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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묻지 마셔요

이별초 작사/오작교 작곡/장탄식 노래
(슬로우)

 

흘러갔나요 이젠 잊어버린 건가요
묻지 말라는데 다시 생각 말자는데
저 하늘에 달뜨고 이 가슴이 달뜨면
궁금한 마음 되어 당신 불러 봅니다
아무도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을 잊어셨나요
당신 생각에 부풀은 이 가슴도 묻어셨나요
잊어버리자는데 과거를 묻는다는데
노래하던 꽃마차 타고 산너머 남촌까지
만리포라 내사랑에서 밤깊은 마포종점까지
번지 없이 떠돌던 주막강산이었나요
무너진 사랑탑이던가요
그럼 당신 지금껏 갖고 계신 건 무엇인가요
그럼 당신 버리고 가신 건 또 무엇인가요
어느 산골 이름모를 계곡에 두고 왔나요
우리 지난 날 다 묻어신다 하면 그리 하셔요
그리 해 보셔요
함께 뱃놀이 갔던 호수 만큼이여요
둘이 지새운 깊고 깊은 그 밤 만큼이어요
가련다 떠나련다 유정천리 무정천리
제발 묻지 마셔요
적막강산 이 마음을 어이 하나요
청산유수 이 노래를 다 어찌 하나요
내 마음이 가는 그곳에 그리운 사람
미련없이 잊으려 해도 너무나도 그리운 사람
당신 마음 어떤지 눈에 선해요
묻지 마셔요
다시 볼 날 기약하여 우리 과거를 묻지 마셔요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이곳에
아주까리 초롱 밑에 홀로 앉아서
태양의 언덕 위에 꿈을 심노라니
파초의 푸른 꿈을 부디 묻지 마셔요

 

 

/2001. 5. 8.

 

65년의 새해

그때 너는 한살이었다
그때도 너는 奇蹟이었다*

 

65년의 새해라는 김수영의 시처럼 나는 기적이었다. 하지만 삼팔육은 내 고물창고에도 없다. 의사당과 방송국과 시민단체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삼팔육은 테라바이트의 비밀을 숨기고 산다. 사과탄 만큼이나 매캐한 눈물을 흘리고 사과탄보다 더 뽀얀 연기를 피운다. 삼팔육은 내 고물창고에도 없다. 내 보물창고에도 없다. 대공분실에도 지하벙커에도 이상한 이름의 공사들에도 대자보로 도배된 학생회관에도 없다. 이제 돌아가는 것은 징징대는 팬 뿐이기에 나는 삼팔육이 아니다. 00년을 맞이하여 공공연하게 빵빵하게 살아가는 몇 안되는 사람들만이 슈퍼 컴퓨터를 돌리며 어거지 삼팔육을 상기시킨다. 그 몇몇만이 삼십대 팔십학번 육십년대생의 이름을 가진 대표단수이다. 아주 많은 피가 아닌 약간의 피는 보상받을 수도 있기에, 작은 희생이 훈장일 수도 있기에 세상은 어느 정도 핏빛을 띠고 있을 뿐이다. 내가 A시대를 살았고 B유파에 속하며 C주의에 심취했다면 그건 별다른 뜻도 없는 것, 내가 X세대 흉내를 내었고, Y족처럼 지냈으며, Z너레이션이 되고자 했다면 모든 철자는 언제든 무엇이든 등식이 되는 공허한 방정식인 법이다. 시대의 중심에는 삼팔육명만 살지 않았고 피 마저 나이를 찾는 절호시절, 삼팔육명이 중심으로 살아 남았다. 대표단수는 단수를 올려가며 힘차게 희망차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때는 바야흐로 65년의 새해,

 

그때 나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나는 奇蹟이었다
계속 판올림 하며 00년의 새해에도 나는.

 

 

2000. 6. 15.
*65년의 새해, 김수영

물의 마법사

물속으로 떨어지면서 물의 표면에 파문을 만드는 조약돌처럼,
물의 깊이를 측량하려 한다면 나는 물속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ㅡ 끌로드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올해는 모두에게 평화로운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이제 막 희생된 처녀들 이외에는 어떤 제물도 필요하지 않으며, 옥수수 농사는 이번 카투운에서 유래가 없는 풍작이 될 것입니다. 쿠쿨칸께서는 이제 치첸이차에 흑요석의 단검이 필요치 않다는 것을, 더이상 태양의 신고를 위해 심장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리라 하였습니다.”

멀리 카라콜에는 이 깊은 밤에도 누군가 하늘을 헤아리고 있겠지만 돔의 창문에 불빛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곳이야말로 밤하늘을 가장 많이 닮은 곳, 별빛이 있는 한 불을 밝힐 수 없는 장소다.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은 오늘밤도 새벽을 지켜보며 별을 헤아리고 있을 것이다. 그의 직업이기 이전에 그의 삶 자체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마야의 많은 여인들이 그러하듯 그의 베개 밑에 장미꽃을 넣지도 않았다.

대신에 아름다운 엘 카스티요에서 착물의 가슴에 꽃을 바치며 그녀는 기도했었다. 하나의 단과 사방으로 제각각 91개의 계단을 가진 그 신전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간절히 염원했었다. 계단의 총합은 1년의 완성임과 동시에 기원의 실현임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치첸이차의 외곽 마을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사시斜視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딸들의 눈 앞에 조그마한 공을 달아 사시로 만들지 않았고, 아들들의 이마에 판자를 묶어 마야의 피라밋처럼 생긴 우아한 두상으로 변형시키도 않았다. 따라서 그들 남매들은 결코 미남도 미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름답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그녀는 성스런 연못을 두려워 했다. 태초의 바다 같은 그 짙은 초록빛이 무서워 그녀는 연못속에 손 한번 넣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공포는 많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듯 그 심연에 무시무시한 용이나 거대한 이무기가 살고 있다는데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깍아지른 바위벽에 둘러싸인 연못을 떠도는 것은 그런 추상적인 괴물이 아니며 그것에 관한 진정한 두려움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그녀는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이차 부족이 ‘아(하)’라고 부르는 물, 그들의 이름 또한 ‘물의 마술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물에 매혹된 물의 노예들인지도 모르겠다.

성스런 연못은 전사의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멀리 남쪽의 중앙지역으로는 카스티요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고 아래쪽으로는 해골 장식이 가득한 촘판틀리와 마야에서 가장 큰 구기장이 펼쳐져 있다.(그녀는 폭타폭을 한번도 관람한 적이 없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이차의 모든 두려움과 기원은 이 연못에 집중되어 있었다.

해마다 19의 달  ㅡ 불길한 와이엡의 마지막날에 연못에서는 물의 신을 위한 제전이 열린다. 이곳에서는 포로들의 심장이 흑요석 단검으로 도려내어지는 대신 아리따운 처녀들이 수장되는 것이다. 제관의 뜻과 가문의 순번과 정교한 천문법칙에 의해 오래전에 그녀가 선택되어 있었다. 아무도 공공연히 그것을 비극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그녀 자신의 태도야말로 가장 당당한 것이었다. 카라콜 별지기가 수십년 동안 바라보았던 어떤 별빛보다도 초롱초롱한 눈빛이그것을 말해주었다.

제관 하약스킨이 건네주는 황동의 잔을 받아 팔체를 마신 그녀의 정신은 서서히 혼미하였다. 하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늙은 하약스킨의 눈빛이나 주민들의 기도와 함성이 그녀를 연못 속으로 밀어넣을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왜냐면 그녀는 그토록 무서워하던 연못 위를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의 마술사는 마술사가 아니었기에 꽃으로 치장된 뗏목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곧장 아래로 아래로 빠져들었다. 그녀를 포함한 다섯명의 처녀가 똑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다들 환각상태였음에도 호흡에의 본능을 어찌하지는 못해 비명을 질러대고 손을 휘저으며 허우적대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만이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헤엄을 쳐서 빠져나오기에는 너무 깊은 곳이기에 그녀는 차라리 그 물을 호흡해야 했다. 어둡고 탁한 그 물은 비의 신 챠크의 숨결같은 것, 그녀는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침착하게 손가락 마다에 끼워진 금박이 입혀진 구리반지를 빼내어 뿌연 물길 속으로 던져넣었다.

그 순간 몇걸음 떨어진 곳에서 형체를 잘 알 수 없는 거대한 괴물이 그녀를 향해 아주 느리게 헤엄쳐 오는 것을 보고는 피가 얼어붙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두려움을 이기지 못해 자칫 물 위로 올라갈뻔 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마음을 진정시키고 다시 그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괴물이 아닌 오래전에 이곳으로 쓰러져 썩어버린 큼지막한 나무둥치였다.

함께 제물이 된 처녀들은 하나같이 가쁜 숨을 참지 못하고 물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제관의 물음에 답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기에 숨쉬기에 바빴고 그들은 곧장 막대로 떠밀려졌다. 그녀는 안타까워 힘껏 외치려 했지만 목소리는 자신의 귀에도 들리지 않았으니 그네들에게 전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녀는 홀로 두려움에 떨며 기다렸다.

어디선가 알 수 없는 물의 흐름이 회전하기 시작하면서 조금전의 통나무는 서서히 그쪽으로 움직여갔다. 보이지 않는 소용돌이는 빛을 모두 삼켜버린 듯 사방이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풍요로운 한해가 되기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이 땅을 풍족하게 할 비를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부모님과 제관과 질투어린 눈길을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내겐 없다고 믿는 적의 창을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걸어가네
하나뿐인 그 사람을 다시 보기 위하여
그의 하늘에 단 하나의 광점이 되기 위하여
나는 물길속을 걷네

 

모든 처녀들이 죽임을 당한 후에야 그녀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지만 혼수상태에 빠진 그녀가 겨우 깨어난 곳은 전사의 신전 곁에 있던 조그만 움막이었다. 하약스킨은 그녀가 대신 읊어준 예언에 적이 만족하였지만 이제 더이상의 제물이 필요없다는 그녀의 말에 몹시도 실망한 듯 눈을 홀겼다. 하지만 쿠쿨칸의 전갈이라는 말에는 그도 어쩌지 못하고 몸을 움찔하였다.

착물은 여전히 피의 쟁반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치첸이차의 연못에서는 그다지 많은 여인의 뼈를 볼 수 없기를 그녀는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친지들과 수많은 이웃들의 축복속에 집으로 돌아왔다. 저멀리 카라콜의 현창 사이로 달이 그윽한 빛을 발하고 있다. 어느 창에선가 이 밤에도 그는 하늘을 들여다보고 있을 것이다. 박투운의 세월이 스무번 돌아가는 동안 그녀의 눈빛도 그곳에 있었다.

 

 

/2000. 6.

 

 

 

+이 글에 나오는 단어들 가운데 제관의 이름을 제외하고 지어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두가 실재하는 건물이거나 장소이거나 단위의 명칭이며, 오래 전에 쓴 글이라 흐릿하지만 제관의 이름도 그의 캐릭터에 맞추어 마야에서 사용했던 두 단어를 붙여서 만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전문가가 아니어서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나와틀어에서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진 단어와 다른 단어 하나를 붙여서 만든 이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엘 카스티요(쿠쿨칸의 신전)’는 윗쪽 사진의 피라밋이고, 그 앞에 있는 석상은 ‘착물’이다. 폭타폭은 인신공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구기 경기의 이름이며, 그가 있었던 카라콜은 천문대이고 사진은 낮의 카라콜을 네가티브로 바꾼 것이다. 박투운은 날짜를 재는 단위로 144,000일, 그러니까 약 400년에 해당한다.(‘카스티요’와 ‘카라콜’은 스페니쉬다.) 하지만 카라콜에서 별을 헤아리던 이는 몇해 지나지 않아 그곳으로부터 영영 달아났다. 박투운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2000. 6.

 

Agua de Estrellas를 듣다 여기 링크했다. 우측 상단의 플레이버튼을 누르면 들을 수 있다. (그것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는데) 예전에는 릴라 다운즈의 노래가 여기 있었나 보다. 하단의 까라꼴 그림 링크까 깨어져 있어 바로잡았다. /2021. 1. 7.

 

꿈을 찍는 사진관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그리운 얼굴 거기 있었지요
할미꽃 꺾어들고 봄노래 부르던
아련한 추억도 거기 있었지요

눈감으면 더 가까운 그리운 그곳
동쪽으로 5리, 남쪽으로 5리
서쪽으로 5리만 가면 되었지요
일곱빛깔 무지개 너머 일곱글자 파아란 글자
꿈을 찍는 사진관이 거기 있었지요
새하얀 창문에 새하얀 지붕
꿈을 찍는 사진관이 거기 있었지요

불도 안 켠 그 방이 어찌 그리 환했나요
깨알 같은 하늘빛 글씨가 어찌 그리 눈부셨나요
1호실 3호실 5호실 지나면 꿈을 찍는 7호실
어둡지도 않은 방이 꿈 그리면 어찌 그리 캄캄했나요

꿈을 찍는 것보다 더 힘든 건 꿈을 꾸는 일
허기진 마음에 미안하지만
하룻밤 그냥 주무세요 꿈을 꾸세요
그리운 이 만나는 꿈을 꾸세요
하얀 종이에 파란 잉크로 꿈을 쓰면 되었지요
그리운 얼굴 마음 속에 그리면 되었지요

책갈피에 꽂혀 있던 노란 민들레 카드
넘길 때 마다 그 얼굴 보여 주었지요
노랑 저고리에 하늘빛 치마
그리운 얼굴이 거기 있었지요

 

/2000. 5. 5.

 

 

16년 전의 어린이날에 동시처럼 썼지만 알다시피 이 글은 강소천의 <꿈을 찍는 사진관>을 요약하고 조금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의 놀라운 동화는 박화목의 <봄>과 더불어 내 삶의 어떤 지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지금도 나 자신의 한 부분처럼(심지어 내가 쓴 글처럼) 여겨지곤 한다. 그들의 쉽고도 놀라운 글 안에는 보르헤스가 있었고 싸이키델릭한 환상이 있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道’가 있었나 보다. 내게 있어 <꿈을 찍는 사진관>은 시집의 제목처럼 느껴지고 그 이야기는 크고 작은 상실과 그리움에 대한 시처럼 여겨지곤 한다. 순이 대신 민들레 카드만 마음 속에 품은 채.

황혼에서 새벽까지

이제 떠날 시간이야. 척박한 나스카의 평원을 혼자 지나왔어. 나그네를 평안케 하는 버섯을 얻어왔지. 외로운 가슴마다 엘도라도의 빛을 주는 환영을 만나고 왔지.

꽃수 자수 긴치마에 검은 머리 여인이 태양의 처녀인양 춤을 추었어. 아카풀코에서 티후아나까지 안데스의 나비처럼 훨훨 날아올랐어. 몹시도 귀에 익은 그 노래, 플라멩코 가락 따라 반도네온의 아련한 소리가 돈 후안의 약초처럼 내 가슴에 불을 붙이고 있었지.

오래된 흙빛 탁자에 취해 엎어진 나는 홀로 마추픽추의 정원을 거닐다 희박한 대기 속에 떨고 있었어. 낡디 낡은 잉카의 조교弔橋가 위태로운 계곡에 걸려 있었어. 암흑보다 더 짙은 우림을 향해 끝없이 비는 퍼부어대었지. 면도칼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잉카의 성벽이 내 한숨에 무너지고 있었어.

이제 떠날 시간이야. 바닷가 모래밭에 하얀 눈물 뿌리며 다시 돌아오마던 깃털 달린 뱀 께짤꼬아뜰의 사라져버린 전설이었어. 스페인에 금과 은의 방을 내어준 아타왈파처럼 나는 가진 게 없어. 주인을 잃어버린 마야의 도시처럼 텅텅 비워버렸어.

어느 맑고 푸른 날 허기진 마음을 코카 잎사귀로 달래다 나는 떠났어. 내 가슴은 아즈텍의 심장처럼 흑요석 고운 날에 기꺼이 뜯겨나갔어. 아카풀코의 황금빛 꿈을 다시 보기 위하여.

 

i will hide and you will hide
and we shall hide together here
underneath the bunkers in the row.
i have water i have rum
wait for dawn and dawn shall come
underneath the bunkers in the row.

 

underneath the bunker, r.e.m., 1986

 

 

/2000. 5. 4.

 

바다가 육지라면

어이야 읊어보자 라면땅이 그 어디뇨
한발 외발 뛰지 말고 노랫가락 불러보자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
라면땅 노래 불러 너도 찾고 나도 살자

콩 심은 데 콩라면 열 받아서 열라면
죄가 많아 신라면 놀란 가슴 쇼킹면
심심하면 설렁탕면 술이라면 사발면
일도양단 우유라면 짜증나서 짜장면

알곰삼삼 맛보면 잘나가는 맵시라면
전라면 버섯라면 제비 찾는 카레라면
겁이 나서 바싹 쫄면 나는 나는 뭐냐면
얼어죽을 물냉면에 맞아죽을 수타면

역마살엔 팔도라면 아픈 곳엔 된장라면
삐걱대면 안성탕면 승진에는 비빔면
외로워서 슬퍼면 괴로와서 술퍼면
웃고 살자 치즈라면 폼을 잡자 김치라면

독수공방 어우동에 긴밤을 새우라면
야심한 밤 새가 울면 무심한 맘 대신하면
눈물 담근 모밀면에 매정할손 칼국수야
가련하다 이내 신세 천부당 만부당면

작자미상 구전가요 인생무상 땡전가요
작자불쌍 누군가요 용감무쌍 박댄가요
라면가락 노래가락 잃어버린 반지가락
라면땅 노래불러 너랑나랑 같이 살자

어이야 갈 곳 많다 넓디넓은 라면땅아
한발로 뛰어 넘을 골목길에 라면땅아
어허야 눈물 같다 갈 곳 없는 진흙탕아
입맛처럼 돌아왔다 안개처럼 스러진다

네가 밀면 당기면 만신창이 떡라면
해가 뜨면 밤이 오면 뒤척이다 잠이 들면
꿈이라면 깨라면 바다가 육지라면
당신이라면.

 
 
/2000. 4. 28.

원일점

아무렴,
기약 없음과 하염없음이야
내가 말할 수 있는 모든 것
내 마음 어딘가에 묻어둔 뼈가 있어
나날이 새겨가던 그리움이라
마디마디 사무치던 옛 하늘의 기록처럼
깎듯이 달이 차고
기울어 가고

 

 

/2000. 1. 16.

유리창 파리

언제나 신비가 감돌고 있었지
그에게는 유리창에 부딪힌 파리의 꿈이 있었지
화장실로 달아나야 할 신비가 있었지
그는 빈털터리 Mister……y

 

 

쿵쿵 가끔씩 가슴 안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지 녹음할 수도 없고 들려줄 수도 없지만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테니 어쩌면 다들 비슷할지도
몰라 행여 다른 몰골을 각성케 하는 거울이 있었지 결단코 전혀 닮지 않은 형제를 보았지 인적 끊긴 해양수족관을 두리번거리던 날 전시관의 미로를 답답한 마음으로 걸어 다녔어 삶이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을 때 쿵쿵 내 바깥에서 똑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꼭 내 몸통만한 바다거북 두 마리가 좁은 수족관에 머리를 쥐어박고 있었지 그 놈들 목숨이 그토록 질길까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 나온 것은 아니지만 내 뒤통수를 때리던 그 소리와 눈빛은 거울 같았어 그렇게 좁은 수족관에서 몸을 움직일 때마다 그들은 부딪히고 있었던 것이지 결코 용서받지 못할 단절 나는 차라리 그놈들 머리가 깨어지길 바랐는지도
몰라 겨울 햇살 비추는 창가에 서면 비슷한 슬픈 미친 바보 같은 비명 소리를 들을 수 있어 다들 나와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것일 테지 고작 그의 날개만 한 의지를 갖고 비상을 꿈꾼 것인지도
몰라 한숨으로 닦아낸 유리창만큼이나 투명하게 읽어낼 수 있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아니 그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맑고 명확한 거울이었는지도
몰라 그러면 세상의 유리창마다에 가득한 나의 날개짓 비명 소리가 그냥 찢어져버리면 좋을지도 몰라 수족관 그저 끔찍하고도
행복했던 비밀 없는 생활이 너무 그리운 것인지도 몰라 푸른 바다거북 한 마리가 창밖 허공을 부유하며 나를 두드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내가 그를, 날개를

 

 

 

/1999.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