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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고 사랑받은 한편

몇 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주 긴 긴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줄엔 행복이 묻어 있었고 어떤 줄은 금세 끊어질 듯 위태롭게 떨렸습니다. 산문이 되었다가 모르는 사이 운을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줄인다고 줄여지지도 않고 애써 늘인다고 늘여지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쓴 것도 아니고 혼자 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동자 속에 몇 개의 형용사가 있었는지 수더분한 옷과 재빠른 걸음걸이가 3/4조였는지 7/5조였는지도 잘 모르는데 어찌 제대로 이해하고 쓸 수나 있었겠나요. 누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했나요. 이별에 관해 그 무슨 공감각적 표현이 있을지, 그리움에 무엇을 보태어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verfremdung effekt)’를 만들어내었는지요.

가끔은 두 줄씩 보기 좋은 쌍을 이루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엇박자로 어지러웠습니다. 역류라면 모를까 감정이 넘쳐나는데 그 무슨 이입이 있을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고 절정도 없는데 기승전결은 또 무슨 허황된 서류에 붙어 있는 이름일까요.

하지만 진짜 시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자신의 운을 맞추었겠지요. 멋진 배경 속에 14행을 넣어서 소네트라 이름 붙였겠지요. 한 줄이 되었다가 전집이 되었다가 두서없이 흩어졌고 그리고 또 흩어진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원본이며 제대로 베껴 쓰지도 못한 마음만의 한 편입니다. 결코 제대로 옮기지 못한 한 편이 여태 마음에 그려집니다. 세상 어딘가 틀림없이 그 한 편을 위한 진짜 작가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그 한 편을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6. 2. 23.

불멸

나무 끝의 부용화
산 속에서 붉은 봉오릴 터뜨렸네
개울가 집이라 적막하여 인적 없는데
어지러이 피었다간 또 지는구나
/신이오, 왕유
木末芙蓉花  목발부용화
山中發紅萼  산중발홍악
澗戶寂無人  간호적무인
紛紛開且落  분분개차락
/辛夷塢, 王維

 

그 이름을 기억하거나 외우고 간직하는 것만이 영속성을 보증하는 틀림없는 방법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 ㅡ 사람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 한 구절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 자격이 없을 때도 있고, 타고난 부끄러움 탓일 수도 있고, 어떤 가능한 방법도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꽃이 피어난들 하나 같은 꽃이 없으며 어제의 그 꽃도 물론 아니다. 심지어 말로 꽃을 피움에야…

문득 3년여 전의 편지들을 찾아 hotmail에 들렀다가 나는 그 계정이 비워져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기억만을 복구하는 것이 싫어 애써 그것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j.j. cale의 어느 노래 가사에 관한 번역과 닭죽 요리에 관한 짧은 언급을 기억한다. 연꼿 속에서 나비가 날아오르는 보색대비의 그림과 옷걸이 속에 펼쳐진 영상들, 그리고 모질게도 힘들었던 어느 하루에 관한 푸념도 기억한다.
나는 상심하고 심란한 마음이 되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머리맡에 있던 보르헤스의 책을 뒤적이며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에서 그리고 <알렙>에서 내 마음 같은 글을 이미 보았기에 불멸에 관한 그의 간결한 생각과 겸손함이 약간의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였다.

위대한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과 똑같이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고 말하는 그의 강의는 철학적이기도 하거니와 사적이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정치적 평등에까지 이르는 함축적인 이야기였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아카사 기록처럼 우주적인 규모의 ‘백업 장치’이건 혹은 내 마음 속의 ‘운항기록계’이건 혹은 보르헤스의 <과학에 대한 열정>에서처럼 ‘그 자체’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그 자체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 다들 알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대체 왜 존재의 증명을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내 안에는 당신에 관한 보다 명백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르헤스를 뒤적였다고 해서 전적으로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약간의 ‘척’이라도 할 수는 있다. 지금은 그것만이라도 필요하고 그것으로라도 족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2003. 10. 17.
+<불멸>, 보르헤스 강연집

 

싸이카

ㅡ 금지곡을 위하여

 

달려, 불꽃이 날리기 시작했지 굉음이 터져야 할텐데 모기 소리만큼도 들을 수 없었어 터널로 들어섰는데 바깥이 더 이상해 보였어 사실은 그 바깥이 정말 터널 같았지 난 시계가 고장난줄 알았어 계기판이 빙빙 돌아 미친줄 알았지
그걸 좋아하니 너도 알 수 있을 걸 느끼고 싶어하니 너도 가고 싶을 걸
가로등이 휘어지면서 앞길이 옆으로 펼쳐지기 시작했어 물고기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느낌 알고나 있을지 몰라 어안렌즈가 장착된 카메라가 아닌 다음에야 볼 수나 있을지 몰라
아득히 멀리 바늘 귀같은 점이 보이는 순간 나는 거대한 흑점 안에 있었어 그 차가운 점 안에 있다고 느낀 순간 점은 사라져버렸어
달려, 있는 힘껏 달려 가슴이 벅차올라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돌아올 때 역회전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만약 따라간다면 요람까지 만약 좇아간다면 무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순찰차 경광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천년이나 되는 줄 알았어 경관이 잽싸게 총을 뽑았지만 그건 정지화면이었지 경관이 부리나케 총을 쏘았지만 거북이 놀음이었어 그랬어, 난 너를 위해 그 총탄을 가져왔지 기어오는 총알을 잠시 기다리다 슬쩍 낚아챈 것이야
꿈길마저 온갖 이름의 수갑을 채우려 한다면 그나마 자유가 아니라면 달려, 목청이 터질 만큼 고함지르며 달리고 싶어 힘줄이 끊어질 만큼 지금 당장 달리고 싶어
아, 다시 한 번 또 그렇게 해보고 싶어
너랑 같이 누워서
그 짓을 해보고 싶어

 

 

/1999. 8. 6.

싸이카

ㅡ 금지곡을 위하여

 

달려, 불꽃이 날리기 시작했지
굉음이 터져야 할텐데 모기 소리 만큼도 들을 수 없었어
턴넬로 들어섰는데 바깥이 더 이상해 보였어
사실은 그 바깥이 정말 턴넬 같았지
난 시계가 고장난줄 알았어
계기판이 빙빙돌아 미친줄 알았지
그걸 좋아하니 너도 알 수 있을 걸
느끼고 싶어하니 너도 가고 싶을 걸
가로등이 휘어지면서
앞길이 옆으로 펼쳐지기 시작했어
물고기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느낌 알고나 있을지 몰라
어안렌즈가 장착된 카메라가 아닌 다음에야
볼 수나 있을지 몰라
아득히 멀리 바늘 귀같은 점이 보이는 순간
나는 거대한 흑점 안에 있었어
그 차가운 점 안에 있다고 느낀 순간 점은 사라져버렸어
달려, 있는 힘껏 달려
가슴이 벅차올라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돌아올 때 역회전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만약 따라간다면 요람까지
만약 좇아간다면 무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순찰차 경광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천년이나 되는 줄 알았어
경관이 잽싸게 총을 뽑았지만 그건 정지화면이었지
경관이 부리나케 총을 쏘았지만 거북이 놀음이었어
그랬어, 난 너를 위해 그 총탄을 가져왔지
기어오는 총알을 잠시 기다리다 슬쩍 나꿔챈 것이야
꿈길 마저 온갖 이름의 수갑을 채우려 한다면
그나마 자유가 아니라면
달려, 목청이 터질만큼 고함지르며 달리고 싶어
힘줄이 끊어질만큼 지금 당장 달리고 싶어
아, 다시 한번 또 그렇게 해보고 싶어
너랑 같이 누워서
그 짓을 해보고 싶어

 

 

/1999. 8. 6.

박정자

19XX년 처음 무지개 마을에 갔던 날 제 ‘더블백’ 속에는 세탁하지 못한 속옷도 꽤 있었습니다. 저는 졸병이었고 그것을 씻거나 버릴 겨를도 없이 그곳에 도착했지요. 전기는 들어왔지만 수도설비도 없는 곳이었고, 사람들은 산 기슭의 웅덩이에서 호스를 연결해 식수로 사용하는 부산과는 격리된 듯한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물갈이’라고 하는 심한 배앓이를 했었습니다. 거기 도착한 첫날 입출항통제초소의 소장은 그런 저가 안스러웠던지 어디서 처녀 한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얼굴이 그야말로 새카만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너무 야위어 있는데 놀랐고 몸무게는 아마 40kg이나 될까 싶었습니다. 그녀가 제 속옷을 손으로 다 세탁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 하나였고, 그 부끄러움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지만 군복이 그걸 숨겨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산에 그런 마을이 있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 곳입니다.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그것은 제게 고향에의 그리움을 깊이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엔 조그만 배를 타고 마을 앞에 있는 모래섬에 놀러가기도 했고, 낚시도 했습니다.

봄의 밤바다에서 숭어가 뛰는 소리를 들었고, 가을의 새벽 아침에 돌아오는 전어잡이 배들의 기쁜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을 전어는 깨소금 세말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하곤 하지요. 선박입출항신고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초소였습니다.

초소의 옆집에는 철없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고, 저는 그들과 참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와 동향이어서 정을 더 많이 나눴지요. 철없는 그들 부부는 일도 하지 않고, 조금 재산이 있었던지 마냥 놀며 지냈습니다만 저는 그들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귀여운 아이들도 생각나는군요.

신부는 예전에 호호아줌마 만화에 나오던 할머니처럼 마음씨 좋고 인심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들 부부의 할머니와도 참 잘지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통하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지요.

그들은 개 한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개가 어디서 극약을 먹고 와서 괴로워하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남편은 결심을 한듯, 어디서 밧줄을 갖고 와 개를 붙들고는 초소옆 담벼락에서 목을 매달았습니다. 한 오분, 십분이나 흘렀을까… 개는 계속 바둥거렸고, 평소와는 빛깔이 달라 보이던 고통스런 초록빛 눈이 아직 기억납니다. 그 개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저는 계속 공포 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부부의 가족들은 제가 있는 동안에 밀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는데 정말 마음이 허전해지는 순간이었고, 그 집은 이후 개척교회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장은 마을의 구멍가게집 처녀와 저를 연결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네요. 박정자는 가끔 바지락을 갖고 초소로 왔습니다. 초소에 있던 전기밥솥에 삶아서 같이 먹고 그랬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오빠는 그녀를 심히 구박하였고, 하나뿐인 여동생 또한 언니를 무시하곤 했습니다만 그녀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지 정붙일 때가 없었던 그녀에게는 가끔 초소에 놀러 오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던가 봅니다. 전 나름대로 그녀를 따뜻하게 대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제 이기심을 돌이켜볼 때 그렇지 못한 것도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늘상 그녀를 놀리고 무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심부름도 많이 시킨 것 같은데 그녀는 한번도 싫다고 하지 않았지요. 저는 마음의 여지를 주지도 않았고요. 비슷한 이유로 그녀를 가슴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은데 그런 게 있었다면 저는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6개월 가량 그곳에 있었습니다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야박함에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시골 같아 보여도 부산의 한 지역이어서인지 도시 속의 어촌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는지 마을 분위기는 메말랐고 제가 자랐던 농촌의 인심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조금은 황량한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참 착하고 예뻤습니다. 아무렇게나 뽀글뽀글 퍼머한 머리에 허름한 옷, 쇠꼬챙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 새카맣고 해골같은 얼굴이었습니다만 저는 무지개 마을을 떠나고도 한참 뒤에야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더욱 그랬습니다.

그녀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잘 치료받고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그녀는 심장이 좋지 않았고 조금 많이 움직이면 숨가빠했습니다.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저는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무지개 마을을 떠나왔습니다. 이후에 그녀가 어찌 되었는지, 또 무지개 마을이 사라졌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무지개 마을의 마지막 밤에 그 고개를 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올해 초 옛 친구가 보낸 메일에서 그는 제가 무지개 마을에 있을 때 그곳을 찾아가던 날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다 넘기 전에 돌아보았던 불빛, 고개를 넘어 다대포 바다의 수많은 어선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 그때 느낌의 일부는 “저기 저 불빛”이란 노래에 들어 있습니다.

그날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무지개 마을보다 더 잊지 못할 그녀입니다.

 

 

/1999. 3. 29.

 

+
그러니까 16년 전에 쓴 글이네요. 소소하게 몇 문장 고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입니다. 내 삶에서 그녀를 본 것은 불과 6개월 가량일 뿐입니다만 다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녀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모레나 두 마르에 귀 기울이면 마음이 저려오곤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그녀에 대해 한 것은 동훈형을 대할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좋아했듯 그녀도 그랬던 듯 싶고요.

그리고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녀에 관해 진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1999년 글을 쓰던 그때도 명확히는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무슨 잘못된 인성이 있는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초소 이웃집 가족이 이사갈 때도 비슷하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깡그리 잊어버린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점점 더 내 잘못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가야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핑계, “정들은 이웃에 인사도 없이…” 하던 정태춘 노래처럼 나는 그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잘못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또 저질렀습니다.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오빠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검색하다 그의 주소까지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지개 마을이란 이름은 아직 있지만 예전의 포구도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2015.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