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낼 뼈라도 있긴 있었을까
다만 콩닥대며 짧은 꿈 잠시 꾸었을 뿐
마음의 지붕에조차 올라본 적은 없었다
추려낼 꿈이라도 어디 있긴 있었을까
온갖 두려움과 낯 뜨거움과 부끄러움의 이름 너머
숨다 달아나다 잠시 퍼덕였을 뿐
이 하루 겨우 재울 양념에 절어서 사는
날개 없는 자의 걸음 같은 가슴살
이내 하루살
/2006. 7. 19. 0:47
+
스팸 피해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화이트룸” 살펴보다
11년 전에 쓴 이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그 책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15, 6년 쯤 전이었을 것이다. 어디로부터 내게 왔는지 모를 <허구들>과 보르헤스 관련 몇몇 서적의 역자 주석과 해설에서 숱하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번역본은 없었다. 한참 뒤에 읽게 된 보르헤스의 에세이집을 무척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 책이었다. 출판사는 보다 구매력 있는 제목을 원했겠지만 나는 바뀐 그 제목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하지만 제목이 무엇이라 붙었던들 그 책, <또다른 심문 otras inquisiciones>은 내게 의미있는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노래 한 곡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브라질 음악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을 다방면으로 확장시켜준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사실을 말하자면 보르헤스의 상당수 에세이가 내게 그랬다. 바벨의 도서관 해제도 물론.)
아무튼 그 책의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이란 에세이에서 나는 레옹 블루아(이전의 책에는 영어식 표기로 ‘레온 블로이’라 되어 있었다)를 다시 보았고 로드 던세이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도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는 두 작가와 그들의 이야기가 각기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이 정착한 마을 ‘몽쥐모’를 떠날 수 없는 부부의 기구한 삶이 있었고, 그와 반대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전설의 도시 ‘카르카손’을 향한 원정대의 허망한 꿈을 다룬 던세이니의 이야기도 있었다.
블루아의 단편에는 일정 부분 블랙 코메디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던세이니의 경우는 중세 무용담의 형식에 삶 자체에 대한 은유를 담담한 어조로 담아내었다. 던세이니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이가 보내온 편지에 인용된 출처불명의 한 줄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은 결코 카르카손에 도달하지 못했다”를 통해 이 단편을 썼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날 수 없는 곳과 수많은 세월을 진군했음에도 닿지 못하는 곳, 내 생각에 삶은 그 두 장소 모두인 것 같았고 나 역시 그 두 곳을 오가며 절망하고 희망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몽쥐모와 카르카손은 결국 같은 공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 않았으면 찾지 않았을 것이다. <녹터널 애니멀즈>의 불편함 때문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어 싱글 맨>을 통해 감독에 대한 느낌에 극적인 반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아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뜻밖이었다.
원작자와 감독이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퀴어 영화라고 한다면 당연히 퀴어 영화겠지만 성적인 정체성보다는 상실과 복원이라는 관점에 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영화가 성적인 소수자를 다루고 있음에도 부담스런 느낌은 별로 없었고 오직 상실에만 공감하며 집중할 수 있었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모든 일 ㅡ 그게 사랑하는 사람이든 다른 무엇이든 상실감이라는 점에서는 내 느낌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던 까닭이다.
사랑하는 사람 없이 깨어난 아침, 침대 위의 만년필에서 잉크가 새어 하얀 시트가 검게 물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손이 그쪽으로 가지만 이미 수습할 수 없는 상태고 어떻게 할 기력도 없다. 잉크 묻은 손으로 하여 자기 입술에 잉크가 묻어도 알지 못한다…… 정말 그런 것이었다. 나는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이 이 장면이었다고 생각했다.(그래서 나는 이 장면을 여기 링크했다가 삭제했다.)
그리고 싱글 맨이란 이름을 따라 몇몇 ‘맨’을 떠올렸다. 해피 엔딩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의 뜻하지 않는 결말이라는 점에서 제일 먼저 <시리어스 맨>이 생각났고, 다시 날자꾸나 하던 <버드맨>과 거기 없었다던 엉뚱한 ‘그 남자’ 이발사도 어른거렸다. 현실이라면 ‘시리어스 맨’이겠지만 상실감에 관해서라면 나로선 ‘어 싱글 맨’에 동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이거나 꿈이거나 ‘그’이거나 ‘그녀’이거나 도무지 복원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감에 관한 이야기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의 귀퉁이, 또는 후미진 (영화관의) 자리에 본능적으로 눈이 가는 사람으로서 <a single man>이 a single man에게만 집중되어 있음은 조금 안타까웠다. 그것은 ‘다크 시티’의 마지막에 진실을 알게 된 순간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버린 형사(윌리엄 허트)나 ‘오픈 유어 아이즈’의 빌딩 옥상에서 자신이 정체성에 충격을 받는 정신과 의사에 대해 내가 가졌던 묘한 연민과 비슷한 무엇이다.
짧고 인위적인 조우였고, 16년을 함께 한 짐(매튜 구드)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고 하더라도 헐리우드의 꿈을 안고 마드리드에서 왔다가 처량한 신세가 된 카를로스(존 코르타자레나)를 냉정히 보낼 때 그 청년 또한 a single man이었고(나는 느끼한 이 청년이 외면당한 게 이상하게 마음이 아팠다), 결국 존경하고 사랑하는(?) 존 팔코너 교수의 생각도 못한 죽음을 목격하게 될 케니(니콜라스 홀트)에겐 이 무슨 캄캄한 절벽이었을까 싶다. 끝내 콜린 퍼스의 사랑을 얻지 못한 찰리(쥴리안 무어) 역시 a single (wo)man이었다. 사랑하는 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이라는 ‘확실한 內傷'(또는 外傷!)을 가진 주인공이었지만 그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단장을 했으나 “과거에 사는 것이 나의 미래야”라고 말하는 그녀를 비롯한 그의 가까운 모두가 더하고 덜할 수 없는 a single man으로 보였다. 혼자라는 것 자체가 확실한 內傷이니 거기 물론 나도 빠질 수 없겠고.
그래서 <녹터널 애니멀즈>의 경우와는 정반대, 특별히 대단한 영화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a single man의 심사가 궁금하다면 이 글을 읽는 이가 봤으면 싶다. 어느 하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삶을 관통하는 아픔 ㅡ 어쩌면 내가 아니라 당신이 거기 있을지도.
/2017. 11. 22.
+개인적인 취향 내지 결함이겠지만 유능한 디자이너이기도 한 감독과 스타일리쉬한 콜린 퍼스의 이미지로 하여 너무 깔끔한 것이 오히려 영화에의 몰입을 어렵게 만드는 것 같았다.
바닷가에 사는 어느 아가씨를 위해 물고기 몇마리를 잡고 예쁘장한 조개껍질을 주워 가져온 어떤 이의 이야기, 내가 아는 몇몇 가수들이 이 노랠 나름의 방식으로 불렀습니다. 하지만 작곡자를 포함한 그 누구의 노래도 나라 리오 만큼 마음에 닿지는 않았습니다. 보싸노바의 뮤즈라고들 하지만 사실 음악적으로 그녀를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몇몇 노래만은 절로 마음이 이끌립니다. 특히나 그녀가 모레나를 노래하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아프게까지 합니다. 단순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곡조에 소박하고 아름다운 가사가 그렇고 모레나 두 마르를 노래하는 분위기도 그렇지요.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동떨어진 듯한 한밤중에 한 사람 앞에 두고 고적하니 노래하는 느낌입니다.
모레나 두 마르가 자신이 노래한 최고의 곡 가운데 하나라고 그녀가 서두에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노래하는 모습을 보면 그녀 자신이 가사에 나오는 ‘예만자 여신의 은과 금’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석을 그렇게 빨리 잃었는지도 모르겠지만요. 이 노래는 한박자 쉬고 들어가는 형식인데다 발음도 어려워 생각만큼 노래하기 쉽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몇번이고 듣고 들으며 낮은 톤으로 따라 부르곤 합니다.
/nara leão
morena
e as estrelas do mar
ai, as pratas e os ouros de iemanjá
포르투갈어 morena는 여자를 뜻하는 단어지만 여기서는 그냥 소녀나 아가씨가 아니라, 피부가 까무잡잡한 여자를 의미합니다. 바닷가의 새카만 아가씨. 그래서인지 이 노래는 아주 오래 전 내가 지냈던 바닷가 마을의 그녀, 박정자를 생각나게 합니다.
산언덕 하나 넘어 차도 들어가지 못하던 곳, 이름도 예쁜 무지개 마을에 살았던 아가씨……. 그 새카만 얼굴과 몹시도 야윈 몸, 촌스런 퍼머 머리에 가늘고 날카로왔던 목소리가 어제처럼 떠오릅니다. para te enfeitar(to please you), 노래에서와는 달리 바지락도 그녀가 씻어와서 삶아주곤 했지요. 그녀를 사귄 것도 사랑한 것도 아닌데 생각하면 이상하게 아프고 미안한 마음 지울 수가 없습니다. 정말 보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내게 있어 모레나는 그 새카만 얼굴 너머 더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고 그리게 합니다. here, there, and everywhere, 여기 저기 내 좁은 세상과 많지 않은 기억의 모퉁이에서 그리운 얼굴이며 마음이며 목소리를 불러오고 그런 의미에서 모레나는 내게 있어 포르투갈어의 보석 같은 ‘saudade’의 또다른 이름입니다.
이 곡은 자신의 고향이자 쌈바의 고향이라 일컬어지는 바이아의 바다를 소재로 하여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고 굵직한 목소리로 노래했던 도리발 까이미의 작품입니다. 내가 이 노래를 들은 것이 2001년쯤일 듯 싶은데 처음 들었을 그때나 지금이나 느낌은 하나 변함이 없고 어떤 날에 누군가 나를 위해 이 노랠 기억해준다면 틀림없이 기쁠 것입니다. 예만자 여신의 은과 금은 모레나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갖고온 물고기와 조개껍질이었을까요, 아니면 바닷가의 모레나 그녀였을까요, 또 어쩌면 이름모를 어부의 마음이었을까요. 어떤 시적 영감도 아닌 어찌 못할 그리움을 불러다 주는 뮤즈, 그녀의 목소리에 낮게 키를 맞춰가며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오 모레나 두 마…….
기억을 소재로 한 최근의 영화를 봤다. 아주 대충 봐서 영화에 관해선 뭐라 말도 하지 못하겠다. 알다시피 기억이란 굉장히 불확실하고 불분명하며, 뜻밖에도 신뢰할 수 없는 것이다. 또 과거에 대한 완벽한 기록이 있다고 한들 희미한 기억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는 않다. 심지어 까마득히 잊어버린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느낌은 남아 있음을 나는 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이 기억의 바깥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기억 그 자체도 아니다. 터무니없는 상실이 안타깝거나 괴롭거나 견디기 힘들 때도 있지만 망각까지 포함하는 오래된 어느 순간의 느낌이나 심정은 그다지 달라지는 법이 없다. 보르헤스에게서 망각에 관한 놀라운 성찰을 배운 이래 나는 기억에 관해서, 엄밀히 말해서는 기억하지 못함에 관하여 한결 편안해졌고 모래성처럼 허물어져가는 기억에 대한 자책에 대해서도 비슷하였다. 르네 마그리트의 기억 ㅡ 눈을 감은 채 관자놀이에 피를 흘리고 있던 모습에 나를 투영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영화가 보여준 것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세세한 기억의 정밀한 총합이라기보다는 그 순간들의 느낌과 그 느낌에 대한 믿음으로 남아 있고, 그것은 좀처럼 훼손되는 법이 없다. 굳이 영화를 통해 다시 확인할 필요도 없이.
그게 2000년대의 중반이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나는 르귄의 단편집이 나온 것을 보고 곧장 구입했다. 아마도 세부 쯤 구해서 하나는 선물을 했고, 잘 펼쳐지지 않는 작은 책이 불편했던 나는 책을 잘라 링으로 묶었다.(선물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어딘가에 원본 그대로의 책이 또 하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여전히 다 읽지 못했다. 나처럼 책읽기에 서툴고 집중력이 떨어지는 사람은 그녀의 책을 읽는데 뭔지 모를 어려움이 있다.
보르헤스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고 해도 한줄 한줄 새겨 읽을 수 있었지만 르귄의 경우엔 그렇지 못했다. 허사처럼 보이는 묘사가 많은 것도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면 스스로도 조금 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멜라스에 대해 가졌던 나의 오래된 어떤 거부감이 희미하게나마 여전히 작동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그리고 좀 비루한 변명 같은 그 결과, 내가 기억하는 바람의 열두 방향은 여기저기 구멍난 스폰지 같은 형상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십수년에 걸쳐 피셔킹을 보았고 다른 몇몇 영화와 책에 대해서도 (이해를 구하기는 좀 곤란한) 비슷한 과정들을 경험했다.
르귄에서도 그럴지는 십여년의 시간을 보낸 지금도 잘 알 수 없지만 그 열두 방향 가운데 하나였던 <파리의 사월>을 여전히 좋아한다. 고독한 어떤 마법사가 꿈같은 마법으로 시공간을 초월하여 친구를 만들고, 애인을 만나고, 친구의 애인까지 엮어서 파리의 사월을 즐거이 거니는 이야기다. 부러운 심정으로 그 이야기를 처음 보았던 때가 언제인지는 잘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르귄의 단편집보다는 한참 이전이었다.
나는 이 책의 서두에 있는 슈롭셔의 젊은이를 옛 홈페이지에 올린 적이 있다.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분이 대신해서 올려주는 형식으로. 그 시가 지닌 문학적 의미에 관해서 아는 바는 별로 없지만 내 마음 같았던 시간을 나는 알고 있다.
코스모스 한들한들 피어 있는 길을 따라 흥얼거리다
문득 밤하늘을 바라 보았지 별 하나 찾기 힘든 그곳,
그리운 얼굴을 떠올리기는 어려운 일이었지
/창백한 푸른 점
어릴 적에 본 학원사의 <코스모스>는 우주에 대한 상상의 보고였다. 지름 10만 광년의 은하에 수많은 별이 모여 있는 도판을 보면서 무한에 관한 수많은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교양서적이라면 교양서적일 뿐이겠지만 처음 읽었을 때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 책에는 은하와 행성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무라이의 투구를 닮은 헤이케 바다의 게와 진화론적 선택을 드라마틱하게 연결시켰고, 불타버린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대한 묘사는 하염없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켰다. <코스모스>를 떠올리면 이오의 활화산에서 퀘이저까지, 에라스토테네스에서 인디언들의 문명세계와의 조우에 관한 기록, 뉴턴이 그려낸 바닷가의 소년의 이야기 등이 순서도 없이 머리속에 펼쳐지곤 한다. 하지만 <코스모스>에서 단 하나의 문장을 뽑는다면 나는 그 책의 제일 앞에 있는 짧은 헌정사를 떠올리곤 한다. 어쩌면 대단할 것도 심오한 것도 없는 연애편지 같은 조금 감상적인 문장일 뿐이지만 그런 마음이 일어날 때 나이브해지고 유치해지는 것은 유치한 일이 아니다. 그런 유치함을 다시 경험할 수 없음이 서글픈 일일 뿐. 내 낡고 오래된 코스모스의 처음에 실린 글은 다음과 같다;
for ann druyan:
in the vastness of space and the immensity of time,
it is my joy to share a planet and an epoch with annie.
/carl sagan
+
창백한 푸른 점은 칼 세이건이 쓴 또다른 책의 제목이지만
내게 있어 책이 아닌, 시의 제목도 아닌 다른 무언가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들의 스테이지를 보면 먼저 눈쌀이 찌푸려질지도 모르겠다. 양아치 같은 인간들이 지저분하고 게걸스런 분위기로 노래하는데다 민망한 장면들도 없지 않다. 술 내지 약에 쩔은 듯 싶고 (누구는 그 몽롱한 세계를 거창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다듬어 “a day in the life”를 만들고 어떤 이들은 살짝 미친 듯 뉴올리언즈의 위치 퀸 “마리 르보”를 노래한다) 싸구려 같은데 묘하게 편안하고 막나가는 듯한데 어찌 좀 속이 후련하고……
애꾸눈 레이 소여가 해적이라면 털복숭이 산적처럼 보이는 멤버도 아닌 다른 한 분, (get my rocks off까지 포함해서) 닥터 훅의 상당수 노래를 작사 작곡한 shel silverstein(‘스타인’이 아니고 ‘스틴’이란다)은 시인 겸 카투니스트에 어린이책도 출판했다는데 정말이지 “믿거나 말거나”다. 여러모로 어울리지 않는 것들의 조합 같은데 신기하게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들 나름의 방식으로 애절한 노래도 있고, 유머러스한 노래도 있지만 역시나 막나가는 노래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나로선 닥터 훅 하면 아무래도 첫번째는 “get my rocks off”다. 멋진 리듬을 지닌 이 노래, 듣고 보는 내가 찔리는 듯 그들 대신 변명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한 만큼 금기를 훌쩍 뛰어넘어 심히 저질스럽고 노골적인데 나름 절묘하다. 닥터 훅이란 밴드의 이름은 레이 소여에게서 짐작할 수 있듯 ‘후크 선장’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는 한방의 훅.
“get my rocks off the mountain, and roll ’em on down the hill.”
(붙이지 아니함 ㅡ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고 애써 강조하던 내 시 두어 편도 비슷한 방식이었을까 잠시 생각해본다./그저 한숨만 쉬는 닥터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