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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petite fille de la mer

어디메, 막 피는 접시꽃 새하얀 매디마다
감빛 돛을 올려라
오늘의 아픔 아픔의 먼 바다에/박용래

 

아마도 내가 열일곱, 열여덟 때였을 것이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해상 일기예보를 전할 때 이 곡이 나왔다.

 

“이즈하라, 소나기 / 눈.”

 

나는 방에 앉은 채 어딘지 모를 먼 바다를 떠도는 것 같았고
이국의 낯선 지명이 겨울 바다 너머로 따스하게 들렸다.

조그만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내 가슴을 적시던
물방울 같은 일렉트릭 피아노의 느낌을 잊은 적은 없었다.
결코 알지 못한 바다의 작은 소녀를.

 

 

+이 곡은 (좀 엉뚱할지도 모르지만) stranger than fiction에도 나왔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경우처럼 상당히 특이한 영화임에는 틀림없는.

 

 

 

/2015. 10. 16. 1:05

 

peace of……

내게 워터보이즈란 재미없는 이름을 알게 해준 첫번째 노래였다.
인트로는 조금 식상한 느낌이었지만
디자이어 앨범을 연상케 하는 집시풍의 바이올린에
마이크 스콧이 길게 길게 이어가며 노래하는 섬의 이름은
알지 못할 섬의 역사와 그 속에 얽혀있을 숱한 사연인양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을 여운을 내게 남겼다.
내 마음에 무엇이 맺혀 풍파를 잠들게 하고 싶은 것인지
가끔은 아이오나를 내 이름처럼 기도처럼
닿지 못하거나 풀리지 않는 마음의 한 조각처럼 여기며
이 노랠 듣곤 했다.

 

 

/peace of iona, waterboys

 

에라티카 늬우스

“이어 ㅇㅇㅇ시인이 무대에 올라 윤동주 시를 낭송했다. 제목은…….”
(가을을 타고 흐르는 시 낭만을 깨우다, dy일보)

“민족시인 윤동주의 ‘ㅇㅇㅇㅇㅇㅇ’이라는 시가 있다.
세월의 가을이 아닌 인생의 가을을 노래한 것이어서 계절의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생각나는 시다.”
(ㄱㄱ신문)

 

모친 모시고 어디 다녀오는 길이었다. 폰을 들여다보다가 무엇이 궁금했던지 어느 친구분께서 보냈다는 카톡에 대해 말씀을 하셨다. 핸들을 잡고 있던 나는 그분이 보내왔다는 윤동주의 시가 어떤 것일지 궁금해서 한번 읽어보라고 했다. 겨우 두어 줄을 읽었는데 나는 중단을 시키고 제목부터 물었다. 시작 부분만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게 윤동주의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당연한 이유의 가장 큰 근거는 그의 시를 거의 다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제목의 시를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고 그게 내가 여태 알지 못한 그의 시라고 한다면 좀 떨어지는 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어딘지 습작의 느낌이 풍기는. 그래서 나는 십중팔구,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다고 말씀을 드렸고 모친도 그런 것 같은 생각이 든다고 했다.

오늘 조금  자세히 찾아봤더니 역시나 그것은 윤동주의 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과 허위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상에 있는 듯, 숱한 기사와 블로그에 너무도 자연스레 윤동주의 시로 소개되고 인용되고 있었다. 이 무슨 첨단 포스트모더니즘 기법의 구현인지 기존 시인의 시와 그 시를 (윤동주의 작품으로 치부하며) 낭송회도 이루어지는 상황이었고, 이 시의 ‘진짜’ 지은이에 관한 작은 기사는 뒷전이었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일부 신문의 칼럼이나 기사에서조차도 이 시를 윤동주의 작품으로 자연스레 인용하고 보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출처불명의 글들이 인터넷이나 sns를 떠돌며 지은이가 잘못 알려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 와전이라는 것이 ‘종이신문’의 영역에서까지 검증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보다 심각한 일이다. 한때 널리 읽혀졌던 스티브 잡스의 유언이라는 글처럼 그것이 터무니없는 와전이었음에도 그것을 걸러낼 ‘필터’가 없었거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오작동은 경기에서 제주까지, 전국 팔도에 골고루 걸쳐 있었다.

게다가 이 시가 인터넷을 떠돌기 이전부터 (다른 어떤 분은 이 시를 그리도 사랑했던지) 원작자의 글을 마음대로 자기 이름으로 지면에 발표하기도 했고, 그런 이유로 해서 현재의 제목 또한 지은이의 원제와는 조금 달라져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그것을 ‘윤동주의 시’로 인용하며 칼럼을 쓴 분들이나 남의 시를 자기 이름으로 발표한 분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기법으로 치자면 빛나던 옛시절의 마술적 리얼리즘 작가들과 맞짱을 뜰만한 최상위 수준인 듯 싶다.

덧붙여 “이 시가 윤동주의 작품으로 둔갑한 것은 그만큼 작품이 우수하다는 증거”라는 어떤 분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지은이에게는 자신의 작품에 관한 소중한 권리가 있는 만큼 그에 관한 의혹 역시 명백하게 해소되어야 할 부분이다. 이 황당한 저작권 덤태기(윤동주)와 침탈(원작자)에 관해 누가 웃고 누가 울어야 할지 조금은 헷갈리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은 이와 같은 와전(물론 지은이에 의한 의도적인 와전)이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낼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누구나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서도 깊이와 진위를 헤아릴 수 없는 숱한 사연들이 자신과 당신의 모습을 전혀 다른 무엇인가로 맞바꾸며 엉터리 같은 못난 세계를 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무슨 빌어먹을 음모이론도 아닌데 진실은 저 너머(또는 이 링크 너머에~)에 있고 누군가는 자신이 결코 쓰지 않은 시의 떨떠름한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

 

잘못 빌린 시집 外

프로스트 시집을 빌려 오려 했는데 알고보니 ‘미국 대표시선’으로 지은이는 ‘프로스트 外…’였습니다. 초겨울의 공원 벤치에서 잠시 책을 펼쳤는데 포우가 나와서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늘 列의 外인 사람이다 보니 外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나 봅니다. 하지만 좀 더 읽어보니 순간의 실망보다는 처음 보는 이름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월러스 스티븐즈는 선시 같은 느낌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에즈라 파운드의 삶이 두 줄로 축약되어 실려 있었고 하와이에 사는 재미교포 시인의 결혼 이민사에 관한 시에도 눈이 갔습니다. 잘못 빌린 시집에서 내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를 아주 조금 엿본 것이겠지요. 그럼 얼마나 많은 잘못들이 내 뒷전에 내 안에 박혀 있었는지 다시 또 생각합니다. 잘못 간 길, 잘못 쓴 시, 내 짧은 걸음들이 만들어낸 숱한 잘못질들에서 그런 이적이 있기를 바랄 수는 없겠으나 에이드리엔 리치의 이야기는 적이 위로가 되었지요. 당신이 멈춰선 그곳은 당신만큼 헐벗고 읽을 만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기에 당신이 이 시를 읽는다는 걸 난 압니다.+ 어쩌면 가지 않았을 길,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는 없지만++ 짙은 청바지 같은 표지를 지닌 잘못 빌린 시집이 그 바깥의 내게 말해주었어요.

 

+헌사, 에이드리엔 리치.
++프로스트.
/2015.12.06. 23:47

 

데들리 시리어스

죽을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예기치 못한 크고 작은 시련의 연속, 처음 봤을 적의 답답한 느낌 때문인지 그 영화를 다시 보고픈 생각은 별로 없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 답답함이 무지무지 생각이 나서 머리 속을 맴돌았다. 나 자신 시리어스 맨의 상태가 되었는가 싶었다.

스탠리 엘린의 단편에 나오는 ‘애플비’처럼 ‘질서바른 세계’를 사랑하는 평범한 물리학 교수인 래리 고프닉에게 연이은 시련이 닥친다. 테뉴어 트랙 심사를 앞두고 음해의 투서가 날아오고, 한국인 학부모는 학점 매수를 시도하고, 백수인 동생 아써는 도박과 여타의 범죄들로 골치를 썩인다. 아들은 대마초 피우기에 여념이 없고 딸은 코 수술을 원하는데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아내가 그도 잘 아는 이와 살기 위해 이혼을 요구하며 고프닉을 모텔로 쫓아내는 대목에서였다. 레코드 회사에서는 돈을 독촉하는 연락이 쉴새없이 오고 왜 내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지 상담하고 싶은데 랍비를 만나기는 너무 어렵고, 그 와중에 안테나 고치러 옥상에 올라갔다가 나체로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이웃 여인을 발견하고서는……

그다지 나쁜 짓 한 것도 없는데 ‘주인공’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시련을 당하는 래리 고프닉의 피곤한 나날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어느 정도 해결의 실마리를 보일 때 갑작스레 토네이도가 불어닥치고 검진을 했던 의사로부터 급히 오라는 전갈을 받으면서 영화는 끝이 난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있을지 짐작을 할 뿐, 하지만 알 수는 없다. 고양이는 죽었거나 또는 살아 가거나.

영화 속에는 세 사람의 랍비가 등장하는데 주차장의 비유(?)를 설파하던 젊은 랍비(상좌스님)와 어떤 치과 환자의 이 안쪽에 새겨진 글자들의 비밀에 관해 들려주던 랍비 나크너(주지스님), 그리고 랍비 마르샥(조실스님)의 제퍼슨 에어플레인 이야기는 사고의 깊이와 폭의 변화를 보여주는 듯 흥미로웠다.

그리고 생각은 단출한 주석을 좋아했다는 랍비 라쉬의 경구를 인용한 영화의 첫 화면으로 돌아간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단순하게 받아들이라.”(Receive with simplicity everything that happens to you.) 너무도 지당한 말씀인데 그 단순함을 받아들이기에 영화를 보는 이는 그 어떤 해결의 능력도 없으면서 실없이 시리어스하기만 했다. ‘멘타쿨루스’라는 이름을 지닌 아써의 복잡한 노트처럼.

“믿었던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고 네 안의 모든 희망이 사라지면 어떻게 할까?”

이루어진 적 없는 그의 욕망이 담긴 꿈에서, 그리고 래리 고프닉이 결국 만나보지 못한 랍비 마르샥이 성인식을 치룬 그의 아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에서 제퍼슨 에어플레인의 노래가 어떤 이의 허공을 삐라처럼 붉게 흩날렸다.

 

When the truth is found to be lies
And all the hope within you dies
Then what?
Grace Slick, Marty Balin, Paul Kantner Jorma(Kaukonen)
These are the members of Airplane!
/Rabbi Marshak

 

/Rabbi Marshak Scene.

 

/Mrs. Samsky Scene에 나른하게 깔렸던.

 

 

도착하지 못한 꿈

냉동여행 Frozen Journey, 필립 K. 딕

 

▲ 그의 지난날
그의 이름은 빅터 케밍스다. 어릴 적에 도르키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가 비둘기를 잡아먹도록 부추겼다. 네 살 때는 거미줄에 걸린 벌을 도와주려다 벌에게 쏘였으며, 마틴이라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화가의 친필서명이 적힌 꽤 값어치 있는 포스터 한 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보관했는지 아니면 찢어져버렸는지 불분명하다.

 

▲ 그의 오늘
새로운 행성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장거리 우주여행에 나섰으나 냉동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여 희미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깨어서 생활할 만큼의 충분한 산소와 식량이 없는 까닭에 우주선의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며 괴로워 하고 새행성에 도착할 가까운 미래의 환상을 접하며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또 절망한다.

 

▲ 그의 내일
10년간의 끔찍스런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
또는 새로운 행성에서의 극적이고도 꿈같은 재회?

 
ARRIVE  ARRIVE3

 
필립 K. 딕 하면 영화의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블레이드 러너>(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토털 리콜>(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임포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 첵>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까닭이다.(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냉동여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슐러 르 귄과 더불어 주류(?) 문학계에서도 거론되곤 하는 몇 안되는 SF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르 귄의 경우와 달리 그는 보다 ‘통상적인’ 형태를 취하곤 한다.

 

내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어. 내 안에 말이야.
통증의 쓰라림. 무가치하다는 느낌.

 

애초에 그는 목표 행성까지 냉동수면 상태로 지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 여행 도중에 일부 의식이 깨어나버렸다. 불행히도 우주선에는 인간이 깨어서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주선의 컴퓨터는 그를 수면 내지 가수면 상태로 유지하고자 애를 쓴다…..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기억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곤 하지만 단 한번도 행복한 기억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우주선은 그에게 새 행성에 도착하는 시점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어 그에게 안도감을 주려 하지만 그마저도 번번이 그가 눈치채어버려 실패하곤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잘못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태를 지속한다. 우주선 컴퓨터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격자처럼 엮어서 하나로 통합해놓은” 상태다.

우주선은 수많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로봇의사를 보내고, 새 행성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곤 하지만 그의 예민하고 집요한 의식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제목을 살짝 고쳐서 이야기 하자면 안드로이드(우주선)는 끊임없이 전기양의 꿈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양의 꿈을 원했다.

 

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를 다시 영원히 냉동시켜 달라고 하자.
난 죄의식에 가득 찬 인간,
파괴할 줄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우주선은 결국 그의 아내를 호출하여 그가 새 행성에서 옛 아내를 다시 만나서 자신의 심적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가상현실과 비슷한 형태로 새 행성에 도착해서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다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그것이 꿈속의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각성했던 그로서는 마틴이 새 행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현실의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냉동여행’도 그렇게 애매하게 끝을 맺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단편에 관해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빅터 케밍스처럼 정확한 해답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진정 깨어나서 아내 마틴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가짜이며,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마치 장주의 호접몽처럼 혼돈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 것이고, 딕 자신의 다른 단편들에서처럼 자신이 과연 자기 자신인지, 현재가 그대로 현실인지에 대해 극심한 혼란에 부딪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한 인간의 모조품임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 임포스터의 정교한 로봇처럼 꿈임을 알지 못하는 꿈이 무한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블랙홀의 내부가 궁금하다면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된다던 어떤 이의 한줄처럼.

 

단편의 마지막은 어쩐지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는 포스터가 현실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찢어졌는지가 열쇠인데 그는 끝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서 혼란스럽게 한다. ‘플레이보이’를 통해 <냉동여행>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작품이 자신의 단편집에 실렸을 때의 제목은 <조만간 나는 도착하기를 희망한다>이라고 한다. 나도 진심으로 그랬으면 싶었다.

그리고 여기 이 단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화가 있다. 참으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짧고도 길고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이야기의 모든 것이다.
케밍스의 고통은 끔찍스럽지만 도착지에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마틴의 말은 나를 부럽게 한다.

 

“…이것이 현실이면 좋을 텐데 말이오.”
마틴이 말했다.
“전 이 일이 당신에게 현실이 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겠어요.”

i hope i shall arrive soon……

 

 

/2006. 3. 18.

 

subconscious-lee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내가 궁금해하는 기억 속의 많은 것들을 지난 수십년간 pc통신/인터넷/모바일폰을 통해 찾아내었다. 무척 반가운 것들도 꽤 있었지만 이들의 복원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는 정확히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것’이 약이라는 말은 여기 합당치 않겠지만, 알지 못함과 찾을 수 없음이 때로는 더 많은 것들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전 오래 전에 봤던 어떤 영화의 장면이 문득 생각났다. 전체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대목으로, 쓰레기더미가 쌓인 바람 부는 섬(?) 같은 곳에서 주인공이 바다를 향해 머리칼 휘날리며 앉아 있던 모습이었다.(단지 내 기억일 뿐, 실제로 이런 장면이 있는지 자신할 수는 없다.) 영화 속의 애니메이션은 그만큼 극단적인 방식은 아니었지만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어딘지 <더 월>을 연상케 하는 것이었다. 유치함이 뒤섞인 어린이용 모험영화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의 느낌이 무척 좋았고 무엇인가 멋진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워낙이 오래 전에 봤던 것이라 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어렵사리 찾아내어 오늘 그 영화에 관해 ‘읽은’ 바로는 알랭 들롱이 애니메이션 작가로 나왔고 마치 에셔의 그림에서처럼 만화의 세계를 들락거리며 일어나는 사건들을 줄거리로 하고 있었다. 영화의 제목은 <패시지>였다.

그리고 subconscious-lee+, 나는 최근에 이 영화가 갑작스레 생각난데는 나 안의 어떤 숨은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이 ‘retrospection(회고)’인지 ‘tautology(유어반복)’인지 아니면 조금 서글픈 이유이거나 합리화일지 알 수 없지만 지금처럼 마음이 고초를 겪을 때 ㅡ.

 

le passage, the passage, 1986 / alain delong

 

+
lee konitz

채워지지 않는 허기 : 고완형의 이빨

고완 형은 날마다 술을 먹는다.
고완 형의 이빨은 동훈 형보다도 더 나쁘다.
아직도 창창한 청춘일 뿐이었는데
그의 앞니가 몇이나 남아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무엇이 험한 그 모습을 부끄럽지 않게 만들었는지
부끄러움보다 더한 무엇이 그를 당당하게 만들었는지
망가진 모습 그대로 썬글라스를 끼고
술마시며 술주정처럼 노래를 한다.
무엇이 포크 음악이냐고 물을 필요도 없고
어떤 것이 펑크인지 애써 나눌 필요도 없다.
공장+의 담벼락에서 첫 키스를 했던 곳,
불길 속에 도끼날을 제련하던 곳,
나의 살던 고향인양 오래된 꿈인양
고완 형이 흥청망청 노래하던 맥콜의 지저분한 옛 동네에
귀 기울인다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먼 산울림, 옛 서부영화 속의 이름.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내게 전혀 다른 모습의 셰인이 다가왔다. 클래쉬 공연장에서 귀를 물어뜯겨 데뷔도 하기 전에 매스컴을 탔던 사람(가해자는 여성 펑크락 그룹의 베이시스트였다~), 노래보다 그 사람의 이에 관한 이야기가 더 많은 사람, 하지만 엉망진창의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너무도 당당하게 노래하던 사람……

오죽하면 그가 이 전체를 새로 했다는 것이 뉴스로 나왔고 그의 이를 소재로 한 노래까지 있다. 밥 딜런은 앞니 몇개 빠진 사람이 노래하는 듯한 목소리로 all along the watch tower를 멋지게 불렀지만 그의 이는 멀쩡하였고 멀쩡한 듯 노래하지만 어딘가 그런 느낌이 있는 셰인 맥고완은 그 반대다.

왜 그렇게까지 엉망이 되었고 그토록 방치했었는지에 관해선 잘 모른다. 다만 그가 굳이 그걸 숨기려고도 고치려고도 애쓰지 않았음에서 괴롭지만 묘한 호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cannibal1

 

무성의하게 툭툭 내뱉는 듯한 창법에 포크와 펑크라는 얼핏 매우 이질적인 두 쟝르를 오가는 음악도 특이하다. 하지만 우리가 펑크 음악이라고 알고 있는 많은 것들이 (섹스 피스톨즈가 그 출발점에서부터 일정 부분 패션과 연계되었듯) 어쩌면 ‘이미지’로 이루어진 것이고 현실 속의 펑크 음악이란 바로 셰인 맥고완의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건달이거나 구제불능의 ‘꼴통’처럼 보이기도 하고 세기말 예술가의 이미지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술주정뱅이처럼, 아니 술주정뱅이의 모습 그대로 아무렇게나 노래하지만 나는 그의 노래와 노래하는 모습에서 어떤 진정성을 느끼곤 한다. dirty old town이 마음으로부터 나를 울렸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셰인 맥고완의 이를 바라보는 느낌은 동훈형의 이를 바라보던 내 느낌과 좀 비슷하다. 누군가의 상처에 공감하고 누군가의 멍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게 한다. pogues ㅡ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처럼.
生을 향한 ‘엄청난 허기’++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면, ‘셰인 맥고완과 함께 술을’++, 그의 술주정 같은 노래는 마음으로부터 떠나는 법이 없을 것이다. 나의 살던 옛 동네가 그다지 더티하게 느껴지지 않거나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는 것처럼.

 

+
글공장이거나 이공장, 동훈형의 이빨.
++
셰인 맥고완에 관한 다큐멘터리.
+++
클래쉬와의 인연은 계속 이어져서 조 스트러머와 같이 노래하기도 했고, 짧은 한때는 조 스트러머 자신이 셰인 맥고완을 대신하여 포그스의 보컬로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6. 1. 15.

 

 

dirty old town / pogues

 

i met my love by the gas works wall
dreamed a dream by the old canal
kissed a girl by the factory wall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clouds a drifting across the moon
cats a prowling on their beat
spring’s a girl in the street at night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heard a siren from the docks
saw a train set the night on fire
smelled the spring on the smoky wind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i’m going to make me a good sharp axe
shining steel tempered in the fire
will chop you down like an old dead tree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i met my love by the gas works wall
dreamed a dream by the old canal
kissed a girl by the factory wall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dirty old town

그대로 그렇게 : a rainy night in soho

예전의 누구처럼 매일의 살아있음이 기적처럼 보이는 사람 ㅡ 그는 참으로 군더더기가 없다. 노래면 노래, 이빨이면 이빨, 술이면 술…… 그냥 끝까지 갔다. 밥 딜런이 ‘앞니 하나 빠진 듯한’ 목소리로 ‘워치타워’를 노래했다면 쉐인 맥고완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담배 피우고 술 마셔가며 노래를 했다. 가끔 마이크에 가리긴 하지만 참으로 보기 난감한 이빨 상태에 대해 숨기는 법도 없이 그대로 그렇게.

그런데 그 모습이며 목소리가 묘하게 귀를 열리게 하고 마음을 끈다. 포크와 펑크라면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같지만 이들은 그게 동전의 양면처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강렬한 연주 대신 섹스 피스톨즈나 클래쉬에게서 볼 수 없는 전통적인(?) 방식의 건달 음악 같은 것 ㅡ 틴 휘쓸, 아코디언, 벤조, 기타, 만돌린에 일렉트릭 기타 대신 알콜(또는 다른…)과 니코틴을 보태어 불을 붙였나 보다.

그리고 이들 건달들의 야릇한 조합은 왠지 진짜 포크, 진짜 펑크 같은 느낌을 준다. 무대 위의 외침도 아니고 숲과 계곡의 전설도 아니고 세상의 온갖 거리와 뒷골목에서 들을 수 있는 ‘소리들’ 말이다. 마치 <바플라이>의 한 장면처럼.

‘뉴욕 동화’의 후속작 같은 느낌이 드는 ‘레이니 나잇’은 물론 소프트하지만 주정뱅이 건달 분위기의 창법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이들의 음악도 좋아하지만 셰인 맥고완이라는 인물을 조금 더  좋아한다. 한때 그랬듯, 셰인 맥고완이 없는 포그스는 이빨 빠진 사자 같다. 정작 그 사자에겐 이가 없는데 ㅡ.

 

/pogu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