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라운드 미드나잇
一茶頃
오고 또 와도
서툰 꾀꼬리
우리 집 담장+
겨우 스물 두셋 시절 일다경에 대해 뭔가 끄적인 적 있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였지만 득함이 없는 시늉이었을 뿐,
그래서 굳이 ‘頃’자를 붙여 부끄러움을 되새기며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삶을 돌아본다
아들 셋과 딸 둘, 세 사람의 여인을 만나 함께 하였으나
닿는 것 스치는 것 모두 찔레꽃인양+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 삶
가진 것 없이 온통 잃어버린 삶이 열 일곱 글자로 오늘까지 남았네
초여름에 와서 한겨울로 떠난 사람
벼룩과 모기, 파리와 개구리에서도 삶을 읽어낸 사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순 다섯의 모진 꿈 너머로
새록새록 꿈꿀 자리 만들었는지
서툴고 서툰 길에서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사랑한 사람
패터슨++의 운전사처럼
一茶 할 적이면 또 一茶를 생각하네
열 일곱 글자
어렸던 눈물인가
잇사가 처음
+고바야시 잇사
++패터슨, 짐 자머쉬
분실과 탕진, a lottery life
해마다 연말이면 어쩌다 생각나는 노래, 며칠 전 차안에서 우연히 lottery song을 들었다. 그래, 이런 사랑스런 노래가 있었지, 그리고 이런 달콤함을 꿈꾸던 때가 있었지……
살아오면서 복권 사본 적이 몇번이나 있었는가 모르겠다. 그런 종류의 운이 내게 있으리라 생각해본 적도 없고 내게 오리라 기대해본 적도 없다.
오래 전의 일이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떤 중년의 부부가 올라오더니 느닷없이 숫자가 적힌 종이쪽지를 하나씩 나눠줬다. 그러더니 대뜸 번호를 셋 불렀는데 내가 갖고 있는 번호도 있었다. 당첨된 사람에게는 자신들이 판매하는 고급 시계를 아주 저렴하게 드린다는 이야기였다. 힘차게 번쩍 손을 들라던 독려의 말투가 좀 우스꽝스럽게 들렸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들에게 번호를 받은 모든 사람이 당첨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당첨은 군대서 훈련받을 때도 있었다. 잠시 쉬며 담배를 피우고선 꽁초 버리러 가는 당번을 뽑기 위해 십수명과 가위바위보를 한 결과 내가 걸렸다는 것, 단 한번만 이겨도 괜찮았는데 결국 내가 담배꽁초를 버리게 되었다는 것, 그런게 내가 가진 하찮은 ‘당첨의 기억’일 뿐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다지 애쓴 일도 없는 인생에 몇번의 당첨 복권(이 표현이 지극히 온당치 않음을 알지만 내 하찮음을 적시하는데 있어서는 그 반대로 매우 합당하다)이 내게 있었다. 백만에 하나인지 일억에 하나일지 알 길 없지만 정말 그랬다. 그것이 내 손에 쥐어졌음에도 뭔지 모르기도 했고 무한정 샘솟을 듯 닥치는대로 써버리기도 했다. 불태우고 찢고 잊어버리고 잃어버리고…… 아마 나는 비슷한 어리석은 일을 몇번은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그 결과 복에 대한 권리는 알게 모르게 실효되었고 이제는 더이상 뽑을 리도 뽑힐 리도 없다. 준비되지 않은 이의 복권은 재앙과 비슷한 법이어서 이제는 짧았던 황금의 시절 대신 상실감만 안고 있을 뿐 모두가 묻혀버린 오래 전의 일이다.
아시다시피 보시다시피 결국은 올해도 꽝, 복에 대해 그다지 자격도 권리도 없음에 아무 것도 갖지 못했음에 궤변처럼, 또는 성현들 말씀처럼, 또는 위로인양 감사하며 결코 복권될 수 없는 내 삶의 잃어버린 몇몇 복권을 추억하며
“thanks a lot…to……”
the lottery song / harry nillsson (/srs.)
골짝 어귀에서
푸른 치마 아가씨 목화 따러 나왔다가
길손과 마주치자 길가로 돌아섰네
흰둥인 누렁이의 뒤를 따라 달리더니
주인아씨 앞으로 짝지어 돌아오네+
知音에게 알리기도 쉽지 않은 일 ㅡ 빠를 젠 빠르고 높고도 낮게, 나이 이제 열아홉인데 벌써 비파 잡고 다룰 줄 안다며+ 신광수의 넉 줄은 태연스레 그윽하였습니다. 원문을 읽으면 그 노골적인 글자들을 말로 옮기지도 못할 정도였지만요. 峽口所見이라는 짧은 만남에 관한 단상에도 그런 느낌 없지 않아 제목마저 조금 달리 보이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았습니다. while my guitar gentley weeps ㅡ 비파 다루는 것 알지 못한 채 골짝 어귀에 서 있는 남자를 떠올려 봅니다. 주인아씨 앞에서 뛰놀던 백구 황구를 바라보던 개같지 않은 인생이 지사도 열사도 상열지사도 아닌 개같은 내 인생인지는 알 길이 없고, 撐天의 그렇고 그런 시절도 이젠 아닌 듯 싶지만요. 기세등등 어디로 갔는지 기타등등일 뿐이지만요, 등등.
+峽口所見, 정민 역.
+신광수의 시 배열을 뒤섞고 내용을 조금 바꿨음.
/2017. 5. 22.
포도아에서 파서를 그리워 함.
화이트 앨범이 세상에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던 1968년의 어느 겨울 날 ㅡ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는 이탈리아로 가는 길에 잠시 포르투갈에 들러 리스보아에 있는 아말리아 호드리게스의 집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카를로스 아리 도스 산토스, 나탈리아 코레이아 등의 시인들과 만나 시편들을 낭송하고 노래를 불렀다. 그 가운데는 그 무렵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노래도 있었는데 saudades do brasil em portugal이 그것이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쓴 이 곡은 자신이 직접 불렀고, 아말리아 호드리게스도 노래했다. 이때의 녹음이 썩 훌륭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날에도 이 노래는 포르투갈의 파두 가수들에 의해 널리 불리어지고 있고 그것은 파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칫 묻혀버렸을 수도 있는 이 곡이 대륙을 넘나들며 이렇게 오래도록 불리어지는 것은 파두를 노래하게 하는 포르투갈/브라질의 독특한 정서 ‘saudade'(우리에게는 ‘그리움’이 있다)가 곡조 속에 깊게 배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카치아 게레이루의 노래와 연주도 멋지지만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15년전 쯤 처음 들었던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조금 허술하지만 쓸쓸하고 품위있는 목소리를 그린다. 한때 그들을 지배했던 포도아를 방문한 파서의 시인이 어떤 느낌을 갖고 있었는지 어찌 알겠냐만 영국을 방문한 미국 시인의 느낌과는 여러모로 차이가 있으리라 싶다. 그리고 이 곡에 대한 나의 느낌은 파서도 포도아도 아닌 객지에서 또 다른 객지를 그리는 이의 심정 같은 것이다. 도착하지 못한 브라질의 꿈이었고 잠시 머물렀던 포르투갈이었음에 속한 곳 없는 내 삶에 관한 것이기도 하고, 돌아갈 수 없음에 관한 것이도 하고.
saudade라 했던가
쏟아지는 그리움이라 했던가
잊혀진 땅
있지도 않은 세상
만나기 어려운 서로간의 이역인데
무엇 하나 이어진 것 없이
홀로 또 다른 역 그렸네
/kátia guerreiro
+
1968년 12월 19일이었다.
물 위의, 또는 물 속의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하는 시를 뒤적였기 때문이었다. amsterdam sur eau. 꿈꾸는 듯 찰랑대는 끌로드 치아리의 연주도 좋았지만 그 눈부심의 값은 오락가락 하는 듯, 영화속의 목소리가 나는 더 듣기 좋았다.
먹고 싶은//
퇴근 3분전이다.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에서 시작하여 이런저런 여자들 하릴없이 늘어놓은 끝에 이창기는 <물 위의 암스테르담>을 그렇게 끝맺었는데 노골적인 것을 마다하지는 않지만 소심한 나였다면 아마 줄띄우기도 ‘여자들’과 ‘퇴근하는 이’ 사이에 했겠고 어휘 역시 “허기진”쯤에 머무르지 않았을까 싶다. 본 적 없는 묘연한 물 속의 암스테르담이니까.
하지만 그 작은 차이는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초래하곤 한다. 그 결과물이 궁금하다면 이 궁상맞은 몰골을 보면 되겠고 <물 속의 암스테르담>이 나는 더 잘 들여다 보였다. 역시나 “네”가 아닌 “내 물비린내”로 줄을 바꾸어가며.
비록 우리
막 열이 내린 시간의 이마를 더듬듯
멀찍이 떨어져
한가롭게 저녁 강가를 산보하고 있지만
/물 속의 암스테르담, 이창기.
퍼펙트 데이
그 사이 몇 개의 빈 칸이 질러져 있었을까
상그리아 홀짝대던 공원의 꿈을 깨고
퍼펙트와 데이 사이에 무엇인가 빠져버린 날
무비 스타도 은막의 제왕도 부러울 것 없는
있는 그대로
없는 그대로
하지만 빈센트 퍼니어의 달콤했던 침대는 전무후무였고
너와 나 사이에서 내가 빠져버린 날
슬픔이여 좋은 아침
화창한 날의 햇살
온종일 소리로 채워보려 하지만
끝없이 갈라지는 두 갈래의 길
심은대로 거둘지니
퍼펙트와 데이 사이가
칼날처럼 위태롭고 퍼펙트하게 아득한 날
있는 그대에게
없는 그대에게
+
다섯 곡의 노래 제목과 그들의 가사 일부,
그리고 단편 제목 하나를 차용하였다.
이 글을 쓰게 만든 여섯번째 노래는……
그는 선약이 있다고 했다 ◎
메이저 영감이 그러했듯 그는 지난 밤의 꿈을 껄끄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읊었다. 발음은 부정확해서 알아듣기 어려웠으나 자신감이 넘쳐났고 사람들은 미처 다 듣지도 못한 그의 꿈에 대해 수많은 심오하거나 얄팍하거나 멋지거나 낯뜨거운 풀이들을 해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꿈은 수많은 다른 꿈들이 되어 그들 각자의 것이 되었고 또 처음으로 꿈을 이야기했던 그 자신의 것이 되기도 했다. 타고난 재능인지 다시 없을 복인지 둘 다인지 몰라도 그 모든 것은 그의 꿈이었고 그것이 일이었고 그리 되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번도 그것이 자신이 꾼 꿈이라고 정확히 말한 적은 없었다. 메이저 영감의 꿈은 몇몇 돼지들을 더욱 살찌우고 사람처럼 걷게 만들었을 뿐이지만 그의 꿈이 더 특별하고 더 평등한 돼지들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의 흐릿한 시력같은 모호함이 아스라한 탑을 만들었고 자신의 꿈을 수없이 변용케 했을 뿐이다. 사기꾼이라고 한다면 그는 멋진 사기꾼이거나 꼬리를 잡기 쉽지 않은 고단수, 그 꿈의 절정 가운데 하나가 그에게 왔을 때조차도 그는 선약(pre-existing commitments)이 있다고만 했을 뿐이다. 온갖 창의적인 비난 속에서도 월계관의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그곳에 있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의 선약이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이라는 자식들과의 만남일지 그 무슨 하찮거나 의미있는 일일지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으로도 또다른 꿈을 꿀 수 있을 것이다. he’s not there ㅡ 그가 거기 있거나 없거나 상관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