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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레터(602번째 편지)

“…어렸을 때 병에 쪽지를 넣어 바다에 던졌지.
하지만 그게 끝내 발견됐는지는 알 수 없었어.”
— 영화 <사일런트 러닝>(1972)

 

조류에 떼밀려간 병속의 편지처럼
읽히지 않은 오늘,
다시 쓰는 숨겨진 이야기
나는 알지 못하고
나는 안다 —
아무도 읽지 않은 글만이
마침내 남겨진 사연인 것을

 

 

2025. 9. 23.
쓰고, 다음 날 병에 넣어 띄우다.

과학이 아닙니다

부슬부슬 이른 봄비
동네 담벼락에 매트리스 하나 덩그러니 기대어져 있다
어느 누구의 잠자리였을지
어쩌면 멀쩡한 듯 어쩌면 다 삭은 듯
매일 오가는 부식가게 한 귀퉁이에 바나나 한 송이
검게 물들어 있다
스스로 自 그럴 然
누구에게도 읽히지 못한 행간인양
폐지 사이에서 비에 젖었다

 

/2024. 2. 20.

연인의 이름

부베에서 루-이지-앤, 브라질의 자누아리아까지+
누군가에겐 간절했을 낯선 글자들
그 또는 그녀로 이루어진 세상이거나
그리움이 만들어낸 도시
사람일지 도시의 이름일지
영영 뜻 모를 철자
내 마음의 고장인양
알 길 없고 갈 길 없는데
결국엔
하나에 이를
하나의 이름

 

 

+
부베는 영화 <부베의 연인>에서 왔지만 마라에게 있어 부베는 도시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루-이지-앤>은 주의 이름을 의인화, 또는 ‘여인화’한 케일의 노래,
그녀는 뉴 올리언즈에 살고 있고 그가 그리는 뉴 올리언즈는 그녀 속에 있다.
미나스 제라이스 주의 도시, 또는 그녀 <자누아리아>는……

 

+
최근에 알게 된 어느 부부의 사연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한다. 가녀리게라도 이어지는 관계, 막장이 되어버린 사이, 무덤덤하게 평행선을 달리는 사람들, 원수처럼 으르렁대는  사람들, 이미 남이 되어버린 이들, 애초부터 혼자인 사람들, 그냥저냥 무난하게 함께 하는 삶, 로댕의 드라마틱하게 과장된 조각이나 그의 그림을 전부 잊어버리고 싶게 만드는 피카소의 삶이 아닌 4천년도 더 된 옛 이집트의 소박한 조각처럼 마주 잡은 손…… 모두가 어떤 순간 이 가운데 어딘가에 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 누구도 바라지 않고 아무도 꿈꾸지 않을 삶을 들여다 본 적이 있을지…… 그녀와 함께 하는 애플비씨의 질서바른 세계다.

곤충綱 나비目

이래저래 거듭거듭 바꿔도 보았으나
알록달록 봄날의 짧은 꿈인양
날아다니는 꽃이 되진 못했네
봄도 아닌데
여긴 밤이 아닌데
거센 빗줄기 오가는 아침
작은 나방 하나
비슷한 색깔의 담벼락 주변을 맴돌고 있다
가지 못한 길
찾지도 못한 길
여긴 밤이 아닌데
영영 밤이 아닌데
온통 밤인양
눈부신 어둠인양
깨치지 못한 어설픈 羽化

 

 

그러나, 그것도 사실에 있어서는 근본적은 아니었다.
감정으로만 살아나가는 가엾은 한 곤충의 내적 파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나는 발견하였다.
나는 또한 나로서도, 또 나의 주위의 – 모든 것에 대하여 굉장한 무엇을 분명히 창작(?)하였는데,
그것이 무슨 모양인지 무엇인지 등은 도무지 기억할 길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病床以後병상이후, 이상

 

 

/2023. 7. 18.

카카오 씨앗이 香을 얻기까지

몰타의 절경이 강풍에 무너졌다
‘아주르 윈도우’는 사라졌어도 그 너머 하늘빛은 변함이 없다
형상을 잃어버린 초콜렛의 맛처럼
오래도록 잊고 지냈던 책속의 초콜렛 포장지처럼

 

어느 날 남아 있는 책 펼치다 책갈피인양 꽂혀 있는 초콜렛 포장지 하나를 발견했다 한 시절이었다 초콜렛 하나 사는 것도 녹록한 일은 아니어서 미련과 아쉬움에 흐릿한 香이라도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찰나였다 순간이었다 오래된 책 냄새 너머 향은 속절없이 흩어졌으나 짙은 갈색의 포장지는 기억나지 않는 책의 알지 못할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고이 잠들어 있었다

카카오 씨앗을 醱酵시켜 향을 얻기까지 대략 열다섯 날, 내 책꽂이 어딘가에서 무한의 서가 알 길 없는 한 모퉁이까지 세월을 괴고 시간을 삭힌 아득한 天上의 열다섯 날, 너를 그리고 나 기다리던 그런 시절이었다 風化―바람이 만들었으나 바람이 되어버린 風景에 대한 바람이었다 아직은 만나지 못한 永遠이었다

 

 

/2023. 6. 26. (+2017. 3. 10.)

+2017년에 쓴 4행을 바탕으로 했다.

 

 

+이 시를 구글 바드에서 테스트해봤다. 처음엔 실수로 제목을 넣지 않고 본문만 넣은 채 아무런 요구사항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로 올라갔는데 바드는 이게 시라는 것을 인식하고 나름의 평을 했다. 다음엔 제목과 본문을 다 넣은 후 소감과 의견을 구했더니 제법 그럴 듯한 답변을 했다. 챗GPT에도 제목없이 본문만 올린 결과 여기서도 시로 파악하고 나름의 해설을 했다.  다만 이 시에 대한 해설에 국한해서는 바드가 조금 더 그럴 듯 했다.

 

 

 

Gozo, Malta - The beautiful Azure Window, a natural arch on the island of Gozo has been collapsed in 9. March. 2017. On this image you can see the before-after site, as the Window is at 50% opacity

Gozo, Malta – The beautiful Azure Window, a natural arch on the island of Gozo has been collapsed in 9. March. 2017. On this image you can see the before-after site, as the Window is at 50% opacity.(from “adobe.com”)

한때의 딸기밭

여전히 사랑하지
하지만 ‘영원히’일 수는 없네
― 나는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이오
― ‘영원히’라는 말은 인간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말이에요+
한때의 딸기밭 달콤했던 빛살
잊지 못해 영원히 그릴 수도 있지
영영 한때의 딸기밭

 

 

+울리카, 보르헤스

 

 

/2023. 4. 10.

 

+이 시를 쓸 때 시험삼아 챗GPT의 의견도 여러 번 들어보았다. (영어/한글로 다 시험했다.)
AI의 의견은 허접했고 디테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에 받아들일 것이 없었지만
나로 하여금 조금 다르게 고치도록은 만든 셈이다.
영원을 기약할 수 없는 인간이 그려낼 수 있는 영원이란
어떤 순간, 어떤 시기, 어느 시절에 대한 흔들리지만 자신에게서는 영속하는 무언가이며
그런 의미에서 이 짧은 이야기는 “찰나가 석화된 영원한 포옹“과도 비슷한 무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