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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마법사

물속으로 떨어지면서 물의 표면에 파문을 만드는 조약돌처럼,
물의 깊이를 측량하려 한다면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ㅡ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올해는 모두에게 평화로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막 희생된 처녀들 이외에는 어떤 제물도 필요하지 않으며, 옥수수 농사는 이번 카투운에서 유래가 없는 풍작이 될 것입니다. 쿠쿨칸께서는 이제 치첸이차에 흑요석의 단검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더이상 태양의 신고를 위해 심장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리라 하였습니다.”

멀리 카라콜에는 이 깊은 밤에도 누군가 하늘을 헤아리고 있겠지만 돔의 창문에 불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이야말로 밤하늘을 가장 많이 닮은 곳, 별빛이 있는 한 불을 밝힐 수 없는 장소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늘밤도 새벽을 지켜보며 별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직업이기 이전에 그의 삶 자체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야의 많은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의 베개 밑에 장미꽃을 넣지도 않았다.

대신에 아름다운 엘 카스티요에서 착물의 가슴에 꽃을 바치며 그녀는 기도했었다. 하나의 단과 사방으로 제각각 91개의 계단을 가진 그 신전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간절히 염원했었다. 계단의 총합은 1년의 완성임과 동시에 기원의 실현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치첸이차의 외곽 마을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사시斜視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딸들의 눈 앞에 조그마한 공을 달아 사시로 만들지 않았고, 아들들의 이마에 판자를 묶어 마야의 피라밋처럼 생긴 우아한 두상으로 변형시키도 않았다. 따라서 그들 남매들은 결코 미남도 미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름답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성스런 연못을 두려워 했다. 태초의 바다 같은 그 짙은 초록빛이 무서워 그녀는 연못속에 손 한번 넣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많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듯 그 심연에 무시무시한 용이나 거대한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깍아지른 바위벽에 둘러싸인 연못을 떠도는 것은 그런 추상적인 괴물이 아니며 그것에 관한 진정한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녀는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이차 부족이 ‘아(하)’라고 부르는 물, 그들의 이름 또한 ‘물의 마술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물에 매혹된 물의 노예들인지도 모르겠다.

성스런 연못은 전사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멀리 남쪽의 중앙지역으로는 카스티요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해골 장식이 가득한 촘판틀리와 마야에서 가장 큰 구기장이 펼쳐져 있다.(그녀는 폭타폭을 한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차의 모든 두려움과 기원은 이 연못에 집중되어 있었다.

해마다 19의 달  ㅡ 불길한 와이엡의 마지막날에 연못에서는 물의 신을 위한 제전이 열린다. 이곳에서는 포로들의 심장이 흑요석 단검으로 도려내어지는 대신 아리따운 처녀들이 수장되는 것이다. 제관의 뜻과 가문의 순번과 정교한 천문법칙에 의해 오래전에 그녀가 선택되어 있었다. 아무도 공공연히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녀 자신의 태도야말로 가장 당당한 것이었다. 카라콜 별지기가 수십년 동안 바라보았던 어떤 별빛보다도 초롱초롱한 눈빛이그것을 말해주었다.

제관 하약스킨이 건네주는 황동의 잔을 받아 팔체를 마신 그녀의 정신은 서서히 혼미하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늙은 하약스킨의 눈빛이나 주민들의 기도와 함성이 그녀를 연못 속으로 밀어넣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는 그토록 무서워하던 연못 위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마술사는 마술사가 아니었기에 꽃으로 치장된 뗏목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곧장 아래로 아래로 빠져들었다. 그녀를 포함한 다섯명의 처녀가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다들 환각상태였음에도 호흡에의 본능을 어찌하지는 못해 비명을 질러대고 손을 휘저으며 허우적대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만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헤엄을 쳐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깊은 곳이기에 그녀는 차라리 그 물을 호흡해야 했다. 어둡고 탁한 그 물은 비의 신 챠크의 숨결같은 것, 그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침착하게 손가락 마다에 끼워진 금박이 입혀진 구리반지를 빼내어 뿌연 물길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 순간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형체를 잘 알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그녀를 향해 아주 느리게 헤엄쳐 오는 것을 보고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칫 물 위로 올라갈뻔 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괴물이 아닌 오래전에 이곳으로 쓰러져 썩어버린 큼지막한 나무둥치였다.

함께 제물이 된 처녀들은 하나같이 가쁜 숨을 참지 못하고 물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관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숨쉬기에 바빴고 그들은 곧장 막대로 떠밀려졌다. 그녀는 안타까워 힘껏 외치려 했지만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으니 그네들에게 전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홀로 두려움에 떨며 기다렸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물의 흐름이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전의 통나무는 서서히 그쪽으로 움직여갔다.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는 빛을 모두 삼켜버린 듯 사방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풍요로운 한해가 되기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이 땅을 풍족하게 할 비를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부모님과 제관과 질투어린 눈길을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내겐 없다고 믿는 적의 창을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하나뿐인 그 사람을 다시 보기 위하여
그의 하늘에 단 하나의 광점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걷네

 

모든 처녀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야 그녀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가 겨우 깨어난 곳은 전사의 신전 곁에 있던 조그만 움막이었다. 하약스킨은 그녀가 대신 읊어준 예언에 적이 만족하였지만 이제 더이상의 제물이 필요없다는 그녀의 말에 몹시도 실망한 듯 눈을 홀겼다. 하지만 쿠쿨칸의 전갈이라는 말에는 그도 어쩌지 못하고 몸을 움찔하였다.

착물은 여전히 피의 쟁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치첸이차의 연못에서는 그다지 많은 여인의 뼈를 볼 수 없기를 그녀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친지들과 수많은 이웃들의 축복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멀리 카라콜의 현창 사이로 달이 그윽한 빛을 발하고 있다. 어느 창에선가 이 밤에도 그는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박투운의 세월이 스무번 돌아가는 동안 그녀의 눈빛도 그곳에 있었다.

 

 

/2000. 6.

 

 

 

+이 글에 나오는 단어들 가운데 제관의 이름을 제외하고 지어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재하는 건물이거나 장소이거나 단위의 명칭이며, 오래 전에 쓴 글이라 흐릿하지만 제관의 이름도 그의 캐릭터에 맞추어 마야에서 사용했던 두 단어를 붙여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나와틀어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진 단어와 다른 단어 하나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엘 카스티요(쿠쿨칸의 신전)’는 윗쪽 사진의 피라밋이고, 그 앞에 있는 석상은 ‘착물’이다. 폭타폭은 인신공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기 경기의 이름이며, 그가 있었던 카라콜은 천문대이고 사진은 낮의 카라콜을 네가티브로 바꾼 것이다. 박투운은 날짜를 재는 단위로 144,000일, 그러니까 약 400년에 해당한다.(‘카스티요’와 ‘카라콜’은 스페니쉬다.) 하지만 카라콜에서 별을 헤아리던 이는 몇해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부터 영영 달아났다. 박투운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2000. 6.

 

Agua de Estrellas를 듣다 여기 링크했다. 우측 상단의 플레이버튼을 누르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릴라 다운즈의 노래가 여기 있었나 보다. 하단의 까라꼴 그림 링크까 깨어져 있어 바로잡았다. /2021. 1. 7.

 

꿈을 찍는 사진관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그리운 얼굴 거기 있었지요
할미꽃 꺾어들고 봄노래 부르던
아련한 추억도 거기 있었지요

눈감으면 더 가까운 그리운 그곳
동쪽으로 5리, 남쪽으로 5리
서쪽으로 5리만 가면 되었지요
일곱빛깔 무지개 너머 일곱글자 파아란 글자
꿈을 찍는 사진관이 거기 있었지요
새하얀 창문에 새하얀 지붕
꿈을 찍는 사진관이 거기 있었지요

불도 안 켠 그 방이 어찌 그리 환했나요
깨알 같은 하늘빛 글씨가 어찌 그리 눈부셨나요
1호실 3호실 5호실 지나면 꿈을 찍는 7호실
어둡지도 않은 방이 꿈 그리면 어찌 그리 캄캄했나요

꿈을 찍는 것보다 더 힘든 건 꿈을 꾸는 일
허기진 마음에 미안하지만
하룻밤 그냥 주무세요 꿈을 꾸세요
그리운 이 만나는 꿈을 꾸세요
하얀 종이에 파란 잉크로 꿈을 쓰면 되었지요
그리운 얼굴 마음 속에 그리면 되었지요

책갈피에 꽂혀 있던 노란 민들레 카드
넘길 때 마다 그 얼굴 보여 주었지요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그리운 얼굴이 거기 있었지요

 

/2000. 5. 5.

 

 

16년 전의 어린이날에 동시처럼 썼지만 알다시피 이 글은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을 요약하고 조금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의 놀라운 동화는 박화목의 <봄>과 더불어 내 삶의 어떤 지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나 자신의 한 부분처럼(심지어 내가 쓴 글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들의 쉽고도 놀라운 글 안에는 보르헤스가 있었고 싸이키델릭한 환상이 있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道’가 있었나 보다. 내게 있어 <꿈을 찍는 사진관>은 시집의 제목처럼 느껴지고 그 이야기는 크고 작은 상실과 그리움에 대한 시처럼 여겨지곤 한다. 순이 대신 민들레 카드만 마음 속에 품은 채.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제 떠날 시간이야. 척박한 나스카의 평원을 혼자 지나왔어. 나그네를 평안케 하는 버섯을 얻어왔지. 외로운 가슴마다 엘도라도의 빛을 주는 환영을 만나고 왔지.

꽃수 자수 긴치마에 검은 머리 여인이 태양의 처녀인양 춤을 추었어. 아카풀코에서 티후아나까지 안데스의 나비처럼 훨훨 날아올랐어. 몹시도 귀에 익은 그 노래, 플라멩코 가락 따라 반도네온의 아련한 소리가 돈 후안의 약초처럼 내 가슴에 불을 붙이고 있었지.

오래된 흙빛 탁자에 취해 엎어진 나는 홀로 마추픽추의 정원을 거닐다 희박한 대기 속에 떨고 있었어. 낡디 낡은 잉카의 조교弔橋가 위태로운 계곡에 걸려 있었어. 암흑보다 더 짙은 우림을 향해 끝없이 비는 퍼부어대었지. 면도칼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잉카의 성벽이 내 한숨에 무너지고 있었어.

이제 떠날 시간이야. 바닷가 모래밭에 하얀 눈물 뿌리며 다시 돌아오마던 깃털 달린 뱀 께짤꼬아뜰의 사라져버린 전설이었어. 스페인에 금과 은의 방을 내어준 아타왈파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 주인을 잃어버린 마야의 도시처럼 텅텅 비워버렸어.

어느 맑고 푸른 날 허기진 마음을 코카 잎사귀로 달래다 나는 떠났어. 내 가슴은 아즈텍의 심장처럼 흑요석 고운 날에 기꺼이 뜯겨나갔어. 아카풀코의 황금빛 꿈을 다시 보기 위하여.

 

i will hide and you will hide
and we shall hide together here
underneath the bunkers in the row.
i have water i have rum
wait for dawn and dawn shall come
underneath the bunkers in the row.

 

underneath the bunker, r.e.m., 1986

 

 

/2000. 5. 4.

 

바다가 육지라면

어이야 읊어보자 라면땅이 그 어디뇨
한발 외발 뛰지 말고 노랫가락 불러보자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라면땅 노래 불러 너도 찾고 나도 살자

콩 심은 데 콩라면 열 받아서 열라면
죄가 많아 신라면 놀란 가슴 쇼킹면
심심하면 설렁탕면 술이라면 사발면
일도양단 우유라면 짜증나서 짜장면

알곰삼삼 맛보면 잘나가는 맵시라면
전라면 버섯라면 제비 찾는 카레라면
겁이 나서 바싹 쫄면 나는 나는 뭐냐면
얼어죽을 물냉면에 맞아죽을 수타면

역마살엔 팔도라면 아픈 곳엔 된장라면
삐걱대면 안성탕면 승진에는 비빔면
외로워서 슬퍼면 괴로와서 술퍼면
웃고 살자 치즈라면 폼을 잡자 김치라면

독수공방 어우동에 긴밤을 새우라면
야심한 밤 새가 울면 무심한 맘 대신하면
눈물 담근 모밀면에 매정할손 칼국수야
가련하다 이내 신세 천부당 만부당면

작자미상 구전가요 인생무상 땡전가요
작자불쌍 누군가요 용감무쌍 박댄가요
라면가락 노래가락 잃어버린 반지가락
라면땅 노래불러 너랑나랑 같이 살자

어이야 갈 곳 많다 넓디넓은 라면땅아
한발로 뛰어 넘을 골목길에 라면땅아
어허야 눈물 같다 갈 곳 없는 진흙탕아
입맛처럼 돌아왔다 안개처럼 스러진다

네가 밀면 당기면 만신창이 떡라면
해가 뜨면 밤이 오면 뒤척이다 잠이 들면
꿈이라면 깨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당신이라면.

 
 
/2000. 4. 28.

원일점

아무렴,
기약 없음과 하염없음이야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내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뼈가 있어
나날이 새겨가던 그리움이라
마디마디 사무치던 옛 하늘의 기록처럼
깎듯이 달이 차고
기울어 가고

 

 

/2000. 1. 16.

유리창 파리

언제나 신비가 감돌고 있었지
그에게는 유리창에 부딪힌 파리의 꿈이 있었지
화장실로 달아나야 할 신비가 있었지
그는 빈털터리 Mister……y

 

 

쿵쿵 가끔씩 가슴 안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지 녹음할 수도 없고 들려줄 수도 없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테니 어쩌면 다들 비슷할지도
몰라 행여 다른 몰골을 각성케 하는 거울이 있었지 결단코 전혀 닮지 않은 형제를 보았지 인적 끊긴 해양수족관을 두리번거리던 날 전시관의 미로를 답답한 마음으로 걸어 다녔어 삶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쿵쿵 내 바깥에서 똑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꼭 내 몸통만한 바다거북 두 마리가 좁은 수족관에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지 그 놈들 목숨이 그토록 질길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내 뒤통수를 때리던 그 소리와 눈빛은 거울 같았어 그렇게 좁은 수족관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단절 나는 차라리 그놈들 머리가 깨어지길 바랐는지도
몰라 겨울 햇살 비추는 창가에 서면 비슷한 슬픈 미친 바보 같은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들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일 테지 고작 그의 날개만 한 의지를 갖고 비상을 꿈꾼 것인지도
몰라 한숨으로 닦아낸 유리창만큼이나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니 그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맑고 명확한 거울이었는지도
몰라 그러면 세상의 유리창마다에 가득한 나의 날개짓 비명 소리가 그냥 찢어져버리면 좋을지도 몰라 수족관 그저 끔찍하고도
행복했던 비밀 없는 생활이 너무 그리운 것인지도 몰라 푸른 바다거북 한 마리가 창밖 허공을 부유하며 나를 두드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내가 그를, 날개를

 

 

 

/1999. 10. 27.

 

창백한 푸른 점+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흥얼거리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보았지 별 하나 찾기 힘든 그곳,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이었지
다만 오래도록 태양을 쏘아보던 사내가 있었고
한결같이 힘들고 외로운 길 위에서
직녀성을 향하여 쏘아올린 닿지 못할 꿈이 있었지
원주율 속에 숨겨진 비밀을 따라 컨택트의 꿈을 찾다
너무 비싼 댓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야
창백한 푸른 점, 비닐 포장에 둘러싸인 두터운 책 표지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 안을 속옷처럼 엿보고 싶어 했지
길어진 한숨이 이슬에 맺혀서 창백한 푸른 점을 가득 채웠지
너도 그 안에 있고 모두가 그 속에 살고 있지
단풍 같은 마음은 빛바랜 채 유구한 것
도시의 야경 너머로 보이지 않는 별이 그 자리에 멈추어
시린 밤이 새도록 창백히 떨고 있었지
무릎마저 젖어드는 새벽녘 짧은 꿈길
홀로 부유하며 창백한 푸른 점에 귀를 기울이면
그리운 숨결이 아직은 들리고 있지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
거문고 가락이 하늘 길을 따라 창으로 흐르고 있지

 

+칼 세이건

 

/1999. 10. 7.

빗방울로 걸다

띄엄띄엄 외우지도 못할 긴 번호입니다. 벽지 구석마다 얼룩이 잦아들면 빗방울 소리가 나를 대신합니다. 부엌 창틀에 빗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다르고, 팬 아스팔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다릅니다.
띄엄띄엄 알지 못할 긴 번호를 눌러 봅니다. 낮은 구름장이 붉은 빛을 띤 새벽, 발신음도 들리지 않았는데 급한 걸음들이 달려갑니다.
추적추적 떨어지는 그 소리는 늘 틀림없는 번호로 이어집니다. 계란 껍질 가지런히 둘러져 있는 화분에 닿는 소리가 다르고, 철벅이는 발자국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다릅니다.
마음의 틈새마다 사방 벽지마다 그리던 모습대로 떠오릅니다. 잠들 무렵이면, 어두운 손길마다 하나씩 훤히 불이 켜지고 머리칼의 길을 따라 빗소리가 참하니 나를 다듬습니다.
띄엄띄엄 외울 필요도 없는 길고 긴 통화입니다.

 

 

/1999. 9. 16.
/2025. 9. 14. 마지막 줄 추가.

신용사회

“나를 믿을 수 있어?”
“아니, 널 믿을 수 없어. 너는 너무 무능해. 너의 ST가 너무 나빠.”

오래 전에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오래 전이 얼마 만큼의 시간인지 그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분명 몇달 또는 1, 2년 보다는 더 흘렀음을 알지만 그 이상은 도무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대형 크레딧 매장에 들러 맥주를 사고 싶었다. 모처럼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고…
체커. 언제나 매장의 정문을 들어서거나 나올 때는 신기했다. 어떻게 알수 있을까… 눈을 인식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손의 지문을 비접촉의 교묘한 방식으로 판독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빈털털이인 그의 마음을 검색하는 것일까. 단층촬영의 방식으로 그의 갈비뼈에 뫼비우스 코드를 기록하고 스캔하는 것일까…
어딘가에 블랙박스가 있었고 그것은 물론 조난 이후라야 개봉 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이 안정된 사회 속에서 물가는 결코 변동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물건의 가격은 일정 수준에서 거의 영구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다른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좀처럼 수정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불변의 경전이었다.
그럼에도 물가는 결국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 가격과 자신의 크레딧의 조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용신뢰도는 급전직하의 추락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숫자를 볼 때마다 마음은 더 참담했다. 어디 공동 작업 센터나 리싸이클 센터로 가면 어느 정도는 레벨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힘겹게 다니는 노인을 잠깐 도와주거나,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거나, 지금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정신지체아동을 위해 약간의 도움을 줘서 그가 도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ST 레벨을 잘 유지하려면 좀 귀찮고 비참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고난에 빠진 누군가를 찾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휴지조각을 찾아서 줏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참담함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그는 점진적 개선이라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낮엔 우연히 시동이 잘 안걸리는 자동차로 애를 먹고 있는 할아버지를 도와주었다. 그냥 그 앞에서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 뿐… 뭐가 잘못된 것인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이미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없는 세상이었다. 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수치로서 보상받고 처벌받으니 모두가 자업자득인 것, 자신의 행운이고 문제일 뿐이었다.
만약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면 넘어져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일으켜 세운 자신이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내 ST를 향상시켜줘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거나 상냥한 미소를 보내거나, 아무런 까닭도 없이 고맙다 생각하고 말해도 ST는 조금씩 개선되는 법이고 실제로 그렇게 즐겨 말하는 구두쇠 같은 인간들도 몇몇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지쳐 있었고 피곤했고, 너무 많은 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CM의 출구 ㅡ 자신이 서 있는 줄에서 그의 ST 레벨이 최악의 수치로 출력되었을 때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급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몹시도 부끄러웠던 한 순간이 지나고 허탈한 느낌이 몰려왔다. 그리고 의혹의 그림자도 거기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왜 자신보다 더 낮은 신용도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뒤처진 낙오자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은 진정 의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미지근한 캔 맥주를 따서 마셨고, 간소한 침대에 누워 Self-Vision을 켰다. SV조차도 그의 크레딧 폭락을 가장 큰 화젯거리로 다루고 있었고, 끊임없이 경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SV도 그러할까. 이런 도덕-경제 이야기만 가득하고, 노래는 캠페인 송만 나오고, 영화는 의식고양을 위한 교훈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분명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딘가 향기가 분명 있었다.
그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힘겹게 채널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채널에선가 신용과 사회에의 기여에 관한 지루해 보이는 영화가 시작될 참이었다.
잠결이어서일까… 그 영화의 주인공은 꼭 자신처럼 보였다. 그의 상대역은 오래전에 가버린 그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른한 마음은 이미 눈을 감았고 잠결에 큰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깨어보니 그녀 혼자 남몰래 눈물 흘리며 크레딧 마켓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잠깐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밤새 행군을 하고 온 사람처럼 온몸이 쑤셨다. 그리고 창문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한때 이 방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전 세계의 많은 음악들을 집대성한 보기드문 최고의 데이타 베이스가 있었고, 아무 쓸모 없지만 정교하고 아름답게 생긴 항해용 나침반도 있었다. 곰팡내가 날만큼 오래되었고,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몇 권의 아름다운 책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전, 냉장고, 간단한 주방도구와 세면대,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SV, SR(Self-Radio)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 아침을 먹는 고역을 대신하여 반컵 정도의 우유를 마시고는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자 했다.
어디에나 있는 체커. 이 슬럼가에서조차도 그는 거의 최저 레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카운터가 0을 켜고 있었다. “쳇, 0이라니. 고장인데도 아무도 관심도 없군…”
하지만 주거지역을 벗어나 교육지역을 통과할 때 살펴본 체커에도 어김없이 그는 0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숨이 막히고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0. 그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꿈의 숫자였다. 인도 최고의 마법, 마야의 신관과 천문가들이 헤아리고 싶어했던 꿈, 충만과 공허의 극점에 있는 무엇…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가슴 벅찬 일,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나눌 수 있는 황금의 열쇠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체커는 어김없이 자신이 레벨 제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불신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Meta Market으로 달려가 한구석의 Sound Part를 뒤졌다. 그리고 뛰는 가슴으로 물건을 골랐다. ㅡ Virtual Sphere Sound System.
자신의 신체를  정확히 계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반경에서 마음껏 실컷 큰 소리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허리띠 버클형의 VS3를 구입하였다. 정말 얼마만에 들어보는 음악인가.
그가 자신의 VS3와 음악 데이타를 고민끝에 처분해버린 것은 ST 유지를 위한 비참한 시도이기도 했지만 거의 아무도 거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길고 혹독했던 외로운 시간, 한번씩은 그녀에 관한 느낌 만큼이나 그리운 소리들이었다.
VS3의 소리 반경을 개방시키면 공공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ST 레벨이 나빠지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꿈도 꾸지 못할 너무 높은 레벨이었기에 기꺼이 소리로 이루어진 구의 장막을 열었다.
엄청난 볼륨이 사방으로 뻗어나갔을 때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깐 놀랐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모두 영상-감각합치형의 Meta Sphere를 좋아할 뿐이었다. MS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결국 세상의 중심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그는 Self-Radio에서 나오는 지리멸렬한 노래들을 잠깐 떠올리다 뛸 듯이 기뻐했고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걷고 달리다 보니 지구라트형으로 건축된 휘황찬란한 큰 건물이 보였다. “참,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방구석에 처박혀 지낸 것일까. 이 근처에 이런 건물이 있는지도 몰랐다니…”
건물의 영롱한 네온싸인에는 Karma Hotel이라는 이름이 날렵한 글씨로 적혀 있었고, K.A.R.M.A.가 순차적으로 소멸하고 다시 켜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Karma 네온이 어둠에 잦아들 때면 형광빛 램프로 “Well, We All Shine On!”*이라는 글자들이 대신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레벨 제로의 당당함으로 KH의 화려한 입구를 거리낌없이 통과하였다.
그를 맞이한 호텔 웨이터는 ST 레벨이 준수한 아주 활달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따뜻하게 그를 접대하였고, 그의 마음에 꼭 들만한 최상층의 가장 매력적인 룸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그 방은 Flashback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호텔 최고의 시설이었고 평생토록 꿈꾸어온 순간이 거기 있었다. 놀라운 방에 관한 경외감과 찬사로 그는 웨이터에게 소정의 ST를 주고 싶었지만 그는 미소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웨이터가 문을 닫고 나가자 거기 자신의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극단의 꿈의 향연이었고 악몽의 조합이었고 아파도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이었다.
무한에 고양되고 도취된 그는 온갖 즐거웠던 순간들의 꿈을 꾸며 달콤하고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룸 써비스가 전혀 필요없는 그 방 자체가 완벽한 세계였다. 그는 그 긴 밤의 한 가운데서 그녀를 만났고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레벨 제로의 길을 보았다.

카르마 호텔의 웨이터가 방을 정리하기 위해 손님의 부재를 확인하고 들어왔을 때 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신용유지국의 확인증을 보는 아주 짧은 순간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었지만 그는 그게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아주 길고 험난한 시련을 넘어 발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망각해버린 무엇이었다. 그는 즐거운 휘파람을 불며 FB의 문을 잠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방의 이름은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영원토록 지속될 Feedback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부재에 다시 직면할 때까지.

ㅡ 나를 믿을 수 있어?

 

1999. 8. 17. jjlee(c). * Instant Karma

 

라듸오 1973

맑은 소리가 없던 시절입니다. 반쯤 망가진 미닫이문의 촘촘한 창살 사이로 덕지덕지 붙은 글자 ― 라듸오 수리.

총천연색, 완전입체음향 스테레오의 빛바랜 색상을 가진 포스터와 양판 표지였습니다. 망가진 꿈의 전파상, 그 글자의 한 획이 세월 따라 떨어져 라디오가 되었습니다.

맑은 소리로 가득한 시절입니다. 아득한 사이렌처럼 우주의 꿈을 좇는 탐색자의 소리처럼 정성 들여 찾아야 했던 주파수입니다. 이제는 자동 선국 ― 오토 튜닝으로 바뀐 지 오래, 그나마 듣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쩌다 그리운 순간입니다.

엿장수 가위질처럼 다듬이질 장단처럼 부드러운 저음이 없던 시절입니다. 초봄의 온실 속에서 울려 퍼지던 나른한 라디오 음향이 가끔 나를 부릅니다. 표지가 달아나 버린 낡은 기억들, 세월 따라 한 획 두 획 떨어져간 추억은 어떻게 발음하고 선국하는 것일까요.

마우스로는 불러낼 수 없는 주소입니다. 잡음 속 희미한 소리로나마 잡히기만 한다면 최대출력으로 증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내 귀로 들어오기보다는 내가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면 잡음은 음악처럼 나를 가득 채우겠지요.

맑고 깊은 고음이 가득했던 시절, 한 획 두 획 시간을 주워 담는 내 가슴도 따라 뛰고 있습니다.

 

 

/1999. 7.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