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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익 모친의 한수

장사익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리 열심히 노랠 들은 것은 아니지만 이분 이야기 나오면 빠짐없이 보는 편이다. 나 같은 이가 배울 점이 많아서 더 그렇다.

이분 주름살에 대한 이야기도 가끔 나오던데 노래하는 모습은 어쩐지 까이따노 벨로주와 비슷한 뭔가가 있는 느낌이다. 주름살도 그렇고. 어떤 다른 길을 갔다고 하더라도 결국 노래를 하게 될 사람들이었다고나 할까.

그의 모친께서 아들 서울로 보내고 딱 한번 편지를 써서 보냈다는데 짧은 그 내용이 그대로 시였다.

내가 열여덟에 읽었으나 결고 잊혀지지 않는 (이후로 본 적이 없어 제목도 잊었고 내용도 까마득히 잊었다!) 석주명의 나비에 관한 짧은 에세이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있으니 말할 필요도 말할 수도 없는 당연하고도 깊디 깊은 감정 말이다.

 

                      볍모가지가 나풀나풀한데
                      건강 조심허구 맛난 거 사먹어라

 

모친께서 글자에 서툴렀다고 했으니 ‘형언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더더욱 짧은 줄에 담아 표현해야 했었나 보다.

그래서 이 글은 참으로 많은 생각 끝에 나온 두 줄이고 어머니가 자식에게 가질 수 있는 많은 느낌과 사연의 필연적이고도 절박한 함축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느낌으론 광화문에서 우리 동네 초등학교 앞에까지 걸려 있는 몇몇 짧은 시편들에 결코 부족하지는 않다 싶었다.

어떤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한들 보고 읽고 듣고 느끼는 이에게는 시가 아니어도 틀림없는 시인 것이다. 이게 왜 시냐고/시가 아니냐고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어떤 경우라도 불변이며, 나의 아주 작은 시론은 그렇다.
…내 마음이 변치 않는 한.

 

+

기자 또한 당연히 그 글을 시처럼 느끼기는 했으나 마지막 문장으로 볼 때 그의 느낌은 그저 ‘시적 표현’으로 여긴 듯한 느낌이 든다. “볍모가지가 나풀나풀 할 것 같은 오후”란 표현으로 글을 끝맺은 것이 그랬다. 그것은 모친의 많은 생각이 담겨 있는 한 줄을 단순히 ‘가을’이라는 시점으로만 환원시켜버릴 소지가 있는 것이었기에 쓰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2015. 10. 26.

1999-2009, 변함없이

아주 아주 오래전…  어느 시인 흉내를 내며 시 몇편 끄적인 적이 있다.
그때 쓴 것 가운데 일년 전에 보았던 바다에 관한 글이 있었다.
‘변함 없음’에 관한 한켠의 부러움과 한켠의 탄식이었다.
그리고 여기 이 노래는 1년 아닌 10년의 이야기이다.
노래 속의 메시지가 사회적인 것인지 또는 개인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개인적인 의미로 돌아다 본다.
1999년의 겨울을 그리워하며,
그리고 내 부족함에 관한 알지 못할 신랄함으로
이 노래에 대한 중독성은 더욱 강렬한 것이 된다.
누군가의 앨범 제목처럼 인후부가 어찌 어찌 되든.

 

1999-2009

 

2009. 12. 7.

 

 

 

호랑이가 있었다

금슬의 정이 비록 중하나
산림(山林)에 뜻이 스스로 깊다
시절이 변할까 늘 근심하며,
백년해로 저버릴까 걱정하누나*

 

일로 해서 <삼국유사>를 펼쳤다가 또다시 읽고 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봤을 때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는 꽤 충격적인 느낌이었다. 남녀의 목욕과 성불이 한자리에 있다는 것도 미처 생각못한 일이었으니 ‘金물’ 아닌 ‘禁物’로 하여(처녀로 현신한 관음보살과 함께 金물에 목욕하고 성불했다) 무엇인가 초현실적인 감각도 없지 않아 보였다.

유사에 수록된 향가들도 인상적이지만 말미마다 은근슬쩍 붙어 있는 그럴듯한 풍월로 해서 이야기는 더욱 빛을 발한다.(이상하게 그것에 관해 주목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에 절에서 만들어내는 작은 책자에 넣기 위해 선택한 삼국유사의 한 편은 <김현감호 金現感虎>였다. 오늘 어디엔가 이 땅의 야생호랑이에 관한 기사가 있었다만 나로 말하자면, <이생감호>의 한 시절에 관해 믿지 못할 경험담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몇줄 안되는 축약으로라도 이야기는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정말 호랑이였으나 나는 허당 같은 ‘이생(李生)’일 뿐이었다. 호랑이는 내게 목을 맡겼으나 나는 찌르지도 못했다… <김현감호>의 후반부에 나오는 다른 이야기 속의 호랑이는 또 좀 다른 類다. 한 세월을 부부로 살다 옛 고향집에서 호랑이 가죽을 발견하고선 남편도 자식도 잊어버린 채 달아나버렸다. 어쩌면 나는 호랑이 아내의 가죽을 훔쳐서 숲속으로 숨어버린 또다른 이야기의 주인공이었을 것이다. 아니면 김혼공의 딸에게 반해 낙산사 관음보살 전에 그녀와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다 평생 같은 헛꿈만 꾸다 끝이 났거나.(세규사의 스님에 비할 길 없어 나는 깨어나지도 못했다.)

지금도 어쩌다 탑돌이를 나가지만 결코 호랑이를 기다리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했다고 믿은 어떤 선택이 참 어리석고 못난 짓이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호랑이가 있었다. 불꽃 속에 연꽃이 있었다.

 

홀아비는 미인을, 도둑은 창고를 꿈꾸네
어찌 가을날 하룻밤 꿈만으로
때때로 눈만 감아 청량에 이르리*

*삼국유사

 

2010. 1. 23. mister.yⓒmisterycase.com

 

멸실환 滅失環

오늘의 나를 있게 해준…
이라고들 자랑스런 인사를 합니다.
…그런 거 없습니다.
어제의 나를 잊지 못할 무엇으로 새겨준… 저는
저대로 못난대로
저린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거기 제가 없었기에 오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여기 당신이 없기에 지금 이곳,
제가
있습니다.

 

2009. 6. 20.

경운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 Pun에 관한 짧은 Pun

 

어떤 제한적인 의미에서 韻이라는 것은 일종의 고품격화된 pun이다. 많은 시인들이 제 나름대로 마음 속에 운을 띄워 보지만 그것을 제대로 부드럽게 풀어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약간의 어폐가 있다고 하더라도 韻이 좋다면 그것은 아주 멋진 표현이 되거나 적어도 무난한 흐름은 된다.
나의 경우, 시를 쓰는데 있어 (별스레 그런 걸 찾지도 않았다만) 그다지 품격이 없는데다 韻이 좋지 못하여 운보다는 내 말이 가는대로 달리고 휘파람 불며 떠돌다 되는대로 당근인양 pun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게 갈 곳 없는 내 글의 운명이거니 하면서…

우리말의 경우 한자어로 표현되는 단어들이 부지기수인 관계로 이래저래 동음이의어 homonym가 무진장이고 따라서 그것은 나의 나쁜 운을 위한 보고다. 때로 그것은 운을 시험하는 즉석복권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꿈 잘꾸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산신령이 나타나 한 수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韻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위치에 기발한 pun이 사용된다면 약간의 논리없음은 pun에 의해 어느 정도 무마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주제를 희석시키고 경박한 것으로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나는 가능한 한 그것이 Hors d’oeuvre나 일종의 양념 이상의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다시 말해서 pun을 제거한 상태에서도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천박함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스스로에 관한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어주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랄 때가 많다.

하지만 나 또한 오래도록 시를 쓰면서 行韻의 날을 항상 기다려 왔다. 내 韻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물처럼 바람처럼 또는 소월처럼 운이 흐르기를. 그래서 가끔은 운우지정의 마음을 간직한 채 뜬 구름 잡는 소릴 헤적여 본다. 구운몽의 꿈을 열어 젖힌다. “I see the sky, oh, I see the cloud, everything is clear in my heart ..”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인지 흐름과 멈춤,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에도 운이 있는 것인지… 산문 밖을 좀 나다녀야 운문을 열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韻作機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 나의 고물 耕韻機는 늘 삑사리만 내고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인 사임도 韻이 나빠 사임하게 되고 “애정성”에 붙들려 가지 않았던가.
행운유수라고 어쩌다 가끔은 내게도 韻秀 좋은 날이 있어 기쁘다. 韻이 따라 준다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하루, 그런 순간을 늘 기다린다. 따라서 그런 때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 될 것이다. Good luck!!!

나의 고물 耕韻機, 아무리 힘주어 돌려도
요란한 빈 소리에 매캐한 연기 뿐
척박한 이내 마음 언제나 발동 걸려
절로 운을 읊어 보려나.
마음 밭 갈고 닦아 구름 가듯 물 흐르듯
경운기 타고 떠나 보려나.

 

/2001. 3. 28.

 

PS.

<1984년>에서 사임의 잘못은 운을 맞추기가 너무 어려워 ‘god’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존 레논은 “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이라 했던가.^^;;
Pun이란… Donovan의 노랠 좀 바꾸어서 말한다면 Pun is a very magic fellow쯤 될 것이고, Beach Boys의 노래 제목을 고친다면 Pun, Pun, Pun이 surfing처럼 유쾌한 것이 될 테다.
그것은 또한 hippology여서 pun이 몰려 다니는 hippocampus는 나의 꿈을 일깨워 준다. 그리하여 포르노 왕국이 아닌 新애마 천국으로 가는 나는 hippophille이다. 그런 면에서 이작자는 여전히 餘福이 많아 여성운은 좋은 것 같은데 남성운이 별로 없는 것 아닌지 몰라. 韻도 없는 것이 말만 많은 이작자, 정말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좀 씩씩거리며 씩씩하게 살자!!!

Stardust

: 별을 들여다보다

 

위인전과 고전음악과 서가에 꽂힌 명작전집들에 괜스런 반감을 가졌던 어린 시절처럼 스탠다드 음악에 대해서도 비슷한 어리석음을 나는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애써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들도 몇몇 있기는 있었나 보다.

재즈, 특히 스탠다드 재즈가 그러하였고, Stardust란 제목(‘노래’가 아니라 ‘제목’이다)의 경우도 비슷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영어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내가 그 무슨 뜻인지 얼른 닿지 않는 단어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사전 찾아볼 생각은 않고 노래 제목 보면 star에 그 무슨 dust일까… 뭐 별무리 그런 것일까… 아니면 단어 그대로 ‘성진 星塵’일까… 그런 생각들을 했을 뿐이었다.

Hoagy Carmichael B&W Gallery Wrapped Box Canvas Print (Wearing Hat)

 

호기 카마이클의 노래를 들었을 때 나는 또다시 그런 엉뚱한 생각들을 반복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한 곡이라 우리 귀에 더 편한 스타일도 많겠지만, 나는 작곡자의 옛스런 분위기 그대로가 제일 좋은 것 같다. 그것은 그의 삶의 궤적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잔잔하고 게으른 분위기의 피아노 연주와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휘파람 소리까지가 그러하다. 어쩐지 <카사블랑카>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람 같은 느낌도 든다.

열 네 살 적에 우연히 백일장에 나가게 되어 <그림자>라는 정해준 제목으로 시를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혼자 앉아 밤하늘을 들여다 보며…”라는 구절을 넣었는데 스타더스트 듣다 보니 문득 그 생각이 났다.

사전을 열어 찾아본 결과는 ‘小星團 소성단’, ‘宇宙塵 우주진’ 그리고 ‘恍惚 황홀’이었다.(코케인의 은어로 사용되기도 한다고 한다.)  지금도 노래 속의 스타더스트가 지닌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노래로부터 그 단어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는 있다.  이 노래는 호기 카마이클의 원곡과 피아노 연주가 주는 옛스러움에 빠져드는 것도 좋고, 까이따노 벨로주가 조곤조곤 속삭이듯 노래하는 버전도 충분히 아름답다.

스타더스트가 그리움을 노래하는 이 밤, 아주 낡고 오래된 별빛이 아스라히 (아마도 42광년쯤의 거리로부터 날아와) 부서지고 있다. 그림자도 따라서 밤하늘을 들여다본다.

 

Sometimes I wonder why I spend
The lonely night dreaming of a song
The melody haunts my reverie…

 

2006. 12. 1. Rever Lee (from “Reverie”)

책이 작자에게

: 작자의 지은이에 관한 단상

 

그때 나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나는 奇蹟이었다
계속 판올림 하며 ○○년의 새해에도 나는.
//이작자

 

휴일의 한낮을 포터블 씨디 플레이어와 함께 보내었다. 마음먹은 김에 비좁은 하드디스크에 겨우 씨디 한장 복사할 공간을 만들어 ‘Samba da Bencao’을 녹음한 것이다. 그리고 작자의 지은이(^^)와 더불어 한참을 감상했다.

지은이는 그 가운데서도 ‘Lungomare’나 ‘Summertime’의 기타 연주, 체 게바라를 기리는 노래와 잉쎈싸떼쥐의 젠틀한 목소리, ‘봉 지아 뜨리쉬떼자'(마치 ‘백치 아다다’처럼 비장미 넘치는 이 노래는 가요무대에 나와도 될 것 같다) 등을 특히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 멋진 곡들 중에서도 ‘쌈바 다 벤쏭’의 가치를 알아봤으니 이작자가 도리어 감격하였다. 아무래도 그 노래에 남다른 멋과 품위가 있다고 한다.

작자의 지은이 ㅡ 작자 스스로야 늘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지만 그 저작권의 반을 갖고 있는 지은이께서는 늘 그 점에 관해서 당당하시다. 나머지 절반의 저작권자보다는 틀림없이 한참 좋은 점수일 것이다. 하찮은 작자이지만 그 당당함을 증명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더욱 그런 심정이 된다.

이작자라는 이름의 옆편소설(?)이 세상에 나온지 어언 XX년, 여전히 하찮은 소설이지만 그것은 작자 자신이 개작에 게을렀던 탓, 원작은 늘 훌륭한 것이었다. 절반의 지은이는 책을 찍고서 또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 사연은 때로 이작자를 부끄럽게 한다.

제 1권 발행일(누님의 생일^^)을 깜빡 넘겨버려 뒤늦게 케일 라이브 씨디를 카피하며, 그리고 이작자라는 작자의 초판 발행일(?)을 앞두고 작자의 공동집필자 가운데 한 사람에 관해 잠시 생각하였다.

부디 책이 값어치 있는 것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작자의 지은이에게는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작자(이작자 아님^^)라면 세상 모든 이가 그러할 것이다. 침해될 수 없는 작자에 관한 저작권, 저작권이여 영원히!

 

제 3권의 스토리를 말하지 않되 언제나 함께 기억하며
책이 작자에게, 이작자가 저작자에게

오늘의 머리까지도 지은이의 손을 빌려 깎은 작자 쓰다.

 

/2003. 7. 27.

 

+
사진 : Old Mister.y Book vol. 2 & 3
+
사진 뒷편의 병풍도 ‘지은이’의 작품이다. 어쩌면 아직도 시골집에 남아 있을 듯.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그 병풍의 뒷면을 제사때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그런 시조들이 세로로 인쇄되어 있었던.

 

Don’t you hear my call, though you’re many years away
Don’t you hear me calling you? (39 / Queen)

플래쉬 백 : 回光

해가 몰라보게 짧아졌습니다. 좀 늦은 시간에 산엘 갔더니 약수터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렸습니다. 큼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별이 새삼스러웠지요. 자그마한 손전등 하나를 갖고 갔는데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측백나무 빼곡한 길목 너머 어둠 속 옛길을 따라 返照의 시간이 왔습니다.

자전거엔 바퀴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전조등이 달려 있었고 캄캄한 논길 다닐 적에는 ㄱ자로 꺾인 국방색 손전등이 요긴했었지요. 큼지막한 6V 전지가 들어가는 묵직한 플래쉬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도둑은 들키지 않기 위해 침침한 손전등을 갖고 다녀야 했고, 늦은 저녁 도랑길에 플래쉬라도 비추면면 목욕하던 아낙네들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별이었던지 미지의 비행물체였던지 강둑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둥글고 또렷한 빛의 궤적도 기억합니다.

시골의 여름밤에 플래쉬 갖고 놀면 그보다 신나는 일도 별로 없었지요. 새 전지를 넣은 손전등을 하늘로 비추면 밤하늘에 뽀얗고도 환한 선이 그어졌습니다. 어둠을 뚫고 구름을 넘어 어느 먼 먼 별에서 그 빛을 끝내 발견하리라는 확신에 가까웠던 믿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플래쉬 자체가 영사기였고 위태로운 담벼락에서 밤하늘까지가 꿈의 스크린이 되었지요. 우리는 저마다 손전등을 들고 불나방처럼 흥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온통 흩뿌려진 별들에까지 닿을 듯한 그 아찔한 환희의 느낌이라니요. 생각하면 가끔은 발을 헛디딘 듯 떨어지는 느낌이고, 잠깐씩은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각성의 충격이 오기도 합니다.

한참 닳아버린 전지 같은 세월 너머 측백나무 우거진 길을 걷다 그 우유빛 빛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얼굴들도 보이고 발자국 소리며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어떤 목소리는 귓전에서 나를 부르고 어떤 목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재촉을 합니다. 누군가 어둠 저 너머에서 플래쉬를 켰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떤 별에서도 응답받지 못한 그 빛이 세월을 돌고 돌아 내 캄캄한 하늘을 밝히는 몇몇 별이 되었습니다.

 

2008. 8. 30. 토.

그 나물에 그 밥

<글공장>에서 <이작자 여인숙>으로,
또 몇번씩 블로그를 들락거리다 새로 차린 워드프레스 사이트.
하지만 솜씨도 없고 별 다를 것도 없는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그런데, 그 나물에 그 밥은 감칠나는 맛에 질리지도 않는데

어떤 이의 밥상, 아니 속상은 탈잡힐 일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전에 비비다 만(?) 그 나물에 그 밥을 다시 집어들었습니다.
양푼이도 참 작습니다.

 

이리 비비고 저리 비벼도 그게 그것
깊어지지 못한 속 누굴 탓하랴만
봄꽃들이 피고 지는 시절 밥상에는 봄이 활짝 피었다
미나리와 참나물 무나물 콩나물에다
찰진 고추장 넣어 비벼 먹으니
달리 필요한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그 나물에 그 밥 먹은 속이 변치 않음에
쓰린 느낌이야 어찌 할 길 없으나
어떻게 생각해도 탈잡을 수 없는 그 맛
어떻게 생각해도 책잡힐 것 밖에 없는 그 속
무엇과도 비져지지 못한 채,
비비지도 못한 채
그 나물에게 그 밥에게 그 이름에게
피치 못하고 면키 어려워
빨개진 그 속.

 

 

2016. 4. 12. 13:32.

거품의 바다 ​Mare Spumans

잠시 기다려주오
위난의 바다 속 섬 같은 그곳
나 이 모래성 허물고
그대 마음대로 나고 들 세상 다시 지으리
그리고 등 돌린 채 그 자리서 잊혀져버린 세계
끝내 담을 수 없었던 未知
바다는 천길만길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고
누군가 그녀에게
돌아오지 못할 이름 주었네

 

2015. 10.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