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혹은 1998년 흐릿한 신문 칼럼에서 영화 속 장면 하나를 처음 봤을 때 만큼이나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2002년의 솔라리스는 감상적이고 공허하였다 하염없이 시간은 흐르고 스타니스와프 렘은 많이 달라진 얼굴로 내 앞에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솔라리스를 들은 것도 본 것도 만난 것도 모두 태고의 흐릿한 이야기 언제나처럼 오래된 책꽂이의 어둑한 책과 바다와 별을 나는 그렸다 Read More
[카테고리:] 말할 수 없는 그것
예전에 가끔 가던 곳
그곳이었다
문밖 큼지막한 바구니엔
알록달록 플라스틱 빗자루 몇 개
비를 맞고 있다
낡은 진열대는 군데군데 빈자리도 있다
오래전 언젠가는 형광등을 사러 가던 곳 Read More
함운경의 어떤 아침
아침 5시 40분
어차피 나는 경매 사는 사람 아니지
6시 일어나야겠네
7시 벌써 이렇게 됐어
경매위판장이 모처럼 열렸는데
집을 나선것은 7시 20분
이미 파장분위기
많이 나온 물건은 없네.
오로지 홍어만 많이 나왔다.
오늘 뭐 팔것 있어요. Read More
허울의 이름뿐인 성
나는 시냇물 소리에서 가을을 들었다.
마개 뽑힌 가슴에 담을 무엇을 나는 찾았다./이상
그저 어려울 뿐 애써 알아야 할 의미도 없지
복잡하다고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유구하고도 쓸모없는 버릇처럼 남은 이름들일 뿐이지
붉디 붉은 부끄럼 같은 까베르네 쇼비뇽, 쇼비뇽 블랑
하얗게 이 마음 회쳐지고야 말 샤르도네, 리슬링
대체 무엇인지 어디 어디 말씀인지 무똥까데
카사리토무스카토다스티 군트럼슈페트레제
라포스톨끌로아팔타 샤토테시에르생떼밀리옹그랑크뤼
주워 섬기기도 어려운 와인의 이름처럼
잘못 고른 와인처럼
도대체 무엇인지 너는 무엇인지
쓸데없이 달았다가 이유없이 거품 물다가
하염없이 속절없이 묻혀버린
시큼텁텁한 이름의 나.
/2021. 7. 10.
petite fleur
피어난 적이나 있었을까
스산한 사막의 겨울
황금과 보물들 사이
수레국화 꽃다발 하나
빛 바랜 채 남았네
그녀+의 운명이 되어버린
가녀린 매듭 몇바퀴
운철로 만들었다는
어린 왕의 여전히 빛나는 단검보다도
안타깝게 아프게
/2020. 9. 4.
+안케세나멘.
베개 둘 베개 하나
두동달이베개는 어디 갔는고+ 틀리기 쉬운 맞춤법 ― 베개를 배고 칼은 벤다 베개 하나 있으면 뭔지 모르게 허전하다 베개 둘에 하나는 머리에 배고 하나는 곁에 두거나 가끔 끌어안는다 책 볼 때는 책도 세워두고 폰을 켜면 폰도 그렇게 둔다 아침이면 베개 하나 어디로 달아났는지 잘 모른다 누군가는 자객처럼 베개 아래에 칼을 품은 채다 자칫하면 어긋나버리는 맞춤법 ― 바드득 이를 갈고 죽어볼까요+ 위징의 꿈처럼+ 베개 하나 배고 누운 밤 누군가의 꿈은 틀림없이 거기 베인다
+김소월
+황제와 장기를 두던 위징이 잠시 조는 사이 용의 목을 베는 꿈을 꾸자 하늘에서 용의 머리가 떨어졌다.
/2020. 8. 30.
업이 무엇인지요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게 만화책에서 봤던 마법사의 주문이 아니라 정구업진언이라는 것을 처음 알았을 적에는 그저 우스웠지요. 하지만 입으로 지은 업을 씻는 진언이라니 끝까지 웃을 일은 아니었지요. 생각해보면 수십년, 흐리멍텅한 업을 지니고 살아왔지요. 10대적부터 막연히 시를 쓰고자 했으나 내내 형편없는 것들만 그렸습니다. 아마도 수십곡, 20대 초반에는 노래도 지었지만 하나같이 어설픈 잡곡이었지요. 업이랍시고 편집일도 하고 조판일도 하고 인쇄일도 하고 더 하찮은 것들도 했지만 제대로 돈을 번 때는그리 많지 않았지요. 그러니 내게 있어 업이 무엇인지는 늘 답없는 이야기였지요. 아침, 점심, 저녁 빠짐없이 설거지를 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아이들을 돌보며 내 업은 무엇보다 가정주부라 생각도 했지요. 설거지를 하면서 죄와 속죄에 관한 시를 그리기도 했지요. 절반쯤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으니 절반쯤 자식들 데리고 살고 있으니 절반쯤 자식으로 살고 있으니 그들 일 살피느라 시간 보낼 적에는 부모가 업이고 자식이 업 같기도 합니다. 오늘 사무실엔 그다지 일이 없습니다. 오신다던 손님이 찾아 오실지도 알 수 없네요. 그러니 업이라고 하기엔 참 모자라기 짝이 없지만 그래서 이게 바로 업인가 싶어집니다. 지은 업이 넘쳐나고, 풀지 못한 업은 끝이 없으니 진언 따위는 알지 못해도 수리수리수리수리 고치고 업데이트 해야 할 내 분명한 업인걸요.
별자리처럼
멀거나 가깝거나
어제거나 억만년 전이거나
마음 가는대로 이어놓은
2020. 3.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