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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시대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판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변고인지 놀라운 작품들과 작자들이 부지기수로 발굴되고 있다. 역사는 이 대단한 발견의 시대를 시인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우스운 시대, 언제 몰래몰래 열심히들 하셔서 단에 오른 것인지 영화배우 교수님도 시인, 연극배우도 시인, 인간문화재 하다가도 시인, 젊은 배우 엉덩이를 툭툭치며 연애를 꿈꾼다던 연출가께서는 오래전부터 시인에다 또 시인, 다들 하나같이 하루 아침에 시인이시다. 돈으로 시인하신 분들이 차라리 깔끔해 보이는 시대, 장미여관의 주인공이 진정 가슴 아픈 시대, 온갖 난삽이 넘쳐나는 찰스 부코스키가 참으로 멋져 보이는 시대다. 그런데 나보다도 부끄럼 많이 타는 오늘날의 이분들이 어찌하여 전업작가인양 시인하시게 되었는지 예술과 외설이 이토록 환상적으로 만날 줄을 나는 몰랐다. 언제나 푸른 네 빛 변하지 않는 그 빛의 사진작가도 시인, 내 몸을 내가 어찌 못한다는 명언을 남기신 정의의 신부님도 시인, 소설가도 시인, 시인들도 시인이긴 한데 이들 문인들은 좀 복잡하다. 어떤 시인은 시인도 하고 부인도 하고,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기도 하고, 결단코 시인할 수 없다고도 한다. 넌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오묘하게 넘나드는 환상적인 ‘옆편’ 소설도 가끔은 구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깃발의 빛깔인지 이런 일에 피를 토하곤 하던 피켓들은 시인하시는 그분들의 경악스런 작품에 관해 웃을까 울을까 망설이며 미적대기만 한다) 나는 시인할 것도 없고 시인이라 할 뭣도 없고 그저 핏대 좀 세워 힘을 주고 이런 시……로 시작하는 단어들과 시에 관해서만 평생토록 아주 조금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자세히 봐도 예쁘지 않고 오래 보아도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시인의 시대, 너라는 이름의 나도 그렇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저리게 누군가의 가슴을 때릴 순간의 꽃, 하지만 이런 시……는 이제 그만 찢어버리고 싶었다.

 

 

+
일부 문장은 이상, 이윤택, 나태주, 고은을 인용하거나 변용하였다.

 

 

헉슬리는 말했다

내가 그 목욕탕에서 목욕을 한 것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적어도 20년, 어쩌면 30년 쯤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여름 날, 몇 번인가 거기서 영화의 한 대목을 찍기도 했던 오래된 목욕탕 맞은 편의 더 오래된 단층 건물에 자그마한 카페가 생겼다. 이름은 <더 프라이빗>이다. 영화를 찍은 거리라곤 하지만 오래되었을 뿐, 그다지 분위기 있지도 않는 이 동네에 이런 카페가 되겠냐 싶었지만 그 안은 거리와 어울리지 않게 꽤 화려해 보였다. 그리고 입간판에는 <오픈 / 더 프라이빗>이라는 글씨가 금빛으로 번쩍이고 있었다. ‘프라이빗’의 오픈이라니 좀 어폐가 있어보였지만 빚을 내어서라도 프라이빗을 오픈하여 빛을 내기도 하는 것이 요즘 시절인지라 프라이빗에서 오늘 읽은 칼럼 속의 헉슬리를 생각하였다. “각자의 기억은 그의 사적인 문학이다. – 올더스 헉슬리.” 내가 다른 방식으로 허접하게 표현했을 뿐이지만 단출하고 명료한 것이 정말이지 <멋진 신세계>의 저자다운 멋진 말이다.(“옥아”라고 부르던 그 순간이, 그녀의 이름이내게  詩처럼 들렸던 것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한때 내가 부지런히 읽었던 숱한 과학철학 서적에서 그의 이름에 맞딱뜨리던 생각을 하며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느 책에서, 어떤 강연이나 에세이나 또는 발표된 적 없는 원고에서, 어떤 이야기에서 그 말이 나왔을지에 관하여. “every man’s memory is his private literature. /aldous huxley.” 하지만 어느 인용에도 헉슬리가 어디서, 또는 어느 책에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출처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 그저 헉슬리가 말했다고만 이야기들을 할 뿐이었다. 이 세상에 나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몇몇이 질문을 던져놓은 것도 봤으나 누구도 정확히 답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어느 책에도 그런 문장은 없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고 알려져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선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the sense of an ending>의 해설에 인용되면서 더 알려진 것도 같은데, 번역자 역시 헉슬리가 말했다고만 했을 뿐이다. 진짜와 가짜가 뒤죽박죽인 세계에서는 마음에 닿는 한 줄이 중요할 뿐 그것이 누구의 말이든 그다지 상관이 없지만, 헉슬리는 말했다. 모두가 헉슬리가 말했다고들 한다. 그리고 그 자체가 사적인 멋진 문학이고, 문학이라고 말하기에는 헉헉 숨이 차고 빛을 발할 프라이빗 같은 것은 없지만 나도 사적이긴 하다. 인용만 남아 떠돌아도 ‘그들 각자의 영화관’처럼.

 

내가 시를 쓴다는 꿈

적어도 수십년 전, 장터도 아닌 외갓집 앞 포장도 되지 않은 길 한켠에서 약장수가 판을 벌였다. 둘 다 한 자 정도 크기나 되었는가 모르겠다. 주인공은 그다지 멋져 보이지는 않았던 장난감 로봇과 몸서리쳐지도록 커다란 기생충을 담아 둔 유리병이었다. 시원찮은 말주변으로 약장수는 슬그머니 로봇 자랑을 했다. 어딘지 어설퍼 보이는 그 로봇이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은 물론이고 앞쪽의 나사 구멍 같은 홈으로 담배를 피울 수도 있다고 했다. 더 놀라운 것은 로봇 가슴의 사각형 부분에 텔레비젼이 장착되어 있어 로봇이 찍어온 아폴로 11호의 달착륙 장면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약간 미심쩍긴 했으나 로봇과 달과 환상이 한참 더 컸기에 나는 경악스런 회충약 선전까지 귀를 기울이며 지겨운 줄도 모른 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회충약은 잘 팔리지 않았고 내 가슴 어딘가도 아픈 것만 같았다. 파장이 되도록 로봇은 끝내 담배를 피우지 않았고 그 새카만 사각형은 한번도 켜진 적 없이 새카맣게 끝이 났다. 그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야기, 천불 소득 백억불 수출로 선진국이 된다는 꿈도 그랬다. 세기가 바뀌도록 내가 시를 쓴다는 꿈도 그랬다. 적어도 수십년, 그냥 그랬는데 속에 천불만 났을 뿐 언제적 파장인데 아직도 그 새카만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약장수는 사라졌고 약장수는 따로 있고 나는 어딘가 틀림없이 아픈 것만 같다.

 

 

/2016. 8. 24.

 

 

 

주차장애사

주차공간에 여유가 많은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늦은 시간에 오면 부득불 중평행주차를 하고선 폐가 될까 염려하여 새벽에 나와 빈 자리를 찾아 차를 옮기곤 했다. 그럼에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은 대부분이 남는 자리여서 밤늦게 들어온 차들은 통상적으로 그곳에 주차하곤 했다. 장애인용 주차표식을 단 차량들이 주차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지만 나는 단 한번도, 어떤 경우에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에 차를 세운 적은 없었다.

그래도 자리를 괜찮은 자리를 찾아 주차를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즐겨 주차하는 자리는 장애인용 자리 옆자리다. 그리고 그곳 주차장의 한 모퉁이는 양 변이 장애인용 주차자리인데다 모서리는 공간이 꽤 넓어서 차를 대고도 남을 정도였고 통행에 불편을 주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도 자주 주차를 하곤 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차를 대는 것을 ‘곡각주차’라고들 한다. 양 변의 끝자리(장애인용 자리)에 차를 대는 사람들이 조금씩만 공간을 넓혀주면 두 변의 모서리 자리는 차를 대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에 그 자리가 비어서 나는 그곳에 주차를 했다. 바로 옆으로 붙은 장애인용 자리 하나는 장애인 아닌 분이 주차를 했고 직각의 다른 변의 장애인 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런데 일요일에 밖에 나와 보니 남은 한 자리에 장애인용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일반인들이 가장 무난하게 선망하는 모 자동차 회사의 조금 큰 중형자동차였다. 아마도 출고한지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이 분이 굳이 (상당히 넓은 장애인용 주차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차 옆으로 잔뜩 붙인데다 주차정지 턱까지 후진도 하지 않은 채 주차를 한 바람에 모서리의 내 차는 양쪽 변의 차 가운데 하나가 빠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월요일 아침에도 그런 상태라면 좀 난감할 뻔 했으나 다행이도 비장애인인 분이 아침 일찍 차를 빼서 나가는 바람에 내 차가 나가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나는 가급적 그 자리에 주차를 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그 장애인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는 늘 비슷한 방식으로 주차를 했고 결국 한번은 곤란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꼭 내 경우처럼 어떤 분이 모서리에 차를 댔는데, 역시나 그 검은 자동차는 모서리 쪽으로 붙인 채(그 검은 차의 옆자리도 장애인용 주차공간이어서 반대쪽은 필요 이상으로 텅 빈 공간이 생겨 있었다) 주차를 해서 모서리의 차가 빠져나올 수 없게 되버린 것이다. 나는 모서리의 차주가 어떻게 문제를 풀지 조금 궁금하였고, 직각으로 두 변에 설치된 장애인 주차공간에 세워진 두 대의 차 ㅡ 한 대는 장애인 표식이 붙은 검은 자동차, 다른 한 대는 비장애인의 ‘불법’ 주차, 차주들은 어떻게 반응할지쓸데없이 염려가 되기도 했다. 나 같으면 또 그 난감한 상태를 어떻게 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하면서. 모서리에 주차했던 차주는 출근하려고 나와서 보니 차가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을 보고선 양쪽 옆의 차들을 번갈아 살펴보며 한참을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국은 포기를 하였는지 그냥 걸어가는 것이었다.(아마도 그 분은 택시를 타고 갔으리라 생각된다.)

이후에도 가끔은 그런 아슬아슬한 상황들이 몇 번 있긴 했으나 다행이 차가 못나가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있었는데 내가 알지 못했을지도. 게다가 그 검은 자동차의 차주는 지상보다는 지하주차장을 선호하는 듯하여, 항상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한두 달 쯤 뒤, 지하주자창 보수공사가 몇주간 계속되었다. 그러다보니 지상주차장으로 차가 몰려서 그야말로 ‘주차장’이 되어서 차 한번 나가려면 몇 대의 차가 새벽부터 움직여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내 경우도 평행주차하고 전화번호를 붙여놨다가 아침 여섯시에 화난 젊은 여성의 전화를 받은 적도 있었다.(그 여자분이 언성을 높인 이유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었지만 미군 자동차의 부속품들에 끼워맞춘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이름이 최무성 형제가 만든 상표명 ‘시-바 ㄹ’의 ‘시발자동차’라는 것,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 난리통의 와중에도 검은 자동차는 여전히 모서리쪽으로 붙인 채 여유롭게 주차를 하여 차 한 대 주차할 수 없는 공간을 아예 막아버리곤 했다. 그다지 넓지는 않은 지상주차장인지라 자동차 세대 정도가 평행주차 해버리면 밀어서 해결할 수도 없는데 꼭 그런 곤란한 상황이 되도록 말이다. 하지만 그 자동차가 장애인 표식을 달고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했고, 모서리 주차는 아주 엄밀히 말하자면 (그게 법적인 구속력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파트 규정상 맞는 일은 아니기에 그 검은 차가 잘못한 것은 없다. 하지만 몇주 동안 심각한 주차난을 겪는 동안 그 차가 그런 것을 전혀 고려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나는 몇 번의 작은 사건을 통해 예상할 수는 있었다. 그로 인해 꽤 많은 사람들이 불편했음에 관해서도.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그 차주를 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들 부부는 어딘가 스포츠센터나 수영장을 다녀오는 것 같았다. 이미 모서리에 주차된 차를 보고선 주차를 했는데 내려서는 옆의 차를 훌끔훌끔 보더니 아내 쪽에서 폰으로 사진을 찍고선 가는 것이었다. 아마도 차가 나가다 긁기라도 하면 ‘범인잡기’에 대비하는 모습인 듯 싶었다. 주차하고 들어가면서 보니 그 검은 차는 주차선의 정중앙으로 정확하게 주차되어 있었다. 운전석에서 보아가며 조금만 오른쪽으로 주차했어도 사진 찍어가면서까지 신경쓸 일은 없었을 것도 같았지만 그분들 속을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튼 검은 차가 등장하고나서부터 나는 아주 확실한 상황이 아닌 다음에야 그 곡각지에는 절대 주차를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언젠가 딱 한번, 장애인용 자리에 일반인들이 주차하는지 조사하러 온 분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분은 매우 당당하게 장애인 자리에 주차를 한 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분의 차에 장애인 표식은 물론 없었고 그 시간에 장애인 자리에 주차된 자동차는 그 단속차량이 유일했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자질구레하고 긴이야기는 비장애인의 그다지 크지 않은, 사실은 아주 작은 장애에 관한 이야기다. 아니면 내가 굳이 문장으로 쓰고 싶지는 않은 그 반대의 바램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주 소소한 駐車場哀史거나 그에 못지 않은 소소한 駐車障碍史거나.

für “elysee”

1999년 아니면 2000년 쯤 만년필 하나 선물 받았다. ‘건필 기원’의 뜻을 담은 메모와 함께. 중학교 들어갈 때 만년필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고 18세 쯤에는 어딘가 강제로 참석했던 자리에서 ‘아피스’ 만년필 같은 것 하나 얻었던가 모르겠다. 그 이후론 처음이었다.

꽤 오랜 기간 메일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근무하는 곳이 집과 가까웠기에 (이작자 여인숙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전히) 몇 번 만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전혀 연락도 되질 않는다. 사람도 잊었고 만년필도 잊은 채 그것을 받은 때로부터 거의 17년 쯤의 시간이 흘렀나 보다.

지금도 달리 아는 것이 많지야 않지만 그땐 이 만년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감사히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에서 글쓰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내가 그걸 실제로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해 전 잇달아 두 자루의 펠리칸 만년필을 구입하고서야 새삼스레 서랍 속에 묻혀 있던 펜을 다시 꺼내 써봤고, 올해 다시 찾아봤다. 자세히 살펴본 만년필은 독일 제품으로 elysee란 회사의 것이었다.

elysee 만년필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80년대 스타일의 가늘고 긴 바디에 부드러운 닙을 갖고 있다고 했고 가느다란 모양새와는 대조되는 m 규격의 닙에 대한 내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lysee는 사실은 für elise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고 불어에서 élysée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낙원’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나올 뿐이다. 만년필을 만든 회사는 2000년대 초반 즈음에 생산을 중단하였고 그것을 선물해준 사람은 이제 기억 저편에 있다. 하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다.

17년 전의 기원은 일찌감치 효력을 상실했을지 모르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새것인양 반짝거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기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물건은 때로 사람보다 오래 간다던 어떤 이의 씁쓸한 지적을 슬쩍 잊은 척 하곤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끝>에서 홀로 남겨진 ‘최후의 인간’처럼 그 만년필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責책’하게 하거나 ‘勵려’하게 하곤 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elysee 만년필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런 것이다.

 

/2017. 7. 10.

 

+
발음이 비슷해서일까. 그런데 이 만년필 메이커 이름을 보면
자꾸 톰 제의 어떤 노래 생각이 난다.

für "elysee"

1999년 아니면 2000년 쯤 만년필 하나 선물 받았다. ‘건필 기원’의 뜻을 담은 메모와 함께. 중학교 들어갈 때 만년필이라는 것을 처음 받아봤고 18세 쯤에는 어딘가 강제로 참석했던 자리에서 ‘아피스’ 만년필 같은 것 하나 얻었던가 모르겠다. 그 이후론 처음이었다.
꽤 오랜 기간 메일도 주고 받았고 그 사람이 근무하는 곳이 집과 가까웠기에 (이작자 여인숙에도 그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여전히) 몇 번 만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으로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는 전혀 연락도 되질 않는다. 사람도 잊었고 만년필도 잊은 채 그것을 받은 때로부터 거의 17년 쯤의 시간이 흘렀나 보다.
지금도 달리 아는 것이 많지야 않지만 그땐 이 만년필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저 감사히 받았을 뿐이다. 하지만 이미 컴퓨터에서 글쓰는데 너무 익숙해져 있던 내가 그걸 실제로 사용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해 전 잇달아 두 자루의 펠리칸 만년필을 구입하고서야 새삼스레 서랍 속에 묻혀 있던 펜을 다시 꺼내 써봤고, 올해 다시 찾아봤다. 자세히 살펴본 만년필은 독일 제품으로 elysee란 회사의 것이었다.
elysee 만년필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80년대 스타일의 가늘고 긴 바디에 부드러운 닙을 갖고 있다고 했고 가느다란 모양새와는 대조되는 m 규격의 닙에 대한 내 느낌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elysee는 사실은 für elise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 같고 불어에서 élysée는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궁(‘낙원’의 의미)에 해당한다고 나올 뿐이다. 만년필을 만든 회사는 2000년대 초반 즈음에 생산을 중단하였고 그것을 선물해준 사람은 이제 기억 저편에 있다. 하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내 손안에 있다.
17년 전의 기원은 일찌감치 효력을 상실했을지 모르지만 만년필은 여전히 새것인양 반짝거리고 있다. 그래서 나는 거기 내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며 물건은 때로 사람보다 오래 간다던 어떤 이의 씁쓸한 지적을 슬쩍 잊은 척 하곤 한다. 하지만 <유년기의 끝>에서 홀로 남겨진 ‘최후의 인간’처럼 그 만년필이 지금까지 내게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무엇인가를 ‘責책’하게 하거나 ‘勵려’하게 하곤 한다. 그것이 어떤 결과를 만들어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elysee 만년필을 바라보는 심정은 그런 것이다.
 
/2017.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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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이 비슷해서일까. 그런데 이 만년필 메이커 이름을 보면
자꾸 톰 제의 어떤 노래 생각이 난다.

지금도 그가 시를 쓰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모두가 그리던 신춘문예의 꿈, 메이저신문에 평론 당선으로 멋진 출발을 했던 그는 글쓰는 이에게 흔치 않은 숱한 풍파를 겪기도 했으나 변함없는 붙임성에 타고난 수완으로 다른 일을 하면서 여전히 잘 나가고 있다고 들었지요.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잘 그려지지 않지만 그가 지금 시를 읽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또다른 한 친구는 인물도 참 멋졌습니다. 첫만남에서부터 내가 어설프게만 보였던 그 친구, 이상하게도 뒤늦게 내게 과분한 관심을 보였었지요. 나는 주제넘는 무신경으로 그를 대했지만요. 그는 오래도록 시를 썼지만 나는 그의 시에 관해 잘 알지는 못하지요. 나는 가끔 그가 전공을 살려 평론이나 미학 같은 분야로 나갔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긴 했지만요. 이제는 고향이 자신의 마당이 되었는데 그의 얼굴에서 읽히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나는 잘 알 수 없습니다. 프로필을 보니 몇해 전에도 시집을 내었다고 나와 있긴 하지만 그가 지금도 시를 쓰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중학교 다닐 적 백일장에서 내가 동시 같은 글로 차상을 받았을 때 바다에 관한 시를 쓰서 장원했던 친구, 그 친구랑도 그럭저럭 잘 지냈는데 너무 어려서였던지 시 이야기를 한 기억은 정말 없네요. 그에게 시는 묻혀버린 추억일지 아니면 눈으로 속으로 여전한 시를 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요.

대학교 시절 시 쓰는 써클에서 만났던 선배, 낮술 먹고 학교 앞 벤치에서 <명태>를 부르던 시절이 생각나네요. 비슷한 시기에 활자화된 시로 다시 만났던 가난했던 그 선배, 언젠가는 전세 문제로 걱정을 해서 돈을 좀 빌려드렸었지요. 이후로 명절마다 부산 내려오면 한번씩 얼굴 보곤 했는데 조금씩이라도 갚아주면 안될까 하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더니 그 이후로 연락이 끊어졌네요. 다른 사정이 있었더라도 괜찮았을텐데 말입니다. 언젠가 누군가랑 결혼했다는 풍문도 듣긴 했지만 그 선배, 지금도 외로운 밤을 마른 명태처럼 곱씹고 있을지요.

나로 말하자면 이것저것 하릴없이 끄적이기는 했지요. 초등학교 때의 동시부터 이야기하자면 햇수가 부끄러울 정도이건만 나날이 쓰기는 어렵고 의욕도 없지요. 실없는 상념에 의미없는 글자들을 너무 쏟아버린 듯, 이제는 아끼고 또 아낀다고 하지만 감춰둔 비단주머니 속에 남겨둔 사연은 아무 것도 없지요. 오죽하면 이하 생각하며 스완송 같은 시를 쓰기까지 했을까요. 지금도 매일 생각하고 끄적이긴 하지요. 하지만 나는 그가 시를 쓰고 있는지 정말 정말 알 수가 없습니다. 그의 눈동자 속에 그 어떤 시도 보이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어요. 그의 눈동자가 반짝이며 보여줄 시가 없기 때문일 것도 같아요. 어쩌면 시를 쓰지 않는 당신이 그 잘난 누구보다도 더 많은 시를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2017. 6. 27.

네이버는 접었다

  • 네이버 뉴스에 사용자가 보기 싫은 댓글이 올라올 경우 이를 접어서 안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 추가됐다. 여러 사용자가 접기요청을 하면 현재 댓글에서는 아예 자동접힘으로 처리된다…….. (중략)
  • 가장 많은 변화가 이뤄진 부분은 댓글접기요청이 추가됐다는 점이다. 그동안 악성댓글이나 광고성 댓글의 경우 사용자들이 신고 버튼을 통해서만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다.
  • 댓글접기요청은 사용자가 직접 보기 싫은 댓글을 자신이 보고 있는 댓글창에서 바로 접어서 안 볼 수 있게 하는 기능이다. 다수 사용자가 접기요청한 댓글은 누적 요청 건수에 따라 자동으로 접힘 처리된다…….. (중략)

 

한성숙 네이버 대표는 취임 당시 기술플랫폼으로 진화를 선언하며 “기술플랫폼의 근간은 사용자 신뢰와 투명성 확보”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작년에 사내 투명성 위원회를 신설하고, 내외부 의견을 수렴해 자사 서비스에 반영해나가는 중이다.

네이버 유봉석 미디어서포트 리더는 “이번 개편을 시작으로 뉴스 댓글창이 더욱 활발하고 건전한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투명성을 제고해나갈 것”이라며 “하반기 중 댓글 작성국가, 작성 기기에 따른 댓글 작성 분포, 연령별/성별 댓글 소비 분포 등도 그래프를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도록 제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http://m.zdnet.co.kr/news_view.asp?article_id=20170623103603&lo=zm3#imadnews

 
포털이 가진 과도한 권력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으로서 조금 충격적인 뉴스였다.  가장 큰 문제는 ‘접기요청’이란 것인데 간단히 말하자면 특정한 댓글에 적정한 사람들의 요청이 있으면 그 댓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린다는 것이다. 위의 기사 인용은 ‘접기요청’이 실제로 이루어진 뉴스를 보고서 찾은 기사다.

문제는, 예를 들어 어떤 댓글에 대해 찬성이 5000이고 반대가 50이라도 ‘접기요청’이 일정수준 발생한다면(당연히 찬성의 수준을 넘을 수는 없다!) 그 댓글을 블라인드 처리해버린다는 것이다. 다수의 찬성 의견이 그보다 작은 소수의 의견에 의해 뭉개져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접기요청’이 어떤 기사에서 어떻게 실행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더욱 그렇다. ‘펼침요청’이라는 건 ‘기계적 균등’일 뿐, 뉴스가 지니는 시간적 중대성으로 본다면 뒤늦은 블라인드 해제는 전혀 의미가 없다. ‘접기’를 실행시키는 ‘여러 사용자’의 조건과 로직이 어떻게 되는지는 설명도 없다. 다만 추정할 수 있는 것은 일정 수준의 ‘부대’만 있다면 일정부분 특정 여론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이 기발한(?) 방법은 아마도 추후에 그다지 민주적이지 못하면서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된 국가들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네이버는 이러한 시스템이 ‘투명성 확보’라고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네이버가 원하는 투명성이란 것이 극소수의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는 ‘순도 1백퍼센트’를 지향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일종의 패러다임 교체 같은 것, 언론사의 특정 인물들을 대신하여 포털/소셜미디어 관련 전문가들이 권력의 핵심으로 가는 시대이기에 이러한 시스템은 더욱 위험한 결정이다. 이런 시스템이 계속 유지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고, 계속 엉터리 논리를 고집하며 간다 한들 의도대로만 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지만 우려스럽다.

(전적으로 살펴본 것은 아니지만 내가 확인한 유일한 비판기사는 단 하나였다. 헤럴드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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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에 관련된 인물의 이름을 넣은 것은 앞으로도 계속 살펴보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