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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는

처음 브라질 음악을 듣고 혹해 포르투갈어 제목들의 뜻을 찾아 헤매일 적에
가장 눈에 들어온 단어는 saudade였다. 브라질과 포르투갈에서 카보베르데까지,
파두와 쌈바, 보싸노바와 모르나까지
포르투갈-브라질만의 정서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나는 그것이 그리움과 매우 비슷한 것이라 생각했다.
minha namorada, 나의 연인을 향한
또는 특정한 장소나 시간 또는 그 모든 것이 함께 했던 순간을 향한.
그리고 그리움은 포르투갈어에서 한글로 바뀌어 내게로 왔다.

 

 

saudade는 그리움
엎질러진
돌이킬 수 없는
서투르고 느린 손이 보낼 수 있었던 메시지는
그것 뿐,
쏘다지는 그리움
안개처럼 안개비처럼 흩날리다
쏟아지는 그리움

 

 

/2019. 10. 11.

 

루즈 네그라

작은 상자 속 금관의 악기들이
흑백 텔레비젼 속에서 음을 올릴 적마다
검은 광휘을 발하던 시대
투박하게 치렁치렁하게
돌이킬 수 없이 막혀버린 커튼 너머
그 빛에 내가 혹하는 오늘
검은 빛에 둘러싸인
어딘지 모를 작은 상자 같은 곳
관을 잃어버린 악기가 적막을 토해내는
기막히게 멋진 밤

 

 

/2019. 10. 6.

 

태양 속의 한 시절, 크리스티나

유튜브에서 영화 <Way Back>을 다시 보았다. 2010년 무렵의 작품, 출연진은 훌륭했지만 영화는 그리 인상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영화를 잊지 못한다.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고3이던 시절, 어떤 막연한 죄의식과 번민으로 수험생으로서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리고 교과서나 참고서가 아닌 ‘책’만 읽던 때였다. 당시에 처음으로 손에 닿았던 책, <1984년>을 읽고서는 망상에 가까울 만큼 몰입되었었다. 마치 메쏘드 연기에 빠진 배우인양, 윈스턴 스미스의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그때 다음으로 읽었던 것은 <제 3의 사나이>와 <동물농장>이었고 그리고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책이 <길은 멀어도>였다.”A Gamble for Life, as Told by Ronald Downing”이란 작은 글씨와 함께 슬라보미르 라위츠라는 저자의 이름이 있던 책이었다.

분명히 기억하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시절에도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집을 뒹굴고 있었던 책이었다. 왜냐면 그 당시 우리집에 하숙하며 내게 수학을 가르치기도 했던 대학생이 책을 다 읽고선 ‘명작같다’고 했던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길게 평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그가 상당히 감동받았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집에 읽을 만한 책이 그리 많지는 않았기에 입시공부에서 아예 손을 떼었던 내 손이 거기 닿은 것이다.

길은 멀어도…… 책을 펼친 이후에는 단숨에 읽지 않을 수 없었다. 좀 상투적이지만 꽤 드라마틱한 스토리에 자유를 향한 의지와 갈망, 그리고 결말부의 짙은 허무감은 내 마음을 사로잡았고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학생 형의 말처럼 ‘명작같은’ 이야기였다. 게다가 실화라는 사실이 더한 무게감을 주었다.

 

Slavomir Rawicz 이미지 검색결과

 

그리고 크리스티나는 이 넌픽션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이다. 주인공 일행이 시베리아의 수용소를 탈출해서 바이칼호를 지날 무렵 만났던 소녀. 동유럽인 일곱명과 미국인 한사람으로 이루어진 탈출자들과 러시아 소녀가 일행이 되어 라사, 인도를 향해 간다. 다들 그녀를 지켜주려 애를 썼고 마르친꼬바스가 그녀와 특히 가까웠다. 오늘 영문판을 찾아 확인한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폴란스카. 비틀즈 어느 노래 가사처럼 열일곱살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런 준비없이 고비사막을 지나면서 큰 시련을 겪는다. 그곳에서 크리스티나는 결국 목숨을 잃는다. 나중에는 마르친꼬바스 또한. 결국 네 사람은 그 길에서 죽음을 맞고, 나머지 네 사람은 인도에 도착했다. 이별의 순간이 담긴 짧은 마지막까지가 강렬한 허무감과 함께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책은 십수년 전에 <얼어붙은 눈물>이란 ‘번안 제목’으로 재출간되기도 했고 <Way Back>이란 제목의 영화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는 원작과는 꽤 다른 부분들이 많았고 재출간된 책 또한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 모든 사연을 여전히 <길은 멀어도>로 기억한다.

이 책에 대해 여러 번 글을 썼지만, 시간이 갈수록 ‘넌픽션’이라는 말엔 더 큰 의구심이 생겼다.
미국의 스파이로 오인받았다는 ‘스미스’라는 의문의 존재를 생각해도 그렇고, 포로수용소의 소장 부인이 탈출을 돕기 위해 가방을 만들어주고 음식까지 제공해준다는 것도 쉽게 믿어지지는 않는다. 무엇보다도 라위츠의 동료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친척이나 지인들 가운데 그 누구도 존재를 드러낸 사람이 없다는 점은 더 강한 의심을 갖게 한다. 이 책이 발간되고 한참 동안까지는 공산국가 출신들이어서 그랬다고 해도(라위츠는 런던에 살았다) 소련 연방 해체 이후에는 정보가 어느 정도 개방된 상태였기에 당사자나 그의 주변 인물들이 나타날 수 있었음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미스터 스미스 뿐만 아니라, 그와 긴 여정을 함께 했던 자로, 콜레메노스까지도.

 

Slavomir Rawicz 이미지 검색결과

(시베리아서 인도까지의 사선은 그들이 탈출 후 걸어서 지나간 길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이 가짜였다고 하더라도 허구 속에서 어떤 절실함과 진실을 느낄 수 있기에 적어도 그 책을 읽던 나는 그랬었기에 치명적인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라위츠의 거짓은 라위츠의 거짓이고 나의 느낌은 나의 것이라 믿기에.

<길은 멀어도>의 수많은 장면들 가운데 가장 아팠던 대목 하나가 바로 고비 사막에서 그녀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장면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래도록 그 모습에서 누군가를 그리고 상상하기도 했다. 테리 잭스가 “Christina”에서 노래했듯이, 강물처럼 흘러가 되돌아올 수 없는 이름. 그의 노래가 더욱 아프게 들리는 것도 그런 까닭에서다. 그리고 먼 사막 어딘가에서 모래 속으로  사라진 또 다른 이름을 생각했다. 사막이라는 혹독한 미로 속에서 속절없이 쓰러진 그녀에게서 나는 틀림없이 누군가를 그려내곤 했었다.

라위츠의 미심쩍은 넌픽션이나 테리 잭스의 감정적 노출이 과도한 노래나 그리 대단한 무엇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 그런 ‘수준’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은 없다. 그저 안타깝고 그리운 사연이 내 안에 담겨 있을 뿐이다.
라사의 회전예배기(마니차)와 소박하고 인정 넘치는 몽골과 티벳의 풍경들,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깡통들, 오래전 일행의 흔적처럼 녹슬어가던 사연들,
그리고 끝없이 돌아가는 기도처럼, 바다가 딸기밭으로 바뀌던 꿈처럼,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것들……

녹지 않는 얼음인양
빛나는 이름
흐릿한 불길 건너다
광막한 미로 속
결정으로 남은 이름,

태양 속의 영원한 한 시절
크리스티나 폴란스카를 기억하며.

 

2015~2025. 10. 무치.

 

I had a dream about you, Christine
I dreamt that flowers growing sideways so green
And butterflies covered all of your head
And an angel slept beside your bed……
/Christina, Terry Jacks

당신과 나의

그다지 즐겁지는 않은 그저 그런 길, 매일 지나치는 오래된 세탁소 무슨 사연인지 주인 아저씨와 그분 할머니만 계시는 듯합니다 일주일에 서너번, 할머니는 가게에 나와 앉아 거리를 바라보십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지만 눈 마주치면 나는 그분들과 늘 인사를 나눕니다 딱히 즐거울 것도 없는 길 하지만 할머니께 인사드릴 적에는 늘 웃습니다 걸음도 건강도 이제는 편치만은 않으신 할머니도 늘 나를 향해 반갑게 웃어주십니다 출근길 퇴근길 5초 10초씩이나 될까요 일주일에 서너번, 일년이라고 해야 얼마나 될 것이며 십수년 그랬다고 한들 또 얼마나 될까요 하지만 할머니는 두고두고 웃는 모습의 나를 기억할 것입니다 별로 웃을 일 없는 내 삶에서 웃는 모습이 나에 관한 거의 모든 기억일 것이에요 나 또한 할머니를 그렇게 기억하고 또 기억하겠지요 매일 그렇게 인화된 적 없는 사진이 켜켜이 쌓이고 있습니다 그 어떤 사연도 없는 그저 웃음뿐인 단 한장의 사진이요

 

 

/2019. 9. 11.

 

바닷가의 작은 소녀 ◎

거실의 거치대로 전락한 mdf 앨범 박스 하나 뒤적이다
닐 영과 반젤리스를 찾았다.
see the sky about to rain, 닐 영 앨범은 여전히 낭랑하다.
모랫벌에 처박힌 큼지막한 장난감 같은 로켓이
새삼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끈다.
그가 직접 연주한 wurlitzer electric piano의 풍성한 여운을
나는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했었다.
장현 앨범을 구입했던 것이 1987년쯤이었던가 모르겠다. Read More

오키, 17년, 스타바운드 ◎

precious memories, how they linger
how they ever flood my soul
in the stillness of the midnight
precious, sacred scenes unfold
/precious memories, j.j. cale.

 

케일의 정규 앨범들은 거의 cd로만 가지고 있고 그 대부분은 20년쯤 전에 구입한 것들이다. #8 앨범은 국내판을 구입했는데 불행히도 reality가 빠져 있다. 하지만 파일들이 있으니 굳이 그것을 아쉬워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유일하게 lp로 갖고 있는 앨범 하나가 okie다. Read More

시인의 마음, 이니셜 에이

*몇개의 다른 시간대에서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은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이어져 있다는 것, 알 수도 있겠지요. 적어도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진정한 시인의 감수성, 시인의 마음에 관해서는 무디고 모자란 사람이라 잘 모르지만요.

/2019. 8. 24.

 

 

어제 저녁

퇴근하려는 참에 전화가 왔습니다. 모친이 삼치 요리를 하는데 파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모퉁이 부식가게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겨울에 어묵도 잠깐씩만 팔고 여름의 삶은 옥수수도 얼마 가지 않아 뭔가 팔아드리고 싶어도 그럴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는 길에 인사를 하고 물었더니 대파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큼지막한 냉장고 문을 열더니 냉동실에서 씻어서 썰어둔 대파를 꺼내 반쯤 넣어 주셨습니다. 예상이 되겠지만 한사코 계산을 거절하셔서 결국 파만 받아 왔습니다. 모친께서 다음에 한번 거기서 장을 보기로 하였습니다./2019. 8. 24.

 

 

2017년 늦은 가을

미스터 에이라는 시인이 계십니다. 2017년 어느 늦은 가을날 서울에서 경북으로 가는 고속버스를 탔던 분의 이니셜입니다. 옆자리에는 여고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거기서 어쩌면 사소한, 아니면 치졸하고 찌질한, 또 어쩌면 부끄럽고도 심각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일은 간단히 풀리질 않아 결국은 경찰서 조사를 거쳐 검찰에까지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Read More

노 모어 슈가 베이비

bill frisell의 맑은 기타 소리를 좋아한다.
자주, 즐겨 듣지는 않아도 듣는 순간의 즐거움을 조금 안다.
프리셀의 기타가 그렉 리즈의 도브로나 페달 스틸과 어울리면
두 소리는 이백 시 양반아 속의 침향인양
나선으로 얽히면서 고혹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여기 델리마디 툰카라의 엑조틱한 연주가 더해진다.
그래서 슈가 베이비는 그 제목보다 좀 더 오묘한 느낌이 든다.
썸머 와인의 여인처럼 뭔가를 더한
‘acid’ sugar baby일지도 모른다.
아래는 <양반아>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목이다.
“두 연기 하나 되어 하늘까지 이를 것”임이
동떨어진 몇 줄에서 더 많이 느껴진다.
세상에 마음 걸리는 일 그곳에 없기에.
슈가 베이비 더는 없기에.

 

 

어디가 제일
마음에 걸리느냐고요?

그야 백문 밖
버들이지요./양반아(부분), 이백

 

 

/2019. 8. 23.

 

 

 


/sugar baby, bill frisell

 

찬은이에요

“재즈를 좋아하시나봐요.” 책상 위에 읽으려고 둔 몇 권과
도서관서 빌려온 책들이 쌓여 있었지요.
그냥 잘 알지 못해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은 어려운 책인데요.” 너가 어찌 이런 책을 읽느냐는 뉘앙스가 풍겼지만
그저 몇 페이지를 보려고 빌렸고 읽기가 힘들다고 했지요.
사실이 그랬지요. 몇년을 두고 있었지만 세권짜리 그 책을 아직 반의 반도 읽지 못했죠.
어찌 좀 낯선가요, 찬은. 저의 진짜 이름이어요.
운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 집안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그럴 듯한 이름입니다.
아는 게 별로 없어 2주에 한번 도서관 가서 책 빌려 와 읽지만
그것도 다 읽기는 힘들었습니다.
어떤 것은 몇페이지만 보고 가끔은 다 읽기도 합니다.
부족한 머리로 들어오는 것도 없고 나오는 것도 없습니다.
찬은이에요. 빙빙돌아 마침내 알아낸 가문의 비밀이에요.
습한 지하세계 너머의 저 윗쪽, 보송보송한 양의 꿈을 꾸는 언더로이드에요.
어찌 하오 어찌 하오 흘러간 옛노래에 여전히 마음 쏟을 때
화장실로 달아나야 할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의
진짜 같은 이름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