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이다. 텔레비젼에서 이 영화를 본 것은. 그리고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목조차도 기억나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이 부분을 볼 때의 느낌을 여태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전 다시 봤을 때도 꼭 그대로였다.
위핑 윌로우여서일까…… 윈스턴 스미스의 ‘황금의 나라’, ‘쥴리아 드림’, ‘튜더 롯지’, 그리고 ‘버드랜드의 자장가’와 ‘오델로’에 이르기까지 왜 ‘willow’란 단어에 대해 각별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아홉 아니면 스무살의 어느 여름날, 조금 늦은 오후 낮잠을 자다 깨어났다. 그런데 가구들이 조금 다른 빛깔처럼 보였다. 마치 방 전체가 물에 잠기었다가 나온 듯했다. 모든 가구들이 물에 젖은 듯 조금씩 더 짙어진 느낌이었는데 무엇인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옷장의 어두운 갈색 빛깔이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계속 그것만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일어나거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사라질 것 같았던 그 빛깔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겐 있지도 않은 쥴리아를 그리며 위핑 윌로우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봤던 빛깔의 이름이려니 했다.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윌로우 송의 빛깔도 비슷하였다.
앞에 있는 운전자의 창밖으로 나와 있는 손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다 피웠는지
담배를 부비더니 슬그머니 길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화단을 향해 가래를 뱉고 창문을 올리면 끝,
더 바랄 무엇이 있는지 백팔염주가 룸미러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의 차는 높고 깨끗하고 연기는 가슴에 남았다……
the man who wasn’t there ㅡ 자신이 저지른 일은 그냥 넘어가고 그가 하지 않은 일로 받은 죄에, (비록 전재산을 털어 변호사를 대긴 했으나) 어딘지 자포자기적인 그의 태도에 깊이 공감했었다. 실제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고 한들 지은 죄와 짓지 않은 죄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마치 영화 속의 베토벤 소나타처럼 위안인지 맹목인지 그다지 상관없는 일…… 실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못했던 레이첼의 悲愴을 듣는 에드 크레인처럼 내게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단조로운 삶과 흑백의 세계에 던져진 유일하지만 몹시 제한적인 ‘빛깔’ 같은 것.
차는 멈추고 음악이 흐르는 사이 내 앞의 운전자와 에드 크레인과 나를 오가며 결국 그인지 또다른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채 삶은 흩어지고 장면만 남았다. 몹시 길고 지루한데 두고두고 반복되는 장면, 오래 동안 피웠고 오래 동안 끊고 지낸 담배 연기가 가슴 속에 자욱하다. 今生受者是…… 가슴 속 연기만 남았다.
‘希罗多德희라다덕’이라는 희랍의 학자가 입버릇처럼 즐겨 말했듯이 “나로서는 잘 믿기지 않지만” 직경이 이만육천십리나 된다는 박처럼 둥글게 생긴 지구의 저 건너편에는 ‘南亚美利加남아미리가’라는 별유천지가 있어 巴西파서라는 나라가 있다.
南亚美利加에서도 그 영토가 가장 넓은 이 나라는 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葡萄牙포도아의 말을 쓰고 있으나 많은 국민들이 글자를 깨치지 못한 설움을 안고 살고 있다. 수도는 파서리아巴西利亚이지만 里约리약, 그러니까 ‘里约热内卢리약열내로’라는 이름의 풍광 좋은 도시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 백성의 대부분은 천주신앙을 지극정성으로 믿고 있으나 멀리 아불리가에서 유래한 무독(파서에는 이를 ‘마고파’라고 이른다)이라는 종교의 해괴한 풍속도 아직 남아 있다.
파서 사람들은 콩을 볶아 만든 咖啡가배라는 이름의 신묘한 차를 즐기는데 그 향이 워낙 짙고 독하여 한번 맛을 들인 사람은 헤어나오기가 힘든 것이 마약과 같다고들 한다. 또한 桑巴삼파라 불리우는 음악과 더불어 가무를 즐기는 습속이 있는데 咖啡나 桑巴나 그 맛을 본 사람들이 흠뻑 빠져든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저 세인들에게는 글월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미개하고 가난한 백성들이 사는 야만의 땅으로만 알려져 있으나 지구의 허파라 불리우는 애마존 지대의 원시림과 伊瓜苏大瀑布이과소대폭포의 장관에다 里约의 아름다운 해변과 삼파축제, 위대한 삼파와 巴萨诺瓦파사낙와의 가인들로 해서 더욱 이름 높은 나라다.
그리고 그 숱한 파서의 별들 가운데서도 진정한 한량이 있었으니 시인이자 파서의 사신으로, 평론가로 가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의 이름은 费尼希邬斯비니희오사 迪摩赖斯적마뢰사다. 约翰列侬약한열농과 披頭合唱團피두합창단에서 시작된 나의 음악적 여정이 적마뢰사를 만나 그의 시가에 귀를 기울이니 내 삶의 행운이며 복이라 여긴다.
적마뢰사의 풍자화 (38세 무렵)
적마뢰사는 여느 가인과는 한참 다른 경력을 지닌 사람으로 일찌기 영길리의 우진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며 19세의 나이에 이미 노래를 쓰기 시작했고 만 20세가 된 1933년 <노정 路程 O Caminho para a Distancia>이라는 시집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33세에는 나라의 부름을 받아 아미리가 합중국의 도시 낙삼기의 부영사가 되어 파서의 사신으로 그 소임을 다 하였다.
외교관으로 일하던 40세 무렵에는 오비이사와 우려적희(Orpheus and Eurydice)라는 희랍신화에 근거하여 <오비오적의상(Orfe da Conseicao)>이라는 희곡을 세상에 내었는데 그가 음악과 연을 맺은 것은 이 희곡에서 기인한 바가 크다. 오비오적의상의 음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무명의 작곡자 동교빈(본명 은동유 카루사 교빈)을 만나 평생의 친우가 되었고 두 사람은 더불어 숱한 가사를 지어 오늘날까지 널리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그의 독특한 예술적 여정은 자신의 기념비적 작품 “성찬삼파”에 잘 묘사되어 있다.)
파발로 섭로달 + 적마뢰사
1958년에 세상에 알려진 노래 “만회사념(Chega de Saudade)”은 적마뢰사가 동교빈과 더불어 만든 최초의 작품들 가운데 하나로 그 곡이 지금에 와서 파사낙와로 불리우는 가사형식의 시초가 되었다. 파사낙와의 교종이라 불리우는 길패두가 비파를 뜯고 애리채기 카도수가 노래하였다. 이 곡이 수록된 애리채기의 시가집은 지애적가, 즉 지극한 사랑의 노래라 불리운다.
바야흐로 느린 삼파가(Samba Cancao)의 전통에 작사악(Jazz)을 가미하여 한층 세련된 형식과 리듬으로 다듬어진 파사낙와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한 동교빈이 곡을 짓고 만동사가 가사를 쓴 “주조(Desafinado)”라는 제목의 노래에서 ‘신경향’이라는 뜻을 지닌 파사낙와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되어 이때부터 이러한 종류의 음악을 파사낙와라고 부르게 되었다. ‘음치’라는 제목의 노래가 파사낙와를 세상에 알린 셈이다.
Arrastao? : 적마뢰사, 애리채기, 동교빈
한편 마헐 카류라는 법국의 감독은 <오비오적의상>을 바탕으로 <흑인 오비오>(1959년)라는 활동사진을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로역자 방법(루이즈 봉파)이 곡을 쓴 “가년화청신(Manha de Carnaval)”과 동교빈/적마뢰사의 “쾌락(A Felicidade)”이라는 시가가 파서의 음악을 육대주에 알리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영화 또한 작품성을 인정받아 풍광좋은 법국의 도시 감성(Cannes)에서 열리는 감성전영축제 대상작이 되었으며 그러한 인연으로 해서 적마뢰사는 1966년의 전영축제에서 심판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동교빈과 적마뢰사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린 것은 “이파니마의 여해(Garota de Ipanema)”라는 파사낙와 형식의 시가였다. 어느 날 이파니마에서 만난 애로의사(Heloisa)라는 낭자에게 반해버린 동교빈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차던 적마뢰사는 그를 위해 “이파니마의 여해”라는 시를 썼고 거기 동교빈이 곡을 붙인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파사낙와 가락이 되었다. 애로의사에 관한 동교빈의 연정은 결실을 맺지 못했으나 노래만은 남아서 옛 사랑의 전설을 오늘도 전해주고 있다.(동교빈은 애로의사의 혼인식에까지 동부인 하여 참석하였다니 양반이 할 노릇은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애로의사는 추후 자신의 딸과 더불어 어느 도색화집에 나체의 초상화를 실어 동교빈의 순정을 무색하게 만들었으니 애로의사의 애로가 그런 것이었는지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 기억함인지 지금도 파서의 리약이나 아미리가합중국의 장안 화성돈에 가면 이파니마의 여해를 기리는 “여해루”라는 반점과 “적마뢰사”라는 이름의 요리가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음주가’를 몹시 즐겼던 적마뢰사는 보리로 만든 술(碑酒)을 마시는 것은 시간낭비라는 만고의 명언을 남겼다.
꽃다운 청춘이라 하염없이 지내려니
쓸쓸한 이 내 마음 밤이 되면 잠 못 이뤄
파서 노래 듣는 객을 님인 줄 모르다니
언제나 좋은 기약 고운 님을 만나볼까+
ㅡ 금오신화 만복사저포기
+”만회사념(滿懷思念)”은 Chega de Saudade의 한역.
+말미에 인용한 글은 본시 매월당의 시인데 “남교에 지나는 객”을 글의 성격에 맞추어 “파서 노래 듣는 객”으로 바꾸었다.
+1883년 9월 유길준은 27세의 나이로 보빙사(報聘使)가 되어 미국을 돌아보고 1885년 12월에 돌아왔다. 1896년 4월 1일은 최초의 국한문 혼용체로 작성된 서유견문(西遊見聞) 1,000부가 발간되었던 날이다. 이작자의 이 글 또한 그에게서 배운 바 크다. 적마뢰사와 파사낙와에 관한 기록을 쓸 계기를 준 NCRW에도 감사한다. 다음 회에는 적마뢰사의 60년대 시가집들을 살펴볼 예정.
/2003. 3. mister.yⓒmisterycase.com
+<레코드방>에서 옮겨올만한 글이 별로 없었는데 보싸노바의 역사에 관해 무협지 풍으로 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무려 13년 전에 쓴 것인데 계속 작업하려 했으나 인명, 지명, 노래 제목의 한자어 변환에 시간이 너무 들어 2편까지밖에 못썼다. 오늘 글 옮기면서도 조금 수정하고 추가했는데 만회사념 ㅡ ‘사념’을 돌아보며 적마뢰사의 시대에 관해 수정 작업도 하고 이어서 써볼까 생각도 든다./+2016. 8. 20.
<오비영>의 배경에 기타 연주를 넣었습니다.
<전망 좋은 방>에 어울리는 노래가 있었듯 <오비영>에도 마땅한 소리를 찾아야 했지요.
그리고 나는 자연스레 어떤 곡을 떠올렸습니다.
자신이 쓴 곡은 아니지만 기타를 연주한 그 역시 빼어난 작곡가입니다. 그가 이 곡을 연주하던 시절을 보면 ‘검객’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기타를 들었고 가끔 노래도 했으니 가객이 더 맞겠습니다만 짧은 머리카락에 형형한 눈빛, 그리고 날카로운 연주가 검객을 생각나게 합니다. 연인의 눈동자에 어린 시를 읽어내고 그것에 관하여 이토록 아름다운 도입부를 만든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저릴 만큼입니다.(기다리다 조금 녹아버린 아이스크림 같은 어눌한 목소리를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그의 칼날이 시의 눈, 시의 눈빛이 되어 가슴을 베고 지나갑니다. 어느 순간 그 상처로부터 내가 놓쳤거나 버렸거나 잃어버린 것들이 멈출출을 모르고 핏방울처럼 흩어집니다. 하지만 애써 누르지는 않습니다. 어찌 쓰라림이 없겠습니까만 잠깐 그런다 해서 아물 상처가 아닌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상처가 소리가 된다면 그럴 것이고 어떤 시가 소리가 된다면 그럴 것이고 나는 또 그 소리를 베껴쓰고 싶습니다. 표절처럼 그대로 옮기고 싶습니다.
mister.yⓒmisterycase.com
+
<오비영> 카테고리는, 대부분 기존에 쓴 시로 이루어진
누군가의 시집 계획서 또는 시집인데 문턱(패스워드)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자연스레 오픈이 되겠지만 필요하신 분이 있다면……
연일 지독하게 햇살만 내리쬐다 모처럼 후련하게 비가 쏟아졌다. 금세 그치는가 싶더니 천둥까지 보태어가며 오후 내내 오락가락이다. 내가 얼마나 바보였던지 알려준다며 콩닥대던 빗방울의 리듬이 사라진 자리, 비의 노래들을 생각하며 한참을 보냈다.
사이먼 버터플라이의 비는 가볍게 흩날리고 비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마리 라포레는 조금 부담스럽게 질척인다.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비음의 발음을 따라 우리나라에서 다시 비가 되어 불려졌다. 쇼비 쎙빠라… 우림을 향해 끝없이 쏟아지는 조지 벤의 비에서는 이국적이면서도 에로틱한 슬픔이 느껴지고, 발터 반달레이의 오르간은 비의 바깥인양 안온하다. 벨로주의 여름 비는 늘 내 마음 같았고 다윗의 별이 뜨는 나라의 상징인 하티크바는 희망이라는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이 땅에 와서 연지곤지 예쁜 얼굴 빗물로 다 젖게 만든다는 서글픈 비가 되었다. 마음이 그러하면 비가 아닌 것도 비가 되었고, 이국의 희망가는 비가로 바뀌었던가 보다.
it’s hard to listen to a hard hard heart…… 그리고 패티 그리핀의 노래가 다시 귀에 들어왔다. 그녀의 앨범 제목 하나가 마음을 끌었다. 이제 비는 그쳤고 비의는 어디에도 없이 비의 자취만 남았다. 숱한 마음이, 비에 관한 수많은 노래가 강물 위의 비처럼(라일락 타임) 사라졌으나 어쩌면 그냥 팝송, 흘러갔거나 흘러갈 팝송처럼 또 비가……
어디에 소용있는 그리움일까
화분 홀로 시들한데
남의 일인양 비 쏟아지는 창가에는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rain, patty griffin
+
10여년쯤 전에 쓴 두 줄은 말 그대로 드라이하고, 오늘 고쳐써본 글은 보다 디테일하다.
다시 쓸 때는 고친 것이 좋아 보이더니 결국엔 사족이거나 헛수고인 듯도 싶다.
패티 그리핀의 노래 영상에 내 글과 비슷한 느낌이 있어 여기 시를 붙였다.
는 아니다. 소리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녀를 생각하면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1984년 채링턴 문방구의 다락방에서 윈스턴 스미스와 쥴리아가 마셨던 ‘진짜 커피’ 같은 느낌 ㅡ 예전에 좋아했던 어떤 원두커피의 조합이 생각난다. ‘마일스톤’이라는 회사의 제품이었는데 ‘아이리쉬 크림’에 ‘프렌치 바닐라’를 살짝 섞어 연하게 커피를 내리면 ‘아이리쉬’라는 단어의 어감처럼 맑고 깔끔한 맛이 났다. 그 커피 맛을 본지는 10년은 더 된 듯, 특별히 고급스런 제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상하게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어느 아이리쉬 가수가 흥청망청 즐거이 노래할 때 그녀의 모습을 처음으로 봤다. 무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그녀가 눈에 들어왔다. 앉아서 아코디언(반도네온)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 내 눈을 끌었다. 마치 삶과 음악과 어울림의 기쁨으로 충만한 듯한 이의 모습 같았다. 그런 척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에겐 즐거움 밖에 없는 것 같아, 웃음 밖에 없는 것 같아 조금 불편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좀 다른 분위기의 노래를 찾아보려 했으나 시도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웃지 않는 그녀의 사진을 찾기가 쉽지 않듯이. 삐아솔라 류의 어떤 엄정함도 고뇌도 없이, 케이준/자이데코의 고락과 애환도 아닌 시끌벅적한 축제만 있을 뿐이어서 그녀 자신이나 그녀가 참여한 곡 가운데 딱히 좋아할만한 연주나 노래도 별로 없다. 하지만 그녀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묘하게도 내게 조금 위안이 된다. 그래서 가끔 그녀를 찾아서 본다. 도저히 풀 길 없는 마음에 약간의……
그리고 단 한곡, 그녀가 아코디언을 연주한 어떤 라이브는 마음을 울렸다. 슬픈 곡조여서 그런 것은 아니고, 연주와 보컬(그녀가 노래한 것은 아니다)이 무난히 마음에 들었던데다 그 곡이 내게 주는 의미가 각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주로 아코디언을 연주하지만 피들과 틴 휘슬 연주도 곧잘 한다. 그녀는 1968년에 태어났다.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데+
80년대의 허전한 끝자락은 그렇게 흩어졌으나 아코디언보다도 노래보다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오래 전의 아이리쉬 커피맛과 그것을 기억나게 하는 그녀의 웃음이다. 1968년으로부터의 웃음이 시끌벅적한 이국의 잔치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어떤 구경꾼의 눈을 가득 채우며.
(커피는 결국 찾았다. 역시나 내 기억의 흠결 ㅡ 마일스톤이 아니라 밀스톤이었다. 그래서 다시 살펴보니 조금 달라진 포장의 프렌치 바닐라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아이리쉬 크림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아이리쉬의 향은 아이리쉬에게서 맡아야 하는 것인가 보다.)
아직 히우에서는 올림픽이 진행중이다. 소식이야 매일같이 듣지만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음악이 있는 나라의 제일 큰 도시에서 열렸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큰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그런데 오늘에사 히우 올림픽의 마스코트를 보게 되었다. 이름이 비니시우스였다. 비니시우스라면 나는 단 한 사람을 깊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니시우스의 곁에는 또다른 마스코트도 하나 있었다. 장애인 올림픽을 위한 것인데 그의 이름은 ‘통’이었다. 비니시우스와 통,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브라질의 시인이자 외교관, 가수, 작곡가, 그리고 영화 평론가였던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작곡가 안토니오 까를루스 조빙이 올림픽의 마스코트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다. 비니시우스란 캐릭터는 팔과 다리를 마음대로 늘이고 체력적으로 강해질 수 있지만 그런 능력은 좋은 일에만 사용할 수 있으며, 통의 머리를 덮고 있는 변화무쌍한 잎과 열매는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상지한다고 한다. 지금은 ‘비니시우스와 통’을 검색하면 온통 마스코트가 먼저 나온다.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 사실 마스코트에서 그들의 음악과 사연은 전혀 느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이름들이, 모습이 히우의 올림픽으로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뭉클하였다. 그리고 마스코트로 본 두 사람의 모습은 자연스레 Carta ao Tom을 생각나게 했다.
꼬무 지지아 이 뽀에따 ㅡ 이 노래에 대해 비니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텅 빈 호텔 방에서 나는 톰을 그리워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보내지 않은 숱한 편지들처럼 그에게 편지를 쓰고자 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또낑요을 불러 새로운 노랠 쓸 시간이라고 했고 이제는 과거가 되어버린 멋진 보싸노바의 시대와 우리가 했던 것들을 회상했다. 그 곡의 이름은 ‘톰에게 보내는 서신 74’이다.”
1974년의 일이기도 하지만 나는 가끔 그것이 74번째란 생각도 한다. 두 사람이 “이빠니마의 소녀”를 만든 나씨멘뚜 씨우바 거리 107번지 ‘통’의 집에서 엘리제찌 까르도주를 위해 “깊은 사랑의 노래”를 쓰던 시절에 관한 이야기다. 이 곡의 피아노 전주는 노래 가사 속에도 나오는 ‘헤덴또르(예수상)’가 있는 언덕의 이름 ㅡ “꼬르꼬바두”의 주제부를 상큼하게 차용하고 있다.
Ah que saudade…… 그들의 음악과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를, 그리고 내 귀가 온통 브라질을 향해 있던 시절을 그들처럼 그리워하며 나도 편지를 쓴다. 2분 36초의 시간을 하염없이 늘여가면서.
+첫곡은 오리지널이고 두번째는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세상을 떠난 후 이루어진 추모 라이브 앨범에 수록된 것이다. 원곡처럼 산뜻하고 상큼하지는 않지만 그 어떤 공허감을 나는 알고 있다. (1974년 이후 조빙은 자신에게 온 편지에 답을 붙였고 그래서 Carta ao Tom / Carta do Tom으로도 불리우곤 했다.)
++비니시우스와 통. 그런데 파서의 발음으론 좀 그래서 그냥 ‘통’으로 했다. 내가 들은 바로는 ㅌ과 ㄸ의 가운데쯤, 그리고 통과 토의 가운데쯤(비음)인 듯 싶다.
텍사스에 사는 릴라와 레이먼드 하워드 부부는 1997년 6월, 가까운 템플 시에서 열리는 개척자의 날 축제에 가려고 차를 몰았다. 그러나 이 노부부는 2주일이 지나 목적지로부터 북동쪽으로 수백 마일 떨어진 아칸소 주의 핫스프링스 국립공원 산기슭 아래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경찰은 남편 레이먼드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병력이 있고 아내 릴라는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두사람이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헤매다 숨졌다는 결론을 내렸다. 길을 잘못 든데다 자동차까지 고장이 나자 차를 버리고 걷다가 쓰러져 숨졌다는 것이었다. 이 노부부의 아들은 자신이 축제장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제안했지만 자신의 부모는 아직 건강하고 충분히 우리끼리 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도시를 순회하며 공연 여행을 하던 토니 스캘조는 스핑크스로부터 ‘이 노부부는 왜 실종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토니 스캘조는 하워드 부부가 길을 헤매다 숨진 것이 아니라 두사람이 처음 만났던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절로 돌아가려 했다고 대답했다. 그들은 황금빛 고속도로를 출구로 택했으며,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둔 채 춥거나 배고프지 않고 병들지도 늙지도 않는 그곳으로 떠난 것이라고……
/낙담한 스핑크스를 위한 타이틀 곡, 이창기 (부분).
라디오나 텔레비전에서 이 노랠 들었다면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창기의 시집에서 이 노랠 읽었고, 그래서 밴드와 사연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내게 이 노래는 토니 스캘조가 곡을 쓰고 이창기가 가사를 붙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20세기의 오이디푸스가 된 토니 스캘조가 내어놓은 (스핑크스를 죽음에 이르게 할) 멋진 답에 관해 그(이창기)는 내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리뷰/시를 썼다. 어딘지 트로트 가요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음악보다는 생각이, 가지 못한 길보다 그들이 간 길이 100배쯤 멋지게 보이는 곡에 대하여. 그(스캘조)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나름의 방식으로 ‘기정사실화’하였기에 내비게이션이나 GPS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ㅡ 스핑크스를 낙담시킨 이들의 답을 따르자면 ㅡ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노래는 ‘변사’라는 허망한 결과를 넘어 전혀 다른 과정을 만들어내었다는 점에서 ‘마술적 리얼리즘’과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스캘조의 이야기가 허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둘 가운데 한 사람은 틀림없이 낯설 수 밖에 없는 부부와 어디서 본 듯한 그네의 아이들 ㅡ 옛 애인의 가족사진을 보는 느낌과 길을 잃고 실종되었다 세상을 떠난 노부부의 행로가 과거 또는 전혀 다른 세상에로의 멋진 여행이었다는 주장 가운데 어느 쪽이 현실 너머의 이야기인지에 관해 답하기 어렵지 않은 당신이라면.
They made up their minds
And they started packing
They left before the sun came up that day
An exit to eternal summer slacking
But where were they going without ever
Knowing the way?
/The Way, Fastball(Tony Scalzo)
‘스타바운드’와 더불어 그의 소식을 들었던 여름날이 벌써 3년이 지났나 보다. 어쩌면 아주 짧았던 것도 같고 어쩌면 그보다 한참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도 든다. 또 어쩌면 光年의 세월만큼……
Short and sweet , 너무 짧고 단출해서 허전했던 그의 노래 한 곡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의 모든 노래를 알고 싶어 했고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에 그리 되었다.
시작도 끝도 희미하고 절정도 없는 읊조림
가끔씩 눈에 띄는 놀랍도록 직설적인 표현들
그리고 마치 물위를 걷듯 현을 스치는 듯한 기타 소리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지금도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어찌하여 에릭 클랩튼의 After Midnight은 히트를 하고 그의 버전은 거의 묻혀버렸냐는 것이다.(케일이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들었던 자신의 노래는 에릭 클랩튼이 노래한 것이었다).
케일을 상징할만한 또다른 에피소드로는 그와 잘 아는 기타 제작자의 소개로 죠지 해리슨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케일의 음악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내츄럴리” 앨범을 늘 차에서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되물었던 것은 케일이 이후로 또다른 앨범을 내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죠지 해리슨이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의 일이었고 유명인사와 특출한 무명인사의 만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내 느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적이 없고 수없이 들어온 그 짧고 단순한 음악들이 지겹게 들린 적도 없다. 더이상 그의 새로운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들려준 노래들만으로도 그는 충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