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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정)살인의 추억

“치정살인”이란 단어는 내가 썼던 그 노래에 대한 가장 간략한 정의였다. 본인이 기억하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오래도록 연결이 끊어진 채인 그가 플로라를 알게 된 것은 레코드판에 바늘을 올리던 내 손끝에서였다.

그런데 이 단어를 친구의 아이디로 들어간 고등학교 동창 ‘밴드’에서 보게 되리란 생각은 정말 못했다. (현재 내 폰에는 ‘밴드’도 ‘페이스북’도 없다. ‘카톡’을 쓸 일도 없다.) lily of the west 만큼이나 씁쓸한 느낌이었다.

1999년 7월 25일, 나는 그 글을 썼고, 더 오래전 “천리안” 어딘가에도 썼었다. 그 친구가 나인줄 모르는 내가 거기 있었고 ‘이작자’가 나인줄 모르는 그 친구도 거기 있었다.

비슷한 무렵이었다. 안부와 함께 조금 냉소적인 메일을 그에게 보냈더니(메일 주소가 그 친구 아내의 아이디로 되어 있어서였는지) 누군지 모르지만 스토커짓 계속하면 신고하겠다는 답장을 보내왔던 친구. 그래서 더 냉소적인 답을 쓰면서 나라는 걸 알렸더니 좀 씁쓸해 했었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메일을 보낸 것은 안부를 묻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무엇이 될지 모를 “이작자 여인숙”이 나의 숨겨진 ‘유로파’이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아써 클락의 스페이스 오딧세이 시리즈에 나오는 절대 착륙하지 말라던 유로파 말이다. 소설 속에서처럼 ‘불시착’이라면 어쩔 수도 없지만. 그가 유로파를 방문했는지도 잘 알 수는 없지만.

그리고 2006년의 어느 봄날, 예고도 없이 찾아온 그를 잠깐 만났다. 나의 한심함에 일조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다 싶었다. 하염없이 걸어 내려가다 어느 순간… <1984년>의 윈스턴 스미스처럼 쥴리아처럼 군중 속에서 슬그머니 멀어져간 이래 지금까지 그 친구를 다시 만난 적은 없었다. 한 두 해 전 어렵사리 핸드폰 번호를 찾아내긴 했으나 나는 여태 그 11자리의 숫자를 돌이킬 수 없는 추억처럼 간직해왔을 뿐이다.

flora나 또는 flora의 애인을 죽여버린 노래속의 주인공을 생각하면 우리들의 스토리에도 뭔가 ‘치정살인’ 같은 면이 있는 것도 같다. 플로라 때문에 살인이 난 것은 물론 아니었으나 나라는 인간, (심히 덜떨어진 시의 형태로) 살아 있는 그의 부고장도 썼던 사람이었으니……

 

 

+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면 플로라였거나 아니면 나였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라면 오늘의 나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죽은 주인공이 꾸는 뒤죽박죽의 꿈 같은 것일 게다.

 

 

/2017. 10. 11. 풀리

 

새로 생긴 과일 가게

몹시도 들여다보고 싶었던 여인의 방 ― 예전에 ‘경화미용원’이 자리했던 아파트 위쪽길 초입의 편의점 옆에 과일가게 하나 새로 문을 열었다.

얼마 전에 문을 닫은 가게의 간판이 그대로 붙어 있어 이름도 없지만 길 앞에까지 진열대를 내어놓고 불을 환히 밝힌 채 젊은 부부가 장사를 한다. 새로 시작한 가게라서 그런지 소박한 진열대도 과일도 반질반질하게 보이고 앞길까지 부지런히 쓸어가며 그네들은 희망에 부풀어 있다. 곧 대목이니 좀 더 많은 과일들이 상자로 쌓일 것이고 또 팔려나갈 것이다.

하지만 아파트 가운데에 있는 좀 오래된 과일가게 주인은 마음이 조금 복잡할 것이다. 매일같이 오는 야채트럭에서 과일을 파는 것만 해도 그런데 사람도 그다지 많지 않은 동네에 과일가게 하나 더 생겼으니 아래위로 막힌 셈이다.

새로 생긴 과일가게의 가로길 끝 부식가게도 그렇다. 대파와 무 상추에다 과일 조금 갖다놓고 팔고 있고 겨울엔 어묵이며 떡볶이를 만들어 파는데 과일가게는 또 생겼고 맞은편에는 분식점이 열리려는 찰나다. 아주 가끔 옥수수와 어묵을 샀던 나는 매일 그 길 오가며 인사를 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눈 마주치는 것도 힘들게 느껴진다.

하지만 개업을 준비 중이던 자그마한 분식점은 간판 붙인지도 몇 주 된 것 같은데 무슨 까닭인지 여태 문을 열지 않고 있다. 아무도 알지 못할 흐릿한 창문 너머로 한번도 사용한 적 없는 것 같은 조리도구들이 즐비하고 종이컵과 라면이 후덥지근한 적막 속에 한가득 쌓여 있다. 누군가의 희망도 그렇고 누군가의 절망도 비슷하다.

 

/2017. 9. 18. 화, 풀리.

활명수게맛살조리예그리고

생명의 신비, 그런 책에서 봤던 것인가 모르겠다. 어떤 풀벌레가 있었다. 그놈은 독이 없는데 독 있는 벌레와 거의 같은 무늬를 흉내내어 제 목숨을 보존하고자 했다. 뱀 가운데도 무늬만 독뱀을 흉내내는 비슷한 종류가 있었다. 어쩌면 게맛살도 비슷하고 예전엔 그냥 바나나 우유였던 바나나맛 우유도 그렇다. 또 어쩌면 소화제 치고는 너무도 거창한 이름을 지녔던 활명수나 이제는 유용성이 입증되지 않아 추억마저 뭉개버린 채 시판 금지 조치가 내려진 원기소도 그렇다. 개뿔…… 커다란 동물의 눈처럼 보이는 나비 날개의 문양에서 라면 포장지의 배보다 배꼽이 더 크게 보이는 조리예까지 모두를 뒤섞어 놓은 듯한 뭔가가 동종 내지 아류들을 생각하며 잠시 끄적여보았는데 독이랍시고 있다 한들 제 속으로만 파고들 뿐, 끝내 날개 갖지 못할 어이없는 생명의 미스터리다.

 

/2017. 9. 8.

mjb

이곳에는 신문도 잘 아니 오고 체전부(遞傳夫)는
이따금 ‘하도롱’빛 소식을 가져옵니다.
거기는 누에고치와 옥수수의 사연이 적혀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사는 일가 때문에 수심(愁心)이 생겼나 봅니다.
나도 도회(都會)에 남기고 온 일이 걱정이 됩니다.
/산촌여정, 이상

그래도 좋았고 아니라도 좋았습니다. mjb의 향기, 그건 연인의 이니셜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커피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그 이름 찾아볼 생각은 한번도 하지 못했네요. <산촌여정>이 내 머리 속을 가득 채우고 있던 청춘의 시절엔 검색창 대신 창의 바깥을 바라보며 mjb를 상상했을 뿐이었지요. 그런데 무더운 이국의 슈퍼에서 커피를 찾다 초록빛 mjb를 보았습니다. 80여년의 세월을 넘어 그 이름이 실물이 되어 내 앞에 있었습니다. 그저 드립커피일 뿐이었지만 양철 지붕 위에 쏟아지던 별빛 소리를 기억하며 다소곳이 커피를 집어들었습니다 ㅡ 향기로운 엠제이비의 미각을 까마득히 잊고 지낸 것이 20일이 아닌 20여년은 더 된 것 같습니다. 여전히 알지 못하지만 너무도 익숙한, 어쩌면 영영 봉지 그대로인 커피 mjb. 검색창 너머 창의 바깥으로 그리고 그렸던 mjb. 그건 연인의 이니셜 같은 느낌입니다. 그래도 좋고 아니라도 어쩔 수 없는 낡디 낡고 해진 ‘하도롱’빛이지만요. 빛…… 커피는 별맛없이 쓰기만 했고 나는 그 무엇도 쓰지 않았습니다.

 

 

ascenseur pour

가끔씩 생각나는 한줄들, 어떤 때는 잇사가 위로가 된다. 바쇼에 비해 질곡의 삶을 살았건만, 그래서 가끔 꺾이기도 했지만 그는 오직 그것을 견뎌내며 한줄을 쓰는 것으로 일관했었나 보다. 잇사를 생각하면 하찮은 내 인생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참 아무 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 1월 어느 날의 소감을 뒤돌아보며./2017. 6. 15.

 

월요일부터 얼어붙었던 수돗물은 금요일 사무실 나오니 풀려 있었다.
목요일 퇴근 전에 물 두어통이랑 생수병 몇 개
이웃집에서 갖고 올 때는 그것이 하루를 버텨줄 요긴한 필수품이었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된 바로 순간
“맹물보다도 못한” 하찮은 무엇이 되어버렸다.
나도 누군가에 또 내가 누군가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세상을 사는 것은
거듭 겨울비를
긋는 것//소기

 

늦은 출근 ㅡ 사무실 오는 길에 한참 멀리 위쪽에서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수레 뒤로 차가 따라오는데 귀 어두우셔서 잘 모르는가 싶었다.
마침내 경적을 울리고 우여곡절 끝에 차는 피해갔고
나는 눈짓 손짓으로 2층으로 모시고 커피 한잔 같이 마셨다.
한달여 모아둔 폐지와 사무실에서 쓰려고 뒀으나 잘 입지 않는겨울옷 두 벌 드렸고
수레를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조금 끌어드리고 올라왔다.
그 잠깐 동안은 최근의 우울을 잊고 있었나 보다.

 

둥근 집이야말로
사각 집보다 좋아라
한겨울 칩거//사와 로센

 

힘들어서였을지 아니면 초탈해서였을지 아니면 어떤 달관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은이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요즘의 내 느낌도 비슷하다.
이렇게 완곡하게 썼으니까 내 뜻대로 마음대로 고쳐서 생각하기도 좋다.
하지만 고바야시 잇사를 생각하면 괴로움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다.

그는 전혀 초월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세파에 부대끼고 그 속에서 숱한 고초와 아픔을 겪었으나
남달리 험난했던 삶에 완벽하게 굴복한 적은 없었는가 싶다.

 

여윈 개구리
지지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잇사

 

모르긴 해도, 또 그가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느낌으로는 잇사에 제일 마음이 갔다.
(그것이 그를 좋아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사연이 담긴 그의 몇몇 글에서는 감정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개구리 하이쿠처럼 아이들에 관한 것은 특히나 그랬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70여 페이지로 요약을 했다.
피난처였다.

 

다만 있으면
이대로 있을 뿐
눈은 내리고//잇사

 

 

+
잔느 모로, 또는 어떤 이가
비슷하니 길을 걸을 때
트럼펫 소리가……

 

/2016. 1. 30. 21:49.

 

 


ascenseur pour l’echafaud / miles davis

 

 

九點煙구점연에 갇히어

누군가? 나의 서러운 한 권의 시집을
소중히 읽어 벌레 먹지 않게 할 이.
/이하

 

휴관을 앞둔 도서관에 책을 반납해야 할 마감일이다. 삼국유사를 편역한 두 책은 끝까지 다 읽지 못했음에도 그다지 미련도 아쉬움도 없지만 이하 시집을 돌려보내려니 좀 허전하였다.

그래서 눈에 들어오는대로 몇 페이지 카피를 하다 그것도 마땅찮아 찾아봤더니 구할 수 있는 책이라 바로 주문을 했다. 역자의 번역이 아주 시적이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완역본인 만큼 두고두고 보고 싶었기에 그랬다.

미리 써버린 내 ‘스완 송’의 소재가 되었던 “백옥루”+에 관한 이야기는 <태평광기>에 이하가 말한 것으로 나와 있고, 당나라 시인 이상은의 기록 <이장길 소전>에도 기술되어 있는데 그의 글에는 이하를 하늘나라(?)로 데려갈 저승사자가 했던 말로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모두가 일종의 ‘전해오는 이야기’임에 본질은 이하의 말에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옛 현암사판의 번역으로 <夢天몽천>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이 땅을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단이 전혀 없던 시대에도 남다른 안목과 불허의 상상력은 그 모두를 뛰어넘었나 보다.  나는 이 하루도 ‘九點煙구점연’에 갇힌 채 까마득히 잊고 있으니 그가 夢天에서 봤던 것은 통찰이고, 나의 현실은 夢天인지도 모를 일이다.

 

달 속의 늙은 토끼와 한기 느낀 두꺼비가 우는 듯한 하늘 빛
구름누각 반쯤 열리자 벽 사이로 비스듬히 내비치는 새하얀 달빛
옥 바퀴 이슬에 구르자 물기를 머금은 듯 달빛은 몽롱해지고
계수나무 꽃향기 피어나는 길에서 선녀를 만난다.
삼신산 아래 인간 세상을 바라보니 누런 먼지와 맑은 물뿐
변화를 거듭하는 천년 세월도 달리는 말처럼 한순간이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중국 땅은 아홉 점 먼지
넓은 바다도 쏟아 낸 한잔의 물에 불과한 것을.

/꿈속에 하늘에 올라, 이원섭 역.

老兎寒蟾泣天色 (노토한섬읍천색)
雲樓半開壁斜白 (운루반개벽사백)
玉輪軋露濕團光 (옥륜알로습단광)
鸞佩相逢桂香陌 (난패상봉계향맥)
黃塵淸水三山下 (황진청수삼산하)
更變千年如走馬 (갱변천년여주마)
遙望齊州九點煙 (요망제주구점연)
一泓海水杯中瀉 (일홍해수배중사)

 

 

/2017. 6. 13.

+상제께서 (시인, 묵객들이 머물) 백옥루를 짓게 되어 상량문을 써라고 한다.

 

 

꽤 오래된 시론

그저께 빌려왔던 책, 사흘 동안 안고 산 것은 아니지만 머리 속에선 내내 그랬다. 처음 펼쳤을 때는 모처럼 읽을거리 많은 책을 만난 것 같아 좀 들떴나 보다. 저자, 또는 편역자에 대한 느낌은 아주 조금 달라졌지만 배울 것이 많은 책이어서 그저 감지덕지일 따름이다.  그분의 지지자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책들도 빠짐없이 읽고 싶어질만큼. 서두에 있던 박지원의 인용부터가 인상적이었다. 해설까지 마음에 쏙 든 것은 아니어서 나는 좀 더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직 나만의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나 부지불식간에 책을 읽고 시를 읽고 심지어 쓰기까지 한다는 것, 그 자신이 알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러리라 나는 생각한다 ㅡ 그것을 문자로 한정하지만 않는다면. 그런 의미에서 연암의 글을 시인의 자세에 관한 것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나는 다만 그 짧은 글이 시라고 생각하고 읽었을 뿐이다. 내재율조차도 찾을 길 없다 한들 굳이 산문시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그 어떤 ‘律’도 그 어떤 ‘룰’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가 쓴 시를 읽었다.

라면 몇 개 안아들고

여섯 시가 되자마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라면 몇 개라도 챙겨야 했던
전운 감도는 시대의 소시민인양
도서관이 휴관한다는 문자에 우습게도 애가 닳았나 보다
꽤 두꺼운 시집 세 권에 다른 책 두 권을 보태어 대출 권수를 채웠다
생각지도 못한 분의 생각지도 못한 글이 나름 반가웠다
그리고 페이지마다 오래된 새로움이 가득하였다
경운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쓰던 시절처럼
숨을 곳 없는 난민의
조금 서글퍼지만 피할 길 없는,
불어터졌지만 오랜 허기 면하는 작은 즐거움 같은 것

/2017. 5. 16.

등화관제가
실시됐던
지나간
여름

사이렌 소리에 불이 꺼지자 망 쳐진 내 창으로 수천의 눈동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하수, 정민

+
한시 두시 읊어가며 옮기는 분이라
할아버지인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이 분의 번역이 좋아서 책 빌려왔는데
대학 시절부터 남달랐나 보다.

일어나지 않은 결말에 관한 작은 사유들

엄마와 너댓살 되어보이는 아이가 여름 같은 봄날의 오후의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어느 순간엔가 처음 본 그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별 생각없이 눈이  마주쳤는데 다시 보니 아이가 갖고 놀던 공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그늘막 위로 올라가버린 것이었다. 너무 높아 꺼내기도 곤란한.

나즈막한 언덕으로 되어 있는 뒷쪽으로 돌아서 가봤으나 나무가 빼곡히들 자라 있어 비집고 들어갈 수 있는 틈이 없었다. 다시 돌아와서 쉽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더니 애기 엄마가 벤치 위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데 역시나 키가 모자라 되질 않았다.

가만 보니 내가 안쪽으로 손을 집어 넣으면 어떻게 될 것도 같아 벤치 위로 올라가 생각없이 손을 쑥 넣었다. 그런데 철조망 같은 것이 거기 있었던지 나는 팔을 조금 찔린 채 얼른 손을 빼야 했다. 다시 두어번 조심스레 손을 넣은 끝에 옆으로 공을 굴려 결국 아이에게 돌려줄 수 있었다. 반소매였던 까닭에 팔은 여기저기 좀 긁혔으나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와 아이는 근처에서 조금 더 놀았지만 뭔가 서먹했는지 광장의 저 끝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곤 그 잠깐의 상황에 대해 까마득히 잊고 있다 오늘 상처를 봤더니 조금 곪아 있었다. 어제의 녹슨 철조망을 떠올리다 갑자기 “파상풍?” 이런 단어가 머리 속을 돌았다. 이상이 회충약 먹던 이야기처럼 좀 웃기지만 뒤늦게나마 간단하게나마 소독도 했다. 하지만 그랬다. 그럴 리도 없지만 백만에 하나, 천만에 하나, 일억에 하나… (이건 정말 확률로 따질 수도 없는 가능성에 대한 생각이다) 그 철조망 가시에 뭔가 나쁜 게 있어 내게 어떤 치명적인 결과를 야기한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관해서 잠시 생각해봤다. 그다지 생각할 겨를도 없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결과에 대해 담담히 받아들이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오래전 언젠가 내가 일을 하는데 덩치도 무지 크고 험상궂은 두 손님이 내 뒤에서 유심히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때를 기억한다. 우습지만 아주 잠깐 이 사람들이 내 뒷머리를 내리칠 수도 있으리란 상상을 했다. 그때도 그랬다. 나는 당신들이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하찮은 내 일을 하다 그리 되었음에 개의치도 않고 후회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비슷한 심정으로 언젠가의 어느 한겨울날 어떤 술취한 아주머니에게 사무실을 내준 적이 있었다. 그때도 그 아주머니를 믿었지만 돈이든 물건이든 잃어버린다 한들 후회할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숱한 의미있는 일을 하거나 타인의 삶과 생명을 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거나 역사에 남을 공헌을 하는 것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좋은 일이겠지만 공 하나 꺼내주다 내게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생겼다 한들 그게 나쁘지도 억울할 것도 전혀 없는 일이란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는 그 현실을 달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그런 생각과 상관없이 아주 작은 팔의 상처에 관해서 그다지 염려할 것은 없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다. 이게 아주 작은 선의인지, 염세주의인지, 위선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분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내 결론은 다르지 않았다.

 

 

/2017.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