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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명리

날씨는 버거울만치 무더웠고 길은 여기저기 정체가 심했다. 박물관은 그 본래의 기능과는 별 관련이 없는 무질서와 무례, 그리고 카메라 플래쉬의 경연을 관람하기 위한 장소처럼 보였다.
경주엘 잠시 다녀왔다. 집안의 일도 좀 보고 그리고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어느 옛 스님이 즐겨 피리를 불고 시를 읊었다던 장소를 찾아갔다.

천년고도에 관광도시라는 말이 무색하게 사천왕사터 도로변에는 안내판조차 제대로 없었고 믿었던(?) 네비게이션도 위치를 제대로 찾아주지는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장소에는 당간지주만 휑하니 서있었을 뿐, 초라하기 그지 없었다. 그나마도 발굴관계로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휴일이어서 그런지 들어갈 수도 없었다.

하지만 덕만이라는 이름을 지녔던 여왕의 능이 근처에 있는 까닭에 옛 절터의 전망이라도 볼 수 있을까 막연한 요행수를 바라며 무작정 샛길로 해서 언덕처럼 보이는 나지막한 산을 올랐다. 전날 무릎을 좀 다쳤으나 그 순간에는 불편한줄도 잘 몰랐다. 땀 뻘뻘 흘리며 5분쯤 쉬지 않고 걸었더니 거의 꼭대기 가까이에 이르렀고 시원한 바람이 좀 부는가 싶더니 금세 왕릉이 한눈에 들어왔다.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진 왕의 무덤은 상당히 큰 크기였으나 기단부의 거친 돌에서 보듯 대체로 소박한 모습이었다. 왕릉에 세워져 있는 설명에 따르면 그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의 무덤을 도리천에 만들라고 했으며 그곳이 어딘지 모르는 신하들이 위치를 물었더니 낭산 기슭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낭산 기슭에 영면한지 10여년 후에(일반적으로는 이와 달리 문무왕 19년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 아래쪽 넓은 터에 사천왕사가 들어섰다고 한다.

<유사>에 이르기를, 도리천이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사천왕이 머무는 곳 위에 있다고 하니 여왕의 무덤이라는 결과가 먼저 이루어지고 그곳의 존재를 증명해줄 근거가 뒤늦게 자리를 잡았다고나 할까… 없는 향기로 해서 더 깊은 향을 보여주었던 옛 여왕의 전설이었다.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수미산의 정상에 있으며 산 중턱에는 용을 든 증장천왕, 검을 쥔 지국천왕, 비파를 갖고 있는 다문천왕, 왼손에 탑을 든 광목천왕으로 불리우는 사대천왕이 머물러 도리천을 지킨다.)

결과와 원인의 미묘한 역전 때문이었을까. (내용은 좀 다르지만) 왕릉과 사천왕사에 얽힌 이야기는 묘하게도 보르헤스의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이란 단편을 생각나게 했다. 천일야화의 외전에 실렸던 이야기를 보르헤스가 ‘다시 쓴’ 것이다.
저녁 식사를 앞둔 어느 마법사의 힘으로 순식간에 신부에서 교황까지 이른 어떤 사람이 (마법을 행하기전 마법사는 저녁식사로 메추리 요리를 먹고 싶으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만들지 말라고 명한다) 약속을 저버리고 마법사의 부탁을 하나도 들어주지 않자 (돌아갈 때 먹을 음식을 부탁하자 그마저도 주지 않겠다고 한다) 마법사는 메추리 요리를 만들라는 분부를 내리고 모든 일은 처음대로 돌아와 버린다는 이야기였다.
자신의 부덕함만 마법사에게 속속들이 보여준 결과, 모든 것은 처음으로 와서 신부는 일언지하에 쫓겨난다. 도리천과 사천왕사, 그리고 원인과 결과의 역전에 대해 생각하며 능에서 내려오는 길에 검은 물잠자리 한 마리가 내 앞의 풀꽃을 오가며 한참을 따라 날아왔다.

어느 가을 이른 바람 생각하며 잠시 둘러봤을 뿐인 낭산은 거문고 타던 백결선생이 거처했던 곳이고, 최치원이 책을 읽던 장소이며 월명사가 ― 도리천에 이루어진 옛 여왕의 영면처럼 원인에 앞선 ‘결과’로 느껴지는 ― 불멸의 시를 썼으리라 여겨지는 곳이다.
마법사의 저녁 요리와 같이 이미 이루어진 결과를 돌이킬 수 있는 어떤 주문, 어떤 ‘문두루’도 없기에 월명리는 여태 지도상에 존재한 적이 없는 경주 어느 마을의 이름이다. 바람결에 글 몇줄 새길 날 기약하며 홀로 그리고 또 그려보는.

(돌아오는 길에는 안압지 부근에서 연꽃 구경을 했다. 옷걸이 속에 연밥이 그려져 있던 일련의 그림들과 더불어 수화기처럼, 혹은 송화기처럼 생긴 연밥 보면 늘 어떤 불가해한 커뮤니케이션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월명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바람은 종이돈 날려 떠난 누이의 노자를 삼게 했고
피리 소리는 밝은 달 일깨워 항아가 그 자리에 멈추었네
도솔천이 하늘처럼 멀다고 말하지 말라
만덕화 그 한 곡조로 즐겨 맞았네
(一然 讚)

 

 

/2008. 8.12. 19:11

 

 

 

믿어 의심치 않는 어떤 미래에 대한 사소한 기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은 벚꽃나무로 무성하다. 이제는 2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선 나무들이 봄날이면 터널을 이룰 정도로 자랐으니 어느 계절이나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거리다. 가을은 가을대로 단출한 운치가 있고, 봄날에는 어떤 벚꽃길보다도 소박하고 요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늘 “여름날의 푸른 잎새들”이란 옛 노래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길이다.

아파트의 제일 중심에는 그리 크지 않은 2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고, 그곳엔 이발소와 과일가게와 슈퍼와 치킨집, 그리고 식당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낡고 조용한 이 곳에서 유일하게 조금은 붐비는 곳이 바로 여기다. 상가라고 해도 큰 건물도 아니고 아직은 주차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서 이발하러 오는 사람들도 가끔은 상가 앞에 주차를 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은 아무래도 슈퍼다. 하루의 절반 가량을 보내며 먹고 쉬고 자는 이 곳에 슈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년에 불과 몇 번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곳이 바로 거기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 슈퍼지 이발용 의자가 둘 놓여 있는 이발소나 바로 곁의 과일가게의 두 배 정도 되는 점포일 뿐이다.
그 슈퍼에는 아파트 단지 아래쪽의 술집거리로 술을 배달하는데 사용하는 자전거 하나가 슈퍼가 열려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워져 있다.

말했다시피 차량 통행이 적어서인지 차의 통행에 큰 지장이 없는 탓인지 자전거는 길 방향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핸들과 바퀴의 방향이 슈퍼의 정문과 일직선으로 해서 세워져 있다. 마치 비상상황을 위해 대기중인 순찰차처럼 주인아저씨의 변함없는 머리 스타일과 그 길이처럼 365일 어느 날이나 결코 변함없이 그렇게이다.
하지만 어쩌다 운전을 하면 습관처럼 나는 움직이게 된다.

과속방지턱도 없는 그곳 ― 슈퍼 앞을 지날 적이면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게끔 되어 있는데, 왕복 2차선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피해서 가려면 당연히 맞은편 차선을 절반 가량은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불편도 아니고, 통행이 크게 지장을 받을 정도도 아니니까 아주 잠깐 핸들을 왼편으로 돌려주면 그만일 뿐이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소한 동작을 그곳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일년에 수만 번 또는 수십만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전거와 관련하여, 아직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세계에 관해 감히 말할 수 있다. 만약 부지런하고 마음좋은 주인 아저씨가 스스로 자전거를 90도 돌려서(정확한 90도는 아니어도 근사값은 되어야 한다!) 세워두는 어떤 날이 오고, 그 이후 그렇게 지속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또는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가장 그리는 같고도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유사하거나 전혀 다른 수많은 방법들에 관해 비슷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정확히 실행된 적은 없다.

 

/2007. 7. 20

 

 

+
이 글을 쓴 몇해 뒤 슈퍼는 다른 사람에게 인수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더 이상 자전거 배달을 하지 않게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많은 기회 가운데 하나는 사라져버렸다. 그런 ‘기회’는 수없이 많이 있으나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내가 다니는 육교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는데 자전거보다 훨씬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
추신처럼 달아뒀던 오토바이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왜냐면 그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나 있던 큰 육교 한 가지는 최근에 있었던 야구장 철거와 함께 잘려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꿈이 사라졌지만 꿈은 너무도 많다. 그것을 깨트리는 현실이 더 많은 것이 조금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2018. 10. 2.

 

믿지 못할 나의 금연기

: 그의 마지막 담배

 

사람들에게는 끊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마약, 도박, 음주, 연애, 인연, 담배 등등. 어떤 이는 그 가운데 하나에 그러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병을 한꺼번에 앓기도 한다. 

나는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끊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지독한 중독이었으나 별스레 특이한 방법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평범한 하루, 한껏 그것을 들이마신 채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심신에 모두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그 시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 또는 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렇게 멈추어 있었으면 싶었다. 그 순간의 집중에 성공했기 때문에 중독을 끊었다고 믿는다면 그리 생각해도 좋다.

 

하늘 끝 길은 멀어 혼이 날아가기 힘들고
꿈속의 혼이 관산을 넘기 힘드니…
ㅡ 이백

 

담배의 경우는 또 그랬다. 하루 세갑을 피웠으며 그 사이의 꽤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담배 끊을 생각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담배끊기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내 경험상 그것은 어떤 계기가 있는 날(새해 첫날이나 생일날 등등)에 시작하는 것이 좋고, 가능한 한 많은 곳에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피우는 형태의 금연보조제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데 그것은 맛이 너무 고약한 까닭이다. 나는 새해 첫날에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별하겠노라고 알렸고 그리고 그리 어렵지도 않게 그렇게 했다.

그 동안 비슷한 것과 가짜들과 엉뚱한 것들이 빈 자리를 차지하였고 어느 날엔가 중독은 내게로부터 사라졌다. 모든 것이 너무도 천천히, 그리고 아무런 뚜렷한 경계도 기약도 없이 시작되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스르르 끝이 났기에 이별에는 날짜도 없었다. 
그리움 또한 비슷하게 끊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하나를 끊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다. 그들 가운데 몇몇을 싹둑싹둑 잘라내고도 또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 

끊기 어려운 것은 끊기 어려운 것이고, 새로 무엇인가 끊기 어려운 것을 마음에 담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금연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 했으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담배끊은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움에 관해서는 어떤 격언이 합당한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담배
사라진 연기 내 안에 가득하여…
(이 링크는 지워져 노래를 들을 수 없다.)

 

 

/2006. 2. 7.

두번째 종류의 고독

<침묵의 질주 Silent Running>, 더글러스 트럼불, 1971
오랫동안 한 척의 우주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난 것일까?
ㅡ 두번째 종류의 고독, 죠지 R.R. 마틴

 

영화를 어디에서 봤는지가 가끔은 영화 자체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날 떄가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엔 승객이 거의 없는 고속버스 안에서 비디오로 보았고 <침묵의 질주>는 고등학교 1학년 쯤엔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제목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그 영화를 방영했으나 내가 본 것이라곤 겨우 마지막의 폭발 장면뿐이었다. 금세 조안 바에즈의 테마가 흘렀고… 그럼에도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오래전에 보았던 바로 그 영화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제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래되고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영화는 흑백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더불어 굉장히 적적하고 고독한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우주선과 식물원을 관리하는 조그만 로봇들과의 카드놀이가 이상하게 기억이 났다.
최근에 다시 한번 보았지만 이번에는 자막도 없는 것이어서 그림만으로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스토리를 엮어보면…

토성 궤도 근처의 우주 식물원에서 지리한 업무를 이어가는 4명의 승무원들에게 스테이션을 폭파시키고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곳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던 주인공은(이름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을 죽이고 홀로 남게 된다. 하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던 트럼프 게임이 로봇들과의 게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 많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 고적감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는지 죄책감 탓이었는지 그는 결국 식물원 일부를 떼어내어 우주 공간에 남겨두고 자폭을 선택한다.

 


우주선 Valley Forge의 현창에 비친 자폭 직전의 장면

 

영화는 오래도록 우주 스테이션에서 혼자 지내다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두번째 종류의 고독>이라는 죠지 R.R. 마틴의 단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4년 여를 혼자 고립된 채 지내온 우주의 간이역 근무자가 자신과 교대하러 온 우주선을 ‘작위적인 사고’로 파괴시키고는 또 하염없이 교대자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엉뚱하게도 나는 <두번째 종류의 고독>이 이 영화의 진짜 제목 같은 느낌이 든다.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특수효과를 맡았던 사람이라고 하던데 시대에 따라 급속히 변화하는 테크날러지의 허망함이라고 해야 할지 요즘 방식의 현란한 볼거리는 전혀 없었다.
마치 50년대의 UFO 목격자들이 그린 우스꽝스런 비행접시마냥 우주선과 로봇들은 너무 촌스럽고 폭발 장면도 매우 밋밋하고 단순하다. 또 어떤 이는 이 영화가 너무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했고 그런 이유들로 좀 엉성하게 망가진 영화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질주>에는 나로 하여금 심정적인 일치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물기가 너무 많아도 그렇고 너무 메말라도 살기는 어렵다.
내가 보고 기억한 것은 과학적 논리적 맹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독과 고립에 관한 이야기다.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넘쳐났다 스러져도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할 때 그 제목이 생각난다. 자폭하고 싶을 때 더 생각난다. White Pale Dot, 하염없는 공간에 떠 있는 어떤 고적한 방 하나를 잠시 그려본다.

…나는 어디에서 너를 보았을까.

 

 

2005. 4. 17.

기타 등등

: 이루어질 수 없음의 이루어짐에 관하여

 

처음 기타 배울 때는 그랬다.
친구에게서 빌려온 아주 낡은 기타 교본을 열심히 뒤적이며
코드라는 것을 배웠다.
많이도 필요 없었고 누군가에게 따로 배울 일도 없었다.
왼손 검지 베베 꼬아가며 하이코드 잡으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코드 딱 4개 익히고 나니 연습곡으로 수록되어 있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꽃반지 끼고 그녀와 걸어본 적 없는 길도 함께 걸었다.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히고
아르페지오를 위한 손톱이 길게 자랐을 때
있지도 않은 사랑이 여섯 줄 위를 흐르고 또 흘렀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었다 한들
나에게서 노래가 이루어질 때 세상에 그런 노래는 다시 없었다.
기세 등등 기타 등등 대충 따라 부르면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 다시 없었다.
C와 Am와 Dm와 G7.
도와 라와 레와 솔이 5-3-2-1-2-3의 분산화음으로 어울릴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따로 배울 필요도 없었던 일,
기타 줄 끊어진 채 방 한구석에 잠들어 있어도
오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은 너무도 틀림없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 기타 등등
이루어질 것이다.

 

 

/2004. 11. 5

오리칼크의 도시에 관한 기억

그것을 당신들은 몰랐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부족은 몇 세대 동안이나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죽어갔기 때문이다.
― 티마이오스

 

그것은 손치스라는 이름을 지닌 이집트 신관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사이스에서 한 신전의 관리인으로 봉직할 때 그리스의 철학자 솔론을 만나 자신이 작성한 꿈의 조서의 일부를 보여준 것이다.

나는 킬허의 고전적인 지도를 통해 그의 꿈을 다시 돌아보았고 한스 헤르비거의 논설에서 그 기억의 편린을 그렸다. 비미니 제도의 해저 사진들에 등장하는 거대한 돌벽들을 통해 상상의 자재를 마련하였고 도시의 이름으로 제목 붙여진 어느 히피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몽롱한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도시의 실체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이그내티어스 도넬리는 장대한 저술로 대홍수 이전의 세계에 관한 희미한 기억을 복잡하게 기록하였고, 블라바트스키 부인은 아카사 기록을 통해 그 비밀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에드가 케이시는 도시의 환영이 어느 특정한 해에 인류에게 현실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으나 그 예언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파울로 쉴리이만의 맹랑한 주장 또한 내 아련한 느낌을 의사과학과 고대사로 어지럽혔을 뿐이었다.

도시에 관한 전설은 남극에서 화성까지, 놈모와 오안네스의 신화를 통해 시리우스의 보이지 않는 반성 포 톨라까지 뻗어나갔으며 물위의 도시라 불리우는 아즈텍의 테노치티틀란 또한 오리칼크의 도시에 관한 회상에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최근에는 스페인의 남부에 있는 카디스 근처의 늪지대 ― 마리스마데 이노호스에서 장방형의 구조물과 그것을 둘러싼 동심원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것은 내가 보았던 도시의 기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베게너에 의해 제안된 판구조론은 도시의 존재 자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으나 그것이 나의 희미한 기억을 흐트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빈약한 증거 위에서 언제나 흔들리는 이름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전설에서조차 황폐해져버린 그 땅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것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상태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찰스 햅굿 교수의 지각이동설이 도시의 존재에 관한 새로운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작은 바다 바깥의 장대한 바다, 작은 대륙 바깥의 진정한 대륙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게 넘을 수 있다. 오직 상상의 잔영만이 오늘까지 남아서 빛을 발할 뿐, 그것이 아니라면 불꽃같은 광채를 발한다는 오리칼크의 형상에 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인리히 쉴리이만이 아가멤논의 것이라고 믿었던 황금 마스크는 그저 그의 바램이었을 뿐이지만 그 열망이 유구하고 방대한 유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리칼크의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그 반대의 논리도 항상 유효하여 그것은 앞으로도 수많은 형상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오리칼크의 도시에 대한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기억과 꼭 같다.

도시를 설계했던 최초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영토에서 시인을 추방하였다고 한다. 그가 ‘거주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004. 6. 7. JJ.Lee ⓒ

 

단 한 장의 책

마침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원하던 장소를 우리는 갖게 되었다. 세상에 없는 책이 없는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절판된 책을 찾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책이라 해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소실된 책이나 심지어 다른 사람의 책에 이름만 올라 있는 책을 찾는 일조차도 크게 힘든 일은 아니다. 옛 알렉산드리아나 대영박물관, 혹은 의회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사람이 이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책의 내용은 고사하고 책을 분류하는데만 평생을 바쳐도 모자랐을 만큼인 것이다. 장정이 훌륭한 책이 많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도서관의 책들이 세상 다른 곳의 책들과 다른 것은 별로 없다. 책의 두께나 도안, 글꼴이나 크기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였으나 모든 책에는 일정하게 비슷한 형식이 있었다. 책의 뒷표지가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인데 뒷면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지은이에 대한 소개, 책 내용에 대한 간결하고도 훌륭한 요약,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비평이 그것이었다. 유명 작가나 작품의 경우 수많은 소개와 요약, 그리고 해설과 비평이 존재하는 까닭에 그들만 읽는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만큼이었다. 특히나 명망높은 몇몇 작가들의 책은 여러 권에 걸쳐 책과 작자의 소개가 이어져 있거나 아니면 책 자체의 판형이 굉장이 크거나 (조금 따분한 내용의 양서일 경우) 매우 작은 글씨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사서들은 더 이상 책을 살피거나 분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방문객들은 그곳의 책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어느날 도서관에 들러 오래도록 읽고 싶어 했던 <심문 審問>이라는 제목이 적힌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진실을 보았다. 책의 뒷면은 여느 책과 비슷하게 아주 작은 글씨로 지은이에 관한 소개가 있었고, 그리고 짧은 요약과 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정과 제본 또한 훌륭하여 오랜 세월과 풍상을 버틸 수 있어 보였는데 등표지와 그 반대편 양쪽 모두가 투명한 접착제로 잘 마무리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수천의 페이지를 포함하고 있는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도 삶도 그곳에 꽂혀 있었다.

 

 

/2004. 2. 29. JJ.Lee ⓒ

불멸

나무 끝의 부용화
산 속에서 붉은 봉오릴 터뜨렸네
개울가 집이라 적막하여 인적 없는데
어지러이 피었다간 또 지는구나
/신이오, 왕유
木末芙蓉花  목발부용화
山中發紅萼  산중발홍악
澗戶寂無人  간호적무인
紛紛開且落  분분개차락
/辛夷塢, 王維

 

그 이름을 기억하거나 외우고 간직하는 것만이 영속성을 보증하는 틀림없는 방법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 ㅡ 사람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 한 구절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 자격이 없을 때도 있고, 타고난 부끄러움 탓일 수도 있고, 어떤 가능한 방법도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꽃이 피어난들 하나 같은 꽃이 없으며 어제의 그 꽃도 물론 아니다. 심지어 말로 꽃을 피움에야…

문득 3년여 전의 편지들을 찾아 hotmail에 들렀다가 나는 그 계정이 비워져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기억만을 복구하는 것이 싫어 애써 그것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j.j. cale의 어느 노래 가사에 관한 번역과 닭죽 요리에 관한 짧은 언급을 기억한다. 연꼿 속에서 나비가 날아오르는 보색대비의 그림과 옷걸이 속에 펼쳐진 영상들, 그리고 모질게도 힘들었던 어느 하루에 관한 푸념도 기억한다.
나는 상심하고 심란한 마음이 되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머리맡에 있던 보르헤스의 책을 뒤적이며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에서 그리고 <알렙>에서 내 마음 같은 글을 이미 보았기에 불멸에 관한 그의 간결한 생각과 겸손함이 약간의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였다.

위대한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과 똑같이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고 말하는 그의 강의는 철학적이기도 하거니와 사적이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정치적 평등에까지 이르는 함축적인 이야기였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아카사 기록처럼 우주적인 규모의 ‘백업 장치’이건 혹은 내 마음 속의 ‘운항기록계’이건 혹은 보르헤스의 <과학에 대한 열정>에서처럼 ‘그 자체’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그 자체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 다들 알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대체 왜 존재의 증명을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내 안에는 당신에 관한 보다 명백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르헤스를 뒤적였다고 해서 전적으로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약간의 ‘척’이라도 할 수는 있다. 지금은 그것만이라도 필요하고 그것으로라도 족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2003. 10. 17.
+<불멸>, 보르헤스 강연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