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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편의 영화, 그리고 반추

저스틴 벤슨(+아론 무어헤드)의 세 편의 영화를 잇달아 봤다. 제일 먼저 본 것은 <타임루프 : 벗어날 수 없는>이란 제목으로 나온 <The Endless>였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미지의 현상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독특했다. 진행은 느렸어도 마지막 부분은 짜릿했고, 결말은 조금 불분명했으나 그들은 어쩐지 ‘타임 루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았다.

두번째로 본 것은 레졸루션이었다. 신기한 것은 레졸루션이 <The Endless>의 전편이기도 하면서 타임 루프 존의 일부를 형성하는, 그러니까 <The Endless>의 한 부분으로 편입된다는 점이었다.(두 편의 영화 모두 스토리에서나 진행에서나 답답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제일 마지막에 본 <스프링>은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받은 영화이다.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고,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소재가 되는 것은 일정 부분 호러를 동반한 구조이다. 하지만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던 현실과 비현실의 엉뚱하고도 극명한 전환과 달리 <스프링>에서의 괴기스런 현상은 제한적으로만 드러난다. 그들이 무엇을 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곳엔 사랑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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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링>에는 내가 그렸던 어떤 세계가 있었다. 왜소하고 약해 보이지만 나름 강하고 분명했던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마이클 스타이프나 톰 요크(이쪽에 더 근접하는 듯)의 느낌이 들었다. 디테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사랑에 빠졌던 그녀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던 시대의 폼페이에서 태어나  그 시절을 살았다는 이야기는(특히나 빵집에도 들렀다는 것은) 새삼스레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시 속의 화자로서) 그 시대 폼페이에서 빵가게를 했었기에 그녀를 만났거나 알고 지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  거기서 살다 죽었고, 그녀는 영화 속 그 세계에서 태어나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또 그의 선택은  내가 실현한 적 없는 변심에 대한 내 느낌과 일치했다.

<Endless>를 나름 흥미롭게 본 까닭에 <레졸루션>과 <스프링>까지 보게 되었다. 영화로서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스프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도 사랑했고 삶의 어떤 때에 나는 그녀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퍼펙트한 그녀가 버겁고 과분할 따름이었다. 천민에게 잘못 전달된 귀족의 옷인양. 결함으로 해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나는 정말 바보였다. 또 자기 비하가 아닌, 부족하고 모자란 나를 일깨워달라고 말하지 못한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런 면에서 스프링의 그는 어떤 이에 비할 수 없는 멋진 사람이었다.

 

 

/2018. 9. 4.

씨, 그리고 시

창녕의 이른 아침, 바짝 마른 마당 텃밭에 물을 주고 오신 모친 손에 아주 큼지막한 참외 하나가 들려 있었다. 마당 한귀퉁이에 과일 껍질 같은 것 버리는 장소가 있는데 그 주변에 언제인지도 모르게 참외 하나가 자라고 있었나 보다. 자칫 썩혔을 수도 있었을텐데 용케 찾아 오셨다. 물 주고 거름 주고 비료 줘가면서 키운 참외가 아니어서 단맛은 좀 못했지만 어른 주먹보다도 큰 크기에 갓 따온 것이어서 부드럽고도 시원한 맛이었다. 만약 참외 모종을 심어서 키웠다면 이렇게 잘 익은 참외를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시를 보았다고 말한다면 과한 표현이겠지만 2001년의 어느 여름날 김해 보현사 스님께 들은 그대로, 그리고 그 무렵 쓴 시 그대로였다. 영글었는지도 몰랐을 그 어떤 무심함,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길 없으나 ——.

 

 

누가 뱉어낸 무심함이었는지
노란 참외 하나는 저 홀로 영글었다

/내 마음의 뒷켠, 2001. 9. 8.

 

올웨이즈 온 마이 마인드

내게 있어 willie nelson은 “always on my mind”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쟈니 캐쉬를 듣다가 ‘노상강도’ 패거리에서 그를 다시 보았고 어쩌다 가끔 들었다. 그리고 여기 팔십이 넘은 늙은 가수가 노래하는 summertime이 있다.
“올웨이즈 온 마이 마인드”인 썸머타임이 몇곡 있는지라 새로운 자리가 있을지 아직 잘 알 수 없지만 그의 사그라든 여름날 또한 인상적이었다.
넬슨의 기타는 그만큼 낡고 늙은 채 처연한 여름날의 음률을 만들어낸다.(그럼 나는 어떤 분의 유명했던 낡은 구두가 그날 이후 어찌 되었을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실소하게 된다.)
어릴 적에 “썸머타임 킬러”라는 제목의 영화 포스터가 길거리에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썬글라스를 낀 어떤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던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는 그 제목과 포스터가 참 멋져 보였다. 이제는 본 적 없는 그 영화의 제목이 삶과 이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책감을 지울 수 없었던 나는 마음의 아주 작은 평안을 그리며 근 5년여를 푹푹 찌는 사무실에서 에어컨 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쓰리고 기운빠지는 짓일 뿐이었다. 영영 알 수 없는 답이건만 결코 흩어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여름날 돌아본다.

 

 

/srs.

pets

최근들어 유튜브의 단편 영화들을 가끔 본다. 주로 sf인데 어떤 것은 너무 단순하고 어떤 것은 ‘언어장애’로 잘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영화들은 그냥 보기만 하면 된다. pets의 경우 도입부만 봐도 짐작을 할 수 있을 법한 간단한 구성의 단편 sf영화다. 우리가 일정 부분 예측할 수 있거나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할 미래에 대한 영화로 치자면 좀 뻔하고 안이한 접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단편 영화의 장점은 단순함에 있다. 그것을 현실에 관한 우화라고 본다면 거기 대입할 수 있는 것들은 많다. 그리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폰’이다. 내 경우를 생각해봐도 그렇다. 카톡도,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심지어는 문자나 통화도 별로 쓰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어떤 특정한 부분에서는 그런 측면이 있으니 말이다. 흔히 ‘스몸비’라 불리우는 사람들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포털의 메인에 뜨는 몇줄에 쉽사리 동조할 수 있다면 텔레비젼 뉴스에 대해 별다른 의심이나 회의가 없다면 더욱 그렇다. “wag the dog”의 세계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서 은밀하고도 자연스런 방식으로 존재한다.

 

 

/2018. 7. 16.

꿈속의 꿈

썸머타임…… 날짜를 찾아보면 나오겠지만 아마 이맘때 쯤이었을 거다. 지난 토요일 새벽 꿈을 꾸었다. 가장 컨디션이 좋았을 때, 그러니까 동훈형이 결핵요양소에서 막 나왔을 즈음처럼 아주 좋은 얼굴로 평소와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되자 어느 순간 동훈형도 더이상 보이질 않았다. 다른 사람, 다른 장소, 다른 상황이었다면 공포스런 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건 조금도 없었고 다만 그것에 관한 각성이 처음 소식을 들었던 순간처럼 슬퍼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꿈이었다. 깨어난 내 눈의 촉촉함 또한 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끊어진 현 부여안고
가도 가도 보이잖는 출구
접시물에 빠진 한 마리 파리
파리 한 마리의 나래짓여라
꿈속의 꿈은
/꿈속의 꿈, 박용래

 

 

/2018. 7. 16.

소염진통제

꼬깃꼬깃 접혀 있는 깨알 같은 사연들
효능보다는 구구절절
부작용에 대한 변명이 열배쯤 많은 설명서
바람 빠진 풍선처럼 빛깔도 잃고
그저 굴러다닌다
구의 표면에 찍힌 점들처럼 모두로부터 멀어져가며
팽창하는 우주 속에서 혼몽 속에서
필요한 것은 작은 알약 하나
부작용이 넘쳐나는 작은 알약 하나
꼬깃꼬깃 접혀 있는 붉은 칸 어딘가
증상과 부작용 사이 효능과 금기사항 사이
수많은 글자들 사이에서 읽혀지지 않는
아주 작은 이름 하나

 

 

O it’s still for you and me ◎

보르헤스의 트레저 아일랜드 ㅡ 최근에 구입한 스티븐슨의 단편집 첫 페이지를 펼치니 그가 쓴 헌정사가 있었다.(정확히 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 수록된 헌정사다.) 사촌이었던 캐서린 드 마토스에게 쓴 긴 편지시의 일부라고 하는데 인상적인 헌정사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을 생각나게 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인연을 풀어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바람 이는 히스 황야의 아이들이지요.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작화가 북쪽 땅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건 여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서지요.
/캐서린 드 마토스(Katharine de Mattos)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억겁의 시공간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는 아니었지만 스티븐슨의 두 줄은 당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섬세함과 절절함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끊어진 만남이 미래같은 과거로 하여 다시 이어짐을 바라보며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헌정사는 광대한 우주와 무한의 시간 사이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의 기적 같은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단절되어버린 현실의 인연이그 옛날처럼 함께 이어져 있음을 흩날리는 금작화에서 일러주는 스티븐슨의 문장은 그 소소함과 위태로움으로 하여 더 절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