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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그것은 그것은

그는 기타 연주자였다. 지방 방송국의 기타리스트였는지 어느 이름모를 클럽의 얼굴없는 반주자였는지는 알지 못한다. 마지막 병상에서 그의 아내는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들의 요리법을 여기저기 메모했다. 광고전단의 뒷면에도 썼고, 백지에도 썼다. 얼룩진 사연도 있었고 찢어진 종이도 있었다. 그녀의 머리 속에서 그녀의 마음 속에서 남편을 위한 요리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 그것은 사랑 그것은 행복, 상상 속에서 간결하고 정성 가득하였다. 수목장으로 그녀를 떠나보낸 남편은 사진을 코팅해서 나무에 달았다. 너덜너덜한 요리 메모 쪽지들도 코팅을 했다. 아내 없는 부엌에서 살아가던 어느 날 그는 정신없이 문을 닫고 길을 나섰지만 빌라의 문이 꼭 닫히지 않은 것을 알지 못했다. 몇시간 비워뒀을 뿐인데 그 사이 도둑이 들어 백수십만원의 현금을 잃어버렸다. 그날 그는 허탈한 마음으로 아이스커피를 사들고 내게 왔었다. 잃어버린 돈에 괴로워하고 떠나보낸 아내에 힘들어 했다. 그를 본 마지막날에도 그는 사진을 코팅했다. 경찰은 도둑도 잡아내지 못했고 돈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내도 찾아내지 못했다. 그는 아내의 요리법을 코팅했을 뿐 요리하는 아내를 그렸을 뿐 요리는 하지 않았다. 그것은 상실, 그것은 무기력, 불가해로 가득한 세상에서 남겨진 대책없는 그리움 ― 내 시도 비슷하였다.

어떤 것은 삶이고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그것은 유구한 팰럼세스트palimpsest에
두 존재의 이야기를 더하고 고쳐 쓰는 일 ――
결국 잠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화장실 불을 켜니
아슬아슬한 문틈에 쌀나방 두 마리
죽은 듯 잠들은 듯 꽁지를 맞대고 있다
어떤 것은 삶이고 또 어떤 것은 시늉이다

 

 

/2019. 11. 2.

 

다음 이 시간에…

우리들 모여 밤새 이야기 나눌 적엔
화장실 가는 것도 미안하였지
그 마음 한 조각 달아난 자리
여태 깨어나지 못한 어느 행성의 눈부신 아침
별빛의 끝까지 어둠의 끝까지 아스라히 달려
다시 그날 밤
어떤 미안함도 없이
밤새 또 밤새 이야기 나눌
우리들의 다음 이 시간

 

+
이 시를 처음 쓴 것은 2009년이었다.
생각은 물론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겠고.
나름 끝을 맺었지만 늘 탐탁치 않았다.
그냥은 그럴듯해도 내 심정일랑은 상당한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절대 잘못 써서는 안될 시이기 때문에 계속 마음에 걸렸다.
최근 시편들을 정리하는 작업의 와중에 며칠 뜯어고치다
부족한대로 또 마무리를 했다.
내 심정에 조금은 가까워졌을 뿐
여전히 구질구질해서 답이 아니다.

 

어딘지 모를 저 건너편에서
만나고 만나고 만나고 싶다.
다음 이 시간에.
이 시간에.
/2019. 10. 27.

 

 

+
“여전한 미안함으로”를 “어떤 미안함도 없이”로 고쳤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미안했음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유한하고 일회적인 것이기에 그렇고
미안함이 없는 것은
거기 미지의 영원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9. 10. 29.

루즈 네그라

작은 상자 속 금관의 악기들이
흑백 텔레비젼 속에서 음을 올릴 적마다
검은 광휘을 발하던 시대
투박하게 치렁치렁하게
돌이킬 수 없이 막혀버린 커튼 너머
그 빛에 내가 혹하는 오늘
검은 빛에 둘러싸인
어딘지 모를 작은 상자 같은 곳
관을 잃어버린 악기가 적막을 토해내는
기막히게 멋진 밤

 

 

/2019. 10. 6.

 

그런 슬픈 눈으로

거미줄 낀 화장실 낡은 창 너머 다세대 주택 지나 잠든 것처럼 주저앉은 옛집 위로 산복도로 가는 길 건너 노란 바탕에 붉고 푸른 글씨 할인마트 슈퍼 오래된 간판 하나 보인다. 셔터 내려진지 얼마나 되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내가 갈 일은 별로 없는 길, 아마도 한번쯤 들렀던 것도 같은 가게. 이웃들이나 알까 언제부터 있었던 가게인지 언제 문을 닫은 것인지 나는 모른다. 비집고 들어올 뀸도 이제는 없는지 계절 가고 해 바뀌어도 변함이 없다. 화장실 좁은 창 밖으로 보이는 먼 풍경이다. 당신이 찾을 까닭은 별로 없는 곳, 문닫은 슈퍼에서 산복도로 가는 2차로길 건너 인적없이 주저앉은 가정집 지나 다세대 주택 너머 반쯤 열린 화장실 창문 너머에 비슷한 정물이 있다.

 

 

/2019. 6.25.

 

희망 가요

차마 한마디 꺼내지도 못하고 애닳게 기다리던 노래 있었지요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소식 하나 들려주길 고대하며 엽서 한장 써붙이던 시절도 있었지요 하지만 흘러나오는 노래란 바람빠진 풍선처럼  희망하지 않는 것들이었지요 희망 가요 희망이 가요 여기 희망이 가요 그렇게 흘러들 갔지요 떠난 자리에 희망이 또 갈까요 낮은 자리 또 채워질까요 원치 않는 노래만 줄을 잇는데 지우고 쓰고 또  찢었다 덕지덕지 이어붙입니다 마음에 담아둔 노래 하나 기다리며 또또 또또또 아무도 듣지 않을 신호를 보냅니다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쓰디쓴 바람에 희망가요 희망이 가요 신호를 보냅니다 또또또 또또 또.

 

/2019.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