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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에게 ◉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이하의 시는 이렇게 시작했다. 젊어서도 젊은 적이 없었던 나는 그 두 줄에서 벌써 ‘진상’을 보았다. “진상에게”의 진상은 이하와 비슷한 연배의 품격있는 청년이었던 것 같지만 그 진상이 허접한 어떤 이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보니 자꾸 엉뚱한 것만 더 눈에 들어온다. 진상은 허상이 되고 거기에서야 진상이 보인답시고 ‘겉보기에 허름하고 질이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의 ‘進上’이나 실제의 모습을 뜻하는 ‘眞相’이 나를 찔러대는 것이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쓸쓸하구나, 진상이여!

 

이 구절에 와서는 이미 반백(!)을 넘어 흰머리 가득한 이로서 덧붙일 말도 없는 진상 그 자체다. 한치라도 괜찮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떤 이의 것이 아니고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일도 없다는 끝자락의 몇몇 대목은 나라는 進上에게 결단코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탄식만이 내게 합당하여 그의 시처럼 녹여낼 길 없으니 낡아도 홀로 벼려진 검이 아닌 ‘le fusil rouillé(녹슨 총+)’에게는 울음도 없다. “녹슨 총보다 더 멋진 것은 없어요, 그리고 그건 이제 결코 소용없을 거예요”라던 앙리꼬 마시아스의 노래가 가을 바람처럼 이하의 마지막 말처럼 스산하게 들려올 뿐.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능가경은 책상머리에 쌓아 두고
초사도 손에서 놓지 못하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쓸쓸하구나, 진상(陳述聖)이여!
베옷 입고 김매며 제사의 예를 익히고
오묘한 요순의 글을 배웠거늘
사람들은 낡은 문장이라 나무라네
사립문엔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어 있고
해 기울면 느릅나무 그림자만 앙상한데
이 황혼에 그대가 날 찾아왔으니
곧은 절개 지키려다 젊음이 주름지겠네
오천 길 태화산처럼
땅을 가르고 우뚝 솟은 그대
주변에 겨눌 만한 것 하나 없이
단번에 치솟아 견우성과 북두칠성을 찌르거늘
벼슬아치들이 그대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어찌 내 입까지 막을 수 있으랴
나도 태화산 같은 그대를 본받아
책상다리 하고 앉아 한낮을 바라보네
서리 맞으면 잡목 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눈보라 치는 재단을 지키면서
검은 끈에 관인(官印)을 차고 있다 하나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이네
하늘의 눈은 언제 열려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것인가

 

 

진상에게 드림 / 이하

 

 

/2017. 10. 19.

+열여섯일 적에 <검지의 꿈>이란 제목으로 ‘녹슨 총’에 관해 쓴 적이 있다. 녹슨 총을 붙들고 운다던 나는 역시나 노인이었던 듯.

길모롱이 +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다. 길은 그다지 막히지도 않았고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나는 전부터 나름의 준비를 했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차 안에서 들을 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터널로 진입하기 전에 있는 번잡한 교차로에서 정지신호에 나는 조심스레 차를 멈추었다. 어쩌다 겪게 되는 잠깐의 정적 속에 귀에 익은 감상적인 플라멩코 스타일의 기타 인트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멋진 목소리로 포르투갈어 낭송이 시작되었다.  또낑요가 브라질의 시인이자 가수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를 만나 한껏 고양되어 있던 초기 시절의 작품이자 그들의 가장 멋진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 할 노래였다. 나는 그 내용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으로 충분했고 그녀가 내 곁에 앉아 한 공간을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핸들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맞추며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살짝 그녀에게서 손을 빼서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고 우리는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다 도착하였다. 그녀는 내가 손을 뺀 것을 조금 원망스러워 했다. 나로선 곡선의 도로를 한 손으로 불안하게 주행하기보다는 그녀와의 길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었고, 그 짧은 시간에 비할 수 없는 세월을 그녀와 나누는 것을 꿈꾸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지 못했던 그 짧은 시간… 정지 신호가 다시 주행 신호로 바뀌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룬 사람도 있다.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에서 홀라딕이 신께 간구하여 찰나를 연장하고 또 연장해가며 자신의 희곡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완성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총탄이 격발되는 순간부터 그의 몸을 관통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말이다. 그 총탄은 우리들 모두가 예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간을 뛰어넘어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였고, 다시 오랜 세월을 돌아 누군가의 가슴에 박힌 채 남아 있다.  홀라딕처럼 극적이고 충족된 결말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그런 순간이 있다면 바로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목소리가 느릿하니 흘러나오던 그때였을 것이다. 그것을 ‘소유’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고 그 어떤 영속성을 상상할 수 없음에도 나는 그렇다. 삶에는 너무 많은 위험이 있고 그 위험은 ‘그녀’라고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는 노래했는데 그 어떤 위태로움이 거기 있었는지 가끔 생각해본다. 이제 나는 거의 매일 그 교차로에 멈추곤 하지만 다른 쓰라림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위태로움 또한 내 곁에 없다.

 

 

/2017. 10. 17.

 

 

+
이 글의 제목을 ‘길모롱이’라 붙인 이유는 그 도로가 휘어진 오르막길인 까닭도 있지만 어릴 때 <빨강머리 앤>에서 본 그 단어를 오래도록 좋아했기 때문이다. 앙숙이었던 길버트와 앤이 졸업하는 즈음엔가 둘이 가까워지면서 끝을 맺는 장면에 붙은 작은 제목이 바로 ‘길모롱이’였다. 어렸던 나는 그들의 뒷 이야기를 알지 못했지만 어떤 느낌은 있었다.(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으나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책이어선지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모롱이’의 사전적 의미는 ‘산모퉁이의 휘어둘린 곳’을 뜻하고 모퉁이보다 범위가 좁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길모롱이’란 단어는 내 마음과 달리 사전에 따로 없었다.

(치정)살인의 추억

“치정살인”이란 단어는 내가 썼던 그 노래에 대한 가장 간략한 정의였다. 본인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래도록 연결이 끊어진 채인 그가 플로라를 알게 된 것은 레코드판에 바늘을 올리던 내 손끝에서였다.

그런데 이 단어를 친구의 아이디로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 ‘밴드’에서 보게 되리란 생각은 정말 못했다. (현재 내 폰에는 ‘밴드’도 ‘페이스북’도 없다. ‘카톡’을 쓸 일도 없다.) lily of the west 만큼이나 씁쓸한 느낌이었다.

1999년 7월 25일, 나는 그 글을 썼고, 더 오래전 “천리안” 어딘가에도 썼었다. 그 친구가 나인줄 모르는 내가 거기 있었고 ‘이작자’가 나인줄 모르는 그 친구도 거기 있었다.

비슷한 무렵이었다. 안부와 함께 조금 냉소적인 메일을 그에게 보냈더니(메일 주소가 그 친구 아내의 아이디로 되어 있어서였는지) 누군지 모르지만 스토커짓 계속하면 신고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던 친구. 그래서 더 냉소적인 답을 쓰면서 나라는 걸 알렸더니 좀 씁쓸해 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메일을 보낸 것은 안부를 묻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무엇이 될지 모를 “이작자 여인숙”이 나의 숨겨진 ‘유로파’이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아써 클락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시리즈에 나오는 절대 착륙하지 말라던 유로파 말이다. 소설 속에서처럼 ‘불시착’이라면 어쩔 수도 없지만. 그가 유로파를 방문했는지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2006년의 어느 봄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를 잠깐 만났다. 나의 한심함에 일조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싶었다. 하염없이 걸어 내려가다 어느 순간…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처럼 쥴리아처럼 군중 속에서 슬그머니 멀어져간 이래 지금까지 그 친구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한 두 해 전 어렵사리 핸드폰 번호를 찾아내긴 했으나 나는 여태 그 11자리의 숫자를 돌이킬 수 없는 추억처럼 간직해왔을 뿐이다.

flora나 또는 flora의 애인을 죽여버린 노래속의 주인공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스토리에도 뭔가 ‘치정살인’ 같은 면이 있는 것도 같다. 플로라 때문에 살인이 난 것은 물론 아니었으나 나라는 인간, (심히 덜떨어진 시의 형태로) 살아 있는 그의 부고장도 썼던 사람이었으니……

 

 

+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면 플로라였거나 아니면 나였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면 오늘의 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죽은 주인공이 꾸는 뒤죽박죽의 꿈 같은 것일 게다.

 

 

/2017. 10. 11. 풀리

 

전전전전

세월따라 노래따라인지 방향만
바뀌어 교묘하게 흘러나오는 음악
에 귀를 기울인다 잔잔잔잔
하면 떠오르는 운명
느린 듯 장중하게 어쩌면 음침하게 잔잔잔잔
그리고 나의 어이없는
운명 같은 전전전전 반추는
울증의 전조라는데 전전전전
앞전은 뒷전으로 밀린 채 오직 앞전으로만 가는 운명
씹고 또 씹어
누군가의 죄 대신 십자가 대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씹어대는
전전전전
가려도 가려도 절로 나올 판인데 매일처럼 틀어대는
내일처럼 즐거이 털어대는
나의,
그리고 뻔하고 뻔한 우리들의
지난 이야기
뱉아내는 법도 토해내는 법도 결단코
없는 오늘과 내일의 지난 이야기

굿모닝 베트남

늦은 아침 사무실 와서 자리에 앉으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커피 타는 일입니다. 설탕 넣지 않은 라떼 한 잔 마시고 나와 달달함이 간절해지는 시간, 웬지 수사의 아침 같은 드립커피보다도 공장 생산 가격으로 판매하는 200개들이 커피믹스보다도 두툼한 봉지에 쌓인 정체불명의 베트남 커피가 제일 생각납니다. 이제 막 볶아낸 듯한 커피의 향이 과할 만큼이지만 그게 진짜가 아닌 ‘香’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지요. 너무 짙은 달달함이 느끼할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그게 필요할 때도 있지요. 어쩌면 그건 루이 암스트롱의 노래 같습니다. 밝게 빛나는 축복받은 낮, 캄캄하고 신성한 밤+ ㅡ 이 얼마나 달짝지근한 세상의 맛인가요. 무엇이 진짜인지 그 무엇이 香인지 잘 모르지만 포화로 얼룩진 마음 저 건너편의 굿모닝 베트남, 아득한 무지개 너머 어떤 이가 살고 있다고는 좀처럼 믿기지 않는 왓 어 원더풀 월드입니다.

 

/2017. 9. 21.

 

+
what a wonderful world 가사 일부.

새로 생긴 과일 가게

몹시도 들여다보고 싶었던 여인의 방 ― 예전에 ‘경화미용원’이 자리했던 아파트 위쪽길 초입의 편의점 옆에 과일가게 하나 새로 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문을 닫은 가게의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어 이름도 없지만 길 앞에까지 진열대를 내어놓고 불을 환히 밝힌 채 젊은 부부가 장사를 한다. 새로 시작한 가게라서 그런지 소박한 진열대도 과일도 반질반질하게 보이고 앞길까지 부지런히 쓸어가며 그네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 곧 대목이니 좀 더 많은 과일들이 상자로 쌓일 것이고 또 팔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 가운데에 있는 좀 오래된 과일가게 주인은 마음이 조금 복잡할 것이다. 매일같이 오는 야채트럭에서 과일을 파는 것만 해도 그런데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은 동네에 과일가게 하나 더 생겼으니 아래위로 막힌 셈이다.

새로 생긴 과일가게의 가로길 끝 부식가게도 그렇다. 대파와 무 상추에다 과일 조금 갖다놓고 팔고 있고 겨울엔 어묵이며 떡볶이를 만들어 파는데 과일가게는 또 생겼고 맞은편에는 분식점이 열리려는 찰나다. 아주 가끔 옥수수와 어묵을 샀던 나는 매일 그 길 오가며 인사를 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눈 마주치는 것도 힘들게 느껴진다.

하지만 개업을 준비 중이던 자그마한 분식점은 간판 붙인지도 몇 주 된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여태 문을 열지 않고 있다. 아무도 알지 못할 흐릿한 창문 너머로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것 같은 조리도구들이 즐비하고 종이컵과 라면이 후덥지근한 적막 속에 한가득 쌓여 있다. 누군가의 희망도 그렇고 누군가의 절망도 비슷하다.

 

/2017. 9. 18. 화, 풀리.

활명수게맛살조리예그리고

생명의 신비, 그런 책에서 봤던 것인가 모르겠다. 어떤 풀벌레가 있었다. 그놈은 독이 없는데 독 있는 벌레와 거의 같은 무늬를 흉내내어 제 목숨을 보존하고자 했다. 뱀 가운데도 무늬만 독뱀을 흉내내는 비슷한 종류가 있었다. 어쩌면 게맛살도 비슷하고 예전엔 그냥 바나나 우유였던 바나나맛 우유도 그렇다. 또 어쩌면 소화제 치고는 너무도 거창한 이름을 지녔던 활명수나 이제는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아 추억마저 뭉개버린 채 시판 금지 조치가 내려진 원기소도 그렇다. 개뿔…… 커다란 동물의 눈처럼 보이는 나비 날개의 문양에서 라면 포장지의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보이는 조리예까지 모두를 뒤섞어 놓은 듯한 뭔가가 동종 내지 아류들을 생각하며 잠시 끄적여보았는데 독이랍시고 있다 한들 제 속으로만 파고들 뿐, 끝내 날개 갖지 못할 어이없는 생명의 미스터리다.

 

/2017. 9. 8.

ligado a você : 당신께 ◎

“진실이라 말 할 수도 없는 진실 같은 것,
소식 들은지도 오래입니다……”

 

처음 오신 당신께.
가끔 오시는 당신께.
이제는 오지 않는 당신께.

 

배경에 마음 같은 음악을 깔고 “당신께”라는 단어가 들어간 하찮은 글을 몇번 썼습니다.
끊어졌거나 이어져 있거나, 아니면 그 어떤 상태인지 알 길조차 없거나
스스로 망가뜨리곤 했던 그 어떤 연결에 대한 바램 같은 것이었지요.

 

비슷한 바램이었을까요.
아르날두 안뚜니스는 하늘, 땅, 공기, 소리에서 연결을 느낀다고 노래합니다.
같은 세계에서 더불어 호흡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소리(노래)를 들으며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연결이란 그런 것임을 누구나 알고 믿고 느낀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었겠지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첫 페이지에 썼던 앤 드리앤에 대한 헌정처럼요.+

 

하지만 때로는 그 무엇으로도 이어지지 못할 순간이 있고
그 단절의 시간은 연결에 비하면 영원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하라에서 과나바라 만에 이르기까지 어디에 있든 ligado a você,
연결이란 그런 것입니다.
if we never meet again this side of heaven ㅡ
이어진 것 하나 없음에도 그렇게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srs.

 

 

+
앤 드리앤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
나는 가끔 닉 케이브와 아르날두 안뚜니스를 비슷한 선상에서 듣곤 하는데
심정적으로는 안뚜니스를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곤 합니다.
혼자 훌쩍이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의 노래 하나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요.

 

헉슬리는 말했다

내가 그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적어도 20년, 어쩌면 30년 쯤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여름 날, 몇 번인가 거기서 영화의 한 대목을 찍기도 했던 오래된 목욕탕 맞은 편의 더 오래된 단층 건물에 자그마한 카페가 생겼다. 이름은 <더 프라이빗>이다. 영화를 찍은 거리라곤 하지만 오래되었을 뿐, 그다지 분위기 있지도 않는 이 동네에 이런 카페가 되겠냐 싶었지만 그 안은 거리와 어울리지 않게 꽤 화려해 보였다. 그리고 입간판에는 <오픈 / 더 프라이빗>이라는 글씨가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프라이빗’의 오픈이라니 좀 어폐가 있어보였지만 빚을 내어서라도 프라이빗을 오픈하여 빛을 내기도 하는 것이 요즘 시절인지라 프라이빗에서 오늘 읽은 칼럼 속의 헉슬리를 생각하였다.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다. – 올더스 헉슬리.” 내가 다른 방식으로 허접하게 표현했을 뿐이지만 단출하고 명료한 것이 정말이지 <멋진 신세계>의 저자다운 멋진 말이다.(“옥아”라고 부르던 그 순간이, 그녀의 이름이내게  詩처럼 들렸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내가 부지런히 읽었던 숱한 과학철학 서적에서 그의 이름에 맞딱뜨리던 생각을 하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느 책에서, 어떤 강연이나 에세이나 또는 발표된 적 없는 원고에서, 어떤 이야기에서 그 말이 나왔을지에 관하여. “every man’s memory is his private literature. /aldous huxley.” 하지만 어느 인용에도 헉슬리가 어디서, 또는 어느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출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저 헉슬리가 말했다고만 이야기들을 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나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몇몇이 질문을 던져놓은 것도 봤으나 누구도 정확히 답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어느 책에도 그런 문장은 없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의 해설에 인용되면서 더 알려진 것도 같은데, 번역자 역시 헉슬리가 말했다고만 했을 뿐이다. 진짜와 가짜가 뒤죽박죽인 세계에서는 마음에 닿는 한 줄이 중요할 뿐 그것이 누구의 말이든 그다지 상관이 없지만, 헉슬리는 말했다. 모두가 헉슬리가 말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사적인 멋진 문학이고, 문학이라고 말하기에는 헉헉 숨이 차고 빛을 발할 프라이빗 같은 것은 없지만 나도 사적이긴 하다. 인용만 남아 떠돌아도 ‘그들 각자의 영화관’처럼.

 

내가 시를 쓴다는 꿈

적어도 수십년 전, 장터도 아닌 외갓집 앞 포장도 되지 않은 길 한켠에서 약장수가 판을 벌였다. 둘 다 한 자 정도 크기나 되었는가 모르겠다. 주인공은 그다지 멋져 보이지는 않았던 장난감 로봇과 몸서리쳐지도록 커다란 기생충을 담아 둔 유리병이었다. 시원찮은 말주변으로 약장수는 슬그머니 로봇 자랑을 했다. 어딘지 어설퍼 보이는 그 로봇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앞쪽의 나사 구멍 같은 홈으로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로봇 가슴의 사각형 부분에 텔레비젼이 장착되어 있어 로봇이 찍어온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약간 미심쩍긴 했으나 로봇과 달과 환상이 한참 더 컸기에 나는 경악스런 회충약 선전까지 귀를 기울이며 지겨운 줄도 모른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회충약은 잘 팔리지 않았고 내 가슴 어딘가도 아픈 것만 같았다. 파장이 되도록 로봇은 끝내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그 새카만 사각형은 한번도 켜진 적 없이 새카맣게 끝이 났다. 그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 천불 소득 백억불 수출로 선진국이 된다는 꿈도 그랬다. 세기가 바뀌도록 내가 시를 쓴다는 꿈도 그랬다. 적어도 수십년, 그냥 그랬는데 속에 천불만 났을 뿐 언제적 파장인데 아직도 그 새카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약장수는 사라졌고 약장수는 따로 있고 나는 어딘가 틀림없이 아픈 것만 같다.

 

 

/2016.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