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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잊어버린 나무

el árbol que tú olvidaste
siempre se acuerda de ti,
y le pregunta a la noche
si serás o no feliz.

 

유팡키라는 성을 지닌 그 이름을 듣기 수십년 전부터
아타왈파는 내게 있어 가슴에 맺혀 있는 이름입니다.
오래도록 중남미의 역사에 매혹되었던 내게 있어 아타왈파는 가장 드라마틱한 상징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왕조가 몇대 이어지긴 했으나 그는 스페인에 정복당한 잉카의 마지막 왕이었지요.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인으로 죽어 부활을 꿈꾸었던 ‘the last inca’ 말입니다.
(그 무렵의 나는 잉카와 아즈테카의 이름없는 백성인양
세상에서 가장 싫은 나라가 스페인이었고 피사로와 코르테스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문명의 전달자, 또는 문명 그 자체였던 콘 티키 비라코차가 떠나간 자리,
콘도르의 꿈을 남긴 채 아타왈파가 날아가버린 그 땅에
엑토르 로베르또 차베로 아람부루(héctor roberto chavero aramburu)라는 긴 이름 대신
“먼 땅에서 와서 이야기하는(노래하는) 사람” ㅡ 아타왈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삶의 행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투박한 목소리와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기타 소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강렬한 악기가 되어 마음을 움직였지요.
당신이 그 나무일지 내가 잊혀진 나무일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그 나무에 잠깐 앉았다 날아가버린
“봄날의 작은 새”일지도 알 수 없지만
벚꽃이 활짝 핀 이 봄날에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 귀기울일 때 그의 노래는 보다 진실되게 들리고
나는 잊어버린 나무를 좀 더 잘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영 잃어버린 나무라고 할지라도요.
또 당신이 나라고 할지라도요.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는
늘 당신을 기억해요
당신이 행복한지 어떤지
밤에 묻지요……

 

 

 

/2018. 3. 28.

 

 

+
일부 잉카에게 ‘유빵끼(선조를 존경하는 사람)’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지만
마지막 왕은 그냥 ‘아따왈빠’입니다.

/srs. 2018. 3.

거북의 시간 화살의 시간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냐? 항하강 흐르는 물 내지 사방 넓은 바닷물이 많겠느냐? 너희들이 과거 오랜 세월 동안 나고 죽음에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이 많겠느냐?
/잡아함경 938. 누경(淚經)

 

짝이 없는 오직 한마리, 온종일 좁은 어항에 갇혀 홀로 지내는 삶이 어디서 왔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어항 씻고 먹이도 주지 않은 하루 스물 네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알 길이 없다. 그 하루가 쏜살처럼 지나갈지 거북이처럼 기어갈지도 모른다. 쏜 화살은 멈추어 있다고 했으니 그 모든 순간에 멈추어 귀막은 채 億劫을 사는 것인지도. 그가 자신의 집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 나도 나의 집에 대해 알고 있을 뿐이고, 그가 집 바깥에 대해 알지 못하는 꼭 그만큼 나도 비슷한 형편일 뿐이다. 그리하여 그의 번민이 유영한 시간 속을 나도 비슷하게 허우적대고 있으니 깨달음의 금빛 물에 심신을 담근 전설 속의 두 사람 보기란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깨어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는 4방이 각각 1유순(由旬)이나 되는 큰 돌산이 있다. 어떤 사람이 가시(迦尸)국에서 생산되는 겁패(劫貝 : 무명)로 백 년에 한 번씩 그 산을 스쳐 끊이지 않았을 때, 저 돌산이 마침내 다 닳는다 해도 1겁은 아직 끝나지 않는다. 비구야, 그 겁이란 이와 같이 길고 긴 세월이다.
/잡아함경 949. 산경(山經)

 

 

/2018. 3. 27.

 

이제는 흩어져버린 이름이지만

들은 이야기라 언제였던가는 잘 모르겠다. 원주에서 어떤 세미나가 있었고 네 살 많은 나의 누나 또한 발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세미나를 마치고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이○ 교수 발표 밖에 들을 게 없는 것 같다며 앞으로 해마다 참석했으면 한다고 했었단다. 준비도 물론 열심으로 했겠지만 통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던 까닭이리라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점에 대해서는 나도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그에 관한 소식을 들었다. 그는 너무도 많이 늙었고 그의 삶과 이름은 몇몇 사건들로 하여 많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그 훼손이라는 것은 생각하기 나름, 흩어진 것은 그의 이름일 뿐이고 어떤 부분들에 있어 나는 여전히 그의 지지자이다. 이도 저도 중간도 아닌 사람이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묘한 한 말씀 남기며 창작에의 열정을 피력한 ‘에너지 선생’을 생각해도 그렇다.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 해도 후회없는 그런 마음이라고나 할까.

스위프트에 모자라지 않는 풍자가로서의 놀라웠던 작품들이나 몹시 여린 감상으로 채워졌던 그의 시편들은 길지 않은 시간 속에서 빛을 발했고 그리고 사그라들었다. 좀 많이 오버한 적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 빛의 강렬함과 눈부심을 기억하기에 지금의 희미함 또한 가볍게 넘길 수는 없다.

오래 전 동생이 내게 준 그의 시집을 기억한다. 한시절 꽤 ‘적극적인 참여자’였던 동생이 두 권을 사서 하나 내게 줬던 것, 동생이 갖고 있던 책은 후에 누나에게 전해졌다. 기억나는 글 하나 없는데 그 시집의 제목은 그리움으로 나를 채운다.

一茶頃

오고 또 와도
서툰 꾀꼬리
우리 집 담장+

 

겨우 스물 두셋 시절 일다경에 대해 뭔가 끄적인 적 있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였지만 득함이 없는 시늉이었을 뿐,
그래서 굳이 ‘頃’자를 붙여 부끄러움을 되새기며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삶을 돌아본다

아들 셋과 딸 둘, 세 사람의 여인을 만나 함께 하였으나
닿는 것 스치는 것 모두 찔레꽃인양+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 삶
가진 것 없이 온통 잃어버린 삶이 열 일곱 글자로 오늘까지 남았네
초여름에 와서 한겨울로 떠난 사람
벼룩과 모기, 파리와 개구리에서도 삶을 읽어낸 사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순 다섯의 모진 꿈 너머로
새록새록 꿈꿀 자리 만들었는지
서툴고 서툰 길에서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사랑한 사람
패터슨++의 운전사처럼
一茶 할 적이면 또 一茶를 생각하네

 

열 일곱 글자
어렸던 눈물인가
잇사가 처음

 

 

+고바야시 잇사
++패터슨, 짐 자머쉬

유로파, 금단의 세계

오래 전 그는 얼음 바다의 작은 틈새로부터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잠시 살펴보고는 유로파를 떠났다.

 

그게 스페이스 오디세이 시리즈의 두 번 째였는지 세 번 째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그들 외계 지성체가 결코 가지 말라고 경고한 작은 별이 있었으니 바로 유로파다. 유로파는 갈릴레이가 발견한 목성의 큰 위성 4개 가운데 하나로 표면온도가 영하 171.15°C이다. 하지만 목성의 조석력에 의한 지열로 엄청난 두께의 얼음층 아래에는 바다가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갈라진 지표면으로 분출하는 물기둥이 관측되기도 했다. 그래서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그들이 닫힌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으리라 추론하기도 한다. 아써 클락의 소설 속에서 우주선 하나가 유로파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있긴 했으나 그곳을 금단의 세계로 규정한 지성체로부터 ‘처벌’ 받지는 않았다. 그리스 신화의 에이로피eυρώπη+로부터 이름붙여진 아득한 별 ㅡ 결코 허할 수는 없었지만 티코 분화구에 묻힌 채 300만년을  숨어 있었다는 tma-1처럼 수십 킬로미터의 철벽같은 얼음 아래서 누군가의 불시착을 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옛친구에게.

 

 

/2017. 12. 22.

 

 

+에우로페라고들 많이 표기하는데 확인 결과 실제 발음은 에이로피에 가까웠다.
+tma-1 : tycho magnetic anomaly. 달의 티코 분화구에서 발견된 1:4:9의 비율로 만들어진 검은색 석판.

시인 시대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판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변고인지 놀라운 작품들과 작자들이 부지기수로 발굴되고 있다. 역사는 이 대단한 발견의 시대를 시인 시대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상하고 우스운 시대, 언제 몰래몰래 열심히들 하셔서 단에 오른 것인지 영화배우 교수님도 시인, 연극배우도 시인, 인간문화재 하다가도 시인, 젊은 배우 엉덩이를 툭툭치며 연애를 꿈꾼다던 연출가께서는 오래전부터 시인에다 또 시인, 다들 하나같이 하루 아침에 시인이시다. 돈으로 시인하신 분들이 차라리 깔끔해 보이는 시대, 장미여관의 주인공이 진정 가슴 아픈 시대, 온갖 난삽이 넘쳐나는 찰스 부코스키가 참으로 멋져 보이는 시대다. 그런데 나보다도 부끄럼 많이 타는 오늘날의 이분들이 어찌하여 전업작가인양 시인하시게 되었는지 예술과 외설이 이토록 환상적으로 만날 줄을 나는 몰랐다. 언제나 푸른 네 빛 변하지 않는 그 빛의 사진작가도 시인, 내 몸을 내가 어찌 못한다는 명언을 남기신 정의의 신부님도 시인, 소설가도 시인, 시인들도 시인이긴 한데 이들 문인들은 좀 복잡하다. 어떤 시인은 시인도 하고 부인도 하고,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기도 하고, 결단코 시인할 수 없다고도 한다. 넌픽션과 픽션의 경계를 오묘하게 넘나드는 환상적인 ‘옆편’ 소설도 가끔은 구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깃발의 빛깔인지 이런 일에 피를 토하곤 하던 피켓들은 시인하시는 그분들의 경악스런 작품에 관해 웃을까 울을까 망설이며 미적대기만 한다) 나는 시인할 것도 없고 시인이라 할 뭣도 없고 그저 핏대 좀 세워 힘을 주고 이런 시……로 시작하는 단어들과 시에 관해서만 평생토록 아주 조금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지만 자세히 봐도 예쁘지 않고 오래 보아도 결코 사랑스럽지 않은 시인의 시대, 너라는 이름의 나도 그렇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저리게 누군가의 가슴을 때릴 순간의 꽃, 하지만 이런 시……는 이제 그만 찢어버리고 싶었다.

 

 

+
일부 문장은 이상, 이윤택, 나태주, 고은을 인용하거나 변용하였다.

 

 

조금 지저분한 이야기

尿酸/uric acid

퓨린 유도체로서 탄소, 산소, 수소, 질소 등으로 이루어진 유기화합물이다. 동물의 배설물에 많이 함유되어 있으며, 사람의 오줌에는 하루에 0.6~1.0g이 배출된다. 화학식 C5H4N4O3. 맛과 냄새가 없는 흰색 결정이며, 에탄올 에테르에는 녹지 않고, 물에는 약간 녹는다. 가열해도 융해하지 않고 400℃ 이상에서 분해한다./두산백과사전

 

 

요즘 말로 ‘극혐’이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혼자 쓰는 사무실 화장실이 정말이지 무척 지저분하다. 무지 오래된 부실 건물의 완벽하게 독립되지는 않은 공간에 불편한 방향으로 설치된 수세식 좌변기는 남자가 소변보는 것을 제외하고는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쓰기 힘들다. 본래도 많이 낡았던 화장실을 오래도록 남자들만 사용하다보니 아주 지저분해졌고 언제부터인가는 청소도 거의 포기한 상태로 지냈다.

그러다 나 혼자 사용한 게 또 2~3년 되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관리를 포기한 채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 있는 수십년 된 동굴이었다. 하지만 최근들어 가끔 친구가 들러 그 동굴을 사용하는  바람에 심히 민망했는데 어떻게 청소가 되기나 할지 엄두도 나질 않았다. 배설이란 그토록 지독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베이킹소다로 어설픈 시도를 한번 해봤으나 턱도 없었다. 뭔가 강력한 것이 있을까 해서 인터넷 뒤져 “요산 제거”하는 화장실 청소 용액을 구입해서 시도를 해봤지만 기별도 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싶어 그 청소 용액을 변기 안밖으로 뿌려놓고 다음날 와서 보니 뭔가 좀 희미하게나마 지워진 감이 있었다. 그래서 용액 부어놓고 한두 시간 지나서 닦고, 또 한참 있다 닦고…… 그것을 며칠 동안 했더니 이제는, 적어도 도기 부분은 놀랍게도 새것 비슷하게 깨끗해졌다. 거의 십년 이상 요산이 쌓여 굳어진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변기가 깨끗해진 것이다.

하지만 수십년 된 어떤 물건이나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각하거나 욕망하거나 움직이는 것들은 좀처럼 그렇게 되는 법이 없다. 스스로의 지저분함을 고백하기도 힘들고 고백한다 한들 씻어내기는 더욱 어렵다. 시인해서 시인 못합니다. 시인 하지 않고 시인합니다, 시인 하기 위해 시인 못합니다…… 누구처럼 시인합니다… 인지 뭔지 헷갈리지만 요즘 그 시인 때문에 업장 소멸인지 업장 휴폐업인지 기로를 오가는 시인과 감내하기 힘든 부인의 인생들이 있다.

옛시절 한때는 그분들 가운데 일부가 욕된 과거사로 하여 비난받고 묻히는가 싶더니, 자랑스런 과거사로 하여 훈장들을 달고 사는가 싶더니 요즘은 ‘미투’로 해서 줄줄이 이름들이 나온다. 사연이야 없겠냐만 변명과 억울함이 어찌 없겠냐만 그건 누구나 마찬가지. 나로 말하자면, 사랑에도 사랑의 행위에 관해서도 모두 낯선 이방인 같은 사람일 뿐이라 잘 알 수가 없다. 드뇌브도 바르도도 멋지다만 그 사람을 갖거나 지배하거나 유혹하거나 유혹당하거나 온갖 당치 않은 욕망들마저 실현하고 싶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최선 같은데 말처럼 쉽지는 않은 일, 수십년 세월이 기울어도 그만큼을 기울여도 결단코 지워지지 않을 요산보다 더 지독한 배설의 흔적들만  온통 가득하다, 미…… 투.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

<술고래>를 처음 봤을 때부터 헨리 치나스키를 무척 좋아했다. 바텐더와 돈을 나누는 장면을 마음에 들어했고, 결국 그녀와 함께 돌아간 술집의 시끌벅적한 풍경도 그랬다. 그리고 그가 어느 정도는 찰스 부코스키 자신일 것이라고 기대도 했다. 시집 <사랑에 대하여>는  매우 사실적인만큼 노골적이었다. 또 터무니없는 허세를 펼쳐보이다가도 가끔은 나름의 방식으로 기품도 있었다. 그게 시인지 아니면 짧은 이야기인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은 글들이지만 쟝르를 정의하는 것이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닌 것 같고 스토리가 있어 술술 잘 넘어간다. 나로서는 아주 얄팍한(?) 책,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이 먼저 눈에 들어와서 읽었고, 거기 수록된 “어려운 시절“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집을 칠한 두 사람의 페인트공과의 조우에 관한 소소한 이야기였다.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에 관해서 나같은 이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의 시는 글쓰기에 대한 부담을 덜어준다는 면에서 고무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글을 쓰는 것은 재능이고 능력이니 어쩔 수 없지만 온갖 크고 작은 이야기를 이 흐릿한 눈으로도 끄적일 수는 있기에. 내 짧은 소감에 “위대한 작가가 되는 법”은 한마디로 ‘개뿔'(폄하의 의미는 아니다), 부코스키의 세계를 간략히 서술하자면 ‘깨달음이  없는 이의 하찮은(결코 폄하의 의미는 아니다!) 깨달음’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끌어내린 블라인드”의 한 줄은 나의 이야기처럼도 들린다. 나는 다만 조잡할 뿐이지만.

 

 

내가 당신에게서 좋아하는 점은
그녀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조잡하다는 거야 ㅡ

/끌어내린 블라인드, 찰스 부코스키

 

 

오멜라스와 함께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아니고 책에 대해 아는 바도 별로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그녀의 책을 펼치면 몇줄을 읽지도 못한 채 나는  난독증에 빠지곤 했다. 어쩌면 건조한 묘사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 모자람이 비할 수 없이 확실한 원인일 것이다. 어슐러 르 귄의 모든 작품 가운데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당연히, 그리고 운좋게도 <오멜라스를 떠나가는 사람들>이었다. 번역한 분으로부터 직접 원고를 받아 보았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 그 글이 눈에 잘 들어오질 않았고 번역본을 받은 때로부터 좀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길지도 않은 그 글을 읽었다. <어둠의 왼손>이 여전히 내 책꽂이에 있지만 나는 그것을 다 읽지 못했고, 단편집에 관해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오멜라스에 대해 가끔 생각한다. 우리의 현실에 비해 너무 많은 고결함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던,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내 소감에 대해 희미한 죄스러움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동조하기는 어려운 어떤 느낌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오멜라스를 떠난 사람들의 세상에 그녀의 영혼이 함께하기를 나는 기원한다. 그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행복을 대신하여 오멜라스에서 홀로 고초를  겪고 있는 비천한 한 소년 곁에 오래도록 머물렀기를 나는 기원한다. 그것은 터무니없는 의심에 싸인 나를 더욱 부끄럽게 할 것이고, 그녀를 조금 더 빛나게 할 것이다.

 

“그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나는 그곳을 결코 제대로 묘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곳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있는 것 같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은……”/어슐러 르 귄.

 

 

ursula kroeber le guin, 1929. 10. 21~2018. 1. 22.

 

 


/the ones who walk away
‘오멜라스’로부터는 아닌지 모르지만…

 

나는 다만……

온종일 비가 왔었다. 돌아오는 길, 길모퉁이 부식가게가 열려있지 않기를 바랬다. 하지만 나는 겉옷 주머니에 천원짜리 몇장을 넣어두고 밖으로 나섰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부식가게에 들러는 날이 오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생활력 강해 보이는 아주머니지만 이제는 부식가게라는 것이 추억 속의 거리에나 있는 법이어서 장사가 잘 되지는 않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엄동설한의 좁은 골목에서 김장일을 대신하기도 하고 야채 트럭을 운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은 뽀얗게 김이 서린 창 안쪽에서 대학생쯤 되어보이는 아들과 마주 앉아 서로서로 기운을 북돋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 억척같은 몸과 마음도 할 게 있어야 할 수 있는 법, 손님이 없고 일이 없을 때 아주머니는 좁은 가게 안에서 야채를 다듬으며 텔레비젼을 보고 있곤 하지만 지나가는 객일 뿐인 나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로 해서 마주치는 눈길이 조금 무섭다. 무서워서 무서운 게 아니라는 건 한산한 시장의 어둑한 길을 걸어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어떤 느낌이다. 여전히 비는 그대로 쏟아지는데 부식가게 앞에는 비닐까지 드리운 채 불이 켜져 있었고 어묵 냄비 위로 하얀 김이 솟아 오르고 있었다. 어묵 달라고 부르는 것은 나지만  갯수를 정하는 것은 내 권리가 아니다. 대개는 3천원어치만 가져가라고 하고 그러면 나는 3천원을 드린다. 가끔은 눈치껏 1, 2천원 더 쓰기도 하는데 그때는 떨이를 하기 위함이고 어떤 때는 내가 하나 남은 어묵을 덤으로 받기도 한다. 주머니에 넣어둔 돈은 까마득히 잊고 가방에서 3천원 꺼내느라 잠깐 사이 비도 좀 맞았다. 따뜻한 국물이 생각난 것도 아니고, 달리 바라는 것은 없었다. 어묵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속절없이 타고 있는 커다란 냄비 아래 가스불을 어느 하루 저녁 잠깐이라도 끄고 싶었을 뿐이다.

 

/2018. 1.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