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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슬리는 말했다

내가 그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적어도 20년, 어쩌면 30년 쯤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여름 날, 몇 번인가 거기서 영화의 한 대목을 찍기도 했던 오래된 목욕탕 맞은 편의 더 오래된 단층 건물에 자그마한 카페가 생겼다. 이름은 <더 프라이빗>이다. 영화를 찍은 거리라곤 하지만 오래되었을 뿐, 그다지 분위기 있지도 않는 이 동네에 이런 카페가 되겠냐 싶었지만 그 안은 거리와 어울리지 않게 꽤 화려해 보였다. 그리고 입간판에는 <오픈 / 더 프라이빗>이라는 글씨가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프라이빗’의 오픈이라니 좀 어폐가 있어보였지만 빚을 내어서라도 프라이빗을 오픈하여 빛을 내기도 하는 것이 요즘 시절인지라 프라이빗에서 오늘 읽은 칼럼 속의 헉슬리를 생각하였다.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다. – 올더스 헉슬리.” 내가 다른 방식으로 허접하게 표현했을 뿐이지만 단출하고 명료한 것이 정말이지 <멋진 신세계>의 저자다운 멋진 말이다.(“옥아”라고 부르던 그 순간이, 그녀의 이름이내게  詩처럼 들렸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내가 부지런히 읽었던 숱한 과학철학 서적에서 그의 이름에 맞딱뜨리던 생각을 하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느 책에서, 어떤 강연이나 에세이나 또는 발표된 적 없는 원고에서, 어떤 이야기에서 그 말이 나왔을지에 관하여. “every man’s memory is his private literature. /aldous huxley.” 하지만 어느 인용에도 헉슬리가 어디서, 또는 어느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출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저 헉슬리가 말했다고만 이야기들을 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나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몇몇이 질문을 던져놓은 것도 봤으나 누구도 정확히 답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어느 책에도 그런 문장은 없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의 해설에 인용되면서 더 알려진 것도 같은데, 번역자 역시 헉슬리가 말했다고만 했을 뿐이다. 진짜와 가짜가 뒤죽박죽인 세계에서는 마음에 닿는 한 줄이 중요할 뿐 그것이 누구의 말이든 그다지 상관이 없지만, 헉슬리는 말했다. 모두가 헉슬리가 말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사적인 멋진 문학이고, 문학이라고 말하기에는 헉헉 숨이 차고 빛을 발할 프라이빗 같은 것은 없지만 나도 사적이긴 하다. 인용만 남아 떠돌아도 ‘그들 각자의 영화관’처럼.

 

내가 시를 쓴다는 꿈

적어도 수십년 전, 장터도 아닌 외갓집 앞 포장도 되지 않은 길 한켠에서 약장수가 판을 벌였다. 둘 다 한 자 정도 크기나 되었는가 모르겠다. 주인공은 그다지 멋져 보이지는 않았던 장난감 로봇과 몸서리쳐지도록 커다란 기생충을 담아 둔 유리병이었다. 시원찮은 말주변으로 약장수는 슬그머니 로봇 자랑을 했다. 어딘지 어설퍼 보이는 그 로봇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앞쪽의 나사 구멍 같은 홈으로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로봇 가슴의 사각형 부분에 텔레비젼이 장착되어 있어 로봇이 찍어온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약간 미심쩍긴 했으나 로봇과 달과 환상이 한참 더 컸기에 나는 경악스런 회충약 선전까지 귀를 기울이며 지겨운 줄도 모른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회충약은 잘 팔리지 않았고 내 가슴 어딘가도 아픈 것만 같았다. 파장이 되도록 로봇은 끝내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그 새카만 사각형은 한번도 켜진 적 없이 새카맣게 끝이 났다. 그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 천불 소득 백억불 수출로 선진국이 된다는 꿈도 그랬다. 세기가 바뀌도록 내가 시를 쓴다는 꿈도 그랬다. 적어도 수십년, 그냥 그랬는데 속에 천불만 났을 뿐 언제적 파장인데 아직도 그 새카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약장수는 사라졌고 약장수는 따로 있고 나는 어딘가 틀림없이 아픈 것만 같다.

 

 

/2016. 8. 24.

 

 

 

찢어버린 노트 한 장, Batatinha

Batatinha(Little Potato)는 ‘쌈바의 시인’이라 불리우는 브라질의 쌈비스따다. 하지만 그는 대개의 쌈비스따처럼 기쁘거나 슬퍼거나  활력이 넘쳐나는 리듬 대신 어딘지 내향적이거나 심지어 자기성찰적인 느낌을 주는 느리고 정적인 쌈바를 택했다. 제목 또한 기존 음악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을 보여주며, 그의 쌈바엔 현악기의 사용도 자연스럽고 느릿한 노래들이 더 많다. 그의 모습을 보면 젊은 날에도 새하얗던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사실 내가 이야기 하고픈 것은 그의 음악과는 좀 다른 나 자신의 오래된 기억에 관한 것이다. Read More

my breast bone harper +

they made a harp of her breastbone,
whose sound would melt a heart of stone.
they took three locks of her yellow hair,
and with them strung the harp so rare.
/cruel sister, pentangle

 

헤아리기도 곤란한 시간 저편의 어느 나른했던 오후, 이어폰을 꽂고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어떤 목소리가 꿈결처럼 부드럽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움은 금세 쓰라림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정점을 향해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일렉트릭 기타도 드럼도 없었지만 그 모두를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노래 전체를, 아니 내 마음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결국 잠에서 깬 나는 그 노래를 찾아보았다. 인트로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도노반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지만 그 강렬함은 도노반에게선 보기 힘든 것이었고 노래의 주인공은 roy harper였다. 그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울려퍼질 때나 높고 가늘게 이어질 때 내 마음도 그대로였다. 나는 cruel sister의 사연을 차용하여 ‘my breast bone harper’라 불렀고 이 노래는 한때 내 마음의 頌歌 같은 것이었다. me and my woman과 비슷한 포맷을 지녔지만 기타와 보컬뿐인 the same old rock 또한 내 귀를 울렸다.(이 곡에선 지미 페이지가 어쿠스틱 기타로 격렬한 연주를 들려준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나는 그 노랠 듣곤 했다. 보컬과 기타 모두에서 그는 이 앨범으로 정점을 찍었고 ‘애비로드’에서 녹음된 <stormcock>은 1971년에 발표된 그의 다섯 번째 앨범이었다. 기타와 목소리 그리고 제한적인 오케스트레이션만으로 그는 모든 것을 노래했다. 하지만 이 노래를 頌歌로 여겼던 이는 결코…… 아니었다. /srs

 

 

 

 

 

 

뮤즈

잘못된 세계에 떨어진 어떤 이에 관한 단편을 읽은 적 있었다. <클락워크 오렌지>의 작가가 쓴 소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이의 소지품 가운데 세익스피어의 작품집이 있었던 것인지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세계에 잡혀 글을 쓰는 괴물에게 작품을 갖다바치는 이야기였다. 괴물 작가(?)에게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출현한 인간들이 뮤즈였던 셈이다 ㅡ 뮤즈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뮤즈라면 또 생각나는 가수는 보싸노바의 뮤즈란 별명을 가졌던 나라 리오다. 그녀는 아스뜨루드 질베르뚜의 경우처럼 좀 예쁘장한 스타일의 보싸노바를 불렀지만 질베르뚜와는 다르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그래서 그녀의 노래 가운데는 “내가 없는 날” 듣고 싶은 곡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파서의 가수와 작곡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을 줬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 시대 mpb 씬에 뮤즈가 있었다면,  그들의 부스터가 되었던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더 그랬을 것이고 그들의 뮤즈였을 것이다. 바덴 포웰, 씨꾸 부아르끼, 또낑요, 프란시스 하임, 에두 로부, 그리고 조빙까지가 그 뮤즈로부터 영감을 받아 최고의 작품들을 만들어내었다.(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 뮤즈와 함께하지 못한 이들은 뮤즈의 사후에 더 빛을 발했다.)

뮤즈가 직접적으로 무엇인가 동기를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뮤즈의 일이다. 다만 뮤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렇다. 뮤즈가 반드시 여자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한번도 만나지 못한 존재일 수도 있고, 매일 보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 오래전에 버렸거나 스스로 달아난 만남일 수도 있다. 뮤즈와의 만남과 이별, 뮤즈는 대개 그런 것이고, 나는……

 

si je devais manquer de toi, 내가 당신을 그리워해야 한다면.

 

 


/jean-louis murat

 

c. b.

알 파치스타일지 씨루 파치노일지 조금 삭은 알 파치노를 생각나게 하는 파서 출신의 이 타악기 연주자는 슬라이드/페달스틸 기타의 그렉 리즈처럼 숱한 앨범과 라이브에 참여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그의 퍼포먼스는 유머러스하면서도 실험적이고 상큼하면서도 정열적이다(가끔은 정신과 합동치료 같이도 보인다.ㅎㅎ). 역시나 예측 불허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온 존 존/마크 리봇과 오래도록 함께했으며 뉴 자이언 트리오와의 협연도 인상적었고 요요마에서 스팅, 허비 핸콕, 데이빗 브로자, 폴 사이먼 등에서부터 독특한 퍼포먼스를 포함한 자신의 밴드에 이르기까지 그의 음악적 대역은 꽤 넓다.

아래 곡은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뉴 자이언 밴드와의 협연으로 이디쉬 스타일과는 다른 사운드를 들려주며 꽤 상큼하다. 그의 이름을 파서 식으로 부른다면 씨루 밥찌스따에 가까울 듯도 싶지만 국적을 뛰어넘은 타악기 연주자인만큼 시로 밥티스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cyro babtista

 

주차장애사

주차공간에 여유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 오면 부득불 중평행주차를 하고선 폐가 될까 염려하여 새벽에 나와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옮기곤 했다. 그럼에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은 대부분이 남는 자리여서 밤늦게 들어온 차들은 통상적으로 그곳에 주차하곤 했다. 장애인용 주차표식을 단 차량들이 주차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어떤 경우에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에 차를 세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자리를 괜찮은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겨 주차하는 자리는 장애인용 자리 옆자리다. 그리고 그곳 주차장의 한 모퉁이는 양 변이 장애인용 주차자리인데다 모서리는 공간이 꽤 넓어서 차를 대고도 남을 정도였고 통행에 불편을 주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도 자주 주차를 하곤 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차를 대는 것을 ‘곡각주차’라고들 한다. 양 변의 끝자리(장애인용 자리)에 차를 대는 사람들이 조금씩만 공간을 넓혀주면 두 변의 모서리 자리는 차를 대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에 그 자리가 비어서 나는 그곳에 주차를 했다. 바로 옆으로 붙은 장애인용 자리 하나는 장애인 아닌 분이 주차를 했고 직각의 다른 변의 장애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에 밖에 나와 보니 남은 한 자리에 장애인용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일반인들이 가장 무난하게 선망하는 모 자동차 회사의 조금 큰 중형자동차였다. 아마도 출고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분이 굳이 (상당히 넓은 장애인용 주차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차 옆으로 잔뜩 붙인데다 주차정지 턱까지 후진도 하지 않은 채 주차를 한 바람에 모서리의 내 차는 양쪽 변의 차 가운데 하나가 빠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도 그런 상태라면 좀 난감할 뻔 했으나 다행이도 비장애인인 분이 아침 일찍 차를 빼서 나가는 바람에 내 차가 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가급적 그 자리에 주차를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 장애인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주차를 했고 결국 한번은 곤란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꼭 내 경우처럼 어떤 분이 모서리에 차를 댔는데, 역시나 그 검은 자동차는 모서리 쪽으로 붙인 채(그 검은 차의 옆자리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이어서 반대쪽은 필요 이상으로 텅 빈 공간이 생겨 있었다) 주차를 해서 모서리의 차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나는 모서리의 차주가 어떻게 문제를 풀지 조금 궁금하였고, 직각으로 두 변에 설치된 장애인 주차공간에 세워진 두 대의 차 ㅡ 한 대는 장애인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 다른 한 대는 비장애인의 ‘불법’ 주차, 차주들은 어떻게 반응할지쓸데없이 염려가 되기도 했다. 나 같으면 또 그 난감한 상태를 어떻게 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모서리에 주차했던 차주는 출근하려고 나와서 보니 차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보고선 양쪽 옆의 차들을 번갈아 살펴보며 한참을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국은 포기를 하였는지 그냥 걸어가는 것이었다.(아마도 그 분은 택시를 타고 갔으리라 생각된다.)

이후에도 가끔은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몇 번 있긴 했으나 다행이 차가 못나가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있었는데 내가 알지 못했을지도. 게다가 그 검은 자동차의 차주는 지상보다는 지하주차장을 선호하는 듯하여, 항상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두 달 쯤 뒤, 지하주자창 보수공사가 몇주간 계속되었다. 그러다보니 지상주차장으로 차가 몰려서 그야말로 ‘주차장’이 되어서 차 한번 나가려면 몇 대의 차가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내 경우도 평행주차하고 전화번호를 붙여놨다가 아침 여섯시에 화난 젊은 여성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그 여자분이 언성을 높인 이유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지만 미군 자동차의 부속품들에 끼워맞춘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이름이 최무성 형제가 만든 상표명 ‘시-바 ㄹ’의 ‘시발자동차’라는 것,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난리통의 와중에도 검은 자동차는 여전히 모서리쪽으로 붙인 채 여유롭게 주차를 하여 차 한 대 주차할 수 없는 공간을 아예 막아버리곤 했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지상주차장인지라 자동차 세대 정도가 평행주차 해버리면 밀어서 해결할 수도 없는데 꼭 그런 곤란한 상황이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자동차가 장애인 표식을 달고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했고, 모서리 주차는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그게 법적인 구속력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파트 규정상 맞는 일은 아니기에 그 검은 차가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몇주 동안 심각한 주차난을 겪는 동안 그 차가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몇 번의 작은 사건을 통해 예상할 수는 있었다. 그로 인해 꽤 많은 사람들이 불편했음에 관해서도.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그 차주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 부부는 어딘가 스포츠센터나 수영장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이미 모서리에 주차된 차를 보고선 주차를 했는데 내려서는 옆의 차를 훌끔훌끔 보더니 아내 쪽에서 폰으로 사진을 찍고선 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차가 나가다 긁기라도 하면 ‘범인잡기’에 대비하는 모습인 듯 싶었다. 주차하고 들어가면서 보니 그 검은 차는 주차선의 정중앙으로 정확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보아가며 조금만 오른쪽으로 주차했어도 사진 찍어가면서까지 신경쓸 일은 없었을 것도 같았지만 그분들 속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검은 차가 등장하고나서부터 나는 아주 확실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그 곡각지에는 절대 주차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딱 한번, 장애인용 자리에 일반인들이 주차하는지 조사하러 온 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분은 매우 당당하게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분의 차에 장애인 표식은 물론 없었고 그 시간에 장애인 자리에 주차된 자동차는 그 단속차량이 유일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자질구레하고 긴이야기는 비장애인의 그다지 크지 않은, 사실은 아주 작은 장애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면 내가 굳이 문장으로 쓰고 싶지는 않은 그 반대의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소소한 駐車場哀史거나 그에 못지 않은 소소한 駐車障碍史거나.

라 칼리푸사, 안토니오의 노래

오래도록 나는 ‘라 칼리푸사’가 술집 내지 클럽의 이름이거니 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la, california, usa’의 아나그램이었다.

마이클 프랭스의 antonio’s song은 달달하기만 하고 그 노래가 안또니우 까를루스 조빙의 음악을 잘 표현한 것인지에 대한 확신은 별로 없다. ‘프레부'(헤시피 축제의 쌈바/리듬) 같은 삶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그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더불어 ‘mpb’, 그러니까 ‘무지까 빠뿔라르 브라질레이라’로 불리우는 브라질 대중 음악의 수준을 한차원 높은 곳으로 이끌어간 ‘마이스뜨루’임에 틀림없지만 쌈바를 작곡하고 노래한 ‘쌈비스따’라고 부르기는 적절치 않은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나는 가끔 그 노래의 한 대목에 끌리곤 했다.”내 희망의 대부분이 사라졌을 때 안토니오의 쌈바가 날 아마존으로 이끌었네(when most of my hope was gone antonio’s samba led me to the amazon)”라는 소절이다. 그리고 한때는 내게도 ‘안토니오’의 것이 아닌 ‘안토니오의 노래’가 있었다만 지금은 무엇이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어딘지 모를 ‘라 칼리푸사’를 배회하며 most of가 아니라 all of인 것처럼 느끼고, 고통이 잉태한 즐거움이란 ‘虛辭’라고 여기며 안토니오의 노래로부터 아득히 떨어져 있을 뿐.

mjb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 오고 체전부(遞傳夫)는
이따금 ‘하도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愁心)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都會)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산촌여정, 이상

그래도 좋았고 아니라도 좋았습니다. mjb의 향기, 그건 연인의 이니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커피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 찾아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네요. <산촌여정>이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청춘의 시절엔 검색창 대신 창의 바깥을 바라보며 mjb를 상상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무더운 이국의 슈퍼에서 커피를 찾다 초록빛 mjb를 보았습니다. 80여년의 세월을 넘어 그 이름이 실물이 되어 내 앞에 있었습니다. 그저 드립커피일 뿐이었지만 양철 지붕 위에 쏟아지던 별빛 소리를 기억하며 다소곳이 커피를 집어들었습니다 ㅡ 향기로운 엠제이비의 미각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 것이 20일이 아닌 20여년은 더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어쩌면 영영 봉지 그대로인 커피 mjb. 검색창 너머 창의 바깥으로 그리고 그렸던 mjb. 그건 연인의 이니셜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좋고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낡디 낡고 해진 ‘하도롱’빛이지만요. 빛…… 커피는 별맛없이 쓰기만 했고 나는 그 무엇도 쓰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