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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여덟 살에게 ◎
1.
여름엔 삶은 옥수수도 가끔 사고 겨울엔 어묵을 사가곤 하는
길모퉁이 부식가게, 그녀가 등 돌린 채 앉아 있다.
바깥은 이토록 봄날인데 닫힌 창문 너머로 일없이 앉아 있는 그녀의
잔기침 소리가 들린다.
김장이든 부식이든 일만 있다면 밤을 새워서도 즐거이 움직일 분이건만
이렇게 환한 아침 어둑한 실내에서 고개 숙이고 있다.
2.
유치원 아이들이 손잡고 봄나들이를 간다.
세상에 유치원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던 나는
길바닥에 붙어 있는 이름 적힌 은빛 스티커를 보다
내 일곱 여덟 살 시절을 잠깐 떠올렸다.
그때 울고 웃고 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는지 생각하면 마음 쓰리지만
한편으론 그 덧없음이 얼마나 눈부시고 가슴 뭉클한 일이었는지
가능하다면 이 모두를 내 여덟 살에게 전하고 싶다.
3.
사무실 와서 도시락을 꺼낸다. 오늘은 회덮밥이다.
생선 종류를 들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따로 가져온 밥에 ‘칠분도쌀’이라고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 있다.
예전에 내가 떼낸 시래기밥, 견과류죽, 또 시래기밥 포스트잇이
냉장고 옆에 몇장 남아 있다.
이렇게 환한 봄날 아침 고개 숙인 채 앉은
수많은 잘못들의 총합인 내가
스물여덟 살에게, 모든 여덟 살에게 말하고 싶은 것들 가운데
어쩌면 전부일지도 모를 작은 부분들이다.
봄, 테스트

오늘 나오다 프리우스도 옆에 있고 해서 폰으로 한장 찍어봤다.
저 앞의 큰길 벚꽃이 멋진데 이곳이 한산해서 나는 오히려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좀 촌스러울지 모르겠지만
거의 30년 이상 이 아파트의 벽 또한 벚꽃 같은 연분홍 빛깔이었다!)
퇴근길에는 다른 이의 사진에 행인1, 행인2로 너무 많이 찍히는 것 같아
좀 불편하다.
모친이 주로 사용하고 계시는 프리우스는
외관에 흠집들이 좀 있어도 별 문제는 없는 것 같고
10.5만km 정도 시점에 브레이크 패드만 한번 교체했을 뿐이다.
조만간의 점검 때에는 점화플러그를 비롯하여 추가적으로 교체해야 할 소모품들이
좀 있을 듯 싶다.
신기하게도 어제는 나의 랜덤 아이팟에서 김정미의 노래가 나왔다.
봄, 그리고 햇님.
그리고 봄이면 생각나는 씨꾸 부아르끼 지 올란다의 처연한 옛노래도.
(이 포스트는 폰에서 올려 컴으로 수정했다.)
이제는 흩어져버린 이름이지만
들은 이야기라 언제였던가는 잘 모르겠다. 원주에서 어떤 세미나가 있었고 네 살 많은 나의 누나 또한 발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 교수 발표 밖에 들을 게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 해마다 참석했으면 한다고 했었단다. 준비도 물론 열심으로 했겠지만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까닭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너무도 많이 늙었고 그의 삶과 이름은 몇몇 사건들로 하여 많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그 훼손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 흩어진 것은 그의 이름일 뿐이고 어떤 부분들에 있어 나는 여전히 그의 지지자이다. 이도 저도 중간도 아닌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묘한 한 말씀 남기며 창작에의 열정을 피력한 ‘에너지 선생’을 생각해도 그렇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후회없는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
스위프트에 모자라지 않는 풍자가로서의 놀라웠던 작품들이나 몹시 여린 감상으로 채워졌던 그의 시편들은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빛을 발했고 그리고 사그라들었다. 좀 많이 오버한 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빛의 강렬함과 눈부심을 기억하기에 지금의 희미함 또한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오래 전 동생이 내게 준 그의 시집을 기억한다. 한시절 꽤 ‘적극적인 참여자’였던 동생이 두 권을 사서 하나 내게 줬던 것, 동생이 갖고 있던 책은 후에 누나에게 전해졌다. 기억나는 글 하나 없는데 그 시집의 제목은 그리움으로 나를 채운다.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
尿酸/uric acid
퓨린 유도체로서 탄소, 산소, 수소, 질소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화합물이다. 동물의 배설물에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사람의 오줌에는 하루에 0.6~1.0g이 배출된다. 화학식 C5H4N4O3. 맛과 냄새가 없는 흰색 결정이며, 에탄올 에테르에는 녹지 않고, 물에는 약간 녹는다. 가열해도 융해하지 않고 400℃ 이상에서 분해한다./두산백과사전
요즘 말로 ‘극혐’이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혼자 쓰는 사무실 화장실이 정말이지 무척 지저분하다. 무지 오래된 부실 건물의 완벽하게 독립되지는 않은 공간에 불편한 방향으로 설치된 수세식 좌변기는 남자가 소변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쓰기 힘들다. 본래도 많이 낡았던 화장실을 오래도록 남자들만 사용하다보니 아주 지저분해졌고 언제부터인가는 청소도 거의 포기한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 나 혼자 사용한 게 또 2~3년 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리를 포기한 채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수십년 된 동굴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가끔 친구가 들러 그 동굴을 사용하는 바람에 심히 민망했는데 어떻게 청소가 되기나 할지 엄두도 나질 않았다. 배설이란 그토록 지독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이킹소다로 어설픈 시도를 한번 해봤으나 턱도 없었다. 뭔가 강력한 것이 있을까 해서 인터넷 뒤져 “요산 제거”하는 화장실 청소 용액을 구입해서 시도를 해봤지만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 청소 용액을 변기 안밖으로 뿌려놓고 다음날 와서 보니 뭔가 좀 희미하게나마 지워진 감이 있었다. 그래서 용액 부어놓고 한두 시간 지나서 닦고, 또 한참 있다 닦고…… 그것을 며칠 동안 했더니 이제는, 적어도 도기 부분은 놀랍게도 새것 비슷하게 깨끗해졌다. 거의 십년 이상 요산이 쌓여 굳어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변기가 깨끗해진 것이다.
하지만 수십년 된 어떤 물건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하거나 욕망하거나 움직이는 것들은 좀처럼 그렇게 되는 법이 없다. 스스로의 지저분함을 고백하기도 힘들고 고백한다 한들 씻어내기는 더욱 어렵다. 시인해서 시인 못합니다. 시인 하지 않고 시인합니다, 시인 하기 위해 시인 못합니다…… 누구처럼 시인합니다… 인지 뭔지 헷갈리지만 요즘 그 시인 때문에 업장 소멸인지 업장 휴폐업인지 기로를 오가는 시인과 감내하기 힘든 부인의 인생들이 있다.
옛시절 한때는 그분들 가운데 일부가 욕된 과거사로 하여 비난받고 묻히는가 싶더니, 자랑스런 과거사로 하여 훈장들을 달고 사는가 싶더니 요즘은 ‘미투’로 해서 줄줄이 이름들이 나온다. 사연이야 없겠냐만 변명과 억울함이 어찌 없겠냐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나로 말하자면, 사랑에도 사랑의 행위에 관해서도 모두 낯선 이방인 같은 사람일 뿐이라 잘 알 수가 없다. 드뇌브도 바르도도 멋지다만 그 사람을 갖거나 지배하거나 유혹하거나 유혹당하거나 온갖 당치 않은 욕망들마저 실현하고 싶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최선 같은데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 수십년 세월이 기울어도 그만큼을 기울여도 결단코 지워지지 않을 요산보다 더 지독한 배설의 흔적들만 온통 가득하다, 미…… 투.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술고래>를 처음 봤을 때부터 헨리 치나스키를 무척 좋아했다. 바텐더와 돈을 나누는 장면을 마음에 들어했고, 결국 그녀와 함께 돌아간 술집의 시끌벅적한 풍경도 그랬다. 그리고 그가 어느 정도는 찰스 부코스키 자신일 것이라고 기대도 했다. 시집 <사랑에 대하여>는 매우 사실적인만큼 노골적이었다. 또 터무니없는 허세를 펼쳐보이다가도 가끔은 나름의 방식으로 기품도 있었다. 그게 시인지 아니면 짧은 이야기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글들이지만 쟝르를 정의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고 스토리가 있어 술술 잘 넘어간다. 나로서는 아주 얄팍한(?) 책,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읽었고, 거기 수록된 “어려운 시절“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집을 칠한 두 사람의 페인트공과의 조우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였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에 관해서 나같은 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시는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면에서 고무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글을 쓰는 것은 재능이고 능력이니 어쩔 수 없지만 온갖 크고 작은 이야기를 이 흐릿한 눈으로도 끄적일 수는 있기에. 내 짧은 소감에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은 한마디로 ‘개뿔'(폄하의 의미는 아니다), 부코스키의 세계를 간략히 서술하자면 ‘깨달음이 없는 이의 하찮은(결코 폄하의 의미는 아니다!)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끌어내린 블라인드”의 한 줄은 나의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나는 다만 조잡할 뿐이지만.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는 점은
그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조잡하다는 거야 ㅡ
/끌어내린 블라인드, 찰스 부코스키
오멜라스와 함께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책에 대해 아는 바도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책을 펼치면 몇줄을 읽지도 못한 채 나는 난독증에 빠지곤 했다. 어쩌면 건조한 묘사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모자람이 비할 수 없이 확실한 원인일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의 모든 작품 가운데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당연히, 그리고 운좋게도 <오멜라스를 떠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번역한 분으로부터 직접 원고를 받아 보았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고 번역본을 받은 때로부터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길지도 않은 그 글을 읽었다. <어둠의 왼손>이 여전히 내 책꽂이에 있지만 나는 그것을 다 읽지 못했고, 단편집에 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오멜라스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에 비해 너무 많은 고결함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던,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내 소감에 대해 희미한 죄스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동조하기는 어려운 어떤 느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의 세상에 그녀의 영혼이 함께하기를 나는 기원한다.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대신하여 오멜라스에서 홀로 고초를 겪고 있는 비천한 한 소년 곁에 오래도록 머물렀기를 나는 기원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의심에 싸인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할 것이고, 그녀를 조금 더 빛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그곳을 결코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어슐러 르 귄.
ursula kroeber le guin, 1929. 10. 21~2018. 1. 22.
/the ones who walk away
‘오멜라스’로부터는 아닌지 모르지만…
나는 다만……
온종일 비가 왔었다. 돌아오는 길, 길모퉁이 부식가게가 열려있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는 겉옷 주머니에 천원짜리 몇장을 넣어두고 밖으로 나섰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부식가게에 들러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활력 강해 보이는 아주머니지만 이제는 부식가게라는 것이 추억 속의 거리에나 있는 법이어서 장사가 잘 되지는 않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엄동설한의 좁은 골목에서 김장일을 대신하기도 하고 야채 트럭을 운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뽀얗게 김이 서린 창 안쪽에서 대학생쯤 되어보이는 아들과 마주 앉아 서로서로 기운을 북돋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억척같은 몸과 마음도 할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법, 손님이 없고 일이 없을 때 아주머니는 좁은 가게 안에서 야채를 다듬으며 텔레비젼을 보고 있곤 하지만 지나가는 객일 뿐인 나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로 해서 마주치는 눈길이 조금 무섭다. 무서워서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건 한산한 시장의 어둑한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어떤 느낌이다. 여전히 비는 그대로 쏟아지는데 부식가게 앞에는 비닐까지 드리운 채 불이 켜져 있었고 어묵 냄비 위로 하얀 김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묵 달라고 부르는 것은 나지만 갯수를 정하는 것은 내 권리가 아니다. 대개는 3천원어치만 가져가라고 하고 그러면 나는 3천원을 드린다. 가끔은 눈치껏 1, 2천원 더 쓰기도 하는데 그때는 떨이를 하기 위함이고 어떤 때는 내가 하나 남은 어묵을 덤으로 받기도 한다. 주머니에 넣어둔 돈은 까마득히 잊고 가방에서 3천원 꺼내느라 잠깐 사이 비도 좀 맞았다. 따뜻한 국물이 생각난 것도 아니고, 달리 바라는 것은 없었다. 어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속절없이 타고 있는 커다란 냄비 아래 가스불을 어느 하루 저녁 잠깐이라도 끄고 싶었을 뿐이다.
/2018. 1. 17.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
기억을 소재로 한 최근의 영화를 봤다. 아주 대충 봐서 영화에 관해선 뭐라 말도 하지 못하겠다. 알다시피 기억이란 굉장히 불확실하고 불분명하며, 뜻밖에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과거에 대한 완벽한 기록이 있다고 한들 희미한 기억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심지어 까마득히 잊어버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느낌은 남아 있음을 나는 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억 그 자체도 아니다. 터무니없는 상실이 안타깝거나 괴롭거나 견디기 힘들 때도 있지만 망각까지 포함하는 오래된 어느 순간의 느낌이나 심정은 그다지 달라지는 법이 없다. 보르헤스에게서 망각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배운 이래 나는 기억에 관해서, 엄밀히 말해서는 기억하지 못함에 관하여 한결 편안해졌고 모래성처럼 허물어져가는 기억에 대한 자책에 대해서도 비슷하였다. 르네 마그리트의 기억 ㅡ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에 피를 흘리고 있던 모습에 나를 투영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영화가 보여준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세세한 기억의 정밀한 총합이라기보다는 그 순간들의 느낌과 그 느낌에 대한 믿음으로 남아 있고, 그것은 좀처럼 훼손되는 법이 없다. 굳이 영화를 통해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이.

/memory 1, rene magritte
진상에게 ◉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이하의 시는 이렇게 시작했다. 젊어서도 젊은 적이 없었던 나는 그 두 줄에서 벌써 ‘진상’을 보았다. “진상에게”의 진상은 이하와 비슷한 연배의 품격있는 청년이었던 것 같지만 그 진상이 허접한 어떤 이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보니 자꾸 엉뚱한 것만 더 눈에 들어온다. 진상은 허상이 되고 거기에서야 진상이 보인답시고 ‘겉보기에 허름하고 질이 나쁜 물건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서의 ‘進上’이나 실제의 모습을 뜻하는 ‘眞相’이 나를 찔러대는 것이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쓸쓸하구나, 진상이여!
이 구절에 와서는 이미 반백(!)을 넘어 흰머리 가득한 이로서 덧붙일 말도 없는 진상 그 자체다. 한치라도 괜찮은 부분이 있다면 그건 어떤 이의 것이 아니고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일도 없다는 끝자락의 몇몇 대목은 나라는 進上에게 결단코 어울리는 것이었다. 오직 그의 탄식만이 내게 합당하여 그의 시처럼 녹여낼 길 없으니 낡아도 홀로 벼려진 검이 아닌 ‘le fusil rouillé(녹슨 총+)’에게는 울음도 없다. “녹슨 총보다 더 멋진 것은 없어요, 그리고 그건 이제 결코 소용없을 거예요”라던 앙리꼬 마시아스의 노래가 가을 바람처럼 이하의 마지막 말처럼 스산하게 들려올 뿐.
장안에 한 젊은이 있어
나이 스물에 마음은 벌써 늙어 버렸네
능가경은 책상머리에 쌓아 두고
초사도 손에서 놓지 못하네
곤궁하고 못난 인생
해 질 녘이면 애오라지 술잔만 기울이네
지금 길이 이미 막혔는데
백발까지 기다려 본들 무엇하리
쓸쓸하구나, 진상(陳述聖)이여!
베옷 입고 김매며 제사의 예를 익히고
오묘한 요순의 글을 배웠거늘
사람들은 낡은 문장이라 나무라네
사립문엔 수레바퀴 자국 얼어붙어 있고
해 기울면 느릅나무 그림자만 앙상한데
이 황혼에 그대가 날 찾아왔으니
곧은 절개 지키려다 젊음이 주름지겠네
오천 길 태화산처럼
땅을 가르고 우뚝 솟은 그대
주변에 겨눌 만한 것 하나 없이
단번에 치솟아 견우성과 북두칠성을 찌르거늘
벼슬아치들이 그대를 말하지 않는다 해도
어찌 내 입까지 막을 수 있으랴
나도 태화산 같은 그대를 본받아
책상다리 하고 앉아 한낮을 바라보네
서리 맞으면 잡목 되고 말지만
때를 만나면 봄버들 되는 것을,
예절은 내게서 멀어져만 가고
초췌하기가 비루먹은 개와 같네
눈보라 치는 재단을 지키면서
검은 끈에 관인(官印)을 차고 있다 하나
노비 같은 기색과 태도로
다만 먼지 털고 비질만 할 뿐이네
하늘의 눈은 언제 열려
옛 검(劍) 한번 크게 울어 볼 것인가
진상에게 드림 / 이하
/2017. 10. 19.
+열여섯일 적에 <검지의 꿈>이란 제목으로 ‘녹슨 총’에 관해 쓴 적이 있다. 녹슨 총을 붙들고 운다던 나는 역시나 노인이었던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