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싱어송라이터 mohsen namjoo는 낮은 목소리와 찢어지는 고음이 교차하며 인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런 면에서는 좀 예외적인 khat bekesh는 오래된 멕시코의 맘보-볼레로 송에서 완벽하게 흥을 도려낸 채 슬픈 템포로 노래하는 것이 의욕 다 달아나버린 요즘의 내 마음 같았다. 촌스런 분위기의 화면이지만 나는 남주가 자신의 세타(페르시아의 전통악기)를 히치하이킹 시켜버리고 돌아서는 장면에 깊이 공감하였다. 자유의 기회로부터 쓸쓸히 등을 돌리던 빠삐용의 드가처럼, 거꾸로 매달린 스패니쉬 퀘셔천 마크처럼, “끼엔 쎄라, 후 윌 잇 비?”.
지난 새벽 잠이 깨었다. 창녕이었다. 불투명한 창문은 열어둔 탓에 바깥이 잘 보였고, 온갖 자질구레한 것들은 적당한 어둠 속에 감춰진 채 적막 속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잠시 마당을 바라보던 내 마음에 문득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오래 전에 꽤 좋아했던 노래, look at me였다.
한밤중에 듣는 그 노래는 사랑노래라기보다는 묘한 허무감을 내게 남기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그 노래가 수록된 앨범 자켓을 좋아해서 책상 위에 액자 마냥 얹어두곤 했었다. 또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내 ‘삐삐’에도 그 노래가 흘렀다. 허리에 찬 삐삐에선 가끔 불이켜지고 진동이 울렸다.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것이다.
가끔은 ‘3504’ 같은 메시지도 있었다. 그것은 조금 더 길어져 35가 몇번씩 이어지기도 했고 04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3535353504040404. 문자를 사용할 수 없는 기기이다보니 숫자로 대신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언어와 곡조로 번역하자면 “love you forever and forever love you with all my heart”쯤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허리에서 감지된 진동이 마음을 두드리곤 했다. 아무런 답도 할 수 없었지만 그 신호 자체가 어떤 연결인양 여기곤 했다. 그리고 잠깐 울렸던 메시지는 원주율처럼 끝없이 이어지며 나를 호출할 것이라 생각했다. 내가 속했던 세상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 여기던 시절이었다.
우리, 또는 우리들은 제각각 다른 세상으로 발을 디뎠고 그곳에는 삐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호출하던 신호 또한 일방의 무한한 공간 너머로 어떤 해석도 불가능한 파편으로 흩어져버렸다. 노래는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있지만 듣지 않은지는 몇년이나 되었는지 가물가물하다.
그러다 지난 새벽 잠이 깨었다. 온갖 잡다한 것들이 어둠 속에 곱게 감춰진 마당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의 꿈이었다.
집안 행사로 모처럼 해운대를 다녀왔다. 평소 별로 갈 일 없고 그리 가고 싶은 곳도 아닌데 부페까지 다녀왔다. 이것저것 접시에 담다 보니 조금 이상하게 적힌 낯익은 단어가 있었다. 과카몰 새우요리인가 아무튼 비슷한 이름이었는데 ‘과카몰레’를 그렇게 표기한 모양이었다.
평소 요리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전혀 사람이라 과카몰레를 맛본 적은 없었고, ‘듣기만’ 했을 뿐이다. 여기서 듣기란 단어나 요리에 관해서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노래로 들었다는 말이다. 좋은 인상에 행복한 표정이 좀 지나쳐서 괜스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케빈 조핸슨(이 사람 이름은 왠지 영어식으로 불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의 노래로 그게 요리/소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과카몰레 또한 그 재료가 되는 아보카도(와카틀)와 토마토(토마틀)처럼 나와틀어에서 유래한 단어라고 하며, 과카몰레를 잔뜩 얹은 삶은 새우는 꽤 맛있었다. 언젠가는 ‘(다녹은) 초콜렛/쇼콜라틀’까지가 소스의 재료가 되는 릴라 다운즈의 와하까 몰레도 맛볼 수 있을까 모르겠다.
가녀린 달 한 조각을 제외하고는 밤바다에서 볼 것이라고는 너무도 생경하게 치솟아올라 있는 초고층 아파트뿐이었고, 부페서 채운 더부룩한 속보다 더 많은 우울이 내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과하게 즐겁고 화사한 분위기의 과카몰레는 limon과 sal의 지나친 상큼함과 지독한 씁쓸함이 내내 한켠에 함께 있었다. 우적우적 몰래 씹어삼킬 수밖에 없는 몰레, mi querida soledad!
거의 열흘이 넘도록 뭔지 모를 몸살 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주 벌초 갔을 때도 그래서 내내 힘들었고 오늘까지 마찬가지다. 그 사이 몸살약도 이것저것 먹었고 오늘도 약이 필요한 것 같다. 나이 들어 보는 만화가 젊은 날의 느낌과 같을 수는 없지만 가라앉은 몸을 눕힌 채 대충 봤던 <너의 이름은>과 <초속 5센티미터>를 다시 봤다.
<너의 이름은>이 좀 더 드라마틱했지만 나는 <초속 5센티미터>의 첫번째 단편, 폭설 속에 하염없이 연착하는 기차 속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토오노 다카키의 심정이 어떤 이의 삶 전반에 걸친 어떤 느낌과 비슷했던 까닭이다. 신기하게도, 그리고 다행이 모골라의 노래와 <초속 5센티미터>가 만나는 지점이 있어 아래에 링크했다. 모골라는 1968년에 결성되어 40여년을 활동해온 터키 락 밴드의 대표 주자 가운데 하나로 ‘(터키에 있는) 몽골리안’을 의미하며, 노래 ‘요룸 시닌레 yolum seninle’는 ‘너와 함께 이 길을’이란 뜻이다. 노래의 배경이 된 애니는 <초속 5센티미터>의 첫번째, ‘桜花抄 벚꽂 이야기’이다.
저녁 7시가 아닌 11시 15분 도착. 그것이 비극적이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대개의 현실처럼 토오노 다카키가 여자 친구(시노하라 아카리)를 만나지 못한 것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서두의 인용은 그런 내 심사를 대신하는 대사였다.
그러고보니 내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다르지만 그런 허탈함을 불러온 일이 있기는 했다. 여름방학때 고향에 있는 외가집에 놀러 갔다가 거기서 초등학교 1학년 때의 누군가를 만난 것이다.(아이들의 놀림으로 두 손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뒷모습, 그녀의 두갈래 땋은 머리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외가집에 있는 며칠 동안 그녀와 한 두번 따로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가 초록색과 유치환의 깃발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도 기억난다. 우리는 어느 일요일 부산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그녀는 그날 오지 않았고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그날로부터 멀지 않았던 다른 일요일, 몰래 밀양으로 간 나는 그녀의 집까지 찾아갔으나…… 당황한 그녀의 모습을 잠깐 보았을 뿐,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리운지난날의기억들이변한다모든것이변한다
/지주회시,이상
이 한줄은 그해 가을과 겨울 내 마음의 모든 것이었고 그래서 기차 속의 토오노군의 심정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세번째 단편에서 철로 너머 보이지 않는 그녀에 분개하는 청춘들의 소감은 그 기차처럼 나를 떠난지 오래, 애니메이션 속의 노래가 내겐 별로였지만 가사 한 줄은 생각난다. 이 길 함께 하지 못한 그 누구일지……
저스틴 벤슨(+아론 무어헤드)의 세 편의 영화를 잇달아 봤다. 제일 먼저 본 것은 <타임루프 : 벗어날 수 없는>이란 제목으로 나온 <The Endless>였다. 정체불명의 존재가 만들어내는 미지의 현상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독특했다. 진행은 느렸어도 마지막 부분은 짜릿했고, 결말은 조금 불분명했으나 그들은 어쩐지 ‘타임 루프’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 같았다.
두번째로 본 것은 레졸루션이었다. 신기한 것은 레졸루션이 <The Endless>의 전편이기도 하면서 타임 루프 존의 일부를 형성하는, 그러니까 <The Endless>의 한 부분으로 편입된다는 점이었다.(두 편의 영화 모두 스토리에서나 진행에서나 답답함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제일 마지막에 본 <스프링>은 상대적으로 좋은 평을 받은 영화이다. 러브 스토리이기도 하고, 결혼에 대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 소재가 되는 것은 일정 부분 호러를 동반한 구조이다. 하지만 <황혼에서 새벽까지>에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던 현실과 비현실의 엉뚱하고도 극명한 전환과 달리 <스프링>에서의 괴기스런 현상은 제한적으로만 드러난다. 그들이 무엇을 택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곳엔 사랑이 있었다.
<스프링>에는 내가 그렸던 어떤 세계가 있었다. 왜소하고 약해 보이지만 나름 강하고 분명했던 남자 주인공의 캐릭터는 마이클 스타이프나 톰 요크(이쪽에 더 근접하는 듯)의 느낌이 들었다. 디테일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가 사랑에 빠졌던 그녀가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던 시대의 폼페이에서 태어나 그 시절을 살았다는 이야기는(특히나 빵집에도 들렀다는 것은) 새삼스레 내 가슴을 뛰게 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시 속의 화자로서) 그 시대 폼페이에서 빵가게를 했었기에 그녀를 만났거나 알고 지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상 속에서 거기서 살다 죽었고, 그녀는 영화 속 그 세계에서 태어나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또 그의 선택은 내가 실현한 적 없는 변심에 대한 내 느낌과 일치했다.
<Endless>를 나름 흥미롭게 본 까닭에 <레졸루션>과 <스프링>까지 보게 되었다. 영화로서의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스프링>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도 사랑했고 삶의 어떤 때에 나는 그녀의 실체를 전혀 알지 못했기에 퍼펙트한 그녀가 버겁고 과분할 따름이었다. 천민에게 잘못 전달된 귀족의 옷인양. 결함으로 해서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생각일 뿐이지만 아무 것도 알지 못했던 나는 정말 바보였다. 또 자기 비하가 아닌, 부족하고 모자란 나를 일깨워달라고 말하지 못한 나는 참으로 어리석었다. 그런 면에서 스프링의 그는 어떤 이에 비할 수 없는 멋진 사람이었다.
내게 있어 willie nelson은 “always on my mind”는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쟈니 캐쉬를 듣다가 ‘노상강도’ 패거리에서 그를 다시 보았고 어쩌다 가끔 들었다. 그리고 여기 팔십이 넘은 늙은 가수가 노래하는 summertime이 있다.
“올웨이즈 온 마이 마인드”인 썸머타임이 몇곡 있는지라 새로운 자리가 있을지 아직 잘 알 수 없지만 그의 사그라든 여름날 또한 인상적이었다.
넬슨의 기타는 그만큼 낡고 늙은 채 처연한 여름날의 음률을 만들어낸다.(그럼 나는 어떤 분의 유명했던 낡은 구두가 그날 이후 어찌 되었을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실소하게 된다.)
어릴 적에 “썸머타임 킬러”라는 제목의 영화 포스터가 길거리에 붙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썬글라스를 낀 어떤 남자의 얼굴이 거기 있었던지 가물가물하지만 그때는 그 제목과 포스터가 참 멋져 보였다. 이제는 본 적 없는 그 영화의 제목이 삶과 이별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책감을 지울 수 없었던 나는 마음의 아주 작은 평안을 그리며 근 5년여를 푹푹 찌는 사무실에서 에어컨 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그것은 쓰리고 기운빠지는 짓일 뿐이었다. 영영 알 수 없는 답이건만 결코 흩어지지 않는 그리움으로 여름날 돌아본다.
보르헤스의 트레저 아일랜드 ㅡ 최근에 구입한 스티븐슨의 단편집 첫 페이지를 펼치니 그가 쓴 헌정사가 있었다.(정확히 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 수록된 헌정사다.) 사촌이었던 캐서린 드 마토스에게 쓴 긴 편지시의 일부라고 하는데 인상적인 헌정사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을 생각나게 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우리 인연이 끊어졌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바람 불던 히스 황야의 아이들이지요.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금작화가 북쪽 지방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건 여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서지요.
/캐서린 드 마토스(katharine de mattos)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억겁의 시공간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는 아니었지만 스티븐슨의 두 줄은 당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섬세함과 절절함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끊어진 만남이 미래같은 과거로 하여 다시 이어짐을 바라보며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헌정사는 광대한 우주와 무한의 시간 사이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의 기적 같은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단절되어버린 현실의 인연이그 옛날처럼 함께 이어져 있음을 흩날리는 금작화에서 일러주는 스티븐슨의 문장은 그 소소함과 위태로움으로 하여 더 절절하다.
보르헤스의 트레저 아일랜드 ㅡ 최근에 구입한 스티븐슨의 단편집 첫 페이지를 펼치니 그가 쓴 헌정사가 있었다.(정확히 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 수록된 헌정사다.) 사촌이었던 캐서린 드 마토스에게 쓴 긴 편지시의 일부라고 하는데 인상적인 헌정사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을 생각나게 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인연을 풀어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바람 이는 히스 황야의 아이들이지요.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작화가 북쪽 땅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건 여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서지요.
/캐서린 드 마토스(Katharine de Mattos)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억겁의 시공간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는 아니었지만 스티븐슨의 두 줄은 당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섬세함과 절절함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끊어진 만남이 미래같은 과거로 하여 다시 이어짐을 바라보며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헌정사는 광대한 우주와 무한의 시간 사이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의 기적 같은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단절되어버린 현실의 인연이그 옛날처럼 함께 이어져 있음을 흩날리는 금작화에서 일러주는 스티븐슨의 문장은 그 소소함과 위태로움으로 하여 더 절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