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main content

내가 사랑하는 B

저들의 비행을 어찌 막을 것인가
지겹게도 모질게도 밤새도록 쏟아지네1)

 

A는 혈액형일 뿐이고 내 인생은 플랜 B도 만들 수 없는 형편이지만 지금까지의 삶에 있어 몇몇 B는 언제나 내 곁에 있어왔다. 예전처럼 ‘미쳐서’ 푹 빠진 것은 아니어도 쉬엄쉬엄 긴 길을 같이 간다고나 할까. 쉽사리 그 연결이 끊어지지는 않을 나의 B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 있다. 모든 것으로 모든 것을 바라본다고 해도 여전히 많은 의문이 존재할 이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오직 B뿐이라고 한다면 그건 억지스런 일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세상의 숱한 철자들 가운데 우연찮게 내 곁에 모인 B에 관하여 아주 짧은 개인적인 생각을 늘어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여기 첫 번째 B가 있다.

“Nothing is real, and nothing to get hung about…”
내 청춘의 B는 오직 단 하나였다. 그들에게 귀 기울일 적에 세상에 그 B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줄 알았고, 알 필요도 없었다. ○○여년 전 어느 여름날, 바닷가 근처 교회의 사택에 살고 있던 친구 집에서 갔다 얻어왔던 테잎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Abbey Road>의 표지 사진이 들어 있었으나 이런 저런 그들의 노래, 심지어 솔로곡까지도 하나 포함되어 있었던 테잎이었다. 지금처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좋아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때는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가진 외로움의 한 부분이기도 했고 또 그 반대의 어떤 심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구했던 청춘이 평생을 갈 수는 없었으니 어느 날엔가 전혀 새로운 땅으로부터 B가 내게로 왔다. 테리 길리엄의 영화에서 시작된 B에의 인연은 같은 제목의 시를 쓰게 하였고, 도서관의 천사는 내게 안또니우 까를루스 조빙을 통해 브라질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내 삶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평화와 함께.
아꽈렐라 두 브라질 ㅡ 브라질의 몽롱한 속삭임은 결코 드러난 적이 없는 불꽃이었고 어떠한 거리낌도 없는 유혹이었고 나는 초록과 노랑(브라질 국기의 색깔)으로 온통 물들고 말았다. 예전에 한번 들어본 적 없는 숱한 노래와 리듬과 신의 이름들이 더불어 내게로 왔다.

그리고 결코 출입한 적 없는 도서관의 방대한 책 사이에서 아무런 기척도 없이 B가 내게로 왔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어린 시절부터 쓰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이야기들의 원형이 바로 그의 글 속에 있었다. ‘꼰스띠뚜시온 광장의 담배 광고 간판이 바뀐데서 느낀 슬픔’2)에 진심으로 동조하면서,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에 관한 그의 짧은 글에 마음 움직이면서 B는 더욱 나를 많은 책과 이야기들로 이끌고 있었다. 어지럽고 함축적이며 상상 저 너머를 달리는 그의 세계에 생의 본질에 관한 심오한 고찰 같은 것이 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아득한 그 느낌들로 해서 나는 더 많은 것을 생각하곤 했고, 그의 미로 속으로 즐거이 빠져들었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연을 지닌 B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을 채우고 (아주 조금은) 비우게도 했다. 또 다른 어떤 B가 그랬듯 이 B에 관해서라면, 내가 사랑하는 B이면서도 여전히 거의 알지 못하는 B이다. 그리고 두고두고 배워야 할 많은 것들이 있기에 더욱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나는 심히 게으르고, 안다고 말할 수도 없을 만큼 아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설명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수록 더 생각하게 되는 B이다. 도대체 어디에 길이 있다 할 수 있으며, 그 어떤 가르침을 가리켜 그것이 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놓아버리는 것도 간직하는 것도 아니고 그 둘 다를 함께 지니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닌, 미로이면서 직선이고 절대적이다 싶다가도 금세 굽이치는 그 길을 나는 은하수를 바라보는 미지의 눈처럼 아주 조금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전혀 몰랐고 지금도 알지 못하는 어떤 B에 관해 무엇인가 이야기를 해야 한다. 그 B를 생각하면 내 마음은 죄와 부끄러움으로 가득하다. 수많은 변명이 가슴 속에 넘쳐나지만 나는 그 어떤 한마디도 꺼낼 수 없다. 께짤꼬아뜰이나 오아네스처럼, 콘티키 비라코차처럼 내게 많은 길과 단서를 알려주었건만 나는 어리석고 못난 모습 이외에는 보여준 것이 없다 ㅡ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나는 무한의 페이지로 이루어진 책을 도서관에 몰래 꽂아두고 달아나버린 주인공3)처럼 그를 떠났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담겨 있어 결코 태울 수 없었던 신비로운 책처럼 B는 어딘가에, 그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잊혀지고 지워지고 사라졌더라도 ㅡ.

모든 것을 그 색으로 칠하고 싶다던 롤링 스톤즈의 노래처럼, 예나 지금이나 나를 떠나지 않는 B 가운데 하나는 색깔이다. 어떤 시인은 그것을 가리켜 “빛을 넘어 빛에 닿는 단 하나의 빛”이라고 했다. 그 B는 모든 색깔의 원형이며 총합이기도 하며, 결함 투성이의 심신을 조금이나마 숨기고 위로해주는 것이기에 나는 두렵고도 편안하다.

색깔과 연결된 B는 하나 더 있다. 하지만 여기서 B는 색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회색이거나 검정이거나 심지어 붉은색이더라도 B는 떨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골드러시의 시대에 프랑스제 원단에 리벳을 박아서 만든 작업용 바지의 이름이다. 열아홉 시절 나는 빛이 다 바래고 밑단이 다 터져서 너덜너덜해진 그 바지를 마치 히피라도 된 기분으로 입곤 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즐거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단정치 못함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어느 날 집에 와보니 그 바지의 밑단이 깔끔하게 잘려나가고 말끔히 단이 잡혀 있었다. B는 그렇게 해서 나를 떠나버렸으나 이후에도 그것은 늘 내 곁에 있었고 적어도 한 달에 25일 이상을 나는 그 B와 함께 하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이쯤에서 되돌아보면 이외에도 숱하게 많은 B가 내 곁에 있다. 검고 굵은 손가락이 들려주는 통렬한 기타의 울림과 정제되지 않은 목소리가 어울린 B, 금세 목욕하고 나온 초여름의 저녁 바람 같은 상큼한 리듬의 이름, 운전하는 동안 오히려 더 귀 기울이곤 했던 섬세하고도 신중한 B의 피아노 연주와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애쓰는 노회한 청춘의 읊조림 같았던 B의 노래들, 나무 수저와 도마와 투박한 일부 식기들의 기름때를 씻어낼 때 사용하는 B로 시작하는 하얀 가루의 이름까지도 떠오른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색깔치고 아름답지 않은 색깔이 없고 하나의 철자가 없어도 완벽한 문장을 만드는 일은 힘들어진다. 나는 다만 내가 알거나 알지 못하는 세상의 숱한 보물들 가운데 유독 내 곁에 머물러 있는 ‘B’에 관해 잠시 돌아 보았다. 무한의 알파벳으로 이루어져 있는 우주에서 단 하나의 문자만을 떠올리는 것은 바닷가 모래밭에서 조개껍질 하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아이의 마음처럼4) 하나 아는 것 없지만 무구함조차도 멀어져갈 때 나는 그 빈 껍질 하나를 그리고 있었다.

 

 

B를 입고
B에 귀 기울이며
지구 저편 B로 달아났다
끝없이 갈라지는 오솔길에서 B의 책을 펼치며
그 어떤 것도 아니면서 그 모두에 속한 B를 기웃거리고
주체못할 부끄러움으로 B를 기억하며
내가 여전히 한 발을 담그고 있는 도시,
B에서.

 

 

/2012, 2013. 11. 9.

 

1) 두 줄 짜리 시의 제목은 폭격기의 이름에서 따온 <비52>다. 세 가지 ‘비’에 관한.
2) 알렙, J.L.B.
3) 모래의 책, J.L.B.
4) 아이작 뉴턴

 

 

+
B에 관해서 쓸 때 빠트린 몇 가지 가운데 하나는 수십년 이상 그 이름을 알지 못한 채 그려왔던 것이다. 왜 그런지 나는 그것의 향으로부터 형언하기 힘든 향수를 느끼곤 했다. 가슴을 아리게 하고 폐부를 찌르는 무엇인가가 그 속에 있는 듯 싶었다. 찰스 그레이 백작이 그것의 즙을 첨가해서 마신 차의 이름이 얼 그레이고 어느 짧고도 달콤했던 시절 나는 그 향기를 신호인양 메시지인양 즐겼던가 싶다.  / 2015. 4. 18.

 

 

제목을 생각했으나 붙이지 아니함.

다만 홀로 허덕였을 뿐,
수없이 많은 말을 건넸으나 답은 없었다
땀과 숨이 뒤섞일 때
숨과 숨이 거칠게 맞닥뜨릴 때
오늘도 봉긋한 그 가슴에 오르다

 

/2006. 1. 28.

 

 

++
제목을 사용했다면 좀 썰렁했을 것이다.
영상이 상상을 제약하듯, 제목이 많은 것을 가두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붙이지 않은 제목 때문에 붙이지 않은 다른 제목이 붙었다.
마음대로 생각하기 바란다./2016. 7. 25.

 

 

+
꽤 오래 전이다……
굳이 제목을 붙이지 않은데는 당연히 저의가 있다.
거의 오해하고(5할) 아주 조금 이해하길(2할) 바라며.
자연스레 상상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은 역시나 두 개의 트랙을 지니고 있다.
나머지 3할이란, 이해가 오해이거나 오해가 이해일 수도 있다는 것,
사실은 나도 뭐라고 단정짓지 못하겠다는 것./2016. 5. 22.

 

 

다음 이 시간에……

<이작자 여인숙>에 썼던 마지막 글
2015. 9. 16. 13:38

(게시판 복원에 성공하여 ‘화이트룸’에 올렸던 마지막 글을 가져왔다)

 

 

이작자여인숙1

 

 

더러는 햇빛처럼
더러는 빗물처럼
그 사이 사이
그대도 있다가 없다가
그랬다

………………………………………….

놀았다
더운 물속에 쓰라린 상처처럼
바람 앞에 얼굴을 가리는 새처럼
결국은 아팠다
놀았으므로 지극히 쓰라렸다//허수경

 

 

최근에 있었던 몇몇 일은 일말의 미련도 의미가 없음을 새삼 가르쳐주었습니다. 날짜는 절로 가는 것이니 앉아서 남은 시간을 헤아리기 보다는 여기서 그만 끝을 맺고 싶어졌습니다.

……왠지 ‘안락사’의 느낌이 듭니다.ㅎㅎ 安樂, 글자 그대로의 편안하고 즐거운 느낌을 상상해봅니다.

<이작자 여인숙 1999~2015. 모두의 사랑받는 이로 태어났으나 많은 이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망가뜨린 끝에 고적 속에 떠나다.>

이 홈페이지가 여기 있음을 바라보며 며칠이라도 더 번민하는 것이 편치가 않아서 얼른 떠나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천리안의 서비스 종료로 이렇게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내 부족함으로 하여 오늘이 왔다는 점, 무엇보다도 분명히 말해두고 싶습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오직 내 탓입니다. 끝까지 이 고적한 공간을 찾아주시고 관심 가져주신 몇몇 분께 각별히 고마운 말씀 드립니다.

here till here is there, 혼자만의 어떤 다짐들은 가능한 한 끝까지 지속하려 했으나 여기서 멈추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망 좋은 방에 어떤 노래가 흐르거나 멈추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 속에서 그러함이 의미있는 일이겠지요.
지금, 이 순간 무엇인가 의미가 있다면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아니면 아닌대로 그러하겠지요. 이 달을 끝으로 이작자 여인숙은 사라지고, 나는 오늘로 문을 닫습니다. 하지만 잊어버린다는 것은 깡그리 잃어버리거나 사라지는 것과는 좀 다른 무엇입니다. 어떤 눈먼 이가 내게 놀라운 방식으로 가르쳐준 것입니다 . 그것은 결코 지워지거나 사라지는 법이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시 한번 이 글을 읽는 분들께 인사를 드립니다. 레이 브래드베리의 글에서 이 세상의 마지막 밤을 보내던 그들이 그랬듯이 여인숙의 마지막 밤에도 수돗물은 잠가주시고 가벼이 정리도 해주세요.^^ 나는 바보였고 비겁했고 모자라는 사람이었지만 빛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럼 (몇 번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완성을 하지 못한 내 시 제목처럼),

다음 이 시간에……

 

 

 

 

YouTube player

일어나지 않은 일에 관한 증명

전망 좋은 방의 노래 : a theme for…

 

그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거의 십수년 동안, 내 詩로 채워져 있던 곳 ㅡ <이작자 여인숙>의 ‘전망 좋은 방’에는 늘 똑같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 제목이 대단한 비밀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말한 적이 없고 다른 방식으로 노래를 알린 적도 없다.

곡의 분위기와 품격은 전망 좋은 방을 위한 최선의 음악이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고 어떤 이유로 해서 나는 전망 좋은 방의 노래를 바꾸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 그 이유가 사라졌기에 더 바꿀 수가 없었다. 이 노래는 말하자면… 내게 일어났던 일의 증거이고, 일어나지 않았던 일의 증명이다.

노래를 듣노라면 나는 여름밤의 창가가 생각난다. 그것은 추억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상상도 아니다. 말 그대로 내게 일어났던 일은 아닐지 모르지만 아예 없었던 일도 아닌 무엇이다. 노래를 듣는 동안 나는 그 방에 있었고 그 시간에 있었다. 4분 남짓한 노래에 세월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 오래된 그 노래가 흐르고 있다. 끝내 갖지 못한 세월이.

 

 

 

 

 

End of the Line

‘스타바운드’와 더불어 그의 소식을 들었던 여름날이 벌써 3년이 지났나 보다. 어쩌면 아주 짧았던 것도 같고 어쩌면 그보다 한참 더 많은 시간이 지난 듯한 느낌도 든다.  또 어쩌면 光年의 세월만큼……

Short and sweet , 너무 짧고 단출해서 허전했던 그의 노래 한 곡을 들었던 바로 그 순간 나는 그의 모든 노래를 알고 싶어 했고 그다지 길지 않은 시간에 그리 되었다.

시작도 끝도 희미하고 절정도 없는 읊조림
가끔씩 눈에 띄는 놀랍도록 직설적인 표현들
그리고 마치 물위를 걷듯 현을 스치는 듯한 기타 소리에
얼마나 매료되었던지……

지금도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는, 어찌하여 에릭 클랩튼의 After Midnight은 히트를 하고 그의 버전은 거의 묻혀버렸냐는 것이다.(케일이 처음으로 라디오에서 들었던 자신의 노래는 에릭 클랩튼이 노래한 것이었다).

케일을 상징할만한 또다른 에피소드로는 그와 잘 아는 기타 제작자의 소개로 죠지 해리슨을 만났을 때의 일이다. 그는 케일의 음악이 너무 마음에 들어 “내츄럴리” 앨범을 늘 차에서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되물었던 것은 케일이 이후로 또다른 앨범을 내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고 한다. 죠지 해리슨이 세상을 떠나기 몇달 전의 일이었고 유명인사와 특출한 무명인사의 만남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의 음악에 대한 내 느낌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그다지 달라진 적이 없고 수없이 들어온 그 짧고 단순한 음악들이 지겹게 들린 적도 없다. 더이상 그의 새로운 노래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미 들려준 노래들만으로도 그는 충분하였다.

그날 내게 스타바운드를 들려준 이에게도,
“End of the Line”에서도.

 

 

 

 

 

Train for Busan

A night train is coming
In my sleep, in my dream, screaming without sound
She is also running toward me
Gazing outside, an endless glance
her sorrowing spirit is coming for me riding the night
Light flows without ceasing or drifting,
it’s coming, aiming at me, the blind man

 

2000. 5. 5. / 2000. 1.

 

+
역주행이라고 미련이라고 말하면 터무니없고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오다보니 잠시 뒤돌아보았다.

 

 

 

불가사리 이야기

그 시를 썼던 게 1999년인지 2000년인지 모르겠 습니다. 찾아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아무튼 그 무렵이었습니다. 현재를, 심지어 미래까지도 어찌 못할 과거로 돌리며 이별을 이야기한 것이었지요.

생각해보니 그 시는 한 줄, 세  단어 정도로 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전혀 시적인 문장이 아닌 구어체의 밋밋한 서술이거나 주체하기 힘들어 뱉어낸 억지일 뿐이지만 내가 속으로 말했던 것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 나는 그………………

그것을 썼을 때 나름 기뻤습니다. 이별의 시인데도 그랬지요. 나는 긴장했고 조금 자랑스러웠고 한편으론 두렵고 떨렸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시를 써서 좋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리고 시에 가장 직접적인 영감을 준 그녀는(시 속의 그녀를 이야기하는 것이 결단코 아닙니다) 어떤 누드 사진의 주인공이었습니다. 불가사리가 어딘가에 붙어 있는 누드였지요. 나는 그게 떨어지는 것과 이별을 어떻게 연결시킬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두 줄을 쓰고 나니 더이상 쓸 말이 없어 그것으로 끝이 나고 말았지요. 우습고 의미없는 사족이지만(낡아빠진 중고차를 판매하는 이가 그 차의 원래 가격은 얼마였다고 말을 풀어놓는 것처럼요) 밝혀둬야 뭔가 온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하지만 나는 여전히 ‘불가사리’를 ‘미스터리’와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 의미가 ‘불가사의’에 이르러서는 더 절묘해지는데, 그 발음이 ‘불가사.이’가 되기 때문에 ‘mister.y’ 또는 ‘미스터.리’와 거의 같은 형식과 의미를 가집니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의 세계에서……

합당한 것인지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지만 내가 붙였던 제목은 “그리움”이었지요. 경문왕의 복두장이처럼 미다스의 이발사처럼 나는 외딴 곳으로 나아가 구덩이를 팠고 그 모든 사연을 묻었으나 지금도 갈대밭에서는 흐릿한 목소리로 비밀이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사는 달라진 적이 없는데 내것 아닌 노래는 매번 다른 의미로 들리곤 합니다. 말라 비틀어진 채 그대로 굳어버린 불가사리에게도요.

 

 

 

 

 

 

아무도 모르는 소식

별이 사라진 것도 꿋꿋이 견뎌온 건물이 허물어진 것도 아니다. 1년이나 버텼을까 모르겠다. 육교 건너편 인적 드문 길, 점포 하나 문 닫은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간판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 한때는 희망이었고 한때는 버겁기에 더 기대했던 빛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벌써 퇴각해버린 꿈일 뿐인데 자동 타이머가 붙어 있는 간판이 그 길을 훤하니 비추고 있다. 텅 빈 실내에 휑한 빛을 던지고 있다. 또 다른 가녀린 꿈이 자리를 채울 때까지 내 안에도 비슷한 빛이 스러졌다 또 켜지곤 한다는 것,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는 소식일 테고 별이 사라진다 한들 그 길 오고 가는 이들도 그럴 것이다.

 
/2016. 2. 20.

三行詩

그 목줄 누가 내어놓았는지

강아지 한 마리 위태로이 찻길 따라 걷는다

바쁠 것 없는 걸음 괜스레 재촉하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친다

 

(알지 못하는 셋이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 가운데 二人이 느낀 것을
어느 一人이 쓰다.)

일러바치기 심장

귀를 대어보세요.

그녀의 가슴이 째깍거립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들리는 법

한 시간이 한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다들 그러하듯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그곳

그냥 그대로 얼어붙은 초점입니다.

그러던 내 가슴에 손 얹어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귀를 대어보세요.

다들 그러하듯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무지 이길 길 없어 멈출 법도 했건만

한 번쯤 참지 못해 달아날 법도 했건만

찰나를 세월처럼 지켰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The Tell-tale He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