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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 곳 없는 이는 갈 곳도 없이

더위만이 절정을 향해 달리고 있는 오전의 한산한 거리, 겨우 햇빛 가릴 정도의 평상에 늘상 술 드시는 아저씨가 어김없이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다. 평소 배경처럼 앉아 있던 주인 아저씨도 쌀집 할머니도 잠시 자리를 비웠는지 그의 곁엔 행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피우며 신세타령을 하고 있다. 남편도 없는데 딸이 섭섭하고 빌어먹을 담배값은 너무 비싸다. 숨막히는 열기에 내 속이 세상 같고 세상이 내 속 같은데 한숨으로 탄식으로 정처없이 떠돌며 간다. 그들이 그 자리에서 나를 따라 오고 있다. 한참을 그들과 더불어 걷다 육교 위로 올라갔다. 우산처럼 보이는 양산을 든 여인이 고개를 떨군 채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머리 위로 햇살인지 빗줄기인지 모를 사선이 하염없이 내려꽂히고 있다. 육교를 내려온 그녀는 다른 길로 들어섰는데 느리고 뜨거운 바람을 타고 그들이 부유하고 있다. 길가에는 터지지 않은 폭죽이 납작하게 일그러진 채 흩어져 있었고 석달간 파지를 모았으나 할아버지는 이제 더 이상 뵐 수가 없다. 어디서 얻었는지 지난 겨울 내내 그분이 입고 있던 낡고 두껍고 하얀 미키마우스 털옷을 생각하다 책상 앞에 앉은 나는 머지 않아 파지가 될 종이에 무엇인가 쓰고 있다. 그분의 불편한 한쪽 손보다 더 불편한 것 같은 손으로. 나도 생각도 종이처럼 얄팍해지고 있다.

 

 

비밀의 기적

금강경에 관한 어느 책에서 승조 스님의 일화를 보았다. 환속하여 재상이 되기를 바라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한 까닭에 죽음을 당하게 된 그는 마지막 칠일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궤뚫은 <보장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스님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보르헤스를 생각나게 했다. <허구들>에 실린 단편  ‘비밀의 기적’이 그랬다. 사형을 기다리는 8시 44분에서 9시 사이, 그리고 격발의 순간에서부터 총알이 자신을 뚫고 지나가기까지의 찰나를 1년의 시간으로 연장시키며 자로미르 홀라딕은 필생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9시 2분, 창작의 희열 속에 그는 죽었다.

그리고 또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회상이라고나 할까… 스파이크 리의 <25시>에는 수감을 앞둔 주인공 몬티의 행복한 미래의 삶이 꿈처럼 이어진다. 가석방을 마치고 7년의 형기를 채우기 위해 교도소로 가는 길,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속에서 그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아버지의 계획과 선택을 따라 교도소로 가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옛 사랑을 다시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교도소로 가는 길에 꾸었던 짧은 꿈이었다. 그는 반성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고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환영 속에서 잠깐 현실을 잊었을 뿐이다.

 

25

 

또 필립 K.딕의 단편 ‘냉동여행’은 반대로 크고 작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 사로잡혀 무한한 고초를 겪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광속 여행의 와중에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광년의 거리와 시간을 과거의 잘못과 고통들을 반추하며 보내는 것이다.

 

playboy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비밀의 기적과 고통의 무한반복이라는 극단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점들이 있다. 내가 알거나 들었거나 전혀 모르는 비슷한 수많은 사연들이 거기 있을 것이다. 焉敢生心 , 홀라딕이나 승조 스님의 이야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게으름과 무기력을 물리친다면 소소한 몇 페이지 일기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밀의 기적’의 서두에 적절하게 인용된 코란의 구절 역시 이들 모든 이야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를 100년 동안 죽게 한 다음
그를 살려냈고,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ㅡ 너는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는가?
ㅡ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 또는 지상에서의 매미의 일주일 같은 삶의 길이는 찰나에서 거의 무한에 이르기까지 다른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승조 스님이 남긴 열반송을 사족처럼 여기 덧붙여 본다.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五陰本來空  다섯 가지는 본래부터 비어 있었네
將頭臨白刀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베는 일과 같을 뿐이네

(‘사대’는 세상 만물을 이루고 있는 흙, 물, 불, 바람의 4원소를 의미하며 ‘다섯 가지’는 생멸과 변화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을 상징하며 그 각각은 물질, 감각, 지각, 마음의 작용, 마음을 의미한다.)

 

 

mister.yⓒmisterycase.com, 2009.

낙담한 스핑크스를 위한 타이틀 곡

: 토니 스캘조 曲, 이창기 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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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ay / Fastball

 

……서른세살의 여름, 그는 신문에 난 한 노부부의 실종 기사를 읽었다.

텍사스에 사는 릴라와 레이먼드 하워드 부부는 1997년 6월, 가까운 템플 시에서 열리는 개척자의 날 축제에 가려고 차를 몰았다. 그러나 이 노부부는 2주일이 지나 목적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아칸소 주의 핫스프링스 국립공원 산기슭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남편 레이먼드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병력이 있고 아내 릴라는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두사람이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다 숨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길을 잘못 든데다 자동차까지 고장이 나자 차를 버리고 걷다가 쓰러져 숨졌다는 것이었다. 이 노부부의 아들은 자신이 축제장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제안했지만 자신의 부모는 아직 건강하고 충분히 우리끼리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 여행을 하던 토니 스캘조는 스핑크스로부터 ‘이 노부부는 왜 실종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토니 스캘조는 하워드 부부가 길을 헤매다 숨진 것이 아니라 두사람이 처음 만났던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돌아가려 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황금빛 고속도로를 출구로 택했으며,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춥거나 배고프지 않고 병들지도 늙지도 않는 그곳으로 떠난 것이라고……
/낙담한 스핑크스를 위한 타이틀 곡, 이창기 (부분).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이 노랠 들었다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창기의 시집에서 이 노랠 읽었고, 그래서 밴드와 사연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이 노래는 토니 스캘조가 곡을 쓰고 이창기가 가사를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세기의 오이디푸스가 된 토니 스캘조가 내어놓은 (스핑크스를 죽음에 이르게 할) 멋진 답에 관해 그(이창기)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리뷰/시를 썼다. 어딘지 트로트 가요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음악보다는 생각이, 가지 못한 길보다 그들이 간 길이 100배쯤 멋지게 보이는 곡에 대하여. 그(스캘조)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나름의 방식으로 ‘기정사실화’하였기에 내비게이션이나 GPS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ㅡ 스핑크스를 낙담시킨 이들의 답을 따르자면 ㅡ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변사’라는 허망한 결과를 넘어 전혀 다른 과정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마술적 리얼리즘’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스캘조의 이야기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 가운데 한 사람은 틀림없이 낯설 수 밖에 없는 부부와 어디서 본 듯한 그네의 아이들 ㅡ 옛 애인의 가족사진을 보는 느낌과 길을 잃고 실종되었다 세상을 떠난 노부부의 행로가 과거 또는 전혀 다른 세상에로의 멋진 여행이었다는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현실 너머의 이야기인지에 관해 답하기 어렵지 않은 당신이라면.

 

They made up their minds
And they started packing
They left before the sun came up that day
An exit to eternal summer slacking
But where were they going without ever
Knowing the way?
/The Way, Fastball(Tony Scalzo)

 

 

/2016. 8. 9.

 

라운드 미드나잇

모든 것이 다 피곤해, 음악만 빼고.
ㅡ 데일 터너, 라운드 미드나잇

 

저기까지 걸어 가려면 좀 더 긴 밤이 필요해 이 답 없는 이야기가 어찌 풀릴 것인지 궁금해 하던 사이 그들은 조금 나은 집으로 이사를 갔다 모든 이를 위한 두 사람만의 붉은 방은 감은 눈을 파고 들어올 만큼이었고 액자 속의 트럼펫은 저 홀로 퍼덕대다 참다 못해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다 저기까지 가려면 좀 더 많은 어둠이 필요해 저 허공에 걸린 텔레비전 속으로 가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유령이 떠도는 집에서 온갖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총성이 울려퍼져도 졸음은 보슬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흥겨운 모임이 열리는가 싶더니 화창한 바닷가 모랫벌에 나는 앉아 있었다 ㅡ 오직 먹고 자며 침식에 침식당한 가을과 겨울의 나날 ㅡ 그래도 한참 안온하지 않았던가 영화로운 꿈에서 깨어나 담배를 피우러 창가에 갔다 창문 너머 어둠 너머 허공에 등불 하나 켜져 있어 그곳까지 걸었으면 싶었다 더 많은 빛이 필요해 판은 튀어 제자리를 돌고 내 가슴은 담배연기 속을 빠져나오지 못했으나 또, 또또 불을 켤 것이다 라운앤라운앤라운… 소득없이 밤은 뽀얗게 얼어붙은 채 제자리를 돌고

 

mister.yⓒmisterycase.com, 2002. 11.

앰버그리스

황홀이라더니,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것이 황홀이라더니
어떤 불편함, 돌이킬 수 없는 잘못
변명할 길 없는 상처
내 마음이 토해낸 부유물이
소금도 맞고 햇살도 받고 이리저리 돌고 또 돌아
화석처럼 굳었는데
빛도 아니고
보향도 아니고
어떤 불편함, 돌이킬 수 없는 잘못
변명할 길 없는 상처
어찌 못할 번민의 덩어리가 되어
이루어진 심신
역한 냄새 애써 감춰가며
지켜야 할 향도 없이
떼밀려 갈 해변도 기꺼이 앗아갈 손길도
녹여줄 숨결도 없이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것이
정처도 없이

 

 

/2016. 8. 8.
/2018. 10. 17.

 

 

 

노란색 여행용 베개

노란색 표지의 중남미 여행안내서를 찾아 헤매었던 지난 새벽이었다. 시간이야 많다만 돈이 있나 용기가 있나. 지지리도 못난 것이 발로 뛰는 ‘지리상의 발견’은 형편이 못되어서 지도상의 발견이라도 해볼 참이었던지 아무튼 숱한 지명들이 머리속을 맴돌아서 못견딜 지경이었다. 한밤중에 그걸 봐서 뭘 하겠냐만 그 잠오는 베개 없으면 브라질이고 멕시코고 깡그리 지구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기분이라니… Beyond the sea, 우루과이 몬테비데오 해상이 대척점이라던 희미한 기억 되살리며 밤새 침대를 팠다.

잠 잘오는 베개가 필요했었다.
낯익은 머리맡 이불일랑 젖혀두고
일어나 한밤을 서성여야 했었다.
딱딱하고 낯선 베개의 감촉,
겹겹으로 펼쳐지는 꿈을 갖고 싶었다.
빽빽한 글자들이 이국의 언어로 바뀔 때까지는
처음 보는 풍경마다에 내가 서 있을 때까지는
마냥 길을 잃고 헤매어야 했다.
책꽂이 칸칸마다 찾아 보았으나
노란색 중남미 여행안내서는 보이질 않았다.
잠 설치던 하얀 베개 꿈꾸던 푸른 베개
어디든 괜찮다 무엇이든 상관도 없다.
잠오는 노란 베개,
형형색색 꿈이 억수비로 쏟아지는 베개가 필요했었다.
정말 너가 필요했었다.
너를 내게 보내준 너가.

 

mister.yⓒmisterycase.com / 2002. 7. 4.

욕망이라는 이름의 정차

그래서 이토록 멈추어 있었던가. 무료함에 지친 저녁, 어느 영화로운 여인에 관한 인터뷰를 보다 욕망에 충실한 여자 주인공이란 말에 끌끌…… 혀를 찼다. 그래, 아무렴…… 그녀는 충실하겠지. 취향도 제각각이어서 그런 사람도 여럿이겠지. 하면 된다 ― 남들 으랏차차 즐거이 힘을 쓸 때, 게네들 영시기 영차 기꺼이 땀 흘릴…… 그래 그렇지, 그럼 그랬지…… 어떤 불성실한 작자는 면벽으로 수행하고 고적한 수도원에서 기도를 했어. 저 혼자 달짝지근 늘어졌던 그 작자는 충실과는 거리가 먼 게으름뱅이였어. 달달 외워보던 can’t help …ing 뭣뭣 하지 않을 수 없다던데 일요일은 참으세요*, 참았더란다. 아득히 먼 먼데이의 꿈에서 한산한 화요일 오후까지 긴 머리 짧은 치마 토요일 밤의 열기까지, 일주일에 칠일일랑 착실하게 참았단다. a street car named DESIRE ― 영화로운 욕망의 모호한 대상* 그리며 미적지근한 그 맛에 그리도 달았을지 철마는 달리고 싶다며 데카메론의 밤을 홀로 씩씩대며 그리도 달았던지 칙칙하고 폭폭한 밤 기가 막혀 잠들지 못했네. 기차길옆 오막살이 밤새 열차이면 기적 소리 울리며 있는 힘껏 달리고 싶었었네. 아무나 하나, 아무나 하면 되나. 그 동네 나도 가서 살고 싶은데 불의 전차*는 가차 없이 달리고 싶은데 아주아주 멎었을까 초조한 정차, 어찌 할 수 없어 너무 오래 서 있던, 칙칙폭폭 달리지도 못할까 덜컹 더얼컹 아찔하게 겁이 나던

李賀의 마지막 말

목숨 壽 한 획 길고 짧음이 무슨 대수랴
奚囊해낭 속에 천년의 푸른 피 채웠음에
호기로움 도리어 심금 울리네
미처 쓰지 못한 사연들 뿔뿔이 흩어지고
玉樓옥루 높고 좁아 디딜 자리 없으니
먼발치로 그리는 것도 실없는 짓,
비루하게 살고 또 살아
허튼 주머니 털어버리는 것도
多幸이려니

 

 

+“상제께서 백옥루를 짓고 내게 記文을 쓰라 하신다.” 이하, A.D. 816.
(본래 몇가지 주석이 있었으나 전부 삭제하고 ‘한마디’만 남겼다.
옥루는 시인 묵객이 죽어서 가는 곳이라 보면 된다.)

 

 

/2013. 12.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