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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지 않은 결말에 관한 작은 사유들

엄마와 너댓살 되어보이는 아이가 여름 같은 봄날의 오후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처음 본 그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눈이  마주쳤는데 다시 보니 아이가 갖고 놀던 공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늘막 위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너무 높아 꺼내기도 곤란한.

나즈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는 뒷쪽으로 돌아서 가봤으나 나무가 빼곡히들 자라 있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쉽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애기 엄마가 벤치 위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 키가 모자라 되질 않았다.

가만 보니 내가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아 벤치 위로 올라가 생각없이 손을 쑥 넣었다. 그런데 철조망 같은 것이 거기 있었던지 나는 팔을 조금 찔린 채 얼른 손을 빼야 했다. 다시 두어번 조심스레 손을 넣은 끝에 옆으로 공을 굴려 결국 아이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반소매였던 까닭에 팔은 여기저기 좀 긁혔으나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와 아이는 근처에서 조금 더 놀았지만 뭔가 서먹했는지 광장의 저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곤 그 잠깐의 상황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다 오늘 상처를 봤더니 조금 곪아 있었다. 어제의 녹슨 철조망을 떠올리다 갑자기 “파상풍?” 이런 단어가 머리 속을 돌았다. 이상이 회충약 먹던 이야기처럼 좀 웃기지만 뒤늦게나마 간단하게나마 소독도 했다. 하지만 그랬다. 그럴 리도 없지만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일억에 하나… (이건 정말 확률로 따질 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다) 그 철조망 가시에 뭔가 나쁜 게 있어 내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봤다. 그다지 생각할 겨를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오래전 언젠가 내가 일을 하는데 덩치도 무지 크고 험상궂은 두 손님이 내 뒤에서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때를 기억한다. 우습지만 아주 잠깐 이 사람들이 내 뒷머리를 내리칠 수도 있으리란 상상을 했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당신들이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찮은 내 일을 하다 그리 되었음에 개의치도 않고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슷한 심정으로 언젠가의 어느 한겨울날 어떤 술취한 아주머니에게 사무실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아주머니를 믿었지만 돈이든 물건이든 잃어버린다 한들 후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숱한 의미있는 일을 하거나 타인의 삶과 생명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거나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공 하나 꺼내주다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한들 그게 나쁘지도 억울할 것도 전혀 없는 일이란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는 그 현실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아주 작은 팔의 상처에 관해서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다. 이게 아주 작은 선의인지, 염세주의인지, 위선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분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내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2017. 5. 1.

 

레몬 레터(602번째 편지)

“…어렸을 때 병에 쪽지를 넣어 바다에 던졌지.
하지만 그게 끝내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었어.”
— 영화 <사일런트 러닝>(1972)

 

조류에 떼밀려간 병속의 편지처럼
읽히지 않은 오늘,
다시 쓰는 숨겨진 이야기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안다 —
아무도 읽지 않은 글만이
마침내 남겨진 사연인 것을

 

 

2025. 9. 23.
쓰고, 다음 날 병에 넣어 띄우다.

키핑 더 체인지!

: 사양했어야 할 거스름돈에 담긴 짧은 이야기

 

샌드위치는 달았고, 감자튀김은 늘 짰어. 나는 냉장고에 매콤한 스리라차 소스를 챙겨두어야 했지. 하지만 두어 달에 한번, 나는 점심을 먹고도 한참 많이 남은 샌드위치를 아이들에게 갖다 주곤 했어. 하지만 오늘, 키오스크는 전원이 빠져 있었고, 더 이상 콜라도 없었어. 세트 메뉴가 되질 않아 나의 마지막 주문은 샌드위치 셋이었지. 가게 벽에 붙어있는 형형색색 포스트잇에 적힌 낙서들이 안타까웠어. 이 모든 애정과 지지가 낙엽처럼 떨어지는 환영에 맞딱뜨린 순간이었지. 1년 365개의 마지막 잎새를 그녀는 보았을지도 모를 일이지. 감자튀김은 그녀가 억지로 넣어줬어. 생각없이 받은 거스름돈을 그 순간부터 후회했지. 천원 지폐와 동전 하나일 뿐이었는데 돌아오는 동안 그들이 주머니 속에서 나를 닥달하며 짤랑거렸어. 샌드위치 하나와 감자 몇 조각만 먹었어. 내일은 문 닫는 날, 벼랑 끝의 그녀는 대출로 새로이 치킨집을 계획한다고 했어. 거리가 좀 멀지만 나는 한 두 번 가긴 할 거야. 누구에게든 흐릿한 내일, 다만 온종일 짤랑대던 내 주머니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날을 기다릴 뿐이지.

 

/2025. 9. 19.

Woke Enough to Follow

: 각성의 환상

 

오전 11시, 주택가 편도 차선 한 귀퉁이로 폰을 들고 걷는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마흔 즈음으로 보이는데, 지금 뭔가 분명한 일을 하는 사람 같지는 않다. 그는 전혀 바빠 보이지 않았고, 폰 스피커에서 소리가 흘러나온다. 통화 중인가 했지만, 길 따라 걸으며 유튜브에 얼이 빠져 있다. 정치 이야기다. 특정 정당의 주장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단어들이 어김없이 가감없이 흘러나온다. 그는 분명한 일을 하고 있고, 그는 급박하고, 그는 너무 몰두해서 맞은편에서 사람이 오는지조차 생각하지 않는다. 미래는 그의 손에 달려 있고, 어쩌면 내 미래도 그러하다.

글렌 핸사드, 나 없는 날에

셰인 맥고완으로 해서 알게 된 이름이었다. 그의 삶으로 해서 내  귀에 들어왔고, 그의 죽음으로 해서 내 마음에 영영 남게 되었다. 뜻밖에도 그는 우리에게도 꽤 알려져 있는데  <Once> 때문이다. 그 영화와 노래(Falling Slowly)에 대해선 덧붙일 소감이  별로 없지만…… (만약 그가 이 땅에 태어났다면 민요풍의 노래들을 막걸리風으로 껄쭉하게 노래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셰인 맥고완 장례식에서의 노래(Fairytale of New York)와 더불어 “이별주”라면 나는 오직 맥고완과 핸사드를 기억할 것이다. 보르헤스/델리아의 이별과는 많이 다르지만 누구와도 마셔본 적 없는 이별주를 대신하기에 이들보다 어울리는 노래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해리 딘과 함께, 나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언제일지 모를 나 없는 날에 더 있었으면 싶은.

 

 


/Parting Glass, Glen Hansard

 

 


/Falling Slowly, Glen Hansard : <Once>

belong to me?

오래도록 사랑했던 사랑 노래,
<내츄럴 본 킬러>에서의 밥 딜런 버전은 내 마음 같았지만
별 의미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참으로 절절하고 간절한 한편으로 허사와 허세 가득한 Sara처럼 말이다.
See the Pyramids along the Nile……
피라밋은 남았으나 쿠푸의 관은 뚜껑도 없이 텅 비어버렸다.
오늘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그의 유물은 7.6cm짜리 좌상 하나 뿐이다.
내 마음의 느낌도 비슷하다.
팀북투, 사바나라마, 알제리의 시장, 첼시 호텔, 열대의 폭풍……
이름도 희미해졌다.

 

 


/You Belong to Me, Bob Dylan

 

See the pyramids along the Nile
Watch the sunrise from a tropic isle
Just remember, darling, all the while
You belong to meSee the marketplace in old Algiers
Send me photographs and souvenirs
Just remember when a dream appears
You belong to me

I’ll be so alone without you
Maybe you’ll be lonesome too
And blue

Fly the ocean in a silver plane
See the jungle when it’s wet with rain
Just remember ’til you’re home again
You belong to me

I’ll be so alone without you
Maybe you’ll be lonesome too
And blue

Fly the ocean in a silver plane
See the jungle when it’s wet with rain
Just remember ’til you’re home again
You belong to me

“I just want to tell you I love you and I miss you
Don’t forget about me. You won’t forget about me?”
“I won’t forget about you, it’s cool
No matter where he takes you, Timbouktou, it don’t matter, because it’s fate. Know?
Nobody can stop fate, nobody can”

드림 드림 드림

지난 주 생전 처음 가본 영양탕집에서 식사를 대접했으나
‘마산집’에서 고기와 함께 돈을 돌려받아야 했다.
그리고 어제 시간이 잘 맞지 않아 점심을 같이 하지 못한 까닭에 부랴부랴 약속을 잡아
오늘 어르신이랑 마산집에서 막걸리와 함께 수육 국밥을 먹었다.
언제나처럼 기침을 하고 음식도 좀 흘리고 그러셨는데
한번은 좀 심하게 기침을 했으나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식사를 했다.
식사비는 내가 지불했고, 실랑이 끝에 커피값은 어르신의 만원을 결국 받아야 했다. Read More

‘Biutiful’ and Blue

Biutiful (2010) (3/4) : A dying man struggling in his seedy world | Seongyong's Private Place

 

<비우티풀>은 이상하게 보고 싶지 않았던 영화 가운데 하나였다.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의 우울한 모습도 일조를 했다.
중독, 불륜, 가난, 10여명의 사망, 얼마 남지 않은 생명, 터무니없이 어린 아이들……
너무도 극단적인 상황의 연속인 까닭에
<버드맨>과 달리 나는 도무지 감독의 주장에 설득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냐리투의 영화는
마그리트의 화풍을 닮은 커버를 지닌 매직 크리스찬 뮤직 앨범의
노래 하나를 생각나게 했다.
루시 또는 미스터 카이트.
비틀즈의 싸이키델릭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향수어린 분위기의 이 노래는
왠지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하곤 했다.
영화와 노래에 내 마음이 겹친 듯,
뷰티풀하지 못한 어떤 이의 삶과 뷰티풀하다 알려주려 애쓰는 영화 사이에서
온종일 나는 우울하였다.
그리고 이 영화더러 아름답다고 하는 평이 심히 역겨웠다.

 

She feels so unhappy, she no longer cares for life
Has these thoughts of ending all her strife
The world doesn’t know her
It’s so hard and cold and cruel,
she wonders why she’s such a fool……
/Beautiful & Blue, Badfinger

 

 

A Passage for Trumpet

지난 주 내내 어머니는 몸이 좋지 못하셨다. 기력이 심히 떨어져 거의 움직이지도 못한 때도 몇날 있었다. 누나네 다녀가고 조금 괜찮은가 했는데 어제는 아버지가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리며 이런저런 작은 사고를 일으켰다. 다행이 계속되지는 않았다.  간밤에 어머니는 식체가 심하게 걸려 또 누워 계신다. 오늘도 좀 일찍 마치고 가서 어른들 살펴야 할 것 같다.

<A Passage for Trumpet>을 다시 봤다. 1960년 5월 20일에 방송된 Twilight Zone 시즌1의 32번째 에피소드로 알콜중독에 연주할 무대를 잃어버린 조이 크라운의 이야기다. 그는 낙담 속에 전당포에 트럼펫을 팔아치우고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뒤늦게 그는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지만 일종의 ‘림보상태’ 같은 것이었다. 천사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온 그는 교통사고 합의금(?)으로  받은 돈으로 트럼펫을 다시 찾아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옥상에서 혼자 트럼펫 연주하다 이제 막 객지생활을 시작한 착한 아가씨도 만났다.

흑백의 화면 속에 펼쳐지는 그립지만 모질게도 아득한 선율들…… 하지만 나로 말하자면 트럼펫을 연주할  길이 다시 보이지 않는다. 웰즈 이야기 속의 마술가게처럼 찾을 수 없는 곳 — 서글프지만 전당포는 폐업한 것도 같다. 나의 가브리엘은……

 

“Sometimes it’s sour, it goes down hard, but you live with it.
Yeah, it’s a nice talent you got.
To make music, to move people…… That’s an exceptional talent, Joey.
Don’t waste it.”
/A Passage for Trumpet, Twilight Zone

 

 

The Twilight Zone" A Passage for Trumpet (TV Episode 1960) -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