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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로 걸다

띄엄띄엄 외우지도 못할 긴 번호입니다. 벽지 구석마다 얼룩이 잦아들면 빗방울 소리가 나를 대신합니다. 부엌 창틀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르고, 팬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다릅니다.
띄엄띄엄 알지 못할 긴 번호를 눌러 봅니다. 낮은 구름장이 붉은 빛을 띤 새벽, 발신음도 들리지 않았는데 급한 걸음들이 달려갑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그 소리는 늘 틀림없는 번호로 이어집니다. 계란 껍질 가지런히 둘러져 있는 화분에 닿는 소리가 다르고, 철벅이는 발자국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릅니다.
마음의 틈새마다 사방 벽지마다 그리던 모습대로 떠오릅니다. 잠들 무렵이면, 어두운 손길마다 하나씩 훤히 불이 켜지고 머리칼의 길을 따라 빗소리가 참하니 나를 다듬습니다.
띄엄띄엄 외울 필요도 없는 길고 긴 통화입니다.

 

 

/1999. 9. 16.
/2025. 9. 14. 마지막 줄 추가.

라듸오 1973

맑은 소리가 없던 시절입니다. 반쯤 망가진 미닫이문의 촘촘한 창살 사이로 덕지덕지 붙은 글자 ― 라듸오 수리.

총천연색, 완전입체음향 스테레오의 빛바랜 색상을 가진 포스터와 양판 표지였습니다. 망가진 꿈의 전파상, 그 글자의 한 획이 세월 따라 떨어져 라디오가 되었습니다.

맑은 소리로 가득한 시절입니다. 아득한 사이렌처럼 우주의 꿈을 좇는 탐색자의 소리처럼 정성 들여 찾아야 했던 주파수입니다. 이제는 자동 선국 ― 오토 튜닝으로 바뀐 지 오래, 그나마 듣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쩌다 그리운 순간입니다.

엿장수 가위질처럼 다듬이질 장단처럼 부드러운 저음이 없던 시절입니다. 초봄의 온실 속에서 울려 퍼지던 나른한 라디오 음향이 가끔 나를 부릅니다. 표지가 달아나 버린 낡은 기억들, 세월 따라 한 획 두 획 떨어져간 추억은 어떻게 발음하고 선국하는 것일까요.

마우스로는 불러낼 수 없는 주소입니다. 잡음 속 희미한 소리로나마 잡히기만 한다면 최대출력으로 증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내 귀로 들어오기보다는 내가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잡음은 음악처럼 나를 가득 채우겠지요.

맑고 깊은 고음이 가득했던 시절, 한 획 두 획 시간을 주워 담는 내 가슴도 따라 뛰고 있습니다.

 

 

/1999. 7. 17.

압점

그녀가 사다준 조그만 지압기
지하철에서 샀을까 아니면 길거리 좌판에서 샀을까
말랑말랑한 고무 재질에 뭉툭한 바늘이 가득하다
가끔씩 그녀를 생각하며 그걸 손에 꼭 쥐어본다
약간은 시원하고 약간은 아픈 느낌
때로는 그립고 때로는 만지고 싶은 느낌
손바닥을 펴면
압점마다 박혀 있는
수많은 그녀

 

1999. 4. 7

 

지금 이 기분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한대 얻어 맞았나 봐요
금방이라도 코피를 쏟을 것 같은 아찔한 기분
나도 모르는 사이 가슴 위에 기왓장이 쌓여 있었나 봐요
누군가 격파술을 보이는 기분
나는 그의 손맛을 같이 느끼나 봐요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한대 얻어 맞았나 봐요
맞아도 그만 틀려도 그만
그냥 그대로 휩쓸리고 싶어요
눈감고 휘두른 칼에 자비로운 상처를 입었나 봐요
실컷 얻어맞고 걸어가는 통쾌함을 알고 싶었나 봐요
물먹은 종이처럼 물먹은 스폰지처럼
풀어지고 지쳐버리길 바랬나 봐요
당신도 알 것 같은 지금 이 기분
언젠가 당신도 느꼈을 것 같은 지금 이 기분
어디선가 당신도 느끼게 될 지금 이 기분
우리집 강아지는 복슬 강아지
그 반갑고도 슬픈 꼬리처럼
내 마음이 그처럼 흔들리고 있어요

 

 

/1999.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