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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장소

내가 그 책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15, 6년 쯤 전이었을 것이다. 어디로부터 내게 왔는지 모를 <허구들>과 보르헤스 관련 몇몇 서적의 역자 주석과 해설에서 숱하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번역본은 없었다. 한참 뒤에 읽게 된 보르헤스의 에세이집을 무척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 책이었다. 출판사는 보다 구매력 있는 제목을 원했겠지만 나는 바뀐 그 제목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하지만 제목이 무엇이라 붙었던들 그 책, <또다른 심문 otras inquisiciones>은 내게 의미있는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노래 한 곡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브라질 음악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을 다방면으로 확장시켜준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사실을 말하자면 보르헤스의 상당수 에세이가 내게 그랬다. 바벨의 도서관 해제도 물론.)

아무튼 그 책의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이란 에세이에서 나는 레옹 블루아(이전의 책에는 영어식 표기로 ‘레온 블로이’라 되어 있었다)를 다시 보았고 로드 던세이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도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는 두 작가와 그들의 이야기가 각기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이 정착한 마을 ‘몽쥐모’를 떠날 수 없는 부부의 기구한 삶이 있었고, 그와 반대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전설의 도시 ‘카르카손’을 향한 원정대의 허망한 꿈을 다룬 던세이니의 이야기도 있었다.

블루아의 단편에는 일정 부분 블랙 코메디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던세이니의 경우는 중세 무용담의 형식에 삶 자체에 대한 은유를 담담한 어조로 담아내었다. 던세이니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이가 보내온 편지에 인용된 출처불명의 한 줄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은 결코 카르카손에 도달하지 못했다”를 통해 이 단편을 썼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날 수 없는 곳과 수많은 세월을 진군했음에도 닿지 못하는 곳, 내 생각에 삶은 그 두 장소 모두인 것 같았고 나 역시 그 두 곳을 오가며 절망하고 희망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몽쥐모와 카르카손은 결국 같은 공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다.

 

but he, he never came to carcassonne.

 

 

 

/2017. 11. 23.

a single man, 확실한 內傷

그렇지 않았으면 찾지 않았을 것이다. <녹터널 애니멀즈>의 불편함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 싱글 맨>을 통해 감독에 대한 느낌에 극적인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뜻밖이었다.

원작자와 감독이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퀴어 영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퀴어 영화겠지만 성적인 정체성보다는 상실과 복원이라는 관점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가 성적인 소수자를 다루고 있음에도 부담스런 느낌은 별로 없었고 오직 상실에만 공감하며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 ㅡ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실감이라는 점에서는 내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깨어난 아침, 침대 위의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어 하얀 시트가 검게 물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손이 그쪽으로 가지만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상태고 어떻게 할 기력도 없다. 잉크 묻은 손으로 하여 자기 입술에 잉크가 묻어도 알지 못한다…… 정말 그런 것이었다. 나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장면이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여기 링크했다가 삭제했다.)

그리고 싱글 맨이란 이름을 따라 몇몇 ‘맨’을 떠올렸다.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뜻하지 않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제일 먼저 <시리어스 맨>이 생각났고, 다시 날자꾸나 하던 <버드맨>과 거기 없었다던 엉뚱한 ‘그 남자’ 이발사도 어른거렸다. 현실이라면 ‘시리어스 맨’이겠지만 상실감에 관해서라면 나로선 ‘어 싱글 맨’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거나 꿈이거나 ‘그’이거나 ‘그녀’이거나 도무지 복원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귀퉁이, 또는 후미진 (영화관의) 자리에 본능적으로 눈이 가는 사람으로서 <a single man>이 a single man에게만 집중되어 있음은 조금 안타까웠다. 그것은 ‘다크 시티’의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버린 형사(윌리엄 허트)나 ‘오픈 유어 아이즈’의 빌딩 옥상에서 자신이 정체성에 충격을 받는 정신과 의사에 대해 내가 가졌던 묘한 연민과 비슷한 무엇이다.

 

 

짧고 인위적인 조우였고, 16년을 함께 한 짐(매튜 구드)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헐리우드의 꿈을 안고 마드리드에서 왔다가 처량한 신세가 된 카를로스(존 코르타자레나)를 냉정히 보낼 때 그 청년 또한 a single man이었고(나는 느끼한 이 청년이 외면당한 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결국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 팔코너 교수의 생각도 못한 죽음을 목격하게 될 케니(니콜라스 홀트)에겐 이 무슨 캄캄한 절벽이었을까 싶다. 끝내 콜린 퍼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찰리(쥴리안 무어) 역시 a single (wo)man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內傷'(또는 外傷!)을 가진 주인공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단장을 했으나 “과거에 사는 것이 나의 미래야”라고 말하는 그녀를 비롯한 그의 가까운 모두가 더하고 덜할 수 없는 a single man으로 보였다. 혼자라는 것 자체가 확실한 內傷이니 거기 물론 나도 빠질 수 없겠고.

그래서 <녹터널 애니멀즈>의 경우와는 정반대, 특별히 대단한 영화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a single man의 심사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읽는 이가 봤으면 싶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아픔 ㅡ 어쩌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 거기 있을지도.

 

 

/2017. 11. 22.

 

 

+개인적인 취향 내지 결함이겠지만 유능한 디자이너이기도 한 감독과 스타일리쉬한 콜린 퍼스의 이미지로 하여 너무 깔끔한 것이 오히려 영화에의 몰입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바람의 열두 방향

그게 2000년대의 중반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르귄의 단편집이 나온 것을 보고 곧장 구입했다. 아마도 세부 쯤 구해서 하나는 선물을 했고, 잘 펼쳐지지 않는 작은 책이 불편했던 나는 책을 잘라 링으로 묶었다.(선물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딘가에 원본 그대로의 책이 또 하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나처럼 책읽기에 서툴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녀의 책을 읽는데 뭔지 모를 어려움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고 해도 한줄 한줄 새겨 읽을 수 있었지만 르귄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다. 허사처럼 보이는 묘사가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스스로도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멜라스에 대해 가졌던 나의 오래된 어떤 거부감이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Ursula K. Le Guin, Acclaimed for Her Fantasy Fiction, Is Dead at 88 - The New York Times

 

그리고 좀 비루한 변명 같은 그 결과, 내가 기억하는 바람의 열두 방향은 여기저기 구멍난 스폰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십수년에 걸쳐 피셔킹을 보았고 다른 몇몇 영화와 책에 대해서도 (이해를 구하기는 좀 곤란한) 비슷한 과정들을 경험했다.

르귄에서도 그럴지는 십여년의 시간을 보낸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그 열두 방향 가운데 하나였던 <파리의 사월>을 여전히 좋아한다. 고독한 어떤 마법사가 꿈같은 마법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나고, 친구의 애인까지 엮어서 파리의 사월을 즐거이 거니는 이야기다. 부러운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처음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르귄의 단편집보다는 한참 이전이었다.

나는 이 책의 서두에 있는 슈롭셔의 젊은이를 옛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대신해서 올려주는 형식으로. 그 시가 지닌 문학적 의미에 관해서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내 마음 같았던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2017. 11. 4.

코스모스의 한 줄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흥얼거리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 보았지 별 하나 찾기 힘든 그곳,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이었지
/창백한 푸른 점

 

 

어릴 적에 본 학원사의 <코스모스>는 우주에 대한 상상의 보고였다. 지름 10만 광년의 은하에 수많은 별이 모여 있는 도판을 보면서 무한에 관한 수많은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교양서적이라면 교양서적일 뿐이겠지만 처음 읽었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책에는 은하와 행성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의 투구를 닮은 헤이케 바다의 게와 진화론적 선택을 드라마틱하게 연결시켰고, 불타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한 묘사는 하염없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코스모스>를 떠올리면 이오의 활화산에서 퀘이저까지, 에라스토테네스에서 인디언들의 문명세계와의 조우에 관한 기록, 뉴턴이 그려낸 바닷가의 소년의 이야기 등이  순서도 없이 머리속에 펼쳐지곤 한다.  하지만 <코스모스>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뽑는다면 나는 그 책의 제일 앞에 있는 짧은 헌정사를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대단할 것도 심오한 것도 없는 연애편지 같은 조금 감상적인 문장일 뿐이지만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나이브해지고 유치해지는 것은 유치한 일이 아니다. 그런 유치함을 다시 경험할 수 없음이 서글픈 일일 뿐. 내 낡고 오래된 코스모스의 처음에 실린 글은 다음과 같다;

 

 

 

 

for ann druyan: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carl sagan

 

 

+
창백한 푸른 점은 칼 세이건이 쓴 또다른 책의 제목이지만
내게 있어 책이 아닌, 시의 제목도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dr. hook

이들의 스테이지를 보면 먼저 눈쌀이 찌푸려질지도 모르겠다. 양아치 같은 인간들이 지저분하고 게걸스런 분위기로 노래하는데다 민망한 장면들도 없지 않다. 술 내지 약에 쩔은 듯 싶고 (누구는 그 몽롱한 세계를 거창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다듬어 “a day in the life”를 만들고 어떤 이들은 살짝 미친 듯 뉴올리언즈의 위치 퀸 “마리 르보”를 노래한다) 싸구려 같은데 묘하게 편안하고 막나가는 듯한데 어찌 좀 속이 후련하고……

애꾸눈 레이 소여가 해적이라면 털복숭이 산적처럼 보이는 멤버도 아닌 다른 한 분, (get my rocks off까지 포함해서) 닥터 훅의 상당수 노래를 작사 작곡한  shel silverstein(‘스타인’이 아니고 ‘스틴’이란다)은 시인 겸 카투니스트에 어린이책도 출판했다는데 정말이지 “믿거나 말거나”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 같은데 신기하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애절한 노래도 있고, 유머러스한 노래도 있지만 역시나 막나가는 노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로선 닥터 훅 하면 아무래도 첫번째는 “get my rocks off”다. 멋진 리듬을 지닌 이 노래, 듣고 보는 내가 찔리는 듯 그들 대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한 만큼 금기를 훌쩍 뛰어넘어 심히 저질스럽고 노골적인데 나름 절묘하다. 닥터 훅이란 밴드의 이름은 레이 소여에게서 짐작할  수 있듯 ‘후크 선장’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는 한방의 훅.

“get my rocks off the mountain, and roll ’em on down the hill.”
(붙이지 아니함 ㅡ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애써 강조하던 내 시 두어 편도 비슷한 방식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그저 한숨만 쉬는 닥터 후…)

/dr. hook & the medicine show, 1972

 

 

 

ligado a você : 당신께 ◎

“진실이라 말 할 수도 없는 진실 같은 것,
소식 들은지도 오래입니다……”

 

처음 오신 당신께.
가끔 오시는 당신께.
이제는 오지 않는 당신께.

 

배경에 마음 같은 음악을 깔고 “당신께”라는 단어가 들어간 하찮은 글을 몇번 썼습니다.
끊어졌거나 이어져 있거나, 아니면 그 어떤 상태인지 알 길조차 없거나
스스로 망가뜨리곤 했던 그 어떤 연결에 대한 바램 같은 것이었지요.

 

비슷한 바램이었을까요.
아르날두 안뚜니스는 하늘, 땅, 공기, 소리에서 연결을 느낀다고 노래합니다.
같은 세계에서 더불어 호흡하며 하늘을 바라보며 같은 소리(노래)를 들으며
당신과 연결되어 있다고 합니다.
연결이란 그런 것임을 누구나 알고 믿고 느낀 순간들이 누구에게나 있었겠지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의 첫 페이지에 썼던 앤 드리앤에 대한 헌정처럼요.+

 

하지만 때로는 그 무엇으로도 이어지지 못할 순간이 있고
그 단절의 시간은 연결에 비하면 영원에 가까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하라에서 과나바라 만에 이르기까지 어디에 있든 ligado a você,
연결이란 그런 것입니다.
if we never meet again this side of heaven ㅡ
이어진 것 하나 없음에도 그렇게 노래하게 하는 것입니다./srs.

 

 

+
앤 드리앤에게.
광대한 우주, 그리고 무한한 시간.
이 속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앤과 함께 살아 가는 것을 기뻐하면서.

 

+
나는 가끔 닉 케이브와 아르날두 안뚜니스를 비슷한 선상에서 듣곤 하는데
심정적으로는 안뚜니스를 조금 더 가깝게 느끼곤 합니다.
혼자 훌쩍이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었음에도 그의 노래 하나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요.

 

찢어버린 노트 한 장, Batatinha

Batatinha(Little Potato)는 ‘쌈바의 시인’이라 불리우는 브라질의 쌈비스따다. 하지만 그는 대개의 쌈비스따처럼 기쁘거나 슬퍼거나  활력이 넘쳐나는 리듬 대신 어딘지 내향적이거나 심지어 자기성찰적인 느낌을 주는 느리고 정적인 쌈바를 택했다. 제목 또한 기존 음악들과는 많이 다른 성향을 보여주며, 그의 쌈바엔 현악기의 사용도 자연스럽고 느릿한 노래들이 더 많다. 그의 모습을 보면 젊은 날에도 새하얗던 머리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사실 내가 이야기 하고픈 것은 그의 음악과는 좀 다른 나 자신의 오래된 기억에 관한 것이다. Read More

my breast bone harper +

they made a harp of her breastbone,
whose sound would melt a heart of stone.
they took three locks of her yellow hair,
and with them strung the harp so rare.
/cruel sister, pentangle

 

헤아리기도 곤란한 시간 저편의 어느 나른했던 오후, 이어폰을 꽂고 엎드려 잠이 들었는데 어떤 목소리가 꿈결처럼 부드럽게 노래하기 시작했다. 부드러움은 금세 쓰라림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며 정점을 향해 맹렬하게 불타올랐다. 일렉트릭 기타도 드럼도 없었지만 그 모두를 압도하는 무엇인가가 노래 전체를, 아니 내 마음을 온통 휘감고 있었다. 결국 잠에서 깬 나는 그 노래를 찾아보았다. 인트로까지 들었을 때만 해도 도노반인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었지만 그 강렬함은 도노반에게선 보기 힘든 것이었고 노래의 주인공은 roy harper였다. 그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울려퍼질 때나 높고 가늘게 이어질 때 내 마음도 그대로였다. 나는 cruel sister의 사연을 차용하여 ‘my breast bone harper’라 불렀고 이 노래는 한때 내 마음의 頌歌 같은 것이었다. me and my woman과 비슷한 포맷을 지녔지만 기타와 보컬뿐인 the same old rock 또한 내 귀를 울렸다.(이 곡에선 지미 페이지가 어쿠스틱 기타로 격렬한 연주를 들려준다).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으로 나는 그 노랠 듣곤 했다. 보컬과 기타 모두에서 그는 이 앨범으로 정점을 찍었고 ‘애비로드’에서 녹음된 <stormcock>은 1971년에 발표된 그의 다섯 번째 앨범이었다. 기타와 목소리 그리고 제한적인 오케스트레이션만으로 그는 모든 것을 노래했다. 하지만 이 노래를 頌歌로 여겼던 이는 결코…… 아니었다. /srs

 

 

 

 

 

 

뮤즈

잘못된 세계에 떨어진 어떤 이에 관한 단편을 읽은 적 있었다. <클락워크 오렌지>의 작가가 쓴 소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떤 이의 소지품 가운데 세익스피어의 작품집이 있었던 것인지도 가물가물하다. 아무튼, 그 세계에 잡혀 글을 쓰는 괴물에게 작품을 갖다바치는 이야기였다. 괴물 작가(?)에게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출현한 인간들이 뮤즈였던 셈이다 ㅡ 뮤즈의 종말은 비참했지만.

뮤즈라면 또 생각나는 가수는 보싸노바의 뮤즈란 별명을 가졌던 나라 리오다. 그녀는 아스뜨루드 질베르뚜의 경우처럼 좀 예쁘장한 스타일의 보싸노바를 불렀지만 질베르뚜와는 다르게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다.(그래서 그녀의 노래 가운데는 “내가 없는 날” 듣고 싶은 곡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파서의 가수와 작곡가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감을 줬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오히려 그 시대 mpb 씬에 뮤즈가 있었다면,  그들의 부스터가 되었던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가 더 그랬을 것이고 그들의 뮤즈였을 것이다. 바덴 포웰, 씨꾸 부아르끼, 또낑요, 프란시스 하임, 에두 로부, 그리고 조빙까지가 그 뮤즈로부터 영감을 받아 최고의 작품들을 만들어내었다.(아이러니컬한 일이지만 그 뮤즈와 함께하지 못한 이들은 뮤즈의 사후에 더 빛을 발했다.)

뮤즈가 직접적으로 무엇인가 동기를 만들어줄 수도 있겠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뮤즈의 일이다. 다만 뮤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그렇다. 뮤즈가 반드시 여자인 것도 아니고,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한번도 만나지 못한 존재일 수도 있고, 매일 보는 누군가일 수도 있고, 오래전에 버렸거나 스스로 달아난 만남일 수도 있다. 뮤즈와의 만남과 이별, 뮤즈는 대개 그런 것이고, 나는……

 

si je devais manquer de toi, 내가 당신을 그리워해야 한다면.

 

 


/jean-louis mur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