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yokoversesara

Yoko vs. Sara

 

존 레논이나 밥 딜런에 대해 알고 싶은 만큼은 알고 있다. 그들이 언제 무엇을 했고 어떤 사생활을 가졌고 어떤 미발표곡이 있고…… 처럼 깨알같은 지식이 아니라 어떤 느낌에 관한 이야기다. 그들에겐 뮤즈가 되어준 아내들이 있었고 그들의 이름이 들어간, 내가 오래도록 좋아해온 두 노래가 있어 개인적인 느낌으로 비교를 해봤다.

Oh Yoko!는 1971년 9월에 발매된 <imagine>의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Sara는 1976년 1월에 나온 <Desire>의 마지막 트랙으로 수록되었다. 두 앨범 모두 자신의 얼굴을 커버로 하고 있는데 존 레논의 이미지는 몽상적이고 밥 딜런은 집시(‘래글태글 집시’는 아니지만 그 노래 가사처럼 영주의 부인이 달아나는 사건이 날 것 같기는 하다)처럼 보인다. <imagine>의 뒷면엔 앨범 타이틀과 연결되는 “imagine the clouds dripping dig a hole in your garden to put them in”이라는 오노 요코의 글이 인용되어 있다. <Desire>의 뒷면엔 꽤 많은 사진들이 있는데 대개는 딜런과 뮤지션들의 것이고 The Empress라고 적힌 타로 카드(‘fertility’를 상징한다고 한다)가 Sara일 수 있다는 추측을 하게 한다.

 

Imagine, 기본, 1 / 9   

 

새라는 이국적이면서도 비장하고 오 요코는 화사한 애조를 띠고 있는데 두 곡 모두 그들이 직접 연주하는 하모니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열기 가득한 폭풍의 고요한 정점인지(A messenger sent me in a tropical storm) 딜런의 하모니카는 바이올린과 더불어 애조띤 ㅡ 그러나 어딘지 공허한 ㅡ 정열을 보여주는 반면 존 레논의 하모니카는 인적 끊어진 거리의 풍경처럼 쓸쓸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그녀와 함께 하겠노라는 메시지처럼 들린다.

연주에 있어 딜런에서는 스칼렛 리베라((딜런 자신이 길거리에서 캐스팅했다)의 바이올린이 빛을 발했다면 존 레논에겐 니키 홉킨스(She’s a rainbow의 모짜르트 피아노!)가 들려주는 섬세한 피아노의 선율이 있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 새라의 경우 ‘radiant jewel, mystical wife’, ‘glamorous nymph with an arrow and bow’ 같은 식의 찬양이나 ‘Loving you is the one thing i’ll never regret’, ‘You must forgive me my unworthiness’ 등등 연애시절에나 가능할 것 같은 과장된 표현들이 눈에 띄는 반면, oh yoko의 가사는 매우 단출한 방식으로 환상(In the middle of cloud/dream I call your name)에서 현실을 오가는데 ‘In the middle of shave i call your name’ 같은 대목에서는 ‘생활밀착형(!)’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딜런의 가사는 떠나려는 새라를 붙들려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레논은 그 점에서 매우 편안하고 여유롭다. 딜런의 정열적이고도 비장한 찬양이 마지막 애원인지 한 발을 빼려는 소극적인 액션인지는 알기 어렵지만 레논의 경우엔 그의 다른 노래처럼 ‘Grow old me’의 꿈을 간직하고 있다.

Oh Yoko는 어딘지 미숙하고 몹시 여린 사춘기적인 감성을 느끼게 하지만 그만큼 순수한 반면, Sara는 절절함이 넘쳐나지만 그의 하소연이 설령 거짓이래도 넘어갈만큼 능란하고 노회하다.

<롤링 썬더 리뷰> 라이브에서 딜런은 분인지 치약인지 광대처럼 얼굴을 하얗게 칠하고 나와서 새라를 찾았고(이유야 어쨌든 심금을 울렸다), 존 레논은 그의 미들 네임을 ‘오노’로 바꿨다. <mind game>의 커버에서 알 수 있듯이 오노 요코는 그의 삶에 있어 ‘사건의 지평선’이었다. 하지만 새라를 노래한 얼마 뒤 딜런은 새라 로운즈, 새라 딜런이었던 셜리 말린 노진스키와 헤어졌고(1977년) 오 요코를 노래한 10년 뒤 존 레논은 세상을 떠났다.(1980년)

“진실은 저 너머에” 있겠지만 내 느낌에 요코가 거기에 더 가까운 듯 싶고(새라는 라이브에서 좀 더 그렇게 들린다), 노래로는 새라를 더 즐겨 듣는다. 일편단심이 부족한 사람이라 그런지, 요코보다는 새라가 좀 더 나이를 먹은 이의 노래라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라가 더 편안하고 멋지게 들린다. 그럼에도 어쩌다 하모니카 소리를 생각하면 그 아련한 곡조가 여전히 가슴에 닿는다. 등돌린 세상에서 My love will turn you on이라던.

 

 

/2016. 9. 1.

 

 


/oh! yoko

 


/Sara

 

+우측 상단 플레이 버튼 누르면 sara를 들을 수 있다.

 

 

r. k. b. ◎

rkb+2

 

얼마 전에 처음으로 본 사진 ㅡ 내게 청춘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한심하지만 주민등록증상의) 청춘 시절에 나를 매혹시켰던 어떤 이의 어릴 적 사진이다. 침팬지와 나란히 앉아서 즐거워 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음악 보다는 사람 그 자체, 어이없이 무너져버린 정신과 삶이 그때는 어찌 그리도 마음을 끌었는지 모르겠다.

음악을 떠난 그는 칩거하며 그림을 그리고 간단한 가구들을 직접 만들고 학창시절의 전공 분야로 돌아간듯 (책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 미술사에 대한 글을 꾸준히 썼다고 했다. 스스로 작곡하고 노래한 옛 음악들을 그저 시끄럽다고 여겼으며, 지나가버린 시간들과 자신에 관한 다큐멘터리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70년대 초, 대중음악계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때는 50마일(80km 가량)을 걸어서 어머니의 집에 당도했고, 이후 그는 과거가 없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떠난 것이다.

엊그제 우연히 본 사진, 이 환한 표정의 아이 얼굴을 보니 새삼 마음이 좀 쓰렸다. 그가 머리숱 없는 뚱뚱한 동네 아저씨가 되어 헐렁한 옷을 입고 비닐 봉지를 든 채 거리를 거닐던 모습을 처음 봤었던 1998년 무렵처럼, 또는 내 어린 시절의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볼 때의 느낌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그의 나머지의 삶이 자신에겐 소중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고 믿고 싶다. 노인 부부의 변사를 황혼의 멋진 선택으로 해석해낸 토니 스캘조나 그것을 다시 시로 만들어낸 이창기처럼 드라마틱한 무언가를 각색해낼 수 없어 뭔가 빚을 진듯한 느낌이지만.

뉴턴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의미있는 업적을 만유인력의 법칙 발견이 아닌 (남들이 그만큼 알아주지 않는) 성경 연구로 믿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이 있다. 그의 경우에도 자신이 진실로 원하던 것, 뒤늦게 알게 된 자신의 삶의 의미에 한껏 몰입하며 살았다고만 믿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실현 가능한 상상이 있다면 그를 위해 아니, 나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쓰고 싶다. 여기 있었노라고 노래하기에 ‘너무 먼 별’이었던 그의 삶을 관통하는 어떤 빛에 관하여.

 

Self-Portrait2-400
sefl portrait, 1960s.

willow weep for me

오래 전이다. 텔레비젼에서 이 영화를 본 것은. 그리고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이 장면을 제외하고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대목조차도 기억나는 것은 전혀 없다. 다만 이 부분을 볼 때의 느낌을 여태 갖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전 다시 봤을 때도 꼭 그대로였다.

위핑 윌로우여서일까…… 윈스턴 스미스의 ‘황금의 나라’, ‘쥴리아 드림’, ‘튜더 롯지’, 그리고 ‘버드랜드의 자장가’와 ‘오델로’에 이르기까지 왜 ‘willow’란 단어에 대해 각별한 느낌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열아홉 아니면 스무살의 어느 여름날, 조금 늦은 오후 낮잠을 자다 깨어났다. 그런데 가구들이 조금 다른 빛깔처럼 보였다. 마치 방 전체가 물에 잠기었다가 나온 듯했다. 모든 가구들이 물에 젖은 듯 조금씩 더 짙어진 느낌이었는데 무엇인가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특히나 옷장의 어두운 갈색 빛깔이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계속 그것만 쳐다보며 누워 있었다. 일어나거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면 사라질 것 같았던 그 빛깔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누워 있었다. 그리고 내겐 있지도 않은 쥴리아를 그리며 위핑 윌로우를 생각했다. 나는 그것이 내가 봤던 빛깔의 이름이려니 했다.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윌로우 송의 빛깔도 비슷하였다.

“the poor soul sat sighing……”

 

willow song / irène jacob

제목을 생각했으나 따로 붙이지 아니함.

내게 바람을 일으켜줘
더없이 조심스레 그리고 있는 힘껏
너의 숨결을 불어넣어줘
밀고 당기고 안아주지 않는다면 노래할 수 없는 몸
다시 한번 그 가슴에 내 가슴 붙여 실컷 울고 싶어
이슬이거나 숨죽인 천둥이거나
너의 박동을 나는 번역할 수 있지
숨결도 골라가며 네 손길 닿는대로
풀무질 하는대로
즐겁게 청승맞게 노래할 수 있지
내 안을 파고든 바람 ㅡㅡ 風
네 안에 새기고 싶은 뿔 ㅡㅡ 角
축제이거나 처량한 유랑의 끝자락이거나
한몸처럼 기꺼이 너의 악기가 되고 싶어
닿지 못할 그 한몸처럼 너의

 

 

+
마지막 부분의 ‘악기가 되고 싶어’는 진부한 표현이다.
그럼에도 고치지 못한 것은 더 적합한 것을 찾지 못한데다
문장 속의 악기는 상징이기 이전에 말 그대로의 악기이기도 하기에
진부함에 대해 약간의 변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족을 다는 것은
이 시가 지닌 두 가지 트랙에 대해, 그리고 시의 제목에 대해
아주 조금 단서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ㅡ ‘말할 수 없는 그것’이니까.

 

the trial of

앞에 있는 운전자의 창밖으로 나와 있는 손엔 담배가 들려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담배를 다 피웠는지
담배를 부비더니 슬그머니 길바닥으로 떨어트렸다.
그리고 화단을 향해 가래를 뱉고 창문을 올리면 끝,
더 바랄 무엇이 있는지 백팔염주가 룸미러에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그의 차는 높고 깨끗하고 연기는 가슴에 남았다……

 

the man who wasn’t there ㅡ 자신이 저지른 일은 그냥 넘어가고 그가 하지 않은 일로 받은 죄에, (비록 전재산을 털어 변호사를 대긴 했으나) 어딘지 자포자기적인 그의 태도에 깊이 공감했었다. 실제적인 인과관계가 아니라고 한들 지은 죄와 짓지 않은 죄 사이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그리고 마치 영화 속의 베토벤 소나타처럼 위안인지 맹목인지 그다지 상관없는 일…… 실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못했던 레이첼의 悲愴을 듣는 에드 크레인처럼 내게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단조로운 삶과 흑백의 세계에 던져진 유일하지만 몹시 제한적인 ‘빛깔’ 같은 것.

차는 멈추고 음악이 흐르는 사이 내 앞의 운전자와 에드 크레인과 나를 오가며 결국 그인지 또다른 누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 채 삶은 흩어지고 장면만 남았다. 몹시 길고 지루한데 두고두고 반복되는 장면, 오래 동안 피웠고 오래 동안 끊고 지낸 담배 연기가 가슴 속에 자욱하다. 今生受者是…… 가슴 속 연기만 남았다.

 

 

the trial of ed crane / carter burwell

 

readme.txt : 1999. 12. 9. ◎

…그리고 내 가슴을 꿰뚫는 파란 눈빛도 신비다.
<파란 색의 비밀, J. 꼭도>

 

밤의 다이얼이 돌아갑니다. 아주 멀고 희미한 싸이렌 소리가 잡히거나 여기 저기서 밀려난 프로그램들이 재미없이 이어집니다. 지루한 나는 가만히 한 곳에 귀 기울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마음을 돌려봅니다.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아주 작은 부표를 찾아 마음을 집중하는 것입니다.
희미한 별의 소리처럼 잠결에 밀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겨울 바람이 불어대는 피리 소리처럼 나를 부르고 내가 노래합니다. 관현악이 스쳐 지나가고, 유쾌한 이국의 목소리도 가끔 나옵니다. 어쩌다 본 적도 없는 옛 영화의 익숙한 곡조가 들려오면 그날 밤의 마음이 낡은 추억을 펼쳐냅니다. 점점 작은 소리, 점점 낮은 소리로 마음을 모읍니다. 간섭음들 사이로 어둔 골목길을 밝혀주는 옛친구 목소리가 들리고 당신과 나만을 이어주는 다이얼이 있습니다.
이 밤 편히 쉬고 있을 당신의 푸른 창을 흔들고 싶지 않아 소곤소곤 이야기 합니다. 바늘 끝 위에 얹혀질 듯한 희미한 접점을 따라 불러보는 깊은 노래입니다. 아침이면 당신 가슴 속에 동그라니 그 가락의 길이 새겨져 있을텝니다.
급한 아침 저어대는 당신의 찻잔 속에, 시린 바람에 감싼 귀 속에 당신의 얼어붙은 눈 속으로, 끝까지 단추 채워진 외투 속으로 모든 둥글고 따스한 곳에 언뜻 언뜻 노래가 흐를 것입니다.

 

/1999. 12. 9.

돌지 않는 풍차

사랑도 했더라만 미워도 했더라만
마냥 제자리, 멈추어 있었다네
울기도 했더라만 웃기도 했더라만
이제 그만 잠들어버린 바람이었다네
풍차의 나라에서 튤립의 바다에서
더치 페이로 덧칠하던 사랑이었다네
라만차의 연인이 밤새 달리어와도,
산초처럼 로시난테처럼 충직한 가슴이
밤새 기다리어도 그게 그 자리
버티고만 있던 풍차
어둔 길 뒤편으로 눈물은 감추고
천둥인 양 너털웃음 보내어야 할 텐데
거꾸로 돌아가던 미련한 풍차
잠자리 날개마냥 파르르 촐싹대며 떨기만 할 뿐
미치지 않아 미칠 것만 같던
돌지 않는 풍차
돌지 않아 돌 것만 같던 빌어먹을 풍차
박치기왕 풍차 돌리기로 마구마구 돌려버려야 할
얼치기 뽕짝 같은 바보놀음 풍짜작 풍차
사랑도 했더라만 미워도 했더라만
라만차 돈 키호테 부러워서 돌아버리겠네
투비 오어 낫 투비 제멋대로 흥얼거리며
날마다 뚜비뚜와
죽느냐 사느냐 뚜비뚜와
문제를 못 풀어서 뚜비뚜와 돌아버리겠네
돌아라 풍차야 돌아버려라
돈 돈 키호테처럼 뱅뱅 돌아버려라
라쿠카라차 병정들이 전진해야 한다네
라만차 라쿠카라차 달이 떠올라오면
그리운 그 얼굴
오너라 다 덤벼라 아스라한 외침이야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마음이야
땅을 뒤엎고 하늘 덮는다 한들
나 다시 태어나도 옛날 같이 살고 싶다한들
음……음 때는 늦으리,
때는 늦으리
늦으리라만차 돈 돈 돈 키호테
돌아라 돌아라 돌아버려라.

 

+문주란 노래.
+본문의 상당 부분을 <돌지 않는 풍차>, <동숙의 노래>, <주란꽃>, <라쿠카라차>에서 베꼈음.

雜音으로 내리는 비

레코드판을 따라 음악은 흘러간다. 추억 같은 흠집, 흠집 같은 추억이 잡음으로 돌아가고 있다. 낡고 오래된 복사판 레코드 위에 떨어지는 비, 레너드 코헨의 ‘Famous Blue Raincoat’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뮤즈는 죽은 지 오래, 잡음처럼 비가 내림을 나는 알고 있다. 낡은 필름 위에 내리는 비, 잡음처럼 내리는 비, 조잡스런 색채로 연출되는 비극 속에서 비는 내린다. 너는 누구인가, 어두운 오후의 실내에 비가 내린다. 지금껏 들어왔던 모든 다른 소리는 그 잡음을 위한 배경음이 되었다. 나는 잡음을 향하여 마음을 집중시킨다.
머리카락은 결코 젖어드는 법이 없지만 너는 누구인가, 잡음처럼 비가 내린다. 레코드판을 따라 음악은 흘러간다. 내가 가진 책들은 닳아 없어졌다. 기억은 보다 거대한 망각을 위한 장치, 내몰린 세포들의 아우성처럼 잡음이 들린다.
잡음이 음악이다. 번잡한 시장을 지나가는 소리들, 툴툴거리는 먼지투성이 삼륜차의 경적 소리, 물건값을 깎는 소리, 무엇인가 삐걱대는 소리, 칼질하는 소리, 다투는 소리, 곡마단의 나팔 같고 북 같은 소리를 나는 듣고 있다. 그 소리는 아득하게 나를 일깨운다. 아니, 나를 좀더 먼 곳으로 몰아세운다. 또 꿈을 꾸듯 혀를 깨물지 몰라. 또 꿈의 음악실에서 누군가의 손을 마주잡고 온 마음을 이어갈지도 몰라…… 낡고 오랜 복사판에 쏟아지는 비, 전기가 끊어져버린 침침한 오후에도 레코드판은 돌아간다. 잡음처럼 내리는 빗속에서.

고향의 강

미시시피 리버만 강이라더냐
나의 살던 고향에도 강물은 흘렀다네
눈 감으면 떠오르는 고향의 강
산을 끼고 꾸불꾸불 고향의 강+

세상에서 제일 넓은 강인 줄 알았고 제일 깊은 강인 줄 알았고 그 위에 걸린 볼품없는 다리가 금문교만큼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정월에 보름이면 강 건너 마을에도 깡통불이 피어올랐어요 천둥치는 날이면 이무기 강철이가 강둑을 흔들어대었지요 어머니 젊은 날엔 세상에서 제일 멋진 색소폰 소리가 강 건너에서 들려왔다지요 저녁마다 입 삐죽이며 밥 얻으러 다니던 맘보며 어느 겨울날 농약을 먹고 파닥대던 독수리며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자 뛰어내렸으나 유유히 헤엄쳐 나왔다던 똥지게군 박군의 얼굴도 생각납니다 사촌 형님의 야전잠바를 끌어안고 보았던 눈 오는 날의 물새들은 어디로 날아갔을까요

미시시피 리버에만 그리움 흐른다더냐
발가락 꼼지락거려 잡아내던 재첩처럼
더듬더듬 더듬수로 고향의 강 불러봅니다
진달래 곱게 피던 봄날이나 갈대가 흐느끼던 가을밤+이나
지금도 흘러가는 가슴속의 강+을 따라
보드라운 그 손길 그려봅니다

 
+고향의 강, 남상규

학생 애창 365곡집

낡고 낡은 음악책입니다. 음… 세광출판사 1976년 판이네요. 값 700원. 내가 좋아하는 뱃노래도 있고, 알지 못하는 구노의 세레나데도 있습니다. 머나먼 이국땅의 우스쿠다라도 있고, 페르시아 시장의 꿈도 보입니다.
우아한 가곡과 세레나데가 흘러나오는 창문 앞을 지나면 라 쿠가라차의 행진도 있고, 라 스파뇨라의 애수도 있습니다. 재미있었던 ‘냉면’의 추억도 있고, 중학교때 즐겨 불렀던 밀밭에서도 있습니다.(밀밭에서 너와 내가 서로 만나면 키스를 한다 해도 누가 알랴…)
라 쿰파르시타의 정열은 어디 있나요. 베사메무초의 꿈은 어디 갔나요. 빠리의 다리밑을 생각하고, 어찌 ‘제일 파프’ 파스 냄새가 나는 워싱턴 광장도 있습니다. 진주조개잡이의 아름다운 배꼽이 있고, 나 같은 케 세라 세라도 있습니다. Home to the green fields and me once again의 꿈의 그린 필드에서 고향과 사랑을 떠올립니다.(I only know there’s nothing here for me, nothing in this wide world…) 해는 져서 어두운데… 그것은 사무친 고향 생각이었고, 맥스웰 하우스 커피를 떠올리게 되는 홍하의 골짜기를 휘파람으로 불었습니다.
테네시 왈츠에 맞춰 통나무 같은 내가 춤을 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금지된 장난의 클래식 기타 소리가 있고, 자나 깨나 너의 생각, 가슴 아픈 Flee as a Bird가 있습니다. 마이 보니를 bring back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만 알로하 오에의 산들바람 같은 꿈을 꿉니다.
Moon River가 중절모를 쓴 그림자로 흘러들어 옵니다. 국민학교때 정말 물고기의 추억으로 알았던 매기도 있고, 클레멘타인을 찾는 아버지가 있고, Der Tannenbaum과 Old Black Joe 같은 ‘교과서적인 분위기’도 찾을 수 있습니다.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위한 노래도 있고, Summertime의 진득한 꿈도 흐릅니다.
커다란 꿀밤나무 밑에서 “내 그대를 팔고 그대 나를 팔았네”가 아니라  그대하고 나하고 정다웁게 얘기합니다. 커다란 꿀밤 나무 아래서.
국민학교 때 무척이나 좋아했던 김대현의 자장가와 마치 교포처럼 고향을 둘러보는 상상을 했던 옛동산에 올라도 보입니다.(옛 시인의 허사인양 그 소나무는 ‘버혀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면 신나게 해리 베라폰테의 마틸다를 불러 봅니다. 그렇지만 ‘환희의 송가’는 강한 일렉 기타의 ‘치유불능’으로 자꾸만 들립니다.
제임스 딘과 자이안트가 힘차게 울려퍼지면 환자는 사라지고 나는 열심히 꽁당보리밥을 먹으면서 동네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학생 애창 365곡집.

“거리의 아가씨를 익숙한 솜씨로
달콤한 사랑으로 꼬여 내려고
날씬하게 차리고서 나아갔더니
아가씨에 걸려든 것은 총각이었다네”

아름다운 Usku Dara의 꿈이었습니다.

 

/1999. 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