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잊었던 장소, 잊었던 그녀

엊그제, 갑자기 도서관엘 가고 싶어졌다. 적어도 두 계절 이상은 까마득히 잊고 지냈던 곳인데 갑자기 금단현상이라도 찾아온양 가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우리 안에 있고 그 밖은, 도서관은 자유가 넘쳐나는 잊혀진 세계 같았다.

여섯시가 되자마자 마땅히 빌릴 책도 생각지 않은 채 무작정 도서관을 향했다. 그날 도서관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을 홈페이지에서 확인했음에도 그랬다. 장서 정리를 위해서 3일간 휴관하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이 첫날, 나는 어둠이 깔린 도서관 주변을 빙빙 돌다 고양이가 자리를 잡고 있는 벤치 옆에 잠시 앉았다 빈 손으로 돌아왔다.

어제는 재개관을 기다리며 몇권의 대출 리스트를 작성한 후 도서관 바로 옆 공원길을 잠시 산책하다 왔다. 그리고 오늘은 여섯시까지 참을 수가 없어 네시쯤에 자리를 비우고 도서관을 갔다. 책 몇권을 찾아서 무인대출기에 카드를 읽혔으나 비밀번호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데스크에 가서 비밀번호를 변경하고 책을 빌렸다.

민음사에서 나온 신간 두 권을 빌렸는데 책 장정이 참으로 불만스럽다. 이 유력한 출판사는 읽히는 책을 찍는 것이 아니라 카피하기 곤란한 형태의 책을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듯 세로로 무지 홀쭉하여 펼치기 힘든 형태로 책을 만들고 있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매번, 욕이 나올 만큼 불만스럽다. 정말이지 두 손으로 책을 잡지 않으면 읽기가 어려운 형태다. 어쩌면 책을 편히 읽기 위해서 카피라는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빌린 책 가운데는 <그 여자의 재즈 일기>가 있다. <그 남자의 재즈 일기>를 꽤 여러 번 읽었던 사람인지라 작년 언젠가도 이 책을 빌리려 애를 썼지만 (대출 가능하다고 나와 있음에도) 음악 섹션에서 그녀의 일기를 찾을 수가 없어 직원에게 문의도 했었다. 그때 여직원의 말인즉, 책이 이 서가 어딘가에 있는 것은 맞지만 아마도 전혀 다른 곳에 꽂혀 있는 듯 싶다. 언젠가 찾으면 연락 드리겠다고 했으나 나는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제까지의 3일 동안 도서 정리를 위해 휴관을 했다는 점에 근거하여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일기를 찾아 보았고 마침내 제자리에서 그녀의 일기장을 발견하였다. 하지만 기쁨은 거기까지, 몇 페이지 살펴보니 지나라는 이름을 지닌 그녀의 일기를 더 알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무슨 근거가 있었던 것은 아니어도 이러한 결말을 맞게 되리라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펼치기 힘든 책 가운데 하나와 또다른 음악책은 내 잠자리를 즐겁게 해줄 것 같다. 뭔지 모를 허기를 책으로 때우고 도서관 자주 오가며 걷기라도 열심히 해야겠다. 그래야 쓰겠고 쓸 것 같다.

지금, 그리고 여기

어느 날엔가 바빌론으로 가는 길목에 덩그러니 문 하나가 생겼다. 하나 둘 사람들은 점점 그 문을 통해 바빌론으로 들어가길 좋아했다. 이런저런 구경거리도 있고 목적지에 아주 조금 더 빨리 갈 수도 있었다. 문앞에 가게도 차리고 좌판도 차리고 살림도 차렸다. 조금 돌아가면 되는데 언제부터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으로만 들어가길 좋아했다. 오가는 이 모두가 비슷한 장사꾼들을 봤고 같은 소식을 들었고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비슷한 반응들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다수는 각기 특별한 사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누구의 것도 아닌데 문의 주인들은 거대해진 관문 너머의 풍경을 지옥의 모습으로 치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행인들에겐 그들이 그 지옥의 박해받는 유일한 주인공이라는 것을 은근히 알려주고 싶어 했다. 오웰의 텔레스크린엔 감시와 처벌이 따랐지만 그들은 스스로 원하고 온갖 부정과 불의와 모순에 분개하는 무대 위에서 오직 잘못은 이 문이 보여준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을 친절하게도 알려줬다. 침과 욕망을 섞어 만들어낸 허영의 집에서 모두가 정의로 불을 태우는가 싶지만 실은 헛된 정념이 끓어오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이는 많지 않았고 복두장이의 비밀을 말해주는 이는 더욱 없었다.

바빌론의 문 너머엔 온갖 좌판들이 펼쳐져 있고 광대들과 상인들이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소식과 웃음을 팔고 있었다. 문의 주인들은 순서를 만들고 점수를 매기고 그리고 절대 벗어날 수 없는 비밀스런 족쇄들을 끊임없이 만들어내었다. 주인들은 지옥처럼 보이는 무대 저 편에서 그들의 눈물로 진주를 만들어낸다. 그들이 더 많이 울고 더 많이 욕망하고 더 많이 분노할수록 그들의 비밀스런 보석상자는 더 거대해지고 무대 위의 고통은 더 적나라해진다. 오멜라스의 어떤 사람들처럼 그곳을 떠나거나 멀리하고 있을 뿐 메이드 인 차이나를 떠나 살 수 없듯 그들을 떠나 살기도 쉽지 않다. 스스로 눈먼 노예가 되었으나 눈 번뜩이며 홀로 깨어 있는 투사인줄 알고 있으니 끓어오르는 분노와 욕망을 금으로 제련하는 비의는 그 뒷편 숨어 있는 주인들의 것일 뿐이었다. 더 높아지고 더 빛나는 금강의 세계가 당신보다 높은 곳을 보여주면서 그곳에 살지 못하는 당신을 나락이라 하였다.

조금 돌아가면 되는데 거기 돌아간 그만큼 조금 달리 보이는 풍경이 있는데 그 문으로 가지 않는 사람은 이제 별로 없다. 결코 주인으로 불린 적 없는 주인들이 은밀한 폭력을 휘두르는 곳, 온갖 권세와 타락이 그 반대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바빌론의 문 저 너머 그곳이 어디인지 궁금하다면, 블랙홀의 내부가 어떤 형상인지 알고 싶길 원한다면 또한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다. 없어도 될 문이 없어지기를 원한다면.

 

/2016. 10. 19.

la petite fille de la mer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박용래

 

아마도 내가 열일곱, 열여덟 때였을 것이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해상 일기예보를 전할 때 이 곡이 나왔다.

 

“이즈하라, 소나기 / 눈.”

 

나는 방에 앉은 채 어딘지 모를 먼 바다를 떠도는 것 같았고
이국의 낯선 지명이 겨울 바다 너머로 따스하게 들렸다.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내 가슴을 적시던
물방울 같은 일렉트릭 피아노의 느낌을 잊은 적은 없었다.
결코 알지 못한 바다의 작은 소녀를.

 

 

+이 곡은 (좀 엉뚱할지도 모르지만) stranger than fiction에도 나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경우처럼 상당히 특이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2015. 10. 16. 1:05

 

peace of……

내게 워터보이즈란 재미없는 이름을 알게 해준 첫번째 노래였다.
인트로는 조금 식상한 느낌이었지만
디자이어 앨범을 연상케 하는 집시풍의 바이올린에
마이크 스콧이 길게 길게 이어가며 노래하는 섬의 이름은
알지 못할 섬의 역사와 그 속에 얽혀있을 숱한 사연인양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 여운을 내게 남겼다.
내 마음에 무엇이 맺혀 풍파를 잠들게 하고 싶은 것인지
가끔은 아이오나를 내 이름처럼 기도처럼
닿지 못하거나 풀리지 않는 마음의 한 조각처럼 여기며
이 노랠 듣곤 했다.

 

 

/peace of iona, waterboys

 

에라티카 늬우스

“이어 ㅇㅇㅇ시인이 무대에 올라 윤동주 시를 낭송했다. 제목은…….”
(가을을 타고 흐르는 시 낭만을 깨우다, dy일보)

“민족시인 윤동주의 ‘ㅇㅇㅇㅇㅇㅇ’이라는 시가 있다.
세월의 가을이 아닌 인생의 가을을 노래한 것이어서 계절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시다.”
(ㄱㄱ신문)

 

모친 모시고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다. 폰을 들여다보다가 무엇이 궁금했던지 어느 친구분께서 보냈다는 카톡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핸들을 잡고 있던 나는 그분이 보내왔다는 윤동주의 시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겨우 두어 줄을 읽었는데 나는 중단을 시키고 제목부터 물었다. 시작 부분만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게 윤동주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연한 이유의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시를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제목의 시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그게 내가 여태 알지 못한 그의 시라고 한다면 좀 떨어지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습작의 느낌이 풍기는. 그래서 나는 십중팔구,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씀을 드렸고 모친도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늘 조금  자세히 찾아봤더니 역시나 그것은 윤동주의 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과 허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 있는 듯, 숱한 기사와 블로그에 너무도 자연스레 윤동주의 시로 소개되고 인용되고 있었다. 이 무슨 첨단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의 구현인지 기존 시인의 시와 그 시를 (윤동주의 작품으로 치부하며) 낭송회도 이루어지는 상황이었고, 이 시의 ‘진짜’ 지은이에 관한 작은 기사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일부 신문의 칼럼이나 기사에서조차도 이 시를 윤동주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인용하고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불명의 글들이 인터넷이나 sns를 떠돌며 지은이가 잘못 알려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와전이라는 것이 ‘종이신문’의 영역에서까지 검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다 심각한 일이다. 한때 널리 읽혀졌던 스티브 잡스의 유언이라는 글처럼 그것이 터무니없는 와전이었음에도 그것을 걸러낼 ‘필터’가 없었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오작동은 경기에서 제주까지, 전국 팔도에 골고루 걸쳐 있었다.

게다가 이 시가 인터넷을 떠돌기 이전부터 (다른 어떤 분은 이 시를 그리도 사랑했던지) 원작자의 글을 마음대로 자기 이름으로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해서 현재의 제목 또한 지은이의 원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것을 ‘윤동주의 시’로 인용하며 칼럼을 쓴 분들이나 남의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분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법으로 치자면 빛나던 옛시절의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들과 맞짱을 뜰만한 최상위 수준인 듯 싶다.

덧붙여 “이 시가 윤동주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그만큼 작품이 우수하다는 증거”라는 어떤 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지은이에게는 자신의 작품에 관한 소중한 권리가 있는 만큼 그에 관한 의혹 역시 명백하게 해소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황당한 저작권 덤태기(윤동주)와 침탈(원작자)에 관해 누가 웃고 누가 울어야 할지 조금은 헷갈리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은 이와 같은 와전(물론 지은이에 의한 의도적인 와전)이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깊이와 진위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사연들이 자신과 당신의 모습을 전혀 다른 무엇인가로 맞바꾸며 엉터리 같은 못난 세계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무슨 빌어먹을 음모이론도 아닌데 진실은 저 너머(또는 이 링크 너머에~)에 있고 누군가는 자신이 결코 쓰지 않은 시의 떨떠름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잘못 빌린 시집 外

프로스트 시집을 빌려 오려 했는데 알고보니 ‘미국 대표시선’으로 지은이는 ‘프로스트 外…’였습니다. 초겨울의 공원 벤치에서 잠시 책을 펼쳤는데 포우가 나와서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늘 列의 外인 사람이다 보니 外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좀 더 읽어보니 순간의 실망보다는 처음 보는 이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월러스 스티븐즈는 선시 같은 느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에즈라 파운드의 삶이 두 줄로 축약되어 실려 있었고 하와이에 사는 재미교포 시인의 결혼 이민사에 관한 시에도 눈이 갔습니다. 잘못 빌린 시집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아주 조금 엿본 것이겠지요. 그럼 얼마나 많은 잘못들이 내 뒷전에 내 안에 박혀 있었는지 다시 또 생각합니다. 잘못 간 길, 잘못 쓴 시, 내 짧은 걸음들이 만들어낸 숱한 잘못질들에서 그런 이적이 있기를 바랄 수는 없겠으나 에이드리엔 리치의 이야기는 적이 위로가 되었지요. 당신이 멈춰선 그곳은 당신만큼 헐벗고 읽을 만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에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어쩌면 가지 않았을 길,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는 없지만++ 짙은 청바지 같은 표지를 지닌 잘못 빌린 시집이 그 바깥의 내게 말해주었어요.

 

+헌사, 에이드리엔 리치.
++프로스트.
/2015.12.06. 23:47

 

데들리 시리어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시련의 연속, 처음 봤을 적의 답답한 느낌 때문인지 그 영화를 다시 보고픈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 답답함이 무지무지 생각이 나서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 자신 시리어스 맨의 상태가 되었는가 싶었다.

스탠리 엘린의 단편에 나오는 ‘애플비’처럼 ‘질서바른 세계’를 사랑하는 평범한 물리학 교수인 래리 고프닉에게 연이은 시련이 닥친다. 테뉴어 트랙 심사를 앞두고 음해의 투서가 날아오고, 한국인 학부모는 학점 매수를 시도하고, 백수인 동생 아써는 도박과 여타의 범죄들로 골치를 썩인다. 아들은 대마초 피우기에 여념이 없고 딸은 코 수술을 원하는데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내가 그도 잘 아는 이와 살기 위해 이혼을 요구하며 고프닉을 모텔로 쫓아내는 대목에서였다. 레코드 회사에서는 돈을 독촉하는 연락이 쉴새없이 오고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상담하고 싶은데 랍비를 만나기는 너무 어렵고, 그 와중에 안테나 고치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나체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이웃 여인을 발견하고서는……

그다지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주인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련을 당하는 래리 고프닉의 피곤한 나날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보일 때 갑작스레 토네이도가 불어닥치고 검진을 했던 의사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 짐작을 할 뿐, 하지만 알 수는 없다. 고양이는 죽었거나 또는 살아 가거나.

영화 속에는 세 사람의 랍비가 등장하는데 주차장의 비유(?)를 설파하던 젊은 랍비(상좌스님)와 어떤 치과 환자의 이 안쪽에 새겨진 글자들의 비밀에 관해 들려주던 랍비 나크너(주지스님), 그리고 랍비 마르샥(조실스님)의 제퍼슨 에어플레인 이야기는 사고의 깊이와 폭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 흥미로웠다.

그리고 생각은 단출한 주석을 좋아했다는 랍비 라쉬의 경구를 인용한 영화의 첫 화면으로 돌아간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너무도 지당한 말씀인데 그 단순함을 받아들이기에 영화를 보는 이는 그 어떤 해결의 능력도 없으면서 실없이 시리어스하기만 했다. ‘멘타쿨루스’라는 이름을 지닌 아써의 복잡한 노트처럼.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까?”

이루어진 적 없는 그의 욕망이 담긴 꿈에서, 그리고 래리 고프닉이 결국 만나보지 못한 랍비 마르샥이 성인식을 치룬 그의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가 어떤 이의 허공을 삐라처럼 붉게 흩날렸다.

 

When the truth is found to be lies
And all the hope within you dies
Then what?
Grace Slick, Marty Balin, Paul Kantner Jorma(Kaukonen)
These are the members of Airplane!
/Rabbi Marshak

 

/Rabbi Marshak Scene.

 

/Mrs. Samsky Scene에 나른하게 깔렸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