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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론, 그레이의 수많은 그림자

내가 좌파냐 우파냐, 또는 내가 진보냐 보수냐에 대해서 확정하는 것을 그리 의미있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회색주의자다. 여기서 회색이란 이들 이데올로기의 스펙트럼을 섞은 중간의 색으로서의 회색이 아니라 경우에 따라 또는 현재의 상황에 따라, 또는 어떤 특정한 사안에 따라, 그 모든 것들에서 내 색을 찾을 수 있고 달리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색주의자, 또는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쯤으로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일련의 사건들이 진보적인 행위의 결과물이라고 한다면 적어도 이 대목에 관해서는 나는 전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앞으로 내가 어떤 특정한 사안에 대해 결단코 진보적인 색채를 띠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진영논리에서 완벽하게 벗어나고자 애를 쓰는 사람이며, 기본적으로 나는 자유주의자이고 개인주의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개인주의란 비어스가 악마의 사전에서 했던 이기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의 예시처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비어스는 풍자적인 요소가 강한 그의 단어 해석을 통해 ‘이기적인’이란 단어를 ‘남의 이기심에 대한 배려가 없는’이라고 정의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최근의 정치적 상황들에 대해 대부분 매우 부정적이며, 현실적인 힘이 부족한 쪽의 편이다.

물론 이 또한 내일도 그러하리란 이야기는 아니며, 특정한 어떤 정치적 신념의 지지지라나는 것도 결코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이 세상에 온 마음으로 지지해야 할 정치적 이념이나 신념이 존재한다는 것을 전혀 믿지 않으며 그것과 관련된 정치적 성향에 관련없이 그 어느 쪽에나 존재하는 수많은 정치적 위선들을 혐오한다.

그레이의 수많은 그림자, 밝은 곳에서 그것은 검은 빛에 가깝고, 어두운 곳에서는 백색의 음영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수많은 빛깔들이 있고 내 생각도 그렇게 켜켜이 나뉘어 있다.

private folk psych

어떤 때는 울기도 했다.
어떤 때는 어딘지 모르는 먼 나라의 십자로를 걸었다.
/이상

 

 

우연히 들여다본 hwabian 1의 페이지
오래도록 잊어버린 “페어리 테일”의 느낌이다. ‘동화’와는 조금 다른.

내게는 향수어린 세계,
닿지 못할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동경이
지금은 좀 다른 곳을 향해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포크 음악을 잊어버린 적은 없었으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이나 노래를 찾기는 쉽지 않았고
어쩌면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러할 것이다.
방대한 분량에 놀라고, 그 집요함에도 놀란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열의가 음악 그 자체에 있음도 그렇다.

유튜브의 몇몇 이국 사람들에게서
나와 꽤 비슷한 취향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것은 놀라운 경험이었지만 일정 부분 비슷한 취향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전혀 다른 틀이 새로운 세계를 돌아보게 하는데
hwabian 1의 페이지가 그랬다.

하지만 창 너머 허름한 길에서 슬쩍 훔쳐보는 풍경 같은 것임에
나로선 조금 마음이 아프다.
<고독 행성>,
박정대의 몇줄이 그녀를 대신하고 있다.

 

 

 


/driven by the rain, greg welch

 

 

/2019. 8. 14.

 

아니되고 안될 것 같은

오늘은 하루키의 재즈 에세이를 꺼냈다가 잭 티가든에 관한 글을 끄적였습니다.
내가 받았을 때 이미 절판되었던 책이었기에 아마도 그것은 중고서적이었을 것입니다.
그저 십수년 전 아픈 마음과 함께 이 책이 왔다는 것만 알았을 뿐,
그림이 딱히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는지
와다 마코토가 그린 표지의 듀크 엘링턴을 나는 자세히 본 적이 없었습니다.
책을 키보드 옆에 둔 채 검색을 하며 책 표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낡아서 생긴 상처이거니 했던 왼편의 하얀 부분이
모든 표지 사진에 똑같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바보스레 나는 이 책들 제본에 문제가 있었나 생각을 했더랬지요.
자세히 살펴보니 그것은 엘링턴의 피아노 위, 재떨이에 얹혀 있는
담배에서 나오는 연기였습니다. 잠깐 속으로 한숨이 흘렀습니다.
한창 부지런히 담배 피우던 때, 내뿜던 연기 같은 한숨이었습니다.
낡은 흠결처럼 새겨진 기억,
있어도 아니되고 흩어져도 안될 것 같은 하얀 그 연기
빛깔만 달리한 채 아직 내 안에 있는 것 같았습니다.

 

 

/2019. 8. 4.

 

 

watching the watchers

돌아가고 있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냥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허울좋은 명분을 미스릴의 갑옷인양 여전히 걸쳐입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빛나는 갑옷 너머를 볼 수 있어야 하며,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 감시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설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 감시자들의 역할 또한 교묘하게 변화되고 있음 또한 분명하다. 감시해야 할 대상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는 개인을 감시하는 감시자는 감시자가 아니다. 설혹 개개인에게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감시의 대상자가 저질렀거나 저지를 수 있는 문제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짓을 하는 자칭 감시자들이란 사건의 은폐자이며 돌이킬 수 없는 공범일 뿐이다. 아직은 빛을 발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그 허울이라는 것, 한 세월 멋지게 흘러갈지 모르지만 영원할 수는 없다. 부조리한 세계라지만 전적으로 부조리하지만 않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부조리의 진정한 본질이기에 어떤 경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