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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못한 꿈

냉동여행 Frozen Journey, 필립 K. 딕

 

▲ 그의 지난날
그의 이름은 빅터 케밍스다. 어릴 적에 도르키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가 비둘기를 잡아먹도록 부추겼다. 네 살 때는 거미줄에 걸린 벌을 도와주려다 벌에게 쏘였으며, 마틴이라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화가의 친필서명이 적힌 꽤 값어치 있는 포스터 한 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보관했는지 아니면 찢어져버렸는지 불분명하다.

 

▲ 그의 오늘
새로운 행성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장거리 우주여행에 나섰으나 냉동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여 희미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깨어서 생활할 만큼의 충분한 산소와 식량이 없는 까닭에 우주선의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며 괴로워 하고 새행성에 도착할 가까운 미래의 환상을 접하며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또 절망한다.

 

▲ 그의 내일
10년간의 끔찍스런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
또는 새로운 행성에서의 극적이고도 꿈같은 재회?

 
ARRIVE  ARRIVE3

 
필립 K. 딕 하면 영화의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블레이드 러너>(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토털 리콜>(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임포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 첵>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까닭이다.(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냉동여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슐러 르 귄과 더불어 주류(?) 문학계에서도 거론되곤 하는 몇 안되는 SF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르 귄의 경우와 달리 그는 보다 ‘통상적인’ 형태를 취하곤 한다.

 

내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어. 내 안에 말이야.
통증의 쓰라림. 무가치하다는 느낌.

 

애초에 그는 목표 행성까지 냉동수면 상태로 지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 여행 도중에 일부 의식이 깨어나버렸다. 불행히도 우주선에는 인간이 깨어서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주선의 컴퓨터는 그를 수면 내지 가수면 상태로 유지하고자 애를 쓴다…..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기억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곤 하지만 단 한번도 행복한 기억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우주선은 그에게 새 행성에 도착하는 시점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어 그에게 안도감을 주려 하지만 그마저도 번번이 그가 눈치채어버려 실패하곤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잘못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태를 지속한다. 우주선 컴퓨터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격자처럼 엮어서 하나로 통합해놓은” 상태다.

우주선은 수많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로봇의사를 보내고, 새 행성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곤 하지만 그의 예민하고 집요한 의식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제목을 살짝 고쳐서 이야기 하자면 안드로이드(우주선)는 끊임없이 전기양의 꿈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양의 꿈을 원했다.

 

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를 다시 영원히 냉동시켜 달라고 하자.
난 죄의식에 가득 찬 인간,
파괴할 줄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우주선은 결국 그의 아내를 호출하여 그가 새 행성에서 옛 아내를 다시 만나서 자신의 심적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가상현실과 비슷한 형태로 새 행성에 도착해서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다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그것이 꿈속의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각성했던 그로서는 마틴이 새 행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현실의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냉동여행’도 그렇게 애매하게 끝을 맺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단편에 관해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빅터 케밍스처럼 정확한 해답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진정 깨어나서 아내 마틴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가짜이며,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마치 장주의 호접몽처럼 혼돈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 것이고, 딕 자신의 다른 단편들에서처럼 자신이 과연 자기 자신인지, 현재가 그대로 현실인지에 대해 극심한 혼란에 부딪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한 인간의 모조품임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 임포스터의 정교한 로봇처럼 꿈임을 알지 못하는 꿈이 무한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블랙홀의 내부가 궁금하다면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된다던 어떤 이의 한줄처럼.

 

단편의 마지막은 어쩐지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는 포스터가 현실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찢어졌는지가 열쇠인데 그는 끝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서 혼란스럽게 한다. ‘플레이보이’를 통해 <냉동여행>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작품이 자신의 단편집에 실렸을 때의 제목은 <조만간 나는 도착하기를 희망한다>이라고 한다. 나도 진심으로 그랬으면 싶었다.

그리고 여기 이 단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화가 있다. 참으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짧고도 길고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이야기의 모든 것이다.
케밍스의 고통은 끔찍스럽지만 도착지에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마틴의 말은 나를 부럽게 한다.

 

“…이것이 현실이면 좋을 텐데 말이오.”
마틴이 말했다.
“전 이 일이 당신에게 현실이 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겠어요.”

i hope i shall arrive soon……

 

 

/2006. 3. 18.

 

subconscious-lee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궁금해하는 기억 속의 많은 것들을 지난 수십년간 pc통신/인터넷/모바일폰을 통해 찾아내었다. 무척 반가운 것들도 꽤 있었지만 이들의 복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은 여기 합당치 않겠지만, 알지 못함과 찾을 수 없음이 때로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전 오래 전에 봤던 어떤 영화의 장면이 문득 생각났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대목으로, 쓰레기더미가 쌓인 바람 부는 섬(?) 같은 곳에서 주인공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휘날리며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단지 내 기억일 뿐, 실제로 이런 장면이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영화 속의 애니메이션은 그만큼 극단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어딘지 <더 월>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유치함이 뒤섞인 어린이용 모험영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무척 좋았고 무엇인가 멋진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이 오래 전에 봤던 것이라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어렵사리 찾아내어 오늘 그 영화에 관해 ‘읽은’ 바로는 알랭 들롱이 애니메이션 작가로 나왔고 마치 에셔의 그림에서처럼 만화의 세계를 들락거리며 일어나는 사건들을 줄거리로 하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은 <패시지>였다.

그리고 subconscious-lee+, 나는 최근에 이 영화가 갑작스레 생각난데는 나 안의 어떤 숨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retrospection(회고)’인지 ‘tautology(유어반복)’인지 아니면 조금 서글픈 이유이거나 합리화일지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고초를 겪을 때 ㅡ.

 

le passage, the passage, 1986 / alain delong

 

+
lee konitz

채워지지 않는 허기 : 고완형의 이빨

고완 형은 날마다 술을 먹는다.
고완 형의 이빨은 동훈 형보다도 더 나쁘다.
아직도 창창한 청춘일 뿐이었는데
그의 앞니가 몇이나 남아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무엇이 험한 그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는지
부끄러움보다 더한 무엇이 그를 당당하게 만들었는지
망가진 모습 그대로 썬글라스를 끼고
술마시며 술주정처럼 노래를 한다.
무엇이 포크 음악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고
어떤 것이 펑크인지 애써 나눌 필요도 없다.
공장+의 담벼락에서 첫 키스를 했던 곳,
불길 속에 도끼날을 제련하던 곳,
나의 살던 고향인양 오래된 꿈인양
고완 형이 흥청망청 노래하던 맥콜의 지저분한 옛 동네에
귀 기울인다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먼 산울림, 옛 서부영화 속의 이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게 전혀 다른 모습의 셰인이 다가왔다. 클래쉬 공연장에서 귀를 물어뜯겨 데뷔도 하기 전에 매스컴을 탔던 사람(가해자는 여성 펑크락 그룹의 베이시스트였다~), 노래보다 그 사람의 이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 하지만 엉망진창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하게 노래하던 사람……

오죽하면 그가 이 전체를 새로 했다는 것이 뉴스로 나왔고 그의 이를 소재로 한 노래까지 있다. 밥 딜런은 앞니 몇개 빠진 사람이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all along the watch tower를 멋지게 불렀지만 그의 이는 멀쩡하였고 멀쩡한 듯 노래하지만 어딘가 그런 느낌이 있는 셰인 맥고완은 그 반대다.

왜 그렇게까지 엉망이 되었고 그토록 방치했었는지에 관해선 잘 모른다. 다만 그가 굳이 그걸 숨기려고도 고치려고도 애쓰지 않았음에서 괴롭지만 묘한 호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cannibal1

 

무성의하게 툭툭 내뱉는 듯한 창법에 포크와 펑크라는 얼핏 매우 이질적인 두 쟝르를 오가는 음악도 특이하다. 하지만 우리가 펑크 음악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섹스 피스톨즈가 그 출발점에서부터 일정 부분 패션과 연계되었듯) 어쩌면 ‘이미지’로 이루어진 것이고 현실 속의 펑크 음악이란 바로 셰인 맥고완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건달이거나 구제불능의 ‘꼴통’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기말 예술가의 이미지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술주정뱅이처럼, 아니 술주정뱅이의 모습 그대로 아무렇게나 노래하지만 나는 그의 노래와 노래하는 모습에서 어떤 진정성을 느끼곤 한다. dirty old town이 마음으로부터 나를 울렸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셰인 맥고완의 이를 바라보는 느낌은 동훈형의 이를 바라보던 내 느낌과 좀 비슷하다. 누군가의 상처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멍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한다. pogues ㅡ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生을 향한 ‘엄청난 허기’++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셰인 맥고완과 함께 술을’++, 그의 술주정 같은 노래는 마음으로부터 떠나는 법이 없을 것이다. 나의 살던 옛 동네가 그다지 더티하게 느껴지지 않거나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
글공장이거나 이공장, 동훈형의 이빨.
++
셰인 맥고완에 관한 다큐멘터리.
+++
클래쉬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서 조 스트러머와 같이 노래하기도 했고, 짧은 한때는 조 스트러머 자신이 셰인 맥고완을 대신하여 포그스의 보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6. 1. 15.

 

 

dirty old town / pogues

 

i met my love by the gas works wall
dreamed a dream by the old canal
kissed a girl by the factory wall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clouds a drifting across the moon
cats a prowling on their beat
spring’s a girl in the street at night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heard a siren from the docks
saw a train set the night on fire
smelled the spring on the smoky wind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i’m going to make me a good sharp axe
shining steel tempered in the fire
will chop you down like an old dead tree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i met my love by the gas works wall
dreamed a dream by the old canal
kissed a girl by the factory wall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yokoversesara

Yoko vs. Sara

 

존 레논이나 밥 딜런에 대해 알고 싶은 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이 언제 무엇을 했고 어떤 사생활을 가졌고 어떤 미발표곡이 있고…… 처럼 깨알같은 지식이 아니라 어떤 느낌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에겐 뮤즈가 되어준 아내들이 있었고 그들의 이름이 들어간, 내가 오래도록 좋아해온 두 노래가 있어 개인적인 느낌으로 비교를 해봤다.

Oh Yoko!는 1971년 9월에 발매된 <imagine>의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Sara는 1976년 1월에 나온 <Desire>의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두 앨범 모두 자신의 얼굴을 커버로 하고 있는데 존 레논의 이미지는 몽상적이고 밥 딜런은 집시(‘래글태글 집시’는 아니지만 그 노래 가사처럼 영주의 부인이 달아나는 사건이 날 것 같기는 하다)처럼 보인다. <imagine>의 뒷면엔 앨범 타이틀과 연결되는 “imagine the clouds dripping dig a hole in your garden to put them in”이라는 오노 요코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Desire>의 뒷면엔 꽤 많은 사진들이 있는데 대개는 딜런과 뮤지션들의 것이고 The Empress라고 적힌 타로 카드(‘fertility’를 상징한다고 한다)가 Sara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Imagine, 기본, 1 / 9   

 

새라는 이국적이면서도 비장하고 오 요코는 화사한 애조를 띠고 있는데 두 곡 모두 그들이 직접 연주하는 하모니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열기 가득한 폭풍의 고요한 정점인지(A messenger sent me in a tropical storm) 딜런의 하모니카는 바이올린과 더불어 애조띤 ㅡ 그러나 어딘지 공허한 ㅡ 정열을 보여주는 반면 존 레논의 하모니카는 인적 끊어진 거리의 풍경처럼 쓸쓸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그녀와 함께 하겠노라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연주에 있어 딜런에서는 스칼렛 리베라((딜런 자신이 길거리에서 캐스팅했다)의 바이올린이 빛을 발했다면 존 레논에겐 니키 홉킨스(She’s a rainbow의 모짜르트 피아노!)가 들려주는 섬세한 피아노의 선율이 있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새라의 경우 ‘radiant jewel, mystical wife’, ‘glamorous nymph with an arrow and bow’ 같은 식의 찬양이나 ‘Loving you is the one thing i’ll never regret’, ‘You must forgive me my unworthiness’ 등등 연애시절에나 가능할 것 같은 과장된 표현들이 눈에 띄는 반면, oh yoko의 가사는 매우 단출한 방식으로 환상(In the middle of cloud/dream I call your name)에서 현실을 오가는데 ‘In the middle of shave i call your name’ 같은 대목에서는 ‘생활밀착형(!)’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딜런의 가사는 떠나려는 새라를 붙들려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레논은 그 점에서 매우 편안하고 여유롭다. 딜런의 정열적이고도 비장한 찬양이 마지막 애원인지 한 발을 빼려는 소극적인 액션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레논의 경우엔 그의 다른 노래처럼 ‘Grow old me’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Oh Yoko는 어딘지 미숙하고 몹시 여린 사춘기적인 감성을 느끼게 하지만 그만큼 순수한 반면, Sara는 절절함이 넘쳐나지만 그의 하소연이 설령 거짓이래도 넘어갈만큼 능란하고 노회하다.

<롤링 썬더 리뷰> 라이브에서 딜런은 분인지 치약인지 광대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나와서 새라를 찾았고(이유야 어쨌든 심금을 울렸다), 존 레논은 그의 미들 네임을 ‘오노’로 바꿨다. <mind game>의 커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노 요코는 그의 삶에 있어 ‘사건의 지평선’이었다. 하지만 새라를 노래한 얼마 뒤 딜런은 새라 로운즈, 새라 딜런이었던 셜리 말린 노진스키와 헤어졌고(1977년) 오 요코를 노래한 10년 뒤 존 레논은 세상을 떠났다.(1980년)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만 내 느낌에 요코가 거기에 더 가까운 듯 싶고(새라는 라이브에서 좀 더 그렇게 들린다), 노래로는 새라를 더 즐겨 듣는다. 일편단심이 부족한 사람이라 그런지, 요코보다는 새라가 좀 더 나이를 먹은 이의 노래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라가 더 편안하고 멋지게 들린다. 그럼에도 어쩌다 하모니카 소리를 생각하면 그 아련한 곡조가 여전히 가슴에 닿는다. 등돌린 세상에서 My love will turn you on이라던.

 

 

/2016. 9. 1.

 

 


/oh! yoko

 


/Sara

 

+우측 상단 플레이 버튼 누르면 sara를 들을 수 있다.

 

 

r. k. b. ◎

rkb+2

 

얼마 전에 처음으로 본 사진 ㅡ 내게 청춘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심하지만 주민등록증상의) 청춘 시절에 나를 매혹시켰던 어떤 이의 어릴 적 사진이다. 침팬지와 나란히 앉아서 즐거워 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음악 보다는 사람 그 자체, 어이없이 무너져버린 정신과 삶이 그때는 어찌 그리도 마음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을 떠난 그는 칩거하며 그림을 그리고 간단한 가구들을 직접 만들고 학창시절의 전공 분야로 돌아간듯 (책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 미술사에 대한 글을 꾸준히 썼다고 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한 옛 음악들을 그저 시끄럽다고 여겼으며, 지나가버린 시간들과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70년대 초, 대중음악계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50마일(80km 가량)을 걸어서 어머니의 집에 당도했고, 이후 그는 과거가 없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떠난 것이다.

엊그제 우연히 본 사진, 이 환한 표정의 아이 얼굴을 보니 새삼 마음이 좀 쓰렸다. 그가 머리숱 없는 뚱뚱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 헐렁한 옷을 입고 비닐 봉지를 든 채 거리를 거닐던 모습을 처음 봤었던 1998년 무렵처럼, 또는 내 어린 시절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볼 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의 나머지의 삶이 자신에겐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 노인 부부의 변사를 황혼의 멋진 선택으로 해석해낸 토니 스캘조나 그것을 다시 시로 만들어낸 이창기처럼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각색해낼 수 없어 뭔가 빚을 진듯한 느낌이지만.

뉴턴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의미있는 업적을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이 아닌 (남들이 그만큼 알아주지 않는) 성경 연구로 믿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의 경우에도 자신이 진실로 원하던 것, 뒤늦게 알게 된 자신의 삶의 의미에 한껏 몰입하며 살았다고만 믿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실현 가능한 상상이 있다면 그를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쓰고 싶다. 여기 있었노라고 노래하기에 ‘너무 먼 별’이었던 그의 삶을 관통하는 어떤 빛에 관하여.

 

Self-Portrait2-400
sefl portrait, 1960s.

willow weep for me

오래 전이다. 텔레비젼에서 이 영화를 본 것은. 그리고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목조차도 기억나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이 부분을 볼 때의 느낌을 여태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전 다시 봤을 때도 꼭 그대로였다.

위핑 윌로우여서일까…… 윈스턴 스미스의 ‘황금의 나라’, ‘쥴리아 드림’, ‘튜더 롯지’, 그리고 ‘버드랜드의 자장가’와 ‘오델로’에 이르기까지 왜 ‘willow’란 단어에 대해 각별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아홉 아니면 스무살의 어느 여름날, 조금 늦은 오후 낮잠을 자다 깨어났다. 그런데 가구들이 조금 다른 빛깔처럼 보였다. 마치 방 전체가 물에 잠기었다가 나온 듯했다. 모든 가구들이 물에 젖은 듯 조금씩 더 짙어진 느낌이었는데 무엇인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옷장의 어두운 갈색 빛깔이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계속 그것만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일어나거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사라질 것 같았던 그 빛깔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겐 있지도 않은 쥴리아를 그리며 위핑 윌로우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봤던 빛깔의 이름이려니 했다.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윌로우 송의 빛깔도 비슷하였다.

“the poor soul sat sighing……”

 

willow song / irène jacob

제목을 생각했으나 따로 붙이지 아니함.

내게 바람을 일으켜줘
더없이 조심스레 그리고 있는 힘껏
너의 숨결을 불어넣어줘
밀고 당기고 안아주지 않는다면 노래할 수 없는 몸
다시 한번 그 가슴에 내 가슴 붙여 실컷 울고 싶어
이슬이거나 숨죽인 천둥이거나
너의 박동을 나는 번역할 수 있지
숨결도 골라가며 네 손길 닿는대로
풀무질 하는대로
즐겁게 청승맞게 노래할 수 있지
내 안을 파고든 바람 ㅡㅡ 風
네 안에 새기고 싶은 뿔 ㅡㅡ 角
축제이거나 처량한 유랑의 끝자락이거나
한몸처럼 기꺼이 너의 악기가 되고 싶어
닿지 못할 그 한몸처럼 너의

 

 

+
마지막 부분의 ‘악기가 되고 싶어’는 진부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고치지 못한 것은 더 적합한 것을 찾지 못한데다
문장 속의 악기는 상징이기 이전에 말 그대로의 악기이기도 하기에
진부함에 대해 약간의 변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족을 다는 것은
이 시가 지닌 두 가지 트랙에 대해, 그리고 시의 제목에 대해
아주 조금 단서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ㅡ ‘말할 수 없는 그것’이니까.

 

the trial of

앞에 있는 운전자의 창밖으로 나와 있는 손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다 피웠는지
담배를 부비더니 슬그머니 길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화단을 향해 가래를 뱉고 창문을 올리면 끝,
더 바랄 무엇이 있는지 백팔염주가 룸미러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의 차는 높고 깨끗하고 연기는 가슴에 남았다……

 

the man who wasn’t there ㅡ 자신이 저지른 일은 그냥 넘어가고 그가 하지 않은 일로 받은 죄에, (비록 전재산을 털어 변호사를 대긴 했으나) 어딘지 자포자기적인 그의 태도에 깊이 공감했었다. 실제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고 한들 지은 죄와 짓지 않은 죄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마치 영화 속의 베토벤 소나타처럼 위안인지 맹목인지 그다지 상관없는 일…… 실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못했던 레이첼의 悲愴을 듣는 에드 크레인처럼 내게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단조로운 삶과 흑백의 세계에 던져진 유일하지만 몹시 제한적인 ‘빛깔’ 같은 것.

차는 멈추고 음악이 흐르는 사이 내 앞의 운전자와 에드 크레인과 나를 오가며 결국 그인지 또다른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채 삶은 흩어지고 장면만 남았다. 몹시 길고 지루한데 두고두고 반복되는 장면, 오래 동안 피웠고 오래 동안 끊고 지낸 담배 연기가 가슴 속에 자욱하다. 今生受者是…… 가슴 속 연기만 남았다.

 

 

the trial of ed crane / carter burwell

 

雜音으로 내리는 비

레코드판을 따라 음악은 흘러간다. 추억 같은 흠집, 흠집 같은 추억이 잡음으로 돌아가고 있다. 낡고 오래된 복사판 레코드 위에 떨어지는 비, 레너드 코헨의 ‘Famous Blue Raincoat’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뮤즈는 죽은 지 오래, 잡음처럼 비가 내림을 나는 알고 있다. 낡은 필름 위에 내리는 비, 잡음처럼 내리는 비, 조잡스런 색채로 연출되는 비극 속에서 비는 내린다. 너는 누구인가, 어두운 오후의 실내에 비가 내린다. 지금껏 들어왔던 모든 다른 소리는 그 잡음을 위한 배경음이 되었다. 나는 잡음을 향하여 마음을 집중시킨다.
머리카락은 결코 젖어드는 법이 없지만 너는 누구인가, 잡음처럼 비가 내린다. 레코드판을 따라 음악은 흘러간다. 내가 가진 책들은 닳아 없어졌다. 기억은 보다 거대한 망각을 위한 장치, 내몰린 세포들의 아우성처럼 잡음이 들린다.
잡음이 음악이다. 번잡한 시장을 지나가는 소리들, 툴툴거리는 먼지투성이 삼륜차의 경적 소리, 물건값을 깎는 소리, 무엇인가 삐걱대는 소리, 칼질하는 소리, 다투는 소리, 곡마단의 나팔 같고 북 같은 소리를 나는 듣고 있다. 그 소리는 아득하게 나를 일깨운다. 아니, 나를 좀더 먼 곳으로 몰아세운다. 또 꿈을 꾸듯 혀를 깨물지 몰라. 또 꿈의 음악실에서 누군가의 손을 마주잡고 온 마음을 이어갈지도 몰라…… 낡고 오랜 복사판에 쏟아지는 비, 전기가 끊어져버린 침침한 오후에도 레코드판은 돌아간다. 잡음처럼 내리는 빗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