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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몇 개 안아들고

여섯 시가 되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라면 몇 개라도 챙겨야 했던
전운 감도는 시대의 소시민인양
도서관이 휴관한다는 문자에 우습게도 애가 닳았나 보다
꽤 두꺼운 시집 세 권에 다른 책 두 권을 보태어 대출 권수를 채웠다
생각지도 못한 분의 생각지도 못한 글이 나름 반가웠다
그리고 페이지마다 오래된 새로움이 가득하였다
경운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쓰던 시절처럼
숨을 곳 없는 난민의
조금 서글퍼지만 피할 길 없는,
불어터졌지만 오랜 허기 면하는 작은 즐거움 같은 것

/2017. 5. 16.

등화관제가
실시됐던
지나간
여름

사이렌 소리에 불이 꺼지자 망 쳐진 내 창으로 수천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하수, 정민

+
한시 두시 읊어가며 옮기는 분이라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이 분의 번역이 좋아서 책 빌려왔는데
대학 시절부터 남달랐나 보다.

srs #3. querência

벌써 너닷새째 골골골이다. 콧물로 해서 코밑은 헐었고 기침은 시작하면 잘 멈추지 않는다. 잠을 잘못자서인지 다른 문제가 있는지 최근의 스트레스 때문인지 턱이 아파서 입도 잘 못 벌리겠다. 그렇지만 그 어느 하루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vitor ramil 의 노래로 알게 되었던 께렌시아, 얼마 전 어느 정치인께서 고상하게도 께렌시아를 이야기하며 자신의 정치적 선택에 관해 여지를 남겼다. 입에 담지도 못할 낯뜨거운 소리가 넘쳐나는 곳이다 보니 일견 멋진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전적으로 그런 느낌은 들지가 않았다. 그녀라고 께렌시아에 대해 이야기 못할 일은 없지만 어느 줄에 설지 아니면 발을 뺄지를 가지고 갖다붙일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정치인은 투우였을까.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던 투우사의 잘 벼려진 칼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까. 아니면 어쩌다 적이 되어버린 다른 소의 뿔에 그렇게 상처를 입었을까…… 단지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자신에게 상처를 입힐지 어떨지에 관한 생각이었다면 세상이 께렌시아로 넘쳐나거나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씁쓸한 느낌이었다. 스페인어에서 께렌시아의 어원이라는 ‘querer’에 ‘to desire’란 의미가 있다는데 행여 그거라면 모를까. 그게 힐링의 좀 유식한 척 고상한 척 갖다붙인 이름쯤이라면 또 모를까. ‘께렌시아’는 마뚜 그로쑤에 있는 지명이며, 투우가 안정과 평안을 느끼는 투우장 속의 특정한 장소라는 의미에서 상처를 치유하는 장소를 상징하기도 한다(헤밍웨이).

하밀의 께렌시아는 조앙 다 꾸냐 바르가스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라고 한다.

 

피할 곳 없는 매일에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querência / vitor ramil.

일어나지 않은 결말에 관한 작은 사유들

엄마와 너댓살 되어보이는 아이가 여름 같은 봄날의 오후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처음 본 그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눈이  마주쳤는데 다시 보니 아이가 갖고 놀던 공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늘막 위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너무 높아 꺼내기도 곤란한.

나즈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는 뒷쪽으로 돌아서 가봤으나 나무가 빼곡히들 자라 있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쉽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애기 엄마가 벤치 위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 키가 모자라 되질 않았다.

가만 보니 내가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아 벤치 위로 올라가 생각없이 손을 쑥 넣었다. 그런데 철조망 같은 것이 거기 있었던지 나는 팔을 조금 찔린 채 얼른 손을 빼야 했다. 다시 두어번 조심스레 손을 넣은 끝에 옆으로 공을 굴려 결국 아이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반소매였던 까닭에 팔은 여기저기 좀 긁혔으나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와 아이는 근처에서 조금 더 놀았지만 뭔가 서먹했는지 광장의 저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곤 그 잠깐의 상황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다 오늘 상처를 봤더니 조금 곪아 있었다. 어제의 녹슨 철조망을 떠올리다 갑자기 “파상풍?” 이런 단어가 머리 속을 돌았다. 이상이 회충약 먹던 이야기처럼 좀 웃기지만 뒤늦게나마 간단하게나마 소독도 했다. 하지만 그랬다. 그럴 리도 없지만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일억에 하나… (이건 정말 확률로 따질 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다) 그 철조망 가시에 뭔가 나쁜 게 있어 내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봤다. 그다지 생각할 겨를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오래전 언젠가 내가 일을 하는데 덩치도 무지 크고 험상궂은 두 손님이 내 뒤에서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때를 기억한다. 우습지만 아주 잠깐 이 사람들이 내 뒷머리를 내리칠 수도 있으리란 상상을 했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당신들이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찮은 내 일을 하다 그리 되었음에 개의치도 않고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슷한 심정으로 언젠가의 어느 한겨울날 어떤 술취한 아주머니에게 사무실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아주머니를 믿었지만 돈이든 물건이든 잃어버린다 한들 후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숱한 의미있는 일을 하거나 타인의 삶과 생명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거나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공 하나 꺼내주다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한들 그게 나쁘지도 억울할 것도 전혀 없는 일이란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는 그 현실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아주 작은 팔의 상처에 관해서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다. 이게 아주 작은 선의인지, 염세주의인지, 위선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분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내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2017. 5. 1.

 

봄길, 그리고 엘 꼬세체로

엘 꼬세체로는 라몬 아얄라가 쓴 옛 노래다. 소사를 포함한 가수들이 조금 옛스런 스타일로 노래했으나 아르헨티나 출신의 차로 보가린과 디에고 뻬레스가 짝을 이룬 또놀렉은 비전통적인 방식으로 이 곡의 분위기를 바꾸었다. 목소리에서 오는 뭔지 모를 헤픈 느낌에 아련한 분위기의 피아노 소리는 몇해 전 어느 한때 약간의 중독성을 띠고 내게로 왔다. 아래의 동영상은 또놀렉의 라이브보다 이들 노래의 미묘한 분위기를 더 잘 전해주는 것 같다 ㅡ 조금 위태로운 방식으로. 노래 속의 엘 꼬세체로는 목화를 수확하는 이인 듯 싶으나……

 

모란도 시들어가는
한창의 봄날 연등길 따라
멀찌감치 엉덩이 드러낸 처자
아직은 깨닫지 못할 세월인양
걸음 바쁘다
눈도 따라가지 못할 그 길
이제는 아득한 풍경
느릿하니 노 저으며
바닥없는 배를 타고
나는,

 

 

/2017. 4. 27.

 

 


el cosechero / tonolec

 

 

그 집 앞

사무실 오는 길에 세탁소에 들러 옷 두개 드라이 맡겼다. 아파트 바로 위에 세탁소가 있어도 굳이 옷을 들고 이곳까지 온다. 할머니와 둘이서 사는 이분께 어떤 사연이 있는지 모르고 최근에 할머니가 안보이는 날이 많지만 물어볼 수는 없다. 그저 인사나 하고 아무 때나 천천히 찾으면 된다고 재촉하지 않을 뿐이다.

몇몇 가게가 잇달아 폐업을 했던 자리에 들어선 빨래방 앞을 지나면 늘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이 금세 목욕하고 나오는 사람을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개업하던 날 이곳의 주인과 친지들이 조그만 원탁에 둘러앉아 성경책 펼쳐놓고 기도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는데(나는 그 앞을 지나가며 그 기도에 동참했다 생각한다) 한동안은 세탁기 돌아가는 모습을 보기 어렵더니 최근 들어선 손님들이 오가는 것이 자주 보였다. 그래서 그것이 아무리 화학식으로 표기될 수 있는 세제의 첨가물일 뿐이라도 빨래방을 지날 때 나는 향기는 뭔가 상쾌한 느낌이었다.

오늘 멀찌감치서 보니 빨래방 앞에서 누군가가 어떤 할아버지께 길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한참을 상세히 설명하는 이는 그곳 주인이었다. 기도하던 그날의 모습이 어찌 좀 마음을 쓰리게 했는데 아침부터 청소를 하고 영업 준비를 하는 것이 노래 속의 ‘미싱’처럼 세탁기도 잘도 돌아가는가 싶었다.

글도 안되는데 서버가 애를 먹여 닷새 가량을 답답한 심정으로 피곤하게 지냈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듯 싶지만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것도 없다. 향기는 풍기지 못할지라도 그저 빨래방의 세탁기처럼 돌아가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사계”를 조금 고쳐서 말한다면,

빨간 꽃 노란 꽃 꽃밭 가득 피는데
하얀 나비 꽃 나비 담장 위를 나는데.

가릭 (이고르) 슈카체프

고란 브레고비치 때문이었다.
나이값 못하는 건달처럼 보이는 인간들이
요상하게 치장한 채 난장판으로 노래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은.
그렇다고 펑크록을 하는 노장들도 아니고
나를 데려가세요 ㅡ “울릉도 트위스트”를 표절한 듯한(?)
한물간 스타일의 노래에 이토록 떠들썩하게 열을 낼 수 있는 것인지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뻔하고 저질스런 매력”이라고 해야 할지,
이 얄궂고 싼티나는 모습 속에 이상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어
이런저런 노랠 찾아 들었다.
이름부터가 암호같은 러시아어에 막혔지만 이들의 노래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노래는 참 각양각색이었다.
이상하게 쥐어짜는 목소리는 밥 딜런의 때로 거슬리는 비음을 연상케도 했고
집시풍에서 트위스트, 딕시랜드와 록 음악을 제멋대로 오간다.
“10,000km”도 거기 있었고 절망과 그리움과 후련함이 함께 있었다.

(이 노래는 대략……
호랑이, 아니 할머니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인지
할머니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할머니 집엘 가면
럼주를 마시며 즐겁게 논다는 가사로 되어 있다.)

미스터.리 케이스의 기사회생(?)을 자축하며.ㅎㅎ

 

/2017. 4. 18.

 

 

 

해결하지 못한 에러

사흘 정도 홈피가 계속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어제는 그 절정인 듯, 거의 온종일 작동이 되지 않았다.
서버를 이용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유독 워드프레스만 먹통이었다.

현재 원인으로 추측되는 세가지는
1. 케이보드 게시판의 문제
2. 게시판 자료가 포함된 데이터베이스의 문제
3. 워드프레스 현재 버전의 문제(설치때 지나치게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좀 이상했다)
4. 바이러스
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자 할 때 사이트 로딩이 극단적으로 느려진 것은 사실이어서
지금도 어떨지 몰라 게시판에 쓸 글을 포스트로 대신하고 있다.
1~3에서 문제가 있을 경우엔 그 해결까지 시간을 기약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바이러스일 경우가 오히려 제일 간단할 것이다.
(실제로 바이러스가 활동했는지는 모르지만 감염된 파일 몇몇이 있었다.)
장기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백업작업과 더불어 서버 하드디스크를 초기화시켜야 할지도 모르겠다.
계속적으로 해결이 되지 않거나 ‘팩토리 리셋’을 해야 할 상황일 때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블로그를 ‘임시 케이스’로 쓸 생각이다.

+
현재는 어느 정도 안정된 것이 해결된 것으로 보이는데
내 추측이 맞다면
wp super cache라는 플러그인의 오류로 인하여
캐쉬 파일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면서 로딩이 무한정 느려진 듯 싶다.
현재는 문제가 되었던 플러그인을 제거했고
여타의 플러그인 프로그램들도 많이 삭제하였다.

관제엽서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postcard에 비해 이름도 얼마나 분위기 있었던가 ㅡ 문자 메시지와 sns가 없던 옛 시절에는 엽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걸로 응모도 했고 모임도 알렸고 노래도 신청했고 안부도 물었다. 누가 본다고 한들 그대 아니면 의미없노라던 그 나이브한 방식은 또 얼마나 의미있는 것이었던가. 편지나 엽서나 오고 가는 속도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엽서에는 난데없는 청춘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았고 어쩐지 보다 명확하고 빠르게 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우표 붙여 보내야 하는 알록달록한 그림엽서 말고 관제엽서라는 것이 있었다. 군관민 합동작전의 시대, 등화관제의 시대, 신문과 tv에 덧칠되어진 관제라는 이름의 그림자는 지긋지긋하고 신물나는 것이었지만 엽서만은 우표도 붙일 필요 없는 관제가 단출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제는 엽서라는 낭만적인 호칭에 합당한 체신을 지키고자 체신엽서로 이름을 바꾸었고 그 자리는 전혀 다른 모양새의 엽서들이 관제를 대신하여 사제가 관제를 생산하는 놀랍고도 멋진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거기 비하면 관제엽서는 장난이었고 비행기가 떨어지거나 말거나 본인이 무조건 제일순위였던 언론과 방송을 생각하노라면 방법론에 있어 그 옛날의 우격다짐은 순진하리만큼 저차원이었고 최악이었다. 오늘날의 최첨단 사제엽서도 응모를 하고 모임을 알리고 노래도 신청하고 안부도 묻는다. 하지만 눈에 불을 켜는 대신 폰에 불을 켜고 컴으로 불을 붙이면 아침 바람 찬바람에 철없이 울고가는 저 기러기 엽서 한 장 써 붙여서 가위 바위 보 하는 사이 어처구니없는 많은 거짓들이 사제폭탄처럼 터지기 시작한다. 그대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괜찮다며 지금도 여기저기, 온사방에서 폭죽처럼 즐거웁게 터지고 있다. 기구한 내 사연은 깨알같은 글씨로도 관제엽서를 이미 가득채웠으나 아무도 눈도 깜빡 하지 않는다.

零落

꽃 榮 즐길 樂
하릴없이 쓸려나가 영락이런가
한때 봄꿈 속의 영락없는 그 꽃

 

“수고 많으십니다.” “큰 일거리가 생겼습니다.” 웃음으로 대답하는 경비아저씨는 아스팔트를 뒤덮은 꽃잎들을 향해 부지런히 비질을 하고 계신다. 한창이던 벚꽃이건만 연이틀 세찬 빗줄기를 만났으니 흙탕물까지 보태어 바닥에 널브러진 모양새가 참담하다. 연분홍빛 봄꿈을 전해주던 그 여린 꽃잎들은 하루아침에 쓸려나가야 할 쓰레기가 되었으니 떨어질 零에 떨어질 落, 말 그대로 零落이다. 하지만 우리가 ‘똑같은’이나 ‘떨어지지 않는’이라는 의미로 사용하는 ‘영락없는’에서도 한자는 그대로 ‘零落’이다. 떨어지고 또 떨어졌는데 못하지 않고 변함이 없음은 가능한 무엇인가. 榮枯一炊(영고일취), 인생이 꽃피고 시드는 것은 한번 밥짓는 순간처럼 덧없고 부질없음이라 했으니 ‘영락이 없음’은 아무나 도달하지는 못할 경지다. 하지만 형상이 바뀌거나 사라졌어도 변함없는 무엇인가를 그린다는 것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 ‘한번 밥짓는’ 시간만큼이라도 짚어보았으면 싶었다. 애초에는 첫 행을 ‘떨어질 零 떨어질 落’으로 했으나 ‘동음이의어’지만 결국은 ‘동음동의어’이기도 한 ‘꽃 榮 즐길 樂’으로 바꾸었다. 그럼 잠시나마 零落의 시간을 넘어 榮樂을 꿈꾸어……

 

꽃 榮 즐길 樂
한때 봄꿈 속의 영락없는 그 꽃

/2017. 4. 6.

 

아득한 오래된 빛

깊은 밤 뜰 위에 나서
멀리 있는 애인을 생각하다가
나는 여러 억천만 년 사는 별을 보았다.
/김달진

한 두 해 전, 국내 모 자동차 그룹의 일부 차량의 전조등이 미국의 평가기관으로부터 좋지 못한 판정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일부 유수한 메이커의 다른 차량들도 비슷한 판정을 받긴 했지만 이유가 생각과는 좀 달랐다. 그것은 “XX자동차 헤드라이트의 가장 큰 문제점은 너무 환한 빛을 내는 것”이라며 “자체 커브 어댑티브 헤드라이트 시스템은 일반 헤드라이트보다 우수한 성능을 내지만, 맞은편 운전자에게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사실 요즘의 대부분 차량들은 너무 밝아서들 문제인 것 같다. 언제부터인가는 미등도 마찬가지여서 신호 대기시 뒤쪽 운전자의 시야를 방해하곤 한다. 어떤 차는 주간 주행등이 거의 전조등 수준이어서 야간 주행시 그것만 켜도 제법 환했다.(그럼에도 터널 안에서 아예 조명을 켜지 않은 차들이 예전보다 더 많은 것은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자동차 이야기가 아니다. 나 자신의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한때 내 글은 발광하듯 하이빔을 켠 채 제멋대로 달리고자 기를 쓰던 자동차 같았다. 자동차나 운전에 관해서 경험도 지식도 없는 이가 여차하면 급제동을 했고 마그리뜨의 기억처럼 피흘리며 끝까지 달려서 부딪히기를 꿈꾸었다. “너랑 같이 누워서 그 짓을 해보고 싶어”라고 생각했을 때처럼.

지금이라고 그런 생각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조금은 달라졌다. 살짝 열린 문으로 들여다보이는 단출한 풍경… 그렇다고 그 한정된 이미지가 잊혀지지 않을 강렬함이나 전자가 달아나버린 중성자성처럼 극단적인 압축의 형태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저기 아득한 곳에서 차량 하나가 부드럽게 가속하며 당신께로 가고 있다…… 보일 듯 말 듯한 희미한 별 하나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다……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내 글이 그랬으면 한다. 못쓰는 이에겐 꿈일 뿐이겠지만, 나 자신도.

/2017. 4.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