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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팬터시

열아홉살 무렵 당시 유명했던 어떤 소설가와 기자가 실크로드를 여행하고 발간한 에세이집을 읽은 적이 있다. 이란과 터키에 대해 나름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 느낌들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앵커맨도 시를 읊는다는 이야기와 딱딱한 설탕을 녹여가며 마시는 차, 그리고 우스쿠다라가 생각난다.

또 일본에서 만들어진 실크로드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 프로그램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은 기타로의 애잔한 테마와 방송이 끝날 때마다 나오던 짙은 푸른빛(그저 내 상상속의 기억일 뿐이라는 것은 안다)의 히잡을 둘러쓴 어떤 여인의 눈빛이었다. 실크로드의 장면들은 거의 생각나는 것이 없는데 아련한 신쎄사이저 연주와 히잡 속의 눈빛만이 실크로드의 환영을 내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흘러 터키와 이란의 노래를 듣다 보니 그 눈빛이 새록새록 생각이 났다. 화면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했는데 조금 수고를 해서 찾아보니 골쉬프테 파라하니(golshifteh farahani)라는 이름을 지닌 이란 출신의 배우였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녀는 내가 좀 좋아하는 자무시 감독의 어떤 영화에 살짝 철없는(?) 아내로 나왔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sen hiç mi bahar görmedin, 향신료가 과한 이국의 음식처럼 과잉된 느낌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 또한 이국의 미각이려니 한다. 센 히치 미 바할 괴어미딘 ㅡ

당신은 봄을 보았나요?

 

/srs.

내가 만일

무엇에 관한 노래인지 처음엔 잘 몰랐다. 그저 에프랏 벤 주르 efrat ben zur의 비명처럼 들리는 고음에 묘하게 끌렸을 뿐이다. 어떤 고통, 무슨 몸부림이 거기 있을까 상상하면서. 그녀가 노래하는 괴로움의 비밀(?)을 조금이나마 들여다보고 싶었기에 이 노래가 수록된 앨범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에밀리 디킨슨의 시라는 부제가 붙은 로빈이라는 앨범 커버를 보는 순간 조금 알 수는 있었다.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이 그 노래였다.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에밀리 디킨슨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by emily dickinson
내가 만일 애타는 한 가슴을 달랠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
내가 만일 한 생명의 고통을 덜어 주거나
또는 한 괴로움을 달래거나
또는 할딱거리는 로빈새 한 마리를 도와서
보금자리로 돌아가게 해 줄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
if i can stop one heart from breaking,
i shall not live in vain;
if i can easy one life the aching,
or cool one pain,
or help one fainting robin
into his nest again,
i shall not live in vain.

 

그러니까 이 노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 <내가 만일>에 곡을 붙인 것이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나 자신의 기대와도 달리 가사를 알고 나니 내가 상상했던 많은 것들은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이 노래의  고음 또한 먼 산울림처럼 아득해졌다.  ‘내가 만일'(!) 그녀였다면, 그리고 디킨슨의 시를 떠올린다면 차라리 조용히 읊조리는 것이 더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음가짐 또는 행동이 필요할 뿐, 그렇게 높은 목소리로 대신할 합당한 이유를 찾기가 나로선 쉽지 않았다. 때로 온전한 지식이 상상을 훼손시키곤 하는데, 이 노래의 경우가 그랬다. 옛시절의 디스코처럼, fly robin fly를 떠올리면서.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여전히 이 노래는 그 자체로 인상적이고 한갓되이 헛되이 살아온 나는 때로 디킨슨은 깡그리 잊어버린 채 그녀의 비명소리에 동조하곤 한다.

 

 

/2018. 4. 22.

heitor dos prazeres

슬프기 보다는 행복한 게 좋아
행복한 건 가장 좋은 일이고
그건 네 가슴 속의 빛과 같지
하지만 아름다운 쌈바를 만들려면
많은 슬픔이 필요하지
많은 슬픔이 필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쌈바는 만들어질 수가 없다네
/축복의 쌈바,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

 

아무리 짧게 잡아도 10년 이상, 브라질 음악을 미친 듯이 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 세련되고 멋진 음악들이 어떻게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것일까 너무도 궁금하였다. 아리 바호주, 노엘 호자, 이스마엘 씰바, 동가, 넬손 까바낑요, 까똘라, 씨루 몽떼이루……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브라질 음악 이전에는 대체 어떤 음악들이 있었을까에 관해 호기심을 보이다 나는 옛 쌈바 가수들의 이름까지 들춰보게 되었고 거기 낯선 이름 하나가 더 있었다. 에이또르 도스 쁘라제레스다.

1898년 브라질의 히우 지 자네이루에서 태어나 1966년에 세상을 떠난 에이또르 도스 쁘라제레스는 브라질의 쌈비스따이다. 또한 그는 우리가 중남미를 떠올리면 쉽게 연상할 수 있는 라틴풍의 컬러풀한 그림들을 그린 빼어난 화가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은 브라질 흑인들의 삶과 빈민가의 모습들을 비교적 밝은 분위기로 표현해내려 애썼다. 아꽈렐라 두 브라질(브라질의 수채화)를 작곡한 사람은 아리 바호주이지만 그는 브라질을 그림으로 남긴 아꽈렐라 두 브라질 그 자체였다. 나는 푸투마요 씨리즈의 커버를 장식하고 있는 많은 그림들이 그의 화풍을 현대적으로, 그리고 상업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festa de são joão (성요한 축제)

 


morro da mangueira(망게이라 언덕), 1965.

 

 
sem título(무제)

 


sambistas

sem título, 1960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마마에 오쑴(mamãe oxum)인데 1955년에 발표된 이 노래를 듣노라면 오래된 재즈곡을 들을 때처럼 내가 속한 적 없는 세상, 잡음 가득한 흑백의 시대에 대해 저리도록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기쁨과 슬픔이 함께 하는 가운데 나는 ‘유성기’에서 들려오는 듯한 그 소리를 따라 하염없이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도무지 잡을 수 없는 그 아련한 느낌은 거의 고통에 가까운 것 같다.

오쑴은 아프리카에서 유래한 브라질 토착종교의(어떤 면에서 절에 있는 산신각이나 용왕각의 경우처럼 그들의 주된 종교인 가톨릭과 자연스레 융화된) 신앙의 주요한 모티브(여신)으로 번개신 샹고의 아내이며 나이지리아의 오순(osun) 강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에이또르 도스 쁘라제레스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던 것은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와 바덴 포웰의 위대한 노래로부터였다. 그것은 그 노래 제목에서처럼 내게 있어 작은 축복이었다.

 

 

+
마마에 오쑴은 이 페이지의 오른쪽 위에 있는 플레이 버튼을 클릭하면 들을 수 있다.
아래 링크로는 그가 노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vai saudade, heitor dos prazeres, 1965.

 

 

/2018. 5. 2.

 

 

 

+
네이버가 외부 프로그램을 통한 글쓰기에 제동을 걸었다.
예전처럼 워드프레스에서 쓰면 블로그에 글이 올릴 수는 있는데
내용을 변경한다고 하더라도 워드프레스의 수정본으로 갱신시켜주지는 않는다고 한다.
역시나 네이버다운 결정이다.
그래서 글쓰기 연동을 제거하고 수동으로
추후에 선별적으로 업데이트 하는 방식을 택해야 할지 생각중이다.
아마도 그래야 할 듯 싶다.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

el árbol que tú olvidaste
siempre se acuerda de ti,
y le pregunta a la noche
si serás o no feliz.

 

유팡키라는 성을 지닌 그 이름을 듣기 수십년 전부터
아타왈파는 내게 있어 가슴에 맺혀 있는 이름입니다.
오래도록 중남미의 역사에 매혹되었던 내게 있어 아타왈파는 가장 드라마틱한 상징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왕조가 몇대 이어지긴 했으나 그는 스페인에 정복당한 잉카의 마지막 왕이었지요.
프란시스코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인으로 죽어 부활을 꿈꾸었던 ‘the last inca’ 말입니다.
(그 무렵의 나는 잉카와 아즈테카의 이름없는 백성인양
세상에서 가장 싫은 나라가 스페인이었고 피사로와 코르테스는 증오의 대상이었습니다.)
문명의 전달자, 또는 문명 그 자체였던 콘 티키 비라코차가 떠나간 자리,
콘도르의 꿈을 남긴 채 아타왈파가 날아가버린 그 땅에
엑토르 로베르또 차베로 아람부루(héctor roberto chavero aramburu)라는 긴 이름 대신
“먼 땅에서 와서 이야기하는(노래하는) 사람” ㅡ 아타왈파 유팡키(atahualpa yupanqui)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삶의 행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투박한 목소리와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기타 소리는
세상 무엇보다도 강렬한 악기가 되어 마음을 움직였지요.
당신이 그 나무일지 내가 잊혀진 나무일지
이도 저도 아닌 그저 그 나무에 잠깐 앉았다 날아가버린
“봄날의 작은 새”일지도 알 수 없지만
벚꽃이 활짝 핀 이 봄날에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를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걸음 떨어져 귀기울일 때 그의 노래는 보다 진실되게 들리고
나는 잊어버린 나무를 좀 더 잘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영영 잃어버린 나무라고 할지라도요.
또 당신이 나라고 할지라도요.

 

당신이 잊어버린 나무는
늘 당신을 기억해요
당신이 행복한지 어떤지
밤에 묻지요……

 

 

 

/2018. 3. 28.

 

 

+
일부 잉카에게 ‘유빵끼(선조를 존경하는 사람)’라는 호칭이 붙어 있었지만
마지막 왕은 그냥 ‘아따왈빠’입니다.

/srs. 2018. 3.

……and smell the coffee

이름을 듣고
또다시 보게 되네
풀에 핀 꽃들
/데이지

 

아마도 2001년이었을 거다. 앨범 타이틀만 해도 마음이 움직였는데 거기 어찌 못할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never grow old”가 있었다. 그녀 dolores o’riordan이 “forever young”이라고 노래할 때 내 마음도 어딘가를 향해 노래속의 새처럼 달아나고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젊음의 길이란 오직 단 하나뿐이어서 이 노래의 서글픈 역설은 절대 지워지는 법이 없다. 그리고 이제 이 곡을 노래한 그녀가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렸던 얼굴보다 더 어린 나이의 그녀인데 말이다. 그녀의 밴드는 한때 대단한 각광을 받았고 세상의 많은 가수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노래했으나 이후 긴 침체기에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겐 잊혀지지 않는 그녀가 있다. 어제, 우체국에 가서 소포를 부치고 봄날 같은 햇살 아래 자전거를 끌기 시작할 때도 이 노래가 있었다. “grow old me”보다 더 멋진 사랑의 약속은 얼른 생각나지 않는데 어찌 못할 그 짦음이 영원을 노래하였다. to the faithful departed……

 

i feel the breeze
i feel at ease
it is my perfect day

hope you never grow old
hope you never grow old
hope you never grow old
hope you never grow old

forever young
i hope you stay
forever young……

 

 

 


never grow old / cranberries

 

a restless wind inside a

달리 들을 길이라곤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부터 이 노래는 이상하게 귀에 익은 느낌이었다. 라디오가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시대였지만 그래서 귀에 익은 것이 아니라 기시감, 아니 ‘기청감(déjà entendu)’을 불러일으켰고 묘하게도 그것은 돌아갈 길 없는 시간 또는 장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간 <let it be> 버전도 좋았지만 ‘세계 야생동물 기금’에의 기부를 위해 만들어진 앨범에 수록된 버전을 더 자주 듣곤 했었다. 새 소리와 더불어 스피커 채널을 옮겨가며 들리는 파도 소리인지 날개짓인지(아마도 새들의 날개짓인듯) 조금 조악하게 들리는 효과음이 나는 오히려 좋았다. 이펙트가 들어간 일렉트릭 기타와 시타, 탐부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노래 가운데 하나이고 가사는 한편의 환상적인 시(endless rain into a paper cup!) 같았다.

 

 


/beatles ballads

 

‘야생동물 기금’ 버전은 beatles ballads라는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lp로 갖고 있는 이 앨범 재킷을 생각하니 아련한 느낌이 들어 한번 찾아봤다)에도 수록되어 있었고 <past masters>에도 들어 있다. 어릴 때도 그리 추측했었지만 예상대로 ‘기금 버전’은 원래의 녹음을 속도를 올려 조를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의 제목은 여전히 미완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내 어떤 이야기의 제목에도 변용되어 포함되어 있다.

몹시도 캄캄했던 지난 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가 희망일지 신념일지 고통일지 탄식일지 알지 못한 채 이 노래 듣던 시절이 저리도록 그리워졌다. 받을 길도 전할 길도 없는 숱한 사연을 싣고 우주의 저 끝으로부터 이 노래가 다시 내게로 왔다.

 

 

 

 


/no one’s gonna change our world
(world wildlife fund를 위해 across the universe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앨범이다.)

 

 

a restless wind inside a '

달리 들을 길이라곤 없었던 것 같은데 처음부터 이 노래는 이상하게 귀에 익은 느낌이었다. 라디오가 거의 유일한 채널이었던 시대였지만 그래서 귀에 익은 것이 아니라 기시감, 아니 ‘기청감(déjà entendu)’을 불러일으켰고 묘하게도 그것은 돌아갈 길 없는 시간 또는 장소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했다.
오케스트레이션이 들어간 <let it be> 버전도 좋았지만 ‘세계 야생동물 기금’에의 기부를 위해 만들어진 앨범에 수록된 버전을 더 자주 듣곤 했었다. 새 소리와 더불어 스피커 채널을 옮겨가며 들리는 파도 소리인지 날개짓인지 조금 조악하게 들리는 효과음이 나는 오히려 좋았다. 이펙트가 들어간 일렉트릭 기타와 시타, 탐부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는 노래 가운데 하나이고 가사는 한편의 환상적인 시(endless rain into a paper cup!) 같았다.
 
 

/beatles ballads
 
 
‘야생동물 기금’ 버전은 beatles ballads라는 제목의 컴필레이션 앨범(lp로 갖고 있는 이 앨범 재킷을 생각하니 아련한 느낌이 들어 한번 찾아봤다)에도 수록되어 있었고 <past masters>에도 들어 있다. 어릴 때도 그리 추측했었지만 예상대로 ‘기금 버전’은 원래의 녹음을 속도를 올려 조를 바꾼 것이었다. 그리고 이 노래의 제목은 여전히 미완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내 어떤 이야기의 제목에도 변용되어 포함되어 있다.
몹시도 캄캄했던 지난 밤, “nothing’s gonna change my world”가 희망일지 신념일지 고통일지 탄식일지 알지 못한 채 이 노래 듣던 시절이 저리도록 그리워졌다. 받을 길도 전할 길도 없는 숱한 사연을 싣고 우주의 저 끝으로부터 이 노래가 다시 내게로 왔다.
 
 

 
 

/no one’s gonna change our world
(world wildlife fund를 위해 across the universe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던 앨범이다.)
 
 

the analogues’ sgt. pepper

<아날로그>는 세상에 널린 비틀즈 연주 밴드 가운데 하나다.
네덜란드 출신 다섯명의 뮤지션이 만들어내는 연주는
단순한 흉내내기를 넘어 나름 진지하다.
이들은 특히 비틀즈 후기의 스튜디오 앨범들을 라이브로 들려주고 있는데
가능한 한 완벽한 재현을 위해 멜로트론을 비롯한 옛 시절의 악기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라이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원곡에 꽤 충실하다.
이들은 sgt.pepper 50주년(1967)을 기념하여 이 앨범 전체를 라이브로 공연했고
이제는 white album을 진행하고 있다.
a day in the life를 들은지는 정말 오래 되었고 안들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론리 하트인지 브로큰 하트인지 이 노래의 어떤 서글픔이 요즘 내 어떤 느낌인양
창가 바라보며 옛사랑 같은 노랠 다시 듣고 또 들었다.
across the universe, 거의 1분에 가까워 참아내기 어려웠던 여운은……

 

 


a day in the life / analogues

 

 

the analogues’ sgt. pepper

<아날로그>는 세상에 널린 비틀즈 연주 밴드 가운데 하나다.
네덜란드 출신 다섯명의 뮤지션이 만들어내는 연주는
단순한 흉내내기를 넘어 나름 진지하다.
이들은 특히 비틀즈 후기의 스튜디오 앨범들을 라이브로 들려주고 있는데
가능한 한 완벽한 재현을 위해 멜로트론을 비롯한 옛 시절의 악기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라이브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원곡에 꽤 충실하다.
이들은 sgt.pepper 50주년(1967)을 기념하여 이 앨범 전체를 라이브로 공연했고
이제는 white album을 진행하고 있다.
a day in the life를 들은지는 정말 오래 되었고 안들은지도 무척 오래되었다.
론리 하트인지 브로큰 하트인지 이 노래의 어떤 서글픔이 요즘 내 어떤 느낌인양
창가 바라보며 옛사랑 같은 노랠 다시 듣고 또 들었다.
across the universe, 거의 1분에 가까워 참아내기 어려웠던 여운은……

 

 


a day in the life / analog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