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變心 : Sad Lisa

로버트 블록

 

 

“여섯시에요, 할아버지.”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시계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말썽장이 피노키오가 시계 소녀로 바뀐 것 같습니다. 피노키오의 할아버지같은 솜씨 좋은 시계공이 만든 필생의 ‘예술품’이 그녀였습니다.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짧고도 동화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시계를 고치러 울리치 클레임 시계점에 들렀다 우연히 알게 된 리사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리사 역시 할아버지의 편이었기에 주인공은 결국 그들을 떠납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속일 수는 없는 법, 리사는 병(물론 가슴에 병이 났겠지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밤낮 리사를 간호하던 할아버지는 그녀의 병을 고치고는 탈진해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래도록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던 리사를 찾아 끌어안은 나는 깊은 연민과 후회 속에 그녀의 가슴에서 째깍대는 시계소리를 들었습니다.

리사. 착하고 순결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시계였습니다. 리사의 가슴에서 들리는 시계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그였습니다.

<싸이코>를 쓴 로버트 블록이기 때문일까요. 공포소설이 가지는 반전의 매력에 집착한 작가의 조금은 냉정한 선택이라 해야 할까요… 그를 탓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도망치는 나는 너무 무정하였습니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또는 내가 글을 썼다면 ― 그것이 좀 시시하고 유치한 끝맺음이라고 해도 ―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나왔겠습니다.

현실 속에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도망쳤을 것이고, 어쩌면 많은 리사가 지금 이 순간 어두운 방안에 쓰러져 있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더욱 그녀의 손을 잡아야 했습니다.

이 단편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Cat Stevens의 Sad Lisa가 떠오릅니다. 물방울 소리같은 피아노 아르페지오에 이어지는 애처로운 멜로디입니다.

 

Sad Lisa (by Cat Stevens)

 

She hangs her head and cries in my shirt
She must be hurt very badly
Tell me what’s making you sadly
Open your door don’t hide in the dark
You’re lost in the dark, You can trust me
Cause you know that’s how it must be
Lisa, Lisa, sad Lisa, Lisa

Her eyes like windows, tricklin’ rain
Upon her pain, getting deeper
Though my love wants to relive her
She walks alone from wall to wall
Lost in her hall she can’t hear me
Though I know she likes to be near me
Lisa, Lisa, sad Lisa, Lisa

She sits in a corner by the door
There must be more I can tell her
If she really wants me to help her
I’ll do what I can to show her the way
And maybe one day I will free her
Though I know no one can see her
Lisa, Lisa, sad Lisa, Lisa

 

하지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나’입니다. 마네킹 인형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그린 존 콜리어의 단편 <특별배달>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마네킹 ― 전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이었습니다 ―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날 신세가 된 앨버트 베이커는 ‘그녀를 훔쳐서’ 여기 저기 도망다닙니다. 그 사이 말못할 고초를 겪지만 오직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그녀가 망가지지 않게 지켜준다는 데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만 그는 그녀와 영영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쇼윈도 너머의 마네킹을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페리 코모의 옛 스윙 넘버 ‘글렌도라’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차라리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의 주인공처럼 ‘괴물과의 결혼’이었다면 그의 도망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 끔찍한 결혼식장의 풍경을 목격하고 초라하고 혐오스런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는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 ‘나’는 정말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리사의 가슴은 기계처럼 세월을 지켰지만 ‘변심’은 그녀가 아니라 그의 것이었지요.

리사와 마네킹. <특별배달>의 소심한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둘을 바꿀 수 있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나는 용기없는 인간이지만 만약 내가 리사를 만나 사랑했다면 평생토록 그녀와 행복하였겠습니다. 기꺼이 시계공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하며 리사를 돌보았을 것입니다. for Happy Lisa…

“리사, 지금 몇시지?”
그녀의 행복한 가슴이 째깍째깍 뛰고 있습니다.

 

 

/1999. 7. 7.

 

 

 

일러바치기 심장+

 

귀를 대어보세요.
그녀의 가슴이 째깍거립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들리는 법
한 시간이 한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다들 그러하듯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그곳
그냥 그대로 얼어붙은 초점입니다.
그러던 내 가슴에 손 얹어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귀를 대어보세요.
다들 그러하듯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무지 이길 길 없어 멈출 법도 했건만
한 번쯤 참지 못해 달아날 법도 했건만
찰나를 세월처럼 지켰습니다.

 

1999. 7. 6.

 

 

+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The Tell-tale Heart>에서 따온 제목.
이 시는 <변심>에 관한 글보다 하루 전에 썼는데 비슷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담았다.

 

 

박정자

19XX년 처음 무지개 마을에 갔던 날 제 ‘더블백’ 속에는 세탁하지 못한 속옷도 꽤 있었습니다. 저는 졸병이었고 그것을 씻거나 버릴 겨를도 없이 그곳에 도착했지요. 전기는 들어왔지만 수도설비도 없는 곳이었고, 사람들은 산 기슭의 웅덩이에서 호스를 연결해 식수로 사용하는 부산과는 격리된 듯한 조그마한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저는 일주일 동안 ‘물갈이’라고 하는 심한 배앓이를 했었습니다. 거기 도착한 첫날 입출항통제초소의 소장은 그런 저가 안스러웠던지 어디서 처녀 한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얼굴이 그야말로 새카만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너무 야위어 있는데 놀랐고 몸무게는 아마 40kg이나 될까 싶었습니다. 그녀가 제 속옷을 손으로 다 세탁했습니다. 저는 그때 스물 하나였고, 그 부끄러움은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지만 군복이 그걸 숨겨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산에 그런 마을이 있었다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 곳입니다. 낙동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이었고, 그것은 제게 고향에의 그리움을 깊이 상기시키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여름엔 조그만 배를 타고 마을 앞에 있는 모래섬에 놀러가기도 했고, 낚시도 했습니다.

봄의 밤바다에서 숭어가 뛰는 소리를 들었고, 가을의 새벽 아침에 돌아오는 전어잡이 배들의 기쁜 소리를 들었습니다. 가을 전어는 깨소금 세말과도 바꾸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하곤 하지요. 선박입출항신고소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다 쓰러져가는 조그만 초소였습니다.

초소의 옆집에는 철없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고, 저는 그들과 참 가깝게 지냈습니다. 저와 동향이어서 정을 더 많이 나눴지요. 철없는 그들 부부는 일도 하지 않고, 조금 재산이 있었던지 마냥 놀며 지냈습니다만 저는 그들을 참 좋아했습니다. 그들의 귀여운 아이들도 생각나는군요.

신부는 예전에 호호아줌마 만화에 나오던 할머니처럼 마음씨 좋고 인심좋은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그들 부부의 할머니와도 참 잘지냈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통하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지요.

그들은 개 한마리를 키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개가 어디서 극약을 먹고 와서 괴로워하며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남편은 결심을 한듯, 어디서 밧줄을 갖고 와 개를 붙들고는 초소옆 담벼락에서 목을 매달았습니다. 한 오분, 십분이나 흘렀을까… 개는 계속 바둥거렸고, 평소와는 빛깔이 달라 보이던 고통스런 초록빛 눈이 아직 기억납니다. 그 개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저는 계속 공포 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젊은 부부의 가족들은 제가 있는 동안에 밀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는데 정말 마음이 허전해지는 순간이었고, 그 집은 이후 개척교회로 사용되었습니다.

소장은 마을의 구멍가게집 처녀와 저를 연결시키려고 애를 썼지만 그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녀가 내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네요. 박정자는 가끔 바지락을 갖고 초소로 왔습니다. 초소에 있던 전기밥솥에 삶아서 같이 먹고 그랬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오빠는 그녀를 심히 구박하였고, 하나뿐인 여동생 또한 언니를 무시하곤 했습니다만 그녀는 별로 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지 정붙일 때가 없었던 그녀에게는 가끔 초소에 놀러 오는 게 소소한 즐거움이었던가 봅니다. 전 나름대로 그녀를 따뜻하게 대했다고 생각합니다만 제 이기심을 돌이켜볼 때 그렇지 못한 것도 많이 있었을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는 늘상 그녀를 놀리고 무시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녀에게 심부름도 많이 시킨 것 같은데 그녀는 한번도 싫다고 하지 않았지요. 저는 마음의 여지를 주지도 않았고요. 비슷한 이유로 그녀를 가슴 아프게 하지는 않았다고 믿고 싶은데 그런 게 있었다면 저는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6개월 가량 그곳에 있었습니다만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의 야박함에 놀라기도 했었습니다. 시골 같아 보여도 부산의 한 지역이어서인지 도시 속의 어촌이라는 특성 때문이었는지 마을 분위기는 메말랐고 제가 자랐던 농촌의 인심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조금은 황량한 그 속에서 그녀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참 착하고 예뻤습니다. 아무렇게나 뽀글뽀글 퍼머한 머리에 허름한 옷, 쇠꼬챙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와 어눌한 말투, 새카맣고 해골같은 얼굴이었습니다만 저는 무지개 마을을 떠나고도 한참 뒤에야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제대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마음이 더욱 그랬습니다.

그녀가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 잘 치료받고 충분히 사랑받으며 자랐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그녀는 심장이 좋지 않았고 조금 많이 움직이면 숨가빠했습니다. 갑작스레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서 저는 그녀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무지개 마을을 떠나왔습니다. 이후에 그녀가 어찌 되었는지, 또 무지개 마을이 사라졌는지조차 알지 못합니다.

무지개 마을의 마지막 밤에 그 고개를 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올해 초 옛 친구가 보낸 메일에서 그는 제가 무지개 마을에 있을 때 그곳을 찾아가던 날을 회상하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다 넘기 전에 돌아보았던 불빛, 고개를 넘어 다대포 바다의 수많은 어선들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 그때 느낌의 일부는 “저기 저 불빛”이란 노래에 들어 있습니다.

그날 이후 다시는 가보지 못했습니다만 무지개 마을보다 더 잊지 못할 그녀입니다.

 

 

/1999. 3. 29.

 

+
그러니까 16년 전에 쓴 글이네요. 소소하게 몇 문장 고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그대로입니다. 내 삶에서 그녀를 본 것은 불과 6개월 가량일 뿐입니다만 다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녀를 더 많이 생각했습니다. 특히나 모레나 두 마르에 귀 기울이면 마음이 저려오곤 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제가 그녀에 대해 한 것은 동훈형을 대할 때와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그가 나를 좋아했듯 그녀도 그랬던 듯 싶고요.

그리고 참으로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내가 그녀에 관해 진짜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1999년 글을 쓰던 그때도 명확히는 몰랐다고 생각합니다.) 내 안에 무슨 잘못된 인성이 있는지 이야기 속에 나오는 초소 이웃집 가족이 이사갈 때도 비슷하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면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깡그리 잊어버린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나는 점점 더 내 잘못에 대해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가야 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핑계, “정들은 이웃에 인사도 없이…” 하던 정태춘 노래처럼 나는 그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잘못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또 저질렀습니다. 내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오빠의 이름으로 여기저기 검색하다 그의 주소까지는 찾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무지개 마을이란 이름은 아직 있지만 예전의 포구도 완전히 사라지고 없습니다./2015. 9. 9.

Donovan, 그리고 행복

사실 나는 도노반을 ‘사랑한다’. ○○살 먹은 남자가 할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ㅡ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 동화같은 노랫말을 사랑하고,때로는 철없이 들리는 그 멜러디들을 사랑한다. Atlantis를 회상하는 낭랑한 목소리를 사랑하고, 어쩌다 찐득하고(?) 변태적인 듯한 노래들을 사랑한다.(진짜 이상하다… ^^;)

도노반의 노래는 몇가지 전혀 다른 유형이 있다. 집시의 애잔함을 간직한 전형적인 포크 음악도 있고, 앨리스 쿠퍼 같진 않지만 약간의 마성을 드러내는 몇몇 곡들도 있다. 간결하고 경쾌하고 발랄한 노래들이 있고,철학적인 탐색을 추구하는 심각한 노래들도 있다. 그리고 섹스에 대한 은유와 상징들이 드러나는 노래들도 있다. ‘이거 정말 심하군’하고 느낄 만큼 노골적인 대목들도 많이 있다.
이처럼 다양한 스타일과 특이한 노랫말들이 있기에 히피세대의 정신적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앨런 와츠는 그의 저서 <물질과 생명>에서 도노반의 음악을 비틀즈와 함께 높이 평가하였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동화속의 왕자처럼 행복한 꿈을 꾼다. 아름다운 자연, 신비한 집시, 서러운 동요들을 그 낭랑한 목소리로 읊조려 나간다. 나무와 새와 바람과 파도와 행복이 넘치는 세상에 대한 노래들이다. 나는 내가 가진 도노반의 음반들에 수록된 곡들을 나름대로 분류해서 테잎에 담아 자주 듣는다. 그 분류법이란게 지극히 단순/무식한 것이지만 번잡한 일과를 치루면서 듣기에는 효율적인 것이었다.

며칠전 3월의 햇볕이 봄을 알리듯 따사로운 오후였다. 한산한 사무실에서 도노반의 동화같은 노래들을 듣고 있었다. 그다지 슬픈 노래들도 아니었고,예쁜 노랫말과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경쾌한 노래들이 연이어 흘러나오는어느 순간, 갑자기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너무도 간절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깨닫는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나도 행복해지고 싶다’는 한 순간의 너무도 간절한 바램이었다. ‘간절하다’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정도로 간절한 느낌…

○○살이 되도록 도대체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나른한 오후의 사무실에서 한 순간 모든 것이 허깨비로 변해감을 느꼈다. 철없는 목소리는 여전히 즐겁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나는 그 노래속의 주인공처럼 행복하고 싶었다. 이른 출근, 이른 퇴근, 사랑하는 사람, 가족, 아이들, 가정, 따뜻한 저녁 식탁,오붓한 시간, 포근한 밤…
이 모든 것들이 (롤링 스톤스의 노래 제목을 빌리자면) “2,000 light years from me” 같은 느낌이 들면서 너무나 비참해지는 것이었다. 도노반의 그 노래들이 한 순간 너무도 역설적으로 내게 들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행복해지고 싶은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행복’이라는 너무도 단순하고 평범한 말이 내 가슴을 쓰리게 하는 순간이 있으리라고는 결단코 생각한 적이 없었다. Happiness runs…

 

/1998. 3. 8. 0. 8.

 

+
18년쯤 전에 쓴 것이다. 이 글을 썼던 그 이른 봄날에 무슨 노래를 들었는지 나는 거의 기억한다. 노래 두 곡이 흐르는 동안이었는데 한 곡은 특히나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조만간 그 노래에 대해 무엇인가 간략한 글을 쓸 생각이다. / 2016. 7.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