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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너 대신 짧은 봄밤
새로 핀 꽃구경도 즐거웠다만
건너편 집 처녀
다소곳이 설거지하는 모습도 참 예쁘다
전해지려나
이 방을 흐르는 노래 그곳까지 들릴까
나 대신 짧은 봄비
마음아 너는 어디까지 가려나
얼마만큼 쌓이어서 한 줄 닿으려나
너 대신 짧은 봄꿈
양지 바른 곳에 누워 노랠 따라 불렀더라
구름에 햇살 오가다 어느 하루 잠들었는데
자장가 부르던 이만 잠 못 이루네

 

/2002. 3. 18.

 

 

+
“얼마만큼 쌓이어서 한 줄 닿으려나”에서 “인들”을 뺐다.
“한 줄인들”이 더 운이 맞지만 한 줄이나 천 줄이나 닿는 것은 다름이 없고
한 줄이면 족하기에 “인들”은 그 절박함을 부박하게 만든다 싶었다.

/2017. 2. 15.

누구… 시온지……

누구시온지 초면에 실례가 많았습니다. 비루한 행색으로 아 이런, 오 저런 시답잖은 생각만 읊어대었습니다. 밤낮없이 낯 뜨거운 일이었어요. 시집은 어떤가요 장가도 못갔는데, 시시각각 독수공방 시나 읊어볼까요. 책 하나 만든다면 정말 좋겠는데 어디 더 보태어 책 잡힐 일 있나요. 누구 책 망할 일 있나요. 시시콜콜 웃을 일이 아닌데 그냥 웃고 말아야 겠어요. 당신도 이쯤에서 웃어주시고.

시샘도 가물 가물, 가물어서 이토록인가. 적당히 폼잡고 고개 끄덕이며 시인은 아무나 하나.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는다는데 풍류는 고사하고 시류도 모르오니 정말이지 시인 못할 노릇이라는 건 시인해야 하겠군요. 아무렴, 그래야지요. 시인도 아니 되고 부인도 없다는데 천번 만번 꾸벅꾸벅 인가받기 힘든 빌어먹을 시인일랑 밤새도록 계속해야 하겠어요.

잘못한 것 많아서 시인합니다.
온갖 부끄러운 일로 모두 시인합니다.
죄스런 일 많다한들 깡그리 빠짐없이 시인합니다.
밝지도 편안하지도 즐겁지도 않았음에 시인합니다.
무조건 시인합니다.
그리움에 펼쳐보고 잘잘못에 새겨가던
저의 책임에 시인합니다.
어디선가 본 듯한 당신
속속들이 알 것만 같은 당신
대체 누구시온지, 누구의 시온지 부끄럽사오나
오늘의 험한 꼴을 박대 마소서.
이 남루 훨훨 털고
성장 차려 다시 뵐 날 기약합니다.

 

 

 

/2002. 3. 12.

라 마하 데스누다

열세 살 백과사전의 한 페이지 귀퉁이에 마야가 누워 있습니다. 어느 어린 봄날의 시험시간, 책상 사이로 길게 늘어선 그림자를 바라보다 아득해진 삶처럼 너무 작고 흐린 그림이 몹시도 안타까웠습니다. 태초의 숲에서 율리시즈의 고행까지 누구의 연인인들 어땠을까요. 옛 그리스의 꿈인양 비만이 풍만으로 보이던 환상, 얇은 그 옷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라 마하 베스띠다, 지도와 영토 사이 흐릿한 한 지점을 하염없이 꿈꾸었습니다. 마야의 침대 위에 홀로 누웠습니다. 더 잃을 것도 없는 허망을 찾아 내가 간지럽힌 것은, 나를 그리 한 것은 어느 여인의 옆구리였을까요. 고야의 방을 채우던 검은 그림 너머 헐벗은 마음으론 분별치 못할 황홀한 나의 마야입니다.

 

 

2001. 9. 26.

 

+라 마하 데스누다 / 라 마하 베스띠다, 고야.
제목을 한글 발음으로 바꾸었고, 조금 고쳤다.  외래어 표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에 봤던 ‘그책’의 이름대로, 그리고 ‘幻’이라는 의미로 그녀의 이름을 마야라고 썼다. 인용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영토와 지도에 관한 생각은 카프라의 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야란 지도를 영토로 착각하는 것이라고.

 

65년의 새해

그때 너는 한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奇蹟이었다*

 

65년의 새해라는 김수영의 시처럼 나는 기적이었다. 하지만 삼팔육은 내 고물창고에도 없다. 의사당과 방송국과 시민단체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삼팔육은 테라바이트의 비밀을 숨기고 산다. 사과탄 만큼이나 매캐한 눈물을 흘리고 사과탄보다 더 뽀얀 연기를 피운다. 삼팔육은 내 고물창고에도 없다. 내 보물창고에도 없다. 대공분실에도 지하벙커에도 이상한 이름의 공사들에도 대자보로 도배된 학생회관에도 없다. 이제 돌아가는 것은 징징대는 팬 뿐이기에 나는 삼팔육이 아니다. 00년을 맞이하여 공공연하게 빵빵하게 살아가는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슈퍼 컴퓨터를 돌리며 어거지 삼팔육을 상기시킨다. 그 몇몇만이 삼십대 팔십학번 육십년대생의 이름을 가진 대표단수이다. 아주 많은 피가 아닌 약간의 피는 보상받을 수도 있기에, 작은 희생이 훈장일 수도 있기에 세상은 어느 정도 핏빛을 띠고 있을 뿐이다. 내가 A시대를 살았고 B유파에 속하며 C주의에 심취했다면 그건 별다른 뜻도 없는 것, 내가 X세대 흉내를 내었고, Y족처럼 지냈으며, Z너레이션이 되고자 했다면 모든 철자는 언제든 무엇이든 등식이 되는 공허한 방정식인 법이다. 시대의 중심에는 삼팔육명만 살지 않았고 피 마저 나이를 찾는 절호시절, 삼팔육명이 중심으로 살아 남았다. 대표단수는 단수를 올려가며 힘차게 희망차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때는 바야흐로 65년의 새해,

 

그때 나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나는 奇蹟이었다
계속 판올림 하며 00년의 새해에도 나는.

 

 

2000. 6. 15.
*65년의 새해, 김수영

원일점

아무렴,
기약 없음과 하염없음이야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내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뼈가 있어
나날이 새겨가던 그리움이라
마디마디 사무치던 옛 하늘의 기록처럼
깎듯이 달이 차고
기울어 가고

 

 

/2000. 1. 16.

유리창 파리

언제나 신비가 감돌고 있었지
그에게는 유리창에 부딪힌 파리의 꿈이 있었지
화장실로 달아나야 할 신비가 있었지
그는 빈털터리 Mister……y

 

 

쿵쿵 가끔씩 가슴 안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지 녹음할 수도 없고 들려줄 수도 없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테니 어쩌면 다들 비슷할지도
몰라 행여 다른 몰골을 각성케 하는 거울이 있었지 결단코 전혀 닮지 않은 형제를 보았지 인적 끊긴 해양수족관을 두리번거리던 날 전시관의 미로를 답답한 마음으로 걸어 다녔어 삶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쿵쿵 내 바깥에서 똑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꼭 내 몸통만한 바다거북 두 마리가 좁은 수족관에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지 그 놈들 목숨이 그토록 질길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내 뒤통수를 때리던 그 소리와 눈빛은 거울 같았어 그렇게 좁은 수족관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단절 나는 차라리 그놈들 머리가 깨어지길 바랐는지도
몰라 겨울 햇살 비추는 창가에 서면 비슷한 슬픈 미친 바보 같은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들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일 테지 고작 그의 날개만 한 의지를 갖고 비상을 꿈꾼 것인지도
몰라 한숨으로 닦아낸 유리창만큼이나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니 그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맑고 명확한 거울이었는지도
몰라 그러면 세상의 유리창마다에 가득한 나의 날개짓 비명 소리가 그냥 찢어져버리면 좋을지도 몰라 수족관 그저 끔찍하고도
행복했던 비밀 없는 생활이 너무 그리운 것인지도 몰라 푸른 바다거북 한 마리가 창밖 허공을 부유하며 나를 두드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내가 그를, 날개를

 

 

 

/1999. 10. 27.

 

창백한 푸른 점+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흥얼거리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았지 별 하나 찾기 힘든 그곳,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이었지
다만 오래도록 태양을 쏘아보던 사내가 있었고
한결같이 힘들고 외로운 길 위에서
직녀성을 향하여 쏘아올린 닿지 못할 꿈이 있었지
원주율 속에 숨겨진 비밀을 따라 컨택트의 꿈을 찾다
너무 비싼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야
창백한 푸른 점, 비닐 포장에 둘러싸인 두터운 책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 안을 속옷처럼 엿보고 싶어 했지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창백한 푸른 점을 가득 채웠지
너도 그 안에 있고 모두가 그 속에 살고 있지
단풍 같은 마음은 빛바랜 채 유구한 것
도시의 야경 너머로 보이지 않는 별이 그 자리에 멈추어
시린 밤이 새도록 창백히 떨고 있었지
무릎마저 젖어드는 새벽녘 짧은 꿈길
홀로 부유하며 창백한 푸른 점에 귀를 기울이면
그리운 숨결이 아직은 들리고 있지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거문고 가락이 하늘 길을 따라 창으로 흐르고 있지

 

+칼 세이건

 

/1999. 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