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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어 의심치 않는 어떤 미래에 대한 사소한 기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은 벚꽃나무로 무성하다. 이제는 2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선 나무들이 봄날이면 터널을 이룰 정도로 자랐으니 어느 계절이나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거리다. 가을은 가을대로 단출한 운치가 있고, 봄날에는 어떤 벚꽃길보다도 소박하고 요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늘 “여름날의 푸른 잎새들”이란 옛 노래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길이다.

아파트의 제일 중심에는 그리 크지 않은 2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고, 그곳엔 이발소와 과일가게와 슈퍼와 치킨집, 그리고 식당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낡고 조용한 이 곳에서 유일하게 조금은 붐비는 곳이 바로 여기다. 상가라고 해도 큰 건물도 아니고 아직은 주차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서 이발하러 오는 사람들도 가끔은 상가 앞에 주차를 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은 아무래도 슈퍼다. 하루의 절반 가량을 보내며 먹고 쉬고 자는 이 곳에 슈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년에 불과 몇 번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곳이 바로 거기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 슈퍼지 이발용 의자가 둘 놓여 있는 이발소나 바로 곁의 과일가게의 두 배 정도 되는 점포일 뿐이다.
그 슈퍼에는 아파트 단지 아래쪽의 술집거리로 술을 배달하는데 사용하는 자전거 하나가 슈퍼가 열려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워져 있다.

말했다시피 차량 통행이 적어서인지 차의 통행에 큰 지장이 없는 탓인지 자전거는 길 방향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핸들과 바퀴의 방향이 슈퍼의 정문과 일직선으로 해서 세워져 있다. 마치 비상상황을 위해 대기중인 순찰차처럼 주인아저씨의 변함없는 머리 스타일과 그 길이처럼 365일 어느 날이나 결코 변함없이 그렇게이다.
하지만 어쩌다 운전을 하면 습관처럼 나는 움직이게 된다.

과속방지턱도 없는 그곳 ― 슈퍼 앞을 지날 적이면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게끔 되어 있는데, 왕복 2차선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피해서 가려면 당연히 맞은편 차선을 절반 가량은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불편도 아니고, 통행이 크게 지장을 받을 정도도 아니니까 아주 잠깐 핸들을 왼편으로 돌려주면 그만일 뿐이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소한 동작을 그곳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일년에 수만 번 또는 수십만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전거와 관련하여, 아직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세계에 관해 감히 말할 수 있다. 만약 부지런하고 마음좋은 주인 아저씨가 스스로 자전거를 90도 돌려서(정확한 90도는 아니어도 근사값은 되어야 한다!) 세워두는 어떤 날이 오고, 그 이후 그렇게 지속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또는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가장 그리는 같고도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유사하거나 전혀 다른 수많은 방법들에 관해 비슷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정확히 실행된 적은 없다.

 

/2007. 7. 20

 

 

+
이 글을 쓴 몇해 뒤 슈퍼는 다른 사람에게 인수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더 이상 자전거 배달을 하지 않게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많은 기회 가운데 하나는 사라져버렸다. 그런 ‘기회’는 수없이 많이 있으나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내가 다니는 육교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는데 자전거보다 훨씬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
추신처럼 달아뒀던 오토바이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왜냐면 그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나 있던 큰 육교 한 가지는 최근에 있었던 야구장 철거와 함께 잘려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꿈이 사라졌지만 꿈은 너무도 많다. 그것을 깨트리는 현실이 더 많은 것이 조금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2018. 10. 2.

 

사랑하고 사랑받은 한편

몇 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주 긴 긴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떤 줄엔 행복이 묻어 있었고 어떤 줄은 금세 끊어질 듯 위태롭게 떨렸습니다. 산문이 되었다가 모르는 사이 운을 맞추기도 하였습니다. 줄인다고 줄여지지도 않고 애써 늘인다고 늘여지지도 않았습니다. 내가 쓴 것도 아니고 혼자 읽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눈동자 속에 몇 개의 형용사가 있었는지 수더분한 옷과 재빠른 걸음걸이가 3/4조였는지 7/5조였는지도 잘 모르는데 어찌 제대로 이해하고 쓸 수나 있었겠나요. 누가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라고 했나요. 이별에 관해 그 무슨 공감각적 표현이 있을지, 그리움에 무엇을 보태어 ‘낯설게하기(defamiliarization/verfremdung effekt)’를 만들어내었는지요.

가끔은 두 줄씩 보기 좋은 쌍을 이루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엇박자로 어지러웠습니다. 역류라면 모를까 감정이 넘쳐나는데 그 무슨 이입이 있을 것이며, 시작도 끝도 없고 절정도 없는데 기승전결은 또 무슨 허황된 서류에 붙어 있는 이름일까요.

하지만 진짜 시를 아는 사람이었다면 제대로 자신의 운을 맞추었겠지요. 멋진 배경 속에 14행을 넣어서 소네트라 이름 붙였겠지요. 한 줄이 되었다가 전집이 되었다가 두서없이 흩어졌고 그리고 또 흩어진 그대로 남았습니다. 이제는 잃어버린 원본이며 제대로 베껴 쓰지도 못한 마음만의 한 편입니다. 결코 제대로 옮기지 못한 한 편이 여태 마음에 그려집니다. 세상 어딘가 틀림없이 그 한 편을 위한 진짜 작가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지금 그 한 편을 쓰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2006. 2. 23.

믿지 못할 나의 금연기

: 그의 마지막 담배

 

사람들에게는 끊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마약, 도박, 음주, 연애, 인연, 담배 등등. 어떤 이는 그 가운데 하나에 그러하고 때로는 여러 가지 병을 한꺼번에 앓기도 한다. 

나는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끊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지독한 중독이었으나 별스레 특이한 방법을 택한 것도 아니었다. 어느 평범한 하루, 한껏 그것을 들이마신 채 나는 숨을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 심신에 모두 스며들기를 기다렸다.(그 시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었는지 또는 길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말이지 그렇게 멈추어 있었으면 싶었다. 그 순간의 집중에 성공했기 때문에 중독을 끊었다고 믿는다면 그리 생각해도 좋다.

 

하늘 끝 길은 멀어 혼이 날아가기 힘들고
꿈속의 혼이 관산을 넘기 힘드니…
ㅡ 이백

 

담배의 경우는 또 그랬다. 하루 세갑을 피웠으며 그 사이의 꽤 긴 세월 동안 단 한번도 담배 끊을 생각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담배끊기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내 경험상 그것은 어떤 계기가 있는 날(새해 첫날이나 생일날 등등)에 시작하는 것이 좋고, 가능한 한 많은 곳에 그 사실을 알리는 것이 사실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피우는 형태의 금연보조제도 상당한 도움이 되는데 그것은 맛이 너무 고약한 까닭이다. 나는 새해 첫날에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이별하겠노라고 알렸고 그리고 그리 어렵지도 않게 그렇게 했다.

그 동안 비슷한 것과 가짜들과 엉뚱한 것들이 빈 자리를 차지하였고 어느 날엔가 중독은 내게로부터 사라졌다. 모든 것이 너무도 천천히, 그리고 아무런 뚜렷한 경계도 기약도 없이 시작되고 언제인지도 모르게 스르르 끝이 났기에 이별에는 날짜도 없었다. 
그리움 또한 비슷하게 끊기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이다. 나는 그들 가운데 하나를 끊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왔다. 그들 가운데 몇몇을 싹둑싹둑 잘라내고도 또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다. 

끊기 어려운 것은 끊기 어려운 것이고, 새로 무엇인가 끊기 어려운 것을 마음에 담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금연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것에 관해 이야기 했으나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담배끊은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움에 관해서는 어떤 격언이 합당한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담배
사라진 연기 내 안에 가득하여…
(이 링크는 지워져 노래를 들을 수 없다.)

 

 

/2006. 2. 7.

당나귀와 떠난 여행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원유경 옮김, 새움

 

적어도 나는 내 자신을 위한 새로운 즐거움을
하나 찾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고독에 고양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곧 이상한 결핍을 깨닫게 되었다.
― 소나무 숲에서 보낸 하룻밤, 스티븐슨

 

비박(프;bivouac, 독;biwak) 또는 빈티지(영;vintage) 같은 단어들은 묘하게도 우리말과 외래어가 비슷한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러모로 독특한 느낌을 풍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단어들의 매력을 새삼 느끼게 한 것이 바로 스티븐슨의 여행기였다.

좀 엉뚱한 시작이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책의 장정이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양장도 아닌 단순한 하드커버의 제본은 이 책을 뻔질나게 들고 앉은 것이 아님에도 벌써 여기저기 갈라지고 있다. 게다가 겉멋이 많이 들어간 듯한 조판은 안쪽 여백이 지나치게 많고 바깥은 거의 여백이 없는 지경이 되어 책에 집중하기 어려웠다.(내가 까다로운 것인지 가끔씩 눈은 산만하게도 책 바깥을 향하곤 한다.)

스티븐슨의 단출한 여행을 생각할 때 그것은 어쩐지 이율배반적인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스티븐슨의 짧은 여행과 그 여행에 관한 기록, 그리고 그의 삶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스티븐슨이 1878년 당나귀 한 마리를 사서 여행과 노숙에 필요한 장비를 싣고 프랑스 남부 외지에 위치한 세벤느 지방을 여행한 12일간(1878년 9월 22일에서 10월 3일까지)의 기록이다.

별다른 극적인 사건도 없지만 소박한 느낌과 더불어 세벤느 지방의 역사와 종교적 분위기, 그리고 여행의 단상들이 잘 묘사되어 고산 오지의 상큼한 기운을 느끼게 한다.

<늑대의 후예들>이라는 영화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제보당 지역(그 자신도 늑대 괴물에 대한 전설 때문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고초를 당하기도 한다)에 대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고 이런저런 종교적인 역사와 그에 따른 에피소드들도 많은 것들을 생각케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스티븐슨의 여행기는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할 자유로움을 한껏 누렸던 한 사람의 섬세하고 사려깊은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날은 잠자리를 구하지 못해 애매한 장소에서 비박을 하고, 어떤 날은 누추한 여인숙에서 잠을 잤으며, 또 수도원에 잠시 머무는 동안 수도사와 논쟁을 하는 등 그의 12일은 다양한 경험과 자유로움의 연속이었다.

그래서인지 1903년 이래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채비로 그의 길을 따라 여행을 하였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나로서는 당장에라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비박에의 유혹’이 제일 컸다.)

스티븐슨은 44년의 짧은 생애를 통해 끊임없이 여행하며 꽤 많은 작품들을 남겼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삶 자체가 가장 인상적인 것이었다.

특히나 오래도록 미국대륙을 방황한 끝에 다시 만난 11세 연상의 이혼녀 패니 오스본과의 결혼 ― 세벤느 여행 자체가 패니 오스본이 남편의 강요로 영국에서 캘리포니아로 돌아간 후에 이루어졌다 ― 은 그 절정이었으며, 하와이와 사모아에서의 말년 또한 그러하였다. 그의 삶이 너무 짧았음에 안타까움이 많지만 그 삶이 결코 짧지 않을 만큼 그는 살았다. “여행을 꿈꾸는 것이 그곳에 도착한 것보다 낫다”던 언급 또한 그 자신이 대단한 여행가였기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나는 별빛 아래서 내 가까이에 누워 있을 동반자를 소망했다.
언제든지 손이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침묵하고 있는 동반자를.
거기에는 심지어 고독보다도 더 조용한 친교가 있다.
모든 것이 가볍게 이해되는 완전한 고독이.
그래서 사랑하는 연인들이 문밖에서 지내게 된다면,
가장 완벽하고 자유로운 삶이 되는 것이다.
― 소나무 숲에서 보낸 하룻밤, 스티븐슨

 

이 마지막 두 줄에 있는 절실함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는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했다.

 

 

/2005. 7. JJ.Lee ⓒ

두번째 종류의 고독

<침묵의 질주 Silent Running>, 더글러스 트럼불, 1971
오랫동안 한 척의 우주선도 오지 않았다.
이제 다 끝난 것일까?
ㅡ 두번째 종류의 고독, 죠지 R.R. 마틴

 

영화를 어디에서 봤는지가 가끔은 영화 자체보다도 더 선명하게 기억날 떄가 있다. <블레이드 러너>의 경우엔 승객이 거의 없는 고속버스 안에서 비디오로 보았고 <침묵의 질주>는 고등학교 1학년 쯤엔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하지만 나는 그 제목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몇 년 전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그 영화를 방영했으나 내가 본 것이라곤 겨우 마지막의 폭발 장면뿐이었다. 금세 조안 바에즈의 테마가 흘렀고… 그럼에도 나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오래전에 보았던 바로 그 영화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제목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래되고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 영화는 흑백 텔레비전의 이미지와 더불어 굉장히 적적하고 고독한 느낌뿐이었다. 그리고 우주선과 식물원을 관리하는 조그만 로봇들과의 카드놀이가 이상하게 기억이 났다.
최근에 다시 한번 보았지만 이번에는 자막도 없는 것이어서 그림만으로 모든 내용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예전에 보았던 기억을 더듬어 스토리를 엮어보면…

토성 궤도 근처의 우주 식물원에서 지리한 업무를 이어가는 4명의 승무원들에게 스테이션을 폭파시키고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곳을 몹시 아끼고 사랑했던 주인공은(이름도 모르겠다) 우여곡절 끝에 세 사람을 죽이고 홀로 남게 된다. 하지만 그다지 변한 것은 없다. 영화 초반부에서 동료들과 함께하던 트럼프 게임이 로봇들과의 게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은 너무 많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도 모를 일, 고적감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는지 죄책감 탓이었는지 그는 결국 식물원 일부를 떼어내어 우주 공간에 남겨두고 자폭을 선택한다.

 


우주선 Valley Forge의 현창에 비친 자폭 직전의 장면

 

영화는 오래도록 우주 스테이션에서 혼자 지내다 정신이상이 되어버린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두번째 종류의 고독>이라는 죠지 R.R. 마틴의 단편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4년 여를 혼자 고립된 채 지내온 우주의 간이역 근무자가 자신과 교대하러 온 우주선을 ‘작위적인 사고’로 파괴시키고는 또 하염없이 교대자를 기다린다는 이야기다. 엉뚱하게도 나는 <두번째 종류의 고독>이 이 영화의 진짜 제목 같은 느낌이 든다.

감독은 스탠리 큐브릭의 <스페이스 오딧세이>에서 특수효과를 맡았던 사람이라고 하던데 시대에 따라 급속히 변화하는 테크날러지의 허망함이라고 해야 할지 요즘 방식의 현란한 볼거리는 전혀 없었다.
마치 50년대의 UFO 목격자들이 그린 우스꽝스런 비행접시마냥 우주선과 로봇들은 너무 촌스럽고 폭발 장면도 매우 밋밋하고 단순하다. 또 어떤 이는 이 영화가 너무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했고 그런 이유들로 좀 엉성하게 망가진 영화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의 질주>에는 나로 하여금 심정적인 일치감을 느끼게 하는 무엇이 있다. 물기가 너무 많아도 그렇고 너무 메말라도 살기는 어렵다.
내가 보고 기억한 것은 과학적 논리적 맹점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고독과 고립에 관한 이야기다. 마음속에 수많은 생각이 넘쳐났다 스러져도 할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말하고 싶은데 말하지 못할 때 그 제목이 생각난다. 자폭하고 싶을 때 더 생각난다. White Pale Dot, 하염없는 공간에 떠 있는 어떤 고적한 방 하나를 잠시 그려본다.

…나는 어디에서 너를 보았을까.

 

 

2005. 4. 17.

기타 등등

: 이루어질 수 없음의 이루어짐에 관하여

 

처음 기타 배울 때는 그랬다.
친구에게서 빌려온 아주 낡은 기타 교본을 열심히 뒤적이며
코드라는 것을 배웠다.
많이도 필요 없었고 누군가에게 따로 배울 일도 없었다.
왼손 검지 베베 꼬아가며 하이코드 잡으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코드 딱 4개 익히고 나니 연습곡으로 수록되어 있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꽃반지 끼고 그녀와 걸어본 적 없는 길도 함께 걸었다.
손가락 끝에 굳은살이 박히고
아르페지오를 위한 손톱이 길게 자랐을 때
있지도 않은 사랑이 여섯 줄 위를 흐르고 또 흘렀다.
아무리 하찮은 것이었다 한들
나에게서 노래가 이루어질 때 세상에 그런 노래는 다시 없었다.
기세 등등 기타 등등 대충 따라 부르면
세상에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 다시 없었다.
C와 Am와 Dm와 G7.
도와 라와 레와 솔이 5-3-2-1-2-3의 분산화음으로 어울릴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따로 배울 필요도 없었던 일,
기타 줄 끊어진 채 방 한구석에 잠들어 있어도
오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만은 너무도 틀림없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또… 기타 등등
이루어질 것이다.

 

 

/2004. 11. 5

오리칼크의 도시에 관한 기억

그것을 당신들은 몰랐다. 왜냐하면 살아남은 부족은 몇 세대 동안이나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죽어갔기 때문이다.
― 티마이오스

 

그것은 손치스라는 이름을 지닌 이집트 신관의 꿈에서 비롯되었다. 그가 사이스에서 한 신전의 관리인으로 봉직할 때 그리스의 철학자 솔론을 만나 자신이 작성한 꿈의 조서의 일부를 보여준 것이다.

나는 킬허의 고전적인 지도를 통해 그의 꿈을 다시 돌아보았고 한스 헤르비거의 논설에서 그 기억의 편린을 그렸다. 비미니 제도의 해저 사진들에 등장하는 거대한 돌벽들을 통해 상상의 자재를 마련하였고 도시의 이름으로 제목 붙여진 어느 히피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몽롱한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도시의 실체를 보여준 것은 아니었다. 이그내티어스 도넬리는 장대한 저술로 대홍수 이전의 세계에 관한 희미한 기억을 복잡하게 기록하였고, 블라바트스키 부인은 아카사 기록을 통해 그 비밀을 보았다고 주장하였다. 에드가 케이시는 도시의 환영이 어느 특정한 해에 인류에게 현실로 돌아올 것이라고 했으나 그 예언은 애초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약속이었다. 파울로 쉴리이만의 맹랑한 주장 또한 내 아련한 느낌을 의사과학과 고대사로 어지럽혔을 뿐이었다.

도시에 관한 전설은 남극에서 화성까지, 놈모와 오안네스의 신화를 통해 시리우스의 보이지 않는 반성 포 톨라까지 뻗어나갔으며 물위의 도시라 불리우는 아즈텍의 테노치티틀란 또한 오리칼크의 도시에 관한 회상에 일조를 하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최근에는 스페인의 남부에 있는 카디스 근처의 늪지대 ― 마리스마데 이노호스에서 장방형의 구조물과 그것을 둘러싼 동심원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그것은 내가 보았던 도시의 기억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알프레드 베게너에 의해 제안된 판구조론은 도시의 존재 자체를 의심스러운 것으로 만들었으나 그것이 나의 희미한 기억을 흐트릴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매우 빈약한 증거 위에서 언제나 흔들리는 이름으로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전설에서조차 황폐해져버린 그 땅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오직 그것의 존재가 의심스러운 상태로 남아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찰스 햅굿 교수의 지각이동설이 도시의 존재에 관한 새로운 증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크게 상관없는 일이다.

작은 바다 바깥의 장대한 바다, 작은 대륙 바깥의 진정한 대륙은 헤라클레스의 기둥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게 넘을 수 있다. 오직 상상의 잔영만이 오늘까지 남아서 빛을 발할 뿐, 그것이 아니라면 불꽃같은 광채를 발한다는 오리칼크의 형상에 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인리히 쉴리이만이 아가멤논의 것이라고 믿었던 황금 마스크는 그저 그의 바램이었을 뿐이지만 그 열망이 유구하고 방대한 유적을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오리칼크의 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그 반대의 논리도 항상 유효하여 그것은 앞으로도 수많은 형상을 만들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오리칼크의 도시에 대한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는 도시에 대한 기억과 꼭 같다.

도시를 설계했던 최초의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영토에서 시인을 추방하였다고 한다. 그가 ‘거주자’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2004. 6. 7. JJ.Lee ⓒ

 

단 한 장의 책

마침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원하던 장소를 우리는 갖게 되었다. 세상에 없는 책이 없는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절판된 책을 찾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세상에 하나뿐인 책이라 해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고 소실된 책이나 심지어 다른 사람의 책에 이름만 올라 있는 책을 찾는 일조차도 크게 힘든 일은 아니다. 옛 알렉산드리아나 대영박물관, 혹은 의회도서관의 사서로 일하던 사람이 이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책의 내용은 고사하고 책을 분류하는데만 평생을 바쳐도 모자랐을 만큼인 것이다. 장정이 훌륭한 책이 많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이 도서관의 책들이 세상 다른 곳의 책들과 다른 것은 별로 없다. 책의 두께나 도안, 글꼴이나 크기는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였으나 모든 책에는 일정하게 비슷한 형식이 있었다. 책의 뒷표지가 일정한 규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인데 뒷면이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지은이에 대한 소개, 책 내용에 대한 간결하고도 훌륭한 요약, 그리고 군더더기 없는 비평이 그것이었다. 유명 작가나 작품의 경우 수많은 소개와 요약, 그리고 해설과 비평이 존재하는 까닭에 그들만 읽는다고 하더라도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만큼이었다. 특히나 명망높은 몇몇 작가들의 책은 여러 권에 걸쳐 책과 작자의 소개가 이어져 있거나 아니면 책 자체의 판형이 굉장이 크거나 (조금 따분한 내용의 양서일 경우) 매우 작은 글씨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곳의 사서들은 더 이상 책을 살피거나 분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방문객들은 그곳의 책들을 진심으로 사랑한다. 나는 어느날 도서관에 들러 오래도록 읽고 싶어 했던 <심문 審問>이라는 제목이 적힌 책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진실을 보았다. 책의 뒷면은 여느 책과 비슷하게 아주 작은 글씨로 지은이에 관한 소개가 있었고, 그리고 짧은 요약과 해설이 포함되어 있었다. 장정과 제본 또한 훌륭하여 오랜 세월과 풍상을 버틸 수 있어 보였는데 등표지와 그 반대편 양쪽 모두가 투명한 접착제로 잘 마무리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수천의 페이지를 포함하고 있는 단 한 장으로 이루어진 책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내 마음도 삶도 그곳에 꽂혀 있었다.

 

 

/2004. 2. 29. JJ.Lee ⓒ

알렉산드리아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장소와
도저히 복구 불가능한 기억.
― 크리스티나 펠리 로시*

 

항구는 모처럼 동방을 돌아온 배의 소식으로 흥청거렸다. 나의 일터와 항구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내 마음의 설레임은 배가 들어옴으로서 생긴 것임을 안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어도 각별한 친밀감으로 맺어진 항구의 관원은 그 배의 물건들을 면밀히 조사한 후 내가 필요한 것들을 먼저 빌려주는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나는 먼 미래에 그의 직업이 어떤 것으로 불리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로 하여 나는 늘 발품을 덜고 꼭 그만큼 확장된 영토에 상상의 깃발을 꽂는 즐거움을 누리곤 한다.
그래서 나는 늘 기다려왔고 그 기다림은 파라오 네코의 명을 받아 대륙을 일주한 페니키아 함대의 모험담보다도 중요한 무엇에 대한 갈망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내게 질나쁜 파피루스와 가끔씩 애를 먹이는 필사 도구가 있음이 지금처럼 기쁠 때도 그리 많지는 않다. 전달자들 ― 반어반인의 형상을 지닌 양서류의 신화에서 깃털 달린 뱀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는 다양한 형상이 있지만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전달자는 나름의 역할을 꾸준히 수행해왔다. 께짤꼬아뜰과 콘티키 비라코차가 그러하였고 헤르메스와 오안네스가 그러하였다.
나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틈만 생기면 세상을 베끼기에 여념이 없다. 최소의 정보가 주는 가장 훌륭한 선물은 최대의 상상력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진심으로 그 ‘글자들’을 사랑한다. 심지어는 거의 이해하지 못하는 이국의 파피루스까지도 내게는 늘 신성한 무엇이었다. 그 불가해함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또 해독 가능한 세계란 얼마나 협소한 것인가. 바다의 끝은 그토록 아득한 것이어서 태양을 응시하기를 좋아하던 어떤 소년*은 여전히 그 바다의 기슭을 거닐고 있을 것이다.
나는 파피루스를 이어 붙이는 동안 향긋한 풀 냄새를 상상하곤 한다. 사람들은 그것이 역하다고 하는데 나는 잘 모른다. 아니, 나는 거기서 짜릿한 어떤 기운을 느낀다. 전달자들이 떠나기 전에, 더 많은 재촉을 받기 전에 잘 벼린 칼로 마무리를 해서 필사본을 제자리에 꽂고 나면 내 자신이 그 파피루스의 한 페이지로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갖곤 한다. 잊어버리는 데 사용하는 거대한 기억장치* ― 복구 불능의 기억까지 온전히 포함한 채 내가 세상에 돌려줄 수 있는 것이 바로 그런 모습이기를 바란다. 불완전으로 하여 그들이 전달자의 일을 계속하고 있듯 나 또한 그러할 것이다. 나 자신의 일은 점점 하찮은 것이 되어 잊혀질테지만 내가 베낄 수 있는 것은 그것만이 아닐 것이다. 어떤 이는 시에네의 우물에 관한 파피루스를 읽고 세상의 크기를 짐작하였고, 어떤 이는 별의 지도를 그렸다. 어떤 이는 증기기관과 자동기계의 꿈을 설계하였고 어떤 꿈은 파피루스와 더불어 재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영 잊혀진 것은 아니다.
갠지즈의 모래알에서 옛 그리스 이발사의 갈대숲의 기억까지 세상의 팰림프세스트에 수많은 사연이 쓰여지고 또 읽히는 한 내가 사는 곳엔 (그곳이 어디든) 바다가 펼쳐져 있고 파로스의 등대 같은 빛이 밤새 바다를 비출 것이다. 심지어 등대가 사라져도 남아 있는 그 이름과 같은 지속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은 도서관의 명멸과는 전혀 별개이고 나는 천사들이 어떤 직업을 지녔을지 가끔 생각해본다.

 

어떤 형상으로든 세상 어디에 있든,
알렉산드리아의 충실한 관원에게.

 

2003. 11. 6.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우주와 자연에 대한 뉴턴 자신의 비유와 일화.
*유괴,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