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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진 전부 상상

아래의 가릭 이고르 슈카체프의 경우도 그랬지만, 브라질, 쿠바/멕시코 등을 돌아 이스라엘, 이란, 알제리 등등으로 흘러가서 베리 사카로프, 달레르 나자로프, 모흐센 남주, 그러다 페랏 이마지겐(?)에 이르러 그들의 문자(카발리에 문자?)를 보면 거의 암호 같은 느낌에 맞딱뜨린다. 겨우 제목의 발음 내지 뜻이나 알면 다행, 아니면 그저 느낌만 있을 뿐이다. 얼마전 샌디에고서 음악에 상당한 조예를 지닌 분을 잠깐 만났다. 그는 내가 관심가져 듣는 나라의 아티스트들 이름을 물었지만 나는 거의 말할 수가 없었다. 어떤 이름은 기억해낼 수 있었지만 다른 것들은 얼른 떠올릴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게 큰 문제라 생각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내게 가져다준 어떤 정서, 느낌들이 내 안에 있음을 안다. 그리고 때로는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한 채 상상하는 것이 나같은 사람에겐 더 짜릿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내게 있어 ‘미지’란 그런 것이다. 오늘은 에프랏 벤 주르의 어떤 노래를 들었다. 하바 알버스타인의 1970년대 노랠 다시 부른 것인데 노랠 들은지는 몇해 되었지만 나는 아직 그 노래 제목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뜻도 물론. 하지만 그  노랠 듣는 동안 묘한 향수에 휩쓸리곤 한다. 마음 한 구석을 콕콕 찔리는 듯한 느낌, 내게 있어 ‘미지’란 그런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찾아봤다. 할라일라 후 쉬림. 번역기가 풀어낸 벤 주르의 노래 가사 한줄은 “yes, sometimes, tonight is beautiful songs“였다. 그리고 좀 더 살펴본 보다 정확한 번역은 “yes sometimes, the night is pretty songs”였다.)

 

/2020. 1. 21.

말해버린 그것에 관한 약간의 자책 +

말할 수 없는 그것이란 제목으로 처음 쓴 것을 찾아보니 2010년의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애초의 그것은 ‘시’였다.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그것이었고, 말하기 힘든 그것이었고, 형언하지 못해 형언하지 못할 괴로움을 내게 주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게 처음은 아니었고 나는 여태 시에 관한 시를 꽤 여러 편 썼다.  한참 예전에 장난처럼 쓴 누구…시온지…가 그랬고,  절망과 헛된 희망이 교차하는 내가 쓴 가장 좋은 시, 쓰라린 포기각서 같았던 이하의 마지막 말이나 라면은 보글보글도 어쩌면 그렇다. 제대로 쓰진 못했지만 미련스런 할 수 없는 노릇도 그랬다. 이하의 마지막 말을 썼을 때 나는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심히 서글픈 심정이었지만 그 굴욕의 시간을 오늘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꿈 또한 이하의 마지막 말의 깨어나지 못한 꿈 같은 서글픈 변종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 말할 수 없는 그것이란 제목으로 또 다른 시를 썼다. 처음엔 ‘더 말할 수 없는 그것’, ‘영영 말할 수 없는 그것’ 등으로 붙였지만 결국엔 ‘말할 수 없는 그것’으로 환원되었다.

이 시는 앞선 것들과는 달리 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꼭 그만큼이나 ‘말할 수 없는 무엇’이어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초라하고 서글픈 마음이었음에도 나는 시를 쓰고서 좀 기뻤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조금 자랑스러웠다.(그 느낌으로 “보내지 않은 메시지”를 썼고, 거기서 간지러운 몇줄을 빼서 실행한 것이 보낸 메시지다) 사실을 들여다보면 심히 아픈 이야기지만 내 마음에 관하여 가능한 만큼 제대로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것은 의미를 알려줄 수 없는 “메르우트”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었다. 히에로글리프로 쓴 한줄은 ‘메르우트, 엔 메르우트’라고 읽을 수 있다. 다만 발음은 조금 미묘한 차이를 두고 슬쩍 다르게 표기했는데, 의미를 찾기 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뜻을 알고자 애를 쓴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몇 글자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 문자이거나 비밀은 아니다. 평범하고도 위대한 무엇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그 시는 히에로글리프 한줄이거나 끝의 네줄이 전부다.

4행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첫번째 줄은 잇사의 인용으로 시제만 과거형으로 바꾼 것이고 둘째줄은 나의 시점, 셋째줄은 잇사의 시점이기도 하지만 형식상 그것을 빌렸을 뿐, 내 시각이라 할 수 있으며 (“눈에” 다음에서 좀 뻔하고 감상적인 글자 세자는 생략했다) 마지막 줄은 100퍼센트 내가 보는 것이다.

 

찢어진 문틈으로 보던 은하수+
암흑과 광년의 세상을 가로질러
남루한 그 옛날의 눈에 맺힌
당신이라는 이름의 눈부신 오늘이어요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이 시를 배신했다. ‘말할 수 없는 그것’에 관해 하루아침에 깡그리 다 설명해버리고 말았다. “○○는 하되 XX는 하지 않는다”던 방중술의 오래되고 미심쩍은 어떤 금언을 지키지 못한 느낌 같은 것,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허탈하고 참담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평소의 조심스러움, 소심함이나 신중함과 달리 나는 대책없이 직선적인 사람이고 그런 쪽으로 마음을 감추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느꼈기에 가만 있기가 더 힘들었다. 사실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비할 수 없이 온당치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약간의 소소한 이야기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은 하루만에 ‘말해버린 그것’이 되었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라 했지만 내 마음보다 슬프지는 않다.

 

 

+잇사.

 

 

+뭔가 빠진 시가 하나 있었는데 왜 그걸 빼먹었던지 모르겠다. 내가 시를 쓴다던 꿈, 이제사 생각이 나서 한줄 집어넣었다. 매일같이 그 캄캄한 화면에서 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2019. 11. 29.

 

볼륨을 높여라, 카루소

그렇게 멀지 않은 나의 적막한 밸리 포지+, 일찍부터 움직여 차를 달렸다. 이제는 좀 쌀쌀한 날씨라 차창을 열고 운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리고 밸리 포지를 향한 나의 길은 그 영화 제목 같은 “침묵의 질주”는 아니다.

창문을 제법 열고 운전을 한다.(하이브리드 차량 운전자로서 아직 히터는 잘 켜지 않는다.) 그리고 음악을 듣는다. 지나가는 차나 정차시 옆에서 들으라고 차창 여는 것은 아니다. 차가 달릴 적에 더 크게 들려오는 바람 소리, 나는 그 바람 소리보다 더 세게 노랠 듣는 걸 좋아할 따름이다. 좀 추워서 후드를 덮어썼다. 룸미러로 보이는 꼴이 가관이다만 누가 볼 일도 보여줄 일도 없으니 상관은 없다.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음악실은 자동차이고 최고의 오디오 또한 그런 것 같다. 플레이는 언제나 랜덤, 영 기분에 맞지 않으면 넘겨가며 듣는다. 때마침 마음 맞는 노래가 나온다면 그건 세상 최고의 음악이다. 예를 들면 카루소 같은 곡이 그렇다. 그 노래에는 듣는 사람을 (뭔지 모를 스토리의 주인공인양) 멋지게 만들어주는 놀라운 마력이 있다.

 

애써 카루소인 척은 하지 않아
그리고 난 넘버 원도 아냐
만약 내가 노래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거든
그만 다른 곡을 틀도록 해

 

라고 낮고 묵직하게 노래하는 그 대목은 늘 나를 감격케 한다. “‘스트레이트’라고 불리우는 거리”에서 언제나 나도 그런 마음이다!! 텔레캐스터의 명장이라는 그의 기타보다도 자신이 카루소 같은 가수는 아니라는 목소리를 좋아한다. 봄에 더 아름다운 단풍나무를 내게 알려준 시냇물의 한줄처럼 그렇게.

 

아무도 몰라주는
단풍 꽃은
님의 붉은 심장처럼
/시냇물

 

 

 

+영화 <침묵의 질주>에 나오는 우주정거장 형태의 식물원.

 

 

/2019. 11. 17.

 

어떤 것은 삶이고

얼마나 긴 시간이었을까
그것은 유구한 팰럼세스트palimpsest에
두 존재의 이야기를 더하고 고쳐 쓰는 일 ――
결국 잠 이루지 못하고 일어나 화장실 불을 켜니
아슬아슬한 문틈에 쌀나방 두 마리
죽은 듯 잠들은 듯 꽁지를 맞대고 있다
어떤 것은 삶이고 또 어떤 것은 시늉이다

 

 

/2019. 11. 2.

 

다음 이 시간에…

우리들 모여 밤새 이야기 나눌 적엔
화장실 가는 것도 미안하였지
그 마음 한 조각 달아난 자리
여태 깨어나지 못한 어느 행성의 눈부신 아침
별빛의 끝까지 어둠의 끝까지 아스라히 달려
다시 그날 밤
어떤 미안함도 없이
밤새 또 밤새 이야기 나눌
우리들의 다음 이 시간

 

+
이 시를 처음 쓴 것은 2009년이었다.
생각은 물론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겠고.
나름 끝을 맺었지만 늘 탐탁치 않았다.
그냥은 그럴듯해도 내 심정일랑은 상당한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또 절대 잘못 써서는 안될 시이기 때문에 계속 마음에 걸렸다.
최근 시편들을 정리하는 작업의 와중에 며칠 뜯어고치다
부족한대로 또 마무리를 했다.
내 심정에 조금은 가까워졌을 뿐
여전히 구질구질해서 답이 아니다.

 

어딘지 모를 저 건너편에서
만나고 만나고 만나고 싶다.
다음 이 시간에.
이 시간에.
/2019. 10. 27.

 

 

+
“여전한 미안함으로”를 “어떤 미안함도 없이”로 고쳤다.
화장실 가는 것조차도 미안했음은
우리의 삶이 그만큼 유한하고 일회적인 것이기에 그렇고
미안함이 없는 것은
거기 미지의 영원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9. 10. 29.

도에 관심 있으십니까…

하고 역전에서 누가 묻는다면 제일 좋은 퇴치법은 “스미마셍”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아무튼… 내게 그렇게 물었던 청년들에겐 ‘스미마셍’한 일이지만 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물리학의 도>에도 꽤 관심이 컸던 시절이 있었다. 그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물리학에 매혹된 것일 뿐이었지만.

<코스모스>에서 시작된 관심은 프리초프 카프라에 이르러 좀 폭발적으로 되었고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를 알게 되면서 더욱 매혹되었다. 하지만 ‘교양과학’으로 이해하기에 양자론은 내게 있어 일정 부분 불가해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결국은 이래저래 가늠키 힘든 심심미묘한 불법 쪽이 차라리 편하겠다(?)는 안이한 생각으로 마음이 기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카프라의 책에서 읽었던 네줄짜리 문장은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암기력이 젬병인 내가 지금껏 외우고 있을 정도다. 단어나 조사의 차이가 조금 있을지 모르지만 내용은 아래와 같다.

 

우리는 수천 칼파 이전에 헤어졌지만
한번도 떨어져본 적이 없소.
우리는 하루 종일 얼굴을 맞대고 있지만
한번도 만난 적이 없소.
/대등선사

we were parted many thousands of kalpas ago,
yet we have not been separated even for a moment.
we are facing each other all day long,
yet we have never met.
/zen master daito

 

이 말을 한 주인공이 ‘대등선사’로 되어 있었기에 최근 들어 구글링을 통해 영문으로도 읽어봤고, 대등선사(대등국사)라는 인물에 대해서도 좀 찾아봤다. 아마도 일본에서 大燈国師대등국사라고 부르는 이가 그분인가 싶은데 그는 Daitō Kokushi, 1282년에 태어나 1337년에 입적한 일본의 고승으로 카프라의 인용에서 유추해볼 때 그의 말을 들었던 이는 당시의 천황이었던 고다이고(後醍醐天皇, 1288~1339)로 추측된다.

불법의 근본이란게 텅비고 성스러운게 없다거나 수많은 양의 보시에 딱히 공덕이 없다던 양무제를 알현한 달마의 이야기에 더한 무게감(또는 무게없음의 감)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몹시 드라마틱한 대비는 여전히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일본어 원문 찾기를 시도해봤으나 아직 발견하지 못했고, 일전의 “어떤 불미스런 작은 사건 속의 a시인의 정체 밝히기”나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의 원작자 밝히기”처럼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묘하게도 이 문장들은 전부 영문과 번역본으로밖에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게 좀 의문이라면 의문이긴 하지만 라위쯔(라비치)의 <길은 멀어도>가 내게 그랬듯이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것임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리고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이 문장을 엊그제 나는 누군가에게 들려주었다. 그 네줄처럼 나는 이 또한 잊지 못할 것 같다.

 

 

+
카프라 번역본에는 ‘칼파스’라고 되어 있었지만
한글로 옮긴다면 겁(겁파)에 해당하는 ‘칼파’가 맞다.

아침의 쳇 베이커 : the thrill is gone ◎

아마 일주일쯤 되었나 보다.
지난 5,6년 사이 이렇게 잠을 뒤척인 적은 없었다.
따뜻한 우유도 마셨고, 심지어 과자도 먹었다.
하지만 제대로 잠들 수 없는 하루, 또 하루다.
어딘가 쓰리기만 할 뿐, 잠이 부족한 것도 잘 모르겠다.
그러다 뒤척이다 피치 못할 반가운 아침이 왔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