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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종이 상자

아마 지금처럼 늦은 가을이었지 싶다. 20년쯤 전, 어느 날의 우울을 나는 기억한다. 심하게 가라앉았던 그날의 심정이 어째서인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생각도 나질 않는다. 어쩌면 ‘오늘 같은 날’이었을 것이고, 다르지 않은 매일의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던 이상의 말처럼 일상이 되어버린 절망 말이다.

마음 챙기는데 언제나 열심이었던 그녀는 내 가라앉은 심사를 위로하고자 작은 선물을 보낸다고 했는데 Read More

솔솔솔미레…

어떤 사연 더 붙여야 할지요…
제목 잊어버린 옛노래입니다
곡조 생각나지만 떠오르지 않는 노랫말입니다
아무렇게나 흥얼거려도 괜찮을까요
가사가 무슨 대수겠습니까
계명 알지 못한들 또 어쩌겠나요
우습지도 않은 음정을 길게도 뽑아보았습니다
아물거리는 기억의 파도 너머
갈 길 없는 위태한 섬이 떠오릅니다
고이 간직한 사연이거나 마음밖에 있거나
잊혀지고 묻혀도 못다부른 그 대목이
두고두고 떠오릅니다

 

 

/2007. 10. 29.  k에게.

그러나 잊혀질 그의 이름

(보내지 않은 글)

 

 

quetzalcoatl입니다.
께짤꼬아뜰. 케찰코아틀.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어요.
께짤은 깃털, 꼬아뜰은 뱀.
그러니까 깃털달린 뱀, 날개달린 뱀이랍니다.
아주 먼 훗날, 희미하게나마 나를 기억한다면
그 단어를 생각하세요.
반은 인간 절반은 물고기였다던 중동의 오안네스나
잉카의 콘티키 비라코차 같은 이름이에요.
날개나 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희생을 갈망하던 피의 전설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전해주고 사라져버린,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노라고 했지만
실은 눈물로 떠나가버린
형상 없는 마음의 이름입니다.

 

 

/2019. 11. 12.

 

오키, 17년, 스타바운드 ◎

precious memories, how they linger
how they ever flood my soul
in the stillness of the midnight
precious, sacred scenes unfold
/precious memories, j.j. cale.

 

케일의 정규 앨범들은 거의 cd로만 가지고 있고 그 대부분은 20년쯤 전에 구입한 것들이다. #8 앨범은 국내판을 구입했는데 불행히도 reality가 빠져 있다. 하지만 파일들이 있으니 굳이 그것을 아쉬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lp로 갖고 있는 앨범 하나가 okie다. Read More

아니되고 안될 것 같은

오늘은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를 꺼냈다가 잭 티가든에 관한 글을 끄적였습니다.
내가 받았을 때 이미 절판되었던 책이었기에 아마도 그것은 중고서적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십수년 전 아픈 마음과 함께 이 책이 왔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림이 딱히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는지
와다 마코토가 그린 표지의 듀크 엘링턴을 나는 자세히 본 적이 없었습니다.
책을 키보드 옆에 둔 채 검색을 하며 책 표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낡아서 생긴 상처이거니 했던 왼편의 하얀 부분이
모든 표지 사진에 똑같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보스레 나는 이 책들 제본에 문제가 있었나 생각을 했더랬지요.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엘링턴의 피아노 위, 재떨이에 얹혀 있는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였습니다. 잠깐 속으로 한숨이 흘렀습니다.
한창 부지런히 담배 피우던 때, 내뿜던 연기 같은 한숨이었습니다.
낡은 흠결처럼 새겨진 기억,
있어도 아니되고 흩어져도 안될 것 같은 하얀 그 연기
빛깔만 달리한 채 아직 내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2019. 8. 4.

 

 

잊혀진 라듸오

<라듸오 1973>을 썼던 1년 혹은 2년쯤 뒤에 나는 <라듸오 1974>도 썼다. 이전의 라듸오보다 좋은 제품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으니 많은 공산품의 경우처럼 그냥 해만 바꿔 출시되는 엇비슷하거나 그만 못한 물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뭔가 완제품이 되기엔 부족한 시제품 같은 것이어서 그랬는지 나는 그것을 다른 사적인 공간에 올렸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다른 이의 사이트였을 것이다. 그리고 언제 좀 고쳐서 출하를 해야지… 하고선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내 라듸오를 둔 사이트의 주인과 트러블이 생겼다. 내가 제품을 뒀던 곳도 닫혀버렸다. 내 공간처럼 여기고 편히 생각했으나 돌아서면 남이라는 것, 잠시 머리를 스쳤다. 마음이 상해서 제품을 찾아달라고 했더니 링크 주소를 보내왔다. 다만 공개된 공간이 아니었을 뿐, 그곳에 내 라듸오는 그대로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트러블은 진정이 되었고 그곳에 내 시제품 라듸오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기에 다시 옮겨오지도 않았다 ㅡ 어떤 믿음의 징표처럼. 그 상태로 꽤 시간이 흘렀고 결국 현실에서의 연은 끊어지고 말았다. 다시 라듸오의 링크를 찾아간 적이 없는 나는 결국 1974년의 라듸오를 잃어버렸고 그 제품의 모양새며 성능에 대해서도 깡그리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다시 라듸오를 만든다면 아마도 그때와는 전혀 다른 모양새에 더 모자란 성능의 조악한 제품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기에 나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라져버린 라듸오가 수신하던 전파는 여전히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어쩌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형태의 수신기가 그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para te enfeitar : morena do mar

바닷가에 사는 어느 아가씨를 위해 물고기 몇마리를 잡고 예쁘장한 조개껍질을 주워 가져온 어떤 이의 이야기, 내가 아는 몇몇 가수들이 이 노랠 나름의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작곡자를 포함한 그 누구의 노래도 나라 리오 만큼 마음에 닿지는 않았습니다. 보싸노바의 뮤즈라고들 하지만 사실 음악적으로 그녀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몇몇 노래만은 절로 마음이 이끌립니다. 특히나 그녀가 모레나를 노래하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아프게까지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곡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가사가 그렇고 모레나 두 마르를 노래하는 분위기도 그렇지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듯한 한밤중에 한 사람 앞에 두고 고적하니 노래하는 느낌입니다.

모레나 두 마르가 자신이 노래한 최고의 곡 가운데 하나라고 그녀가 서두에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 자신이 가사에 나오는 ‘예만자 여신의 은과 금’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석을 그렇게 빨리 잃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이 노래는 한박자 쉬고 들어가는 형식인데다 발음도 어려워 생각만큼 노래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몇번이고 듣고 들으며 낮은 톤으로 따라 부르곤 합니다.

 


/nara leão

 

morena
e as estrelas do mar
ai, as pratas e os ouros de iemanjá

 

포르투갈어 morena는 여자를 뜻하는 단어지만 여기서는 그냥 소녀나 아가씨가 아니라,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자를 의미합니다. 바닷가의 새카만 아가씨.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아주 오래 전  내가 지냈던 바닷가 마을의 그녀, 박정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산언덕 하나 넘어 차도 들어가지 못하던 곳, 이름도 예쁜 무지개 마을에 살았던 아가씨……. 그 새카만 얼굴과 몹시도 야윈 몸, 촌스런 퍼머 머리에 가늘고 날카로왔던 목소리가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para te enfeitar(to please you), 노래에서와는 달리 바지락도 그녀가 씻어와서 삶아주곤 했지요. 그녀를 사귄 것도 사랑한 것도 아닌데 생각하면 이상하게 아프고 미안한 마음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보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내게 있어 모레나는 그 새카만 얼굴 너머 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리게 합니다. here, there, and everywhere, 여기 저기 내 좁은 세상과 많지 않은 기억의 모퉁이에서 그리운 얼굴이며 마음이며 목소리를 불러오고 그런 의미에서 모레나는 내게 있어 포르투갈어의 보석 같은 ‘saudade’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이 곡은 자신의 고향이자 쌈바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바이아의 바다를 소재로 하여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굵직한 목소리로 노래했던 도리발 까이미의 작품입니다. 내가 이 노래를 들은 것이 2001년쯤일 듯 싶은데 처음 들었을 그때나 지금이나 느낌은 하나 변함이 없고 어떤 날에 누군가 나를 위해 이 노랠 기억해준다면 틀림없이 기쁠 것입니다. 예만자 여신의 은과 금은 모레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갖고온 물고기와 조개껍질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닷가의 모레나 그녀였을까요, 또 어쩌면 이름모를 어부의 마음이었을까요. 어떤 시적 영감도 아닌 어찌 못할 그리움을 불러다 주는 뮤즈, 그녀의 목소리에 낮게 키를 맞춰가며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오 모레나 두 마…….

 

 

 

 

/2017. 11. 12. 일.

 

 

 

바람의 열두 방향

그게 2000년대의 중반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르귄의 단편집이 나온 것을 보고 곧장 구입했다. 아마도 세부 쯤 구해서 하나는 선물을 했고, 잘 펼쳐지지 않는 작은 책이 불편했던 나는 책을 잘라 링으로 묶었다.(선물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딘가에 원본 그대로의 책이 또 하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나처럼 책읽기에 서툴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녀의 책을 읽는데 뭔지 모를 어려움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고 해도 한줄 한줄 새겨 읽을 수 있었지만 르귄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다. 허사처럼 보이는 묘사가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스스로도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멜라스에 대해 가졌던 나의 오래된 어떤 거부감이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Ursula K. Le Guin, Acclaimed for Her Fantasy Fiction, Is Dead at 88 - The New York Times

 

그리고 좀 비루한 변명 같은 그 결과, 내가 기억하는 바람의 열두 방향은 여기저기 구멍난 스폰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십수년에 걸쳐 피셔킹을 보았고 다른 몇몇 영화와 책에 대해서도 (이해를 구하기는 좀 곤란한) 비슷한 과정들을 경험했다.

르귄에서도 그럴지는 십여년의 시간을 보낸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그 열두 방향 가운데 하나였던 <파리의 사월>을 여전히 좋아한다. 고독한 어떤 마법사가 꿈같은 마법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나고, 친구의 애인까지 엮어서 파리의 사월을 즐거이 거니는 이야기다. 부러운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처음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르귄의 단편집보다는 한참 이전이었다.

나는 이 책의 서두에 있는 슈롭셔의 젊은이를 옛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대신해서 올려주는 형식으로. 그 시가 지닌 문학적 의미에 관해서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내 마음 같았던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2017. 11. 4.

길모롱이 +

공항에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였다. 길은 그다지 막히지도 않았고 운전을 좋아하지 않는 내게도 부담이 되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듯 오랜만의 만남이어서 나는 전부터 나름의 준비를 했었고 그 가운데 하나는 차 안에서 들을 음악에 관한 것이었다. 터널로 진입하기 전에 있는 번잡한 교차로에서 정지신호에 나는 조심스레 차를 멈추었다. 어쩌다 겪게 되는 잠깐의 정적 속에 귀에 익은 감상적인 플라멩코 스타일의 기타 인트로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곧이어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멋진 목소리로 포르투갈어 낭송이 시작되었다.  또낑요가 브라질의 시인이자 가수인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를 만나 한껏 고양되어 있던 초기 시절의 작품이자 그들의 가장 멋진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 할 노래였다. 나는 그 내용의 절반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으로 충분했고 그녀가 내 곁에 앉아 한 공간을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잠시 핸들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눈을 맞추며 시간의 흐름을 잊고 있었다. 마침내 신호가 바뀌었고 나는 살짝 그녀에게서 손을 빼서 운전대를 잡아야 했다. 노래는 계속 이어졌고 우리는 이러저런 대화를 나누다 도착하였다. 그녀는 내가 손을 뺀 것을 조금 원망스러워 했다. 나로선 곡선의 도로를 한 손으로 불안하게 주행하기보다는 그녀와의 길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이 더 컸었고, 그 짧은 시간에 비할 수 없는 세월을 그녀와 나누는 것을 꿈꾸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로 만들지 못했던 그 짧은 시간… 정지 신호가 다시 주행 신호로 바뀌는 것보다 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이룬 사람도 있다. 보르헤스의 <비밀의 기적>에서 홀라딕이 신께 간구하여 찰나를 연장하고 또 연장해가며 자신의 희곡을 집필하기 시작해서 완성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총탄이 격발되는 순간부터 그의 몸을 관통하기까지의 짧은 시간에 말이다. 그 총탄은 우리들 모두가 예상하거나 상상하지도 못했던 시간을 뛰어넘어 그녀의 가슴을 관통하였고, 다시 오랜 세월을 돌아 누군가의 가슴에 박힌 채 남아 있다.  홀라딕처럼 극적이고 충족된 결말을 이룬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그런 순간이 있다면 바로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목소리가 느릿하니 흘러나오던 그때였을 것이다. 그것을 ‘소유’라고 하는 것은 그다지 적절하지 않고 그 어떤 영속성을 상상할 수 없음에도 나는 그렇다. 삶에는 너무 많은 위험이 있고 그 위험은 ‘그녀’라고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는 노래했는데 그 어떤 위태로움이 거기 있었는지 가끔 생각해본다. 이제 나는 거의 매일 그 교차로에 멈추곤 하지만 다른 쓰라림들이 대신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 위태로움 또한 내 곁에 없다.

 

 

/2017. 10. 17.

 

 

+
이 글의 제목을 ‘길모롱이’라 붙인 이유는 그 도로가 휘어진 오르막길인 까닭도 있지만 어릴 때 <빨강머리 앤>에서 본 그 단어를 오래도록 좋아했기 때문이다. 앙숙이었던 길버트와 앤이 졸업하는 즈음엔가 둘이 가까워지면서 끝을 맺는 장면에 붙은 작은 제목이 바로 ‘길모롱이’였다. 어렸던 나는 그들의 뒷 이야기를 알지 못했지만 어떤 느낌은 있었다.(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으나 어린이용으로 만들어진 책이어선지 그게 마지막 장면이었다.) ‘모롱이’의 사전적 의미는 ‘산모퉁이의 휘어둘린 곳’을 뜻하고 모퉁이보다 범위가 좁다고 한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길모롱이’란 단어는 내 마음과 달리 사전에 따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