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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작자에게

: 작자의 지은이에 관한 단상

 

그때 나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나는 奇蹟이었다
계속 판올림 하며 ○○년의 새해에도 나는.
//이작자

 

휴일의 한낮을 포터블 씨디 플레이어와 함께 보내었다. 마음먹은 김에 비좁은 하드디스크에 겨우 씨디 한장 복사할 공간을 만들어 ‘Samba da Bencao’을 녹음한 것이다. 그리고 작자의 지은이(^^)와 더불어 한참을 감상했다.

지은이는 그 가운데서도 ‘Lungomare’나 ‘Summertime’의 기타 연주, 체 게바라를 기리는 노래와 잉쎈싸떼쥐의 젠틀한 목소리, ‘봉 지아 뜨리쉬떼자'(마치 ‘백치 아다다’처럼 비장미 넘치는 이 노래는 가요무대에 나와도 될 것 같다) 등을 특히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 멋진 곡들 중에서도 ‘쌈바 다 벤쏭’의 가치를 알아봤으니 이작자가 도리어 감격하였다. 아무래도 그 노래에 남다른 멋과 품위가 있다고 한다.

작자의 지은이 ㅡ 작자 스스로야 늘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지만 그 저작권의 반을 갖고 있는 지은이께서는 늘 그 점에 관해서 당당하시다. 나머지 절반의 저작권자보다는 틀림없이 한참 좋은 점수일 것이다. 하찮은 작자이지만 그 당당함을 증명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더욱 그런 심정이 된다.

이작자라는 이름의 옆편소설(?)이 세상에 나온지 어언 XX년, 여전히 하찮은 소설이지만 그것은 작자 자신이 개작에 게을렀던 탓, 원작은 늘 훌륭한 것이었다. 절반의 지은이는 책을 찍고서 또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 사연은 때로 이작자를 부끄럽게 한다.

제 1권 발행일(누님의 생일^^)을 깜빡 넘겨버려 뒤늦게 케일 라이브 씨디를 카피하며, 그리고 이작자라는 작자의 초판 발행일(?)을 앞두고 작자의 공동집필자 가운데 한 사람에 관해 잠시 생각하였다.

부디 책이 값어치 있는 것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작자의 지은이에게는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작자(이작자 아님^^)라면 세상 모든 이가 그러할 것이다. 침해될 수 없는 작자에 관한 저작권, 저작권이여 영원히!

 

제 3권의 스토리를 말하지 않되 언제나 함께 기억하며
책이 작자에게, 이작자가 저작자에게

오늘의 머리까지도 지은이의 손을 빌려 깎은 작자 쓰다.

 

/2003.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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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Old Mister.y Book vol. 2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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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뒷편의 병풍도 ‘지은이’의 작품이다. 어쩌면 아직도 시골집에 남아 있을 듯.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그 병풍의 뒷면을 제사때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그런 시조들이 세로로 인쇄되어 있었던.

 

Don’t you hear my call, though you’re many years away
Don’t you hear me calling you? (39 / Queen)

플래쉬 백 : 回光

해가 몰라보게 짧아졌습니다. 좀 늦은 시간에 산엘 갔더니 약수터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렸습니다. 큼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별이 새삼스러웠지요. 자그마한 손전등 하나를 갖고 갔는데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측백나무 빼곡한 길목 너머 어둠 속 옛길을 따라 返照의 시간이 왔습니다.

자전거엔 바퀴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전조등이 달려 있었고 캄캄한 논길 다닐 적에는 ㄱ자로 꺾인 국방색 손전등이 요긴했었지요. 큼지막한 6V 전지가 들어가는 묵직한 플래쉬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도둑은 들키지 않기 위해 침침한 손전등을 갖고 다녀야 했고, 늦은 저녁 도랑길에 플래쉬라도 비추면면 목욕하던 아낙네들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별이었던지 미지의 비행물체였던지 강둑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둥글고 또렷한 빛의 궤적도 기억합니다.

시골의 여름밤에 플래쉬 갖고 놀면 그보다 신나는 일도 별로 없었지요. 새 전지를 넣은 손전등을 하늘로 비추면 밤하늘에 뽀얗고도 환한 선이 그어졌습니다. 어둠을 뚫고 구름을 넘어 어느 먼 먼 별에서 그 빛을 끝내 발견하리라는 확신에 가까웠던 믿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플래쉬 자체가 영사기였고 위태로운 담벼락에서 밤하늘까지가 꿈의 스크린이 되었지요. 우리는 저마다 손전등을 들고 불나방처럼 흥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온통 흩뿌려진 별들에까지 닿을 듯한 그 아찔한 환희의 느낌이라니요. 생각하면 가끔은 발을 헛디딘 듯 떨어지는 느낌이고, 잠깐씩은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각성의 충격이 오기도 합니다.

한참 닳아버린 전지 같은 세월 너머 측백나무 우거진 길을 걷다 그 우유빛 빛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얼굴들도 보이고 발자국 소리며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어떤 목소리는 귓전에서 나를 부르고 어떤 목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재촉을 합니다. 누군가 어둠 저 너머에서 플래쉬를 켰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떤 별에서도 응답받지 못한 그 빛이 세월을 돌고 돌아 내 캄캄한 하늘을 밝히는 몇몇 별이 되었습니다.

 

2008. 8. 30. 토.

알렉산드리아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와
도저히 복구 불가능한 기억.
― 크리스티나 펠리 로시*

 

항구는 모처럼 동방을 돌아온 배의 소식으로 흥청거렸다. 나의 일터와 항구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내 마음의 설레임은 배가 들어옴으로서 생긴 것임을 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어도 각별한 친밀감으로 맺어진 항구의 관원은 그 배의 물건들을 면밀히 조사한 후 내가 필요한 것들을 먼저 빌려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나는 먼 미래에 그의 직업이 어떤 것으로 불리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로 하여 나는 늘 발품을 덜고 꼭 그만큼 확장된 영토에 상상의 깃발을 꽂는 즐거움을 누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늘 기다려왔고 그 기다림은 파라오 네코의 명을 받아 대륙을 일주한 페니키아 함대의 모험담보다도 중요한 무엇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 질나쁜 파피루스와 가끔씩 애를 먹이는 필사 도구가 있음이 지금처럼 기쁠 때도 그리 많지는 않다. 전달자들 ― 반어반인의 형상을 지닌 양서류의 신화에서 깃털 달린 뱀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는 다양한 형상이 있지만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전달자는 나름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왔다. 께짤꼬아뜰과 콘티키 비라코차가 그러하였고 헤르메스와 오안네스가 그러하였다.
나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틈만 생기면 세상을 베끼기에 여념이 없다. 최소의 정보가 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최대의 상상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심으로 그 ‘글자들’을 사랑한다. 심지어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이국의 파피루스까지도 내게는 늘 신성한 무엇이었다. 그 불가해함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또 해독 가능한 세계란 얼마나 협소한 것인가. 바다의 끝은 그토록 아득한 것이어서 태양을 응시하기를 좋아하던 어떤 소년*은 여전히 그 바다의 기슭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나는 파피루스를 이어 붙이는 동안 향긋한 풀 냄새를 상상하곤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역하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른다. 아니, 나는 거기서 짜릿한 어떤 기운을 느낀다. 전달자들이 떠나기 전에, 더 많은 재촉을 받기 전에 잘 벼린 칼로 마무리를 해서 필사본을 제자리에 꽂고 나면 내 자신이 그 파피루스의 한 페이지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잊어버리는 데 사용하는 거대한 기억장치* ― 복구 불능의 기억까지 온전히 포함한 채 내가 세상에 돌려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기를 바란다. 불완전으로 하여 그들이 전달자의 일을 계속하고 있듯 나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나 자신의 일은 점점 하찮은 것이 되어 잊혀질테지만 내가 베낄 수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이는 시에네의 우물에 관한 파피루스를 읽고 세상의 크기를 짐작하였고, 어떤 이는 별의 지도를 그렸다. 어떤 이는 증기기관과 자동기계의 꿈을 설계하였고 어떤 꿈은 파피루스와 더불어 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잊혀진 것은 아니다.
갠지즈의 모래알에서 옛 그리스 이발사의 갈대숲의 기억까지 세상의 팰림프세스트에 수많은 사연이 쓰여지고 또 읽히는 한 내가 사는 곳엔 (그곳이 어디든) 바다가 펼쳐져 있고 파로스의 등대 같은 빛이 밤새 바다를 비출 것이다. 심지어 등대가 사라져도 남아 있는 그 이름과 같은 지속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도서관의 명멸과는 전혀 별개이고 나는 천사들이 어떤 직업을 지녔을지 가끔 생각해본다.

 

어떤 형상으로든 세상 어디에 있든,
알렉산드리아의 충실한 관원에게.

 

2003. 11. 6.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우주와 자연에 대한 뉴턴 자신의 비유와 일화.
*유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빗방울을 읽다

불가해한 순열의 초록빛 문자는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온 소식이던지 방충망의 모눈을 따라 드문드문 물방울 맺혀 나 모르는 세상의 철자가 되었습니다. 낯설고도 반가운 사연, 그렇게라도 듣게 되는 장문의 소식입니다. 빗줄기를 따라 사연도 그만큼 길었던가요. 의미 없는 의미의 심장 ― 거기에 뜻 있겠거니 모눈의 마음이 부지런히 받아서 적었습니다. 어느 아침 햇살에 잊혀지는 꿈처럼 해독解讀은 오히려 해독害毒, 조금 틀렸거나 잃어버려도 상관은 없겠지요. 밤이 오면서 창 너머로는 환한 방이 보이고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수심愁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기어 있고 지금쯤엔 저마다의 답신이 송골송골 맺혀 있을 것입니다.
 

 

/2002. 9. 1.

變心 : Sad Lisa

로버트 블록

 

 

“여섯시에요, 할아버지.”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시계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말썽장이 피노키오가 시계 소녀로 바뀐 것 같습니다. 피노키오의 할아버지같은 솜씨 좋은 시계공이 만든 필생의 ‘예술품’이 그녀였습니다.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짧고도 동화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시계를 고치러 울리치 클레임 시계점에 들렀다 우연히 알게 된 리사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리사 역시 할아버지의 편이었기에 주인공은 결국 그들을 떠납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속일 수는 없는 법, 리사는 병(물론 가슴에 병이 났겠지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밤낮 리사를 간호하던 할아버지는 그녀의 병을 고치고는 탈진해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래도록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던 리사를 찾아 끌어안은 나는 깊은 연민과 후회 속에 그녀의 가슴에서 째깍대는 시계소리를 들었습니다.

리사. 착하고 순결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시계였습니다. 리사의 가슴에서 들리는 시계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그였습니다.

<싸이코>를 쓴 로버트 블록이기 때문일까요. 공포소설이 가지는 반전의 매력에 집착한 작가의 조금은 냉정한 선택이라 해야 할까요… 그를 탓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도망치는 나는 너무 무정하였습니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또는 내가 글을 썼다면 ― 그것이 좀 시시하고 유치한 끝맺음이라고 해도 ―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나왔겠습니다.

현실 속에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도망쳤을 것이고, 어쩌면 많은 리사가 지금 이 순간 어두운 방안에 쓰러져 있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더욱 그녀의 손을 잡아야 했습니다.

이 단편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Cat Stevens의 Sad Lisa가 떠오릅니다. 물방울 소리같은 피아노 아르페지오에 이어지는 애처로운 멜로디입니다.

 

Sad Lisa (by Cat Stevens)

 

She hangs her head and cries in my shirt
She must be hurt very badly
Tell me what’s making you sadly
Open your door don’t hide in the dark
You’re lost in the dark, You can trust me
Cause you know that’s how it must be
Lisa, Lisa, sad Lisa, Lisa

Her eyes like windows, tricklin’ rain
Upon her pain, getting deeper
Though my love wants to relive her
She walks alone from wall to wall
Lost in her hall she can’t hear me
Though I know she likes to be near me
Lisa, Lisa, sad Lisa, Lisa

She sits in a corner by the door
There must be more I can tell her
If she really wants me to help her
I’ll do what I can to show her the way
And maybe one day I will free her
Though I know no one can see her
Lisa, Lisa, sad Lisa, Lisa

 

하지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나’입니다. 마네킹 인형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그린 존 콜리어의 단편 <특별배달>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마네킹 ― 전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이었습니다 ―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날 신세가 된 앨버트 베이커는 ‘그녀를 훔쳐서’ 여기 저기 도망다닙니다. 그 사이 말못할 고초를 겪지만 오직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그녀가 망가지지 않게 지켜준다는 데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만 그는 그녀와 영영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쇼윈도 너머의 마네킹을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페리 코모의 옛 스윙 넘버 ‘글렌도라’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차라리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의 주인공처럼 ‘괴물과의 결혼’이었다면 그의 도망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 끔찍한 결혼식장의 풍경을 목격하고 초라하고 혐오스런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는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 ‘나’는 정말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리사의 가슴은 기계처럼 세월을 지켰지만 ‘변심’은 그녀가 아니라 그의 것이었지요.

리사와 마네킹. <특별배달>의 소심한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둘을 바꿀 수 있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나는 용기없는 인간이지만 만약 내가 리사를 만나 사랑했다면 평생토록 그녀와 행복하였겠습니다. 기꺼이 시계공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하며 리사를 돌보았을 것입니다. for Happy Lisa…

“리사, 지금 몇시지?”
그녀의 행복한 가슴이 째깍째깍 뛰고 있습니다.

 

 

/1999. 7. 7.

 

 

 

일러바치기 심장+

 

귀를 대어보세요.
그녀의 가슴이 째깍거립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들리는 법
한 시간이 한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다들 그러하듯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그곳
그냥 그대로 얼어붙은 초점입니다.
그러던 내 가슴에 손 얹어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귀를 대어보세요.
다들 그러하듯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무지 이길 길 없어 멈출 법도 했건만
한 번쯤 참지 못해 달아날 법도 했건만
찰나를 세월처럼 지켰습니다.

 

1999. 7. 6.

 

 

+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The Tell-tale Heart>에서 따온 제목.
이 시는 <변심>에 관한 글보다 하루 전에 썼는데 비슷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담았다.

 

 

Donovan, 그리고 행복

사실 나는 도노반을 ‘사랑한다’. ○○살 먹은 남자가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ㅡ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 동화같은 노랫말을 사랑하고,때로는 철없이 들리는 그 멜러디들을 사랑한다. Atlantis를 회상하는 낭랑한 목소리를 사랑하고, 어쩌다 찐득하고(?) 변태적인 듯한 노래들을 사랑한다.(진짜 이상하다… ^^;)

도노반의 노래는 몇가지 전혀 다른 유형이 있다. 집시의 애잔함을 간직한 전형적인 포크 음악도 있고, 앨리스 쿠퍼 같진 않지만 약간의 마성을 드러내는 몇몇 곡들도 있다. 간결하고 경쾌하고 발랄한 노래들이 있고,철학적인 탐색을 추구하는 심각한 노래들도 있다. 그리고 섹스에 대한 은유와 상징들이 드러나는 노래들도 있다. ‘이거 정말 심하군’하고 느낄 만큼 노골적인 대목들도 많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과 특이한 노랫말들이 있기에 히피세대의 정신적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앨런 와츠는 그의 저서 <물질과 생명>에서 도노반의 음악을 비틀즈와 함께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동화속의 왕자처럼 행복한 꿈을 꾼다. 아름다운 자연, 신비한 집시, 서러운 동요들을 그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려 나간다. 나무와 새와 바람과 파도와 행복이 넘치는 세상에 대한 노래들이다. 나는 내가 가진 도노반의 음반들에 수록된 곡들을 나름대로 분류해서 테잎에 담아 자주 듣는다. 그 분류법이란게 지극히 단순/무식한 것이지만 번잡한 일과를 치루면서 듣기에는 효율적인 것이었다.

며칠전 3월의 햇볕이 봄을 알리듯 따사로운 오후였다. 한산한 사무실에서 도노반의 동화같은 노래들을 듣고 있었다. 그다지 슬픈 노래들도 아니었고,예쁜 노랫말과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경쾌한 노래들이 연이어 흘러나오는어느 순간,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너무도 간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한 순간의 너무도 간절한 바램이었다. ‘간절하다’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정도로 간절한 느낌…

○○살이 되도록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른한 오후의 사무실에서 한 순간 모든 것이 허깨비로 변해감을 느꼈다. 철없는 목소리는 여전히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나는 그 노래속의 주인공처럼 행복하고 싶었다. 이른 출근, 이른 퇴근, 사랑하는 사람, 가족, 아이들, 가정, 따뜻한 저녁 식탁,오붓한 시간, 포근한 밤…
이 모든 것들이 (롤링 스톤스의 노래 제목을 빌리자면) “2,000 light years from me” 같은 느낌이 들면서 너무나 비참해지는 것이었다. 도노반의 그 노래들이 한 순간 너무도 역설적으로 내게 들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행복’이라는 너무도 단순하고 평범한 말이 내 가슴을 쓰리게 하는 순간이 있으리라고는 결단코 생각한 적이 없었다. Happiness runs…

 

/1998. 3. 8. 0. 8.

 

+
18년쯤 전에 쓴 것이다. 이 글을 썼던 그 이른 봄날에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나는 거의 기억한다. 노래 두 곡이 흐르는 동안이었는데 한 곡은 특히나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조만간 그 노래에 대해 무엇인가 간략한 글을 쓸 생각이다. / 2016.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