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다행히 염려할 수 있는 하루

아버지가 2주 동안 혈압약을 드시지 않고 계셨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며칠 전, 병원 진료결과를 보고 왔던 저녁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어서 소리도 좀 질렀나 보다.

6학년때 아버지께 알파벳과 기초영어를 배웠다. 어느날 펜맨쉽을 사오신 아버지는 그걸 하루만에 다 쓰라고 하셨다. 내게 그건 너무 많은 양이었고 나는 그것을 결코 다 쓸 수 없을 것 같아 몰래 몇장을 찢어내고 나머지를 채웠다. 저녁 퇴근해서 돌아오신 아버지는 펜맨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내가 아직 잘모르는 영어 문장으로 나를 타박하셨다. 나는 나중에 혼자 좀 울었던 것 같다.

한달쯤 전, 아버지는 누나네가 있는 서울 다녀오셨다. 걸음이 많이 불편하고 정신이 조금 흐리긴 해도 휠체어까지 사용해서 기차에 태워드리면 서울에서 누나네가 기차까지 들어와서 모셔가는 방식이었다. 그럼에도 기차에서 나올 시간이 되자 아버지는 뭔가 불안했던지 살짝 눈물까지 비쳤다. Read More

허울의 이름뿐인 성

나는 시냇물 소리에서 가을을 들었다.
마개 뽑힌 가슴에 담을 무엇을 나는 찾았다./이상

 

그저 어려울 뿐 애써 알아야 할 의미도 없지
복잡하다고 있어 보이는 것도 아닌데
유구하고도 쓸모없는 버릇처럼 남은 이름들일 뿐이지
붉디 붉은 부끄럼 같은 까베르네 쇼비뇽, 쇼비뇽 블랑
하얗게 이 마음 회쳐지고야 말 샤르도네, 리슬링
대체 무엇인지 어디 어디 말씀인지 무똥까데
카사리토무스카토다스티 군트럼슈페트레제
라포스톨끌로아팔타 샤토테시에르생떼밀리옹그랑크뤼
주워 섬기기도 어려운 와인의 이름처럼
잘못 고른 와인처럼
도대체 무엇인지 너는 무엇인지
쓸데없이 달았다가 이유없이 거품 물다가
하염없이 속절없이 묻혀버린
시큼텁텁한 이름의 나.

/2021. 7. 10.

오독오독오도독

여기 잠들다 ㅡ 그것은 무한에 가까운 복잡한 암호체계였건만 그는 극소수의 무엇인가에만 쏠렸다. 애써 해독해낸 놀라운 문장들. 하지만 어떤 것은 형편없는 오독이었고, 나는 그것에 어찌할 바를 모르곤 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비슷하였고 내일도 딱히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가온 오늘…… 반투명에서 투명으로, 말하자면 그는 언제나 유명을 달리한 유령이었다. 불가해한 세계를 홀로 그리며 이해하기를 좋아했으나 스스로는 결코 이해받지 못했던 사람이란 묘비명은 일찌감치 가슴 속에 새겨져 있었다. 새기고 꽂고 새기고 꽂고 원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원치 않는 바도 아니었다며.

6분의 영원

Dreams for Sale
The Twilight Zone, 1985
(Tommy Lee Wallace)

 

<매트릭스4>가 나온다고 들었다. <매트릭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화려한 비주얼로 채워진 이후의 시리즈들로 해서 인상적인 느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기대감이 아니라) 4편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들은 조금 흥미로왔다. 영화 속에서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것, 네오의 눈이 멀고 트리니티가 죽었다는 ‘현실’이 또다른 단계의 가상현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Dreams for Sale>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접근을 통해 현실과 꿈의 전도를 보여주었다.

1980년대의 끝자락이었던가 모르겠다. 나는 <환상특급>을 꽤 좋아했다.(반면에 <X파일>은 딱히 즐겨본 적이 없다.)  <Dreams for Sale>은 그때 보지 못했던 것을 최근에야 봤다. ‘Twilight Zone’의 주인공은 미래세계에서 10여분의 가상현실 체험을 한다. 그녀가 택한 것은 소풍을 테마로 한 것이었고 남편, 딸과 함께 행복한 야외 피크닉을 즐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상현실 장비에 문제가 생겨 그녀의 피크닉은 비정상적인 에러를 만들어냈고, 결국 그녀는 깨어나고 말았다. 그녀가 믿었던 현실이 고장난 비정상적으로 깨어져 플레이되었기 때문이다. Read More

Okie : 돌아가지 못한 밤

J. J. Cale, 1974.

 

 

케일은 이미 꿰고 있던 시절이었고, CD 앨범도 당연히 갖고 있던 때였다. 하지만 조빙의 몽롱한 브라질을 보고 들은 이래 내 마음은 온통 “질서와 진보”라는 구호가 새겨진 국기를 지닌 나라로 가 있었고, 오직 Garota de Ipanema가 내 곁을 채우고 있던 시절이었다.

그녀가 영국에서 잠깐 한국에 왔고 그때까지 두 사람 사이가 아주 어색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살짝 밤비가 내리던 밤이었다. 가디건이었거나 긴소매 티셔츠였거나 그랬을 것이다. 그녀는 지하철을 타고 와서 아무 말없이 옷 아래쪽으로 손을 집어넣더니 품속에서 레코드판 한 장을 꺼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앨범에 떨어진 약간의 빗방울을 소매로 닦아 내게 주었다. 품위도 없고 분위기도 없었지만 내 마음을 뭉클하게 하곤 했던 것, 그게 그녀의 방식이었다. 이역만리에서 내게로 전해진 LP 1장 ㅡ 하지만 그것은 이별의 선물 같은 것이기도 했다. Read More

속하지 못한 모든 시간

이름마저도 햇살 가득했던 그곳, 밀양. 열네살 즈음 라디오에서 존 덴버의 take me home country road를 듣고는 무척 좋아했다. 아홉살에 부산으로 전학 온 나는 낯선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유년기에서부터 내 생각은 안으로 안으로만 향했던 것 같다. 소니 카세트라디오와 학생애창365곡집에서 얼마나 많은 고향을 그렸는지 모른다. Read More

접시꽃 당신?

털달개비, 접시꽃 화분 전해주신 할아버지께서 예고없이 오셨다.
‘남묘호렌게쿄’를 믿는 분이신지라 모임에 발표할 글 때문이었다.
일하는 동안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접혀지고 구겨진 봉투 셋을 꺼내서 주셨다.
접힌 봉투마다에 불편한 손 떨리는 손으로 쓴
꽃이름들이 눈에 들어왔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