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믿지 못할 경험을 세상에 밝히도록 격려해준 P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글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도 되지 못한 이 글을 내어놓는다. 나 또한 진실을 확신하지 못한채…
실재 reality :
약간 머리가 돈 철학자가 꾸는 꿈
만일 사람이 환영이라는 것을 분석 시험한다 하면,
도간 속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
공허의 핵심
ㅡ A. 비어스, <악마의 사전>에서.
글머리에.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별다르게 쓰라린 삶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운명의 계시나 지배를 받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내가 직접 체험했거나 아니면 바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던 조용하면서도 특이한 사건들의 기록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기괴한 현상들을 직 간접적으로 체험했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하고도 확실하다. 나처럼 한번의 그런 이상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는 마치 그물이 던져진 것처럼 연속적인 체험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것은 융의 공시성처럼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 모양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러한 우연의 그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아무튼 처음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그런 우연 또는 초자연적인 현상(나는 결코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다. 초자연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자연스레 생각하고 있기에)에 무관심하던 나는 조금은 다른 사고방식들을 가지게 되었고, 내 경험들을 글로서 남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짧은 글솜씨에 그 이야기들을 조금도 가감없이 적고자 무척이나 고심하고 노력하였다. 아니, 짧은 솜씨이기에 가감이 없음이 가능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기도 하고, 내게 그 체험들을 이야기해준 사람들이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의 글재주 없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사실을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좋은 글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이고, 글을 지어내는 것은 더욱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다만 나는 내가 겪었던, 또는 겪었다고 믿는 어떤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록해두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소설이 아니라 실재로 내가 겪었던 일이며, 조금의 가감도 없음을 분명히 고백한다.
적어도 그것은 내 삶의 어느 한순간에 실재한 사실이거나 또는 착란에 의한 도착과 환영 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가에 대해선 이 글을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실재로 경험한 일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1993. 10. 2. 토. 초고.
나는 언제나 적당히 쪼들린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뛰어난 재능이나 능력이 없는 나의 밋밋한 삶처럼 별로 특별한 게 없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단 한 시절,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한 순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또는 시절이 여태 나를 묶어두고 있다. 알 수 없는 자책감 속에 나는 그 포박을 운명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하는 방법도 배워왔다. 이제 그 믿어지지 않는 일에 관해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내가 그 낡고 허름한 목욕탕에서 무엇인가 보게 된 것은 지금부터 4년 전, 정확히 말해서 오늘이다. 오늘같이 심하게 흐린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운 낮시간이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나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1달씩 교대로 밤근무를 했다.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밤근무 후 돌아와 늦잠을 자고 낮에 목욕탕엘 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내 하숙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목욕탕은 변두리 동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조그만 목욕탕이었다. 늙은 아저씨가 박스 카운터에 앉아 돈을 받고, 시장 아주머니가 말 안 듣는 어린 아이들을 질책하며 황급히 몰아세우고, 술취한 아저씨가 목욕탕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몇몇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동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탈의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작고 평범한 목욕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날 목욕탕엔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부대끼는 것을 싫어했다. 게다가 약간의 되먹지 못한 결벽증이 있어, 그들이 머리를 감을 때 튀는 비눗방울이나 물을 본의 아니게 뒤집어 쓰기가 싫어 구석진 자리에 앉아 목욕을 했다. (나는 목욕탕 위쪽에 뚫린 작은 창으로 보이는 그날 낮 하늘의 이상스런 어둠과 조용한 목욕탕에 간혹 들리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의 독특하고도 음울한 느낌들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그리 긴 시간을 목욕탕에 앉아 있지도 않았다. 혼자 조용히 목욕을 마치고 이제 탈의실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섰다. 탈의실과 탕 사이에는 큰 미닫이 유리문이 있었는데 그 문 유리창에 목욕하는 사람들이 비쳤다.
고독한 환경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멋부리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유달리 거울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탈의장 정경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내 모습을 습관적으로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나친 자아의식에서 오는 이상한 자책감으로 해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지 목욕탕 여기 저기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감고, 어떤 사람은 샤워를 하고, 어떤 사람은 탕 안에 있고, 모두가 자신들의 몸 씻기에 나름대로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모든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에 소름이 돋곤 한다.
목욕탕 제일 안쪽 편으로는 한증실과 냉탕이 있었는데 냉탕 바로 앞에는 유리 칸막이가 있었다. 아이들이 장난치거나 으스대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찬물을 여기 저기 튀겨 목욕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그만 배려였다. 그런데 탈의실로 통하는 유리창의 넓은 반영 가운데 유독 그곳이 눈에 들어왔다. 탈의실의 형광등 탓으로 워낙 희미해서 정확히는 볼 수 없었지만 누군가가 냉탕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씻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몸을 씻는 그 몸짓은 어디선가 본 듯한 분위기를 풍겼고, 나 역시 꼭 이전에 이러한 상황을 겪은 듯한 몸 떨리는 기시감(旣視感)을 느꼈으며, 그 사람의 모습과 자세가 어딘가 어색하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등을 돌린 자세라서 그런 것일 테지… 하고 나는 문을 열고 목욕탕을 나왔다. 그리고 몸을 말리고 옷을 입느라 그 일은 잊어버렸다.
하지만 옷을 입고, 다시 거울을 보는 순간 그 어색한 포우즈가 떠올라서 목욕탕 쪽을 바라보았다. 즉흥적인 묘한 기대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곳에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모습이 없길 바랬으며, 역시 그 바램대로 냉탕 부근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목욕탕을 슬쩍 훑어보았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 모습의 주인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이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일주일 뒤 다시 목욕탕엘 갔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 되어 날씨가 꽤 쌀쌀했다. 따뜻한 물이 예전보다 더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계절이었다. 그날은 지난 번 왔을 때보다 사람이 적었다. 겨우 대여섯명 될까, 그 정도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역시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서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 섰다. 잠깐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다 별생각없이 문을 열려다 문득, 또는 혹시 하는 이상한 마음이 들어 목욕탕을 살폈다.
갑작스레 지난주에 잠깐 보고 느꼈던 묘한 감정이 떠올라서 나는 탈의실 유리창에 비친 모습들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유독 한 사람만이 내 눈에 들어 왔다. 냉탕 앞에 또 다시 어떤 사람이 등을 돌린 채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기시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자세는 여전히 뭔가 어색하게 보였다. 목욕탕의 습기와 열기로 인한 김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이번에는 좀 더 침착하게 자세히 살폈다. 몸에 비누칠을 하는 동작도, 머리에 물을 붓는 동작도 모두가 무엇인가 어색하고 연약하게 보여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몸이 무척이나 왜소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이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등 아래, 거의 허리 윗부분에 있는 엄지손톱 만한 크기의 점까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이길래 내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그 궁금증을 눌러가면서 잠깐을 더 멍청히 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돌렸다.
누구일까? 불현듯 그 냉탕이 있는 자리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기우였다. 밤근무로 점철되는 오랜 비정상적인 일과가 헛된 망상만을 키워온 탓이리라. 한 사람이 비스듬히 등을 돌린 자세로 냉탕 앞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한순간, 세상에 특별한 기적 같은 것은 없는 법이고, 내 삶에 어떠한 파란도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안도감과 묘한 실망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가 굽은 초로의 사람이었고, 야위기는 했지만 분명 창에 비친 사람은 아니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몸을 돌린 각도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내가 두 번이나 보았던 유리창에 비친 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유리문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그곳엔 초로의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비누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인쇄일을 하면서 인쇄된 ‘종이들’을 읽은 적은 사실 별로 없었다. 인쇄상태에 이상이 없는지, 연판에 이상이 없는지, 또는 색상이 알맞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종이를 정리하고 시끄러운 옵셋 인쇄기 돌아가는 엄청난 소리 속에서 책의 내용을 살필 여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2절지 한장에 페이지는 얽혀 있기에 찾아가며 읽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부분 만큼은 얼른 눈에 들어와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목욕 :
종교상의 예배에 대신하는 일종의 신비적인 의식
다만 영혼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지금까지 결정된 바 없다.
나는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았고, 인쇄소에서 겨우 혼자 별다른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갈 만큼의 월급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일주일에 한번, 목욕을 하고, 한달에 두어번 몇몇 고향 친구들을 만나는 것 말고는별다른 취미도 없다. 환영이나 귀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고, 공포영화는 경멸하는 편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얼이 빠진 채 탈의실로 나오니 목욕탕에 일하는 사내가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빤히 바라보고 있어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으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니, 부끄러움을 생각할 여유가 내겐 이미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 주부터는 한달간 낮시간 근무로 전환되었다.
목욕탕을 나올 때마다 떨리는 가슴으로 유리창을 바라보았지만 냉탕 앞의 사람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 동안 네번 목욕탕을 찾았지만 한번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결국 헛것을 보았군. 나는 그저 피곤함으로 잘못 보았겠지 생각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거의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다음달, 그러니까 처음 그 사람을 본 이후 세째달로 접어든 때였다. 이제 그 낮시간에 목욕탕엘 왔으니 어쩌면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날은 고등학교 운동부 학생들이 무더기로 목욕탕에 오는 바람에 너무 소란스러웠고, 그들의 우람한 모습에 가려 설사 냉탕 근처에 그 사람이 있다고 해도 볼 수 없을 판이었다. 괜스레 짜증이 나고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서둘러 목욕탕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목욕탕이 새로 하나 생겨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자주 가던 목욕탕은 거의 사람이 없었다.
평일낮의 목욕탕은 대개가 두 세사람 뿐이었고, 어쩌다가는 혼자 목욕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오히려 안도의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보름이나 지났을까. 내가 평새토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날의 낮은 매우 어두웠다. 찌푸린 날씨가 몹시도 을씨년스러웠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바람은 매우 심했다.
다시 그 희미한 유리창의 이미지, 아니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그가 목욕하는 동작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던가에 대하여. 왜 내가 그토록 그 환영에 관심을 기울였는지에 대하여.
탈의실로 나오던 나는 습관적으로 닫은 유리문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유리창에 다시 그가 보였고 나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약간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약간 긴 머리와 섬세한 선…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던 것이다. 왜소한 체구의 그녀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노인의 쇄잔하고 힘없는 모습도 아니었고, 목욕탕의 열기 때문에 생긴 환영도 아니었다. 분명히 한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여긴 틀림없는 남탕이다. 바깥 풍경, 그러니까 창문으로 보이는 전봇대의 윗부분이 여기가 2층에 있는 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대개의 목욕탕이 그러하듯이 여탕은 1층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 그녀가 있었다. 여전히 등을 돌린 자세로. 냉탕 가까이에.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겁이 덜컹 났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여자 목욕탕엘 들어왔단 말인가…… 혼란스럽고, 무섭기도 하고, 부끄러운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의문을 깨고 싶었다. 유리창에 비쳤던 그 이미지가 지금 실체로 앞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야말로 평소의 나 답지 않게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문을 열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한걸음 나는 조용히 다가갔다.
간절했다.
한걸음.
그녀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한걸음.
그녀가 내게 왜 나타났는지.
한걸음.
왜 그녀가 몸을 씻는 동작들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왜 남탕에 여자가 와 있는지, 그리고 왜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었는지……
이제 그녀와의 거리는 1m정도로 가까워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1초도 안되는 한 순간에 나는 모든 의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었다.
촉촉한 눈매. 등 아래의 점. 슬픔.
그 짧은 순간에 경악이나 당황, 충격 보다는 왠지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에 충격이 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렸다.
한걸음 뒤로. 하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한걸음 뒤로……
탈의실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탈의실을 지키는 젊은 청년도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이었다.
나는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뿌연 유리창 너머로 여전히 누군가 목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더 이상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내 하숙집이 있는 골목의 가운데 쯤에 있는 집에 사는 사람이었다. 한걸음 뒤로.
그녀는 왼쪽 다리가 약간 불편해서 제대로 앉아서 몸을 씻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한걸음 뒤로. 그녀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한걸음 뒤로, 뒤로, 뒤로……
나는 탈의실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 섰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고 나는 유리문을 통해서 다시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하던 비명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었고, 마지막으로 욕실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달 뒤 그녀는 이사를 갔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특별했다. 금방 눈을 돌려 버렸지만 알 수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이었을까.
나는 그때까지 그녀의 이름을 몰랐지만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버렸다. 회사도 그만두었다는데 도무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 4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녀를 찾지 못했다. 내가 미쳤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지금껏 정상적으로 살아왔고, 인쇄소의 기사로서의 생활 역시 열심히 해왔다. 말이 별로 없고, 사교성도 좋은 편이 못되지만 성실한 사람으로 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 몇달 간의 사건을 돌이켜 볼 때내가 전적으로 미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한다. 역시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그 목욕탕은 결국 문을 닫아 몇년전부터 인쇄소로 바뀌어 버렸고, 나는 더이상 그녀의 자취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단한 언론인이자 특유의 풍자로 일세를 풍미했던 앰브로우즈 비어스는 남미로 여행을 떠난 이후 실종되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분명 비어스는 남미로 떠났고, 그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죽었다. 그가 떠나기전에 말했듯이 그 자신은 그것을 멋진 죽음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어스의 시신 조차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의 글만이 이 세상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녀도 이제는 내가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그녀가 이사를 떠난 후 나는 그 사건들을 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느 정도는 비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여탕에 침입했을 가능성을 솔직히 인정할 수도 있었다. 그 목욕탕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주인이 돈을 받는 카운터 박스는 여탕보다 훨씬 정문에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벌거벗은 상태에서라도 2층 남탕에서 내려와 여탕으로의 침입이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처음, 그리고 두번째로 그녀를 유리문에서 보았을 때는 분명 다른 사람들 – 다른 남자들이 목욕탕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보았던 날, 벌거벗은 그녀(그때까지는 여자인지도 몰랐지만)에 정신이 팔려 멍청히 서있는 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목욕탕 종업원 사내도 나는 기억한다. 물론, 이것 마저도 내 정신의 환각으로 돌려버린다면 그만이겠지만.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모든 것을 내 정신의 착란으로 돌린다 해도 그녀의 등 아래쪽에 나 있던 점 만큼은 결코 그것이 아니다. 내가 여탕으로 몰래 침입했다는 사실 마저도 나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그 이전에 나는 그녀의 점을 보았다.
사실, 내가 여탕에 침입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때는 그 목욕탕이 헐리기 얼마전이었고, 새 목욕탕 때문에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았기에 목욕탕 입구의 계산대 박스에 있는 사람도 졸기가 일쑤였고, 박스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여탕 입구와 계단이 나란히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채로도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여탕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긴 했을 것이다. 단, 그 순간 1,2층 모두에 그녀와 나만 있었다는 전제하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남탕인지 여탕인지 또는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공간이었든지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단 한마디의 대화 조차도 없었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을 하나의 계시라고 나는 믿는다. 그녀와 나를 이어주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4년이 지나버린 지금도 나는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녀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마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녀가 내게 무엇인가 강력히 구하고 있었는지, 나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나는 얼마나 바보였던가. 나는 왜 그전에 그녀와 말 한마디 못하고, 인사 한번 나누지도 못한 것인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마음 아프고 후회스럽다.
그녀에게 다가선 순간에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을 괴로움과 자책 속에 살아왔다. 그 이유를 알아야 했고, 그 슬픔을 달래줬어야 했는데…… 아니, 그때 그녀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었는데, 분명히……
그것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지금껏 나를 괴롭혀 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찾고 있고, 아직도 믿고 있다.
표리부동 이이제이. 가끔식 그녀를 생각하면 인쇄용 필름같은 네가티브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이미지들은 대개 의미 그대로 부정적이고 염세적이고, 때로 괴기스런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 네가티브의 영상이 인쇄기를 통과하면 그와는 반대의 느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 만드는 빛일 수도 있고, 빛을 깨닫게 하는 어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포지티브’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미지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거꾸로된 상 그대로 애정을 갖고 바라본다. 그녀 또한 내 삶에 있어 빛을 인식케 하는 어둠이거나, 아니면 그녀 자체로서 빛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내가 어둠이라면 그 광점은 너무 작고 너무 밝아 종이를 뚫고 책을 뚫고 내게로 온다. 잡은 가득한 레코드 판을 뚫고 음악을 뚫고 안개 가득한 거울 너머로도 분명하게 보인다. 어디선가 읽은 뉴트리노 입자처럼 내 눈을 뚫고 내 가슴을 뚫고도 내게 머문다. 내가 타버리거나 내 안에서 어둠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우울한 음악처럼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안개낀 날, 오직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습한 공기가 어둔 거리를 휩싸고 도는 날, 어디선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다. 그녀의 등 아래에 있는 점은 내 믿음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의 촉촉한 눈매는 나의 약속이 되었고, 그녀의 절뚝거리는 다리는 나의 종교가 되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이란 말인가?
막 자정을 통과하는 마지막 시내버스의 컴컴한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며 지친 몸을 기대고 있을 때 여자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면, 아기를 업고, 무거운 짐을 든 젊은 신부가 혼자 가파른 산복도로를 올라가며 한숨을 내지른다면,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느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환상의 유리문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어스의 말대로 공허의 핵심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현실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1993-. jjle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