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곤했었다
꿈의 책을 뒤적이던 나는 한 문장으로 된 페이지를 읽었다 Read More
[태그:] 보르헤스
그래서 보옥의 꿈을
가보옥이 등장하는 짧은 이야기를 보르헤스에서 읽은 적 있다. 보옥이 (꿈에) 자신의 집과 흡사한 집에 들어가 비슷한 여인들을 만나고 비슷한 꿈을 꾸었다는 자신을 만나고 깨어나는 이야기인데 <홍루몽>을 읽은 적이 없어 어느 대목에서 나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천일야화의 사연이 담긴, 그러니까 세헤라자데가 샤 리아르에게 자신들의 사연을 남 이야기처럼 하는 것이 1001일 가운데 어느 밤이었는지 찾아냈듯이 보옥의 꿈을 찾아보고는 싶다.
가보옥의 꿈에 관한 이야기는 꿈이 현실을 만들고 그 현실이 다시 꿈을 만들고 깨어나는 자기조직적인 구조다. 에셔나 천일야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로 비일상적인 형태의 쳇바퀴라는 점에서, 그리고 비현실적 상황에 어떤 완벽성을 부여한다는 측면에서 매력적이다.
천일야화의 “꿈을 꾼 두 사람의 이야기”(삼백오십일번째 밤) 또한 그런 면으로는 아주 완벽하다. 꿈이 또 다른 꿈이나 현실을 초래하고 현실이 다른 현실 또는 꿈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들이다. 그것은 러셀이 어릴 적에 꾸었다는 꿈처럼 스스로 당위성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뒷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라고 적힌 종이를 뒤집었더니 “뒷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이야기이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본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코엘료와 그의 지지자들에겐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연금술사> 또한 “꿈을 꾼 두 사람의 이야기”를 365일의 꿈으로 늘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한편 그런 꿈에 대한 관심, 심지어는 꿈 그 자체조차도 시간과 공간, 세월과 나이와 형편에 따라 제한당하기도 하고 스스로 구속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꿈이 현실을 부르고 현실이 꿈을 인도하는 듯한 보옥의 꿈을 꾼지 너무도 오래이고 그래서 지금도 보옥의 꿈을 꾼다. 꿈은 그저 꿈일 뿐이기도 하고 그것을 꿈꾸는 것이기도 하기에.
꿈을 꾼다는 그 여인을 꿈꾸었네
그녀가 나와 함께 꿈꾸고 있다는 꿈을 꾸었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2018. 5. 7.
두 장소
내가 그 책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아마 15, 6년 쯤 전이었을 것이다. 어디로부터 내게 왔는지 모를 <허구들>과 보르헤스 관련 몇몇 서적의 역자 주석과 해설에서 숱하게 그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지만 번역본은 없었다. 한참 뒤에 읽게 된 보르헤스의 에세이집을 무척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바로 그 책이었다. 출판사는 보다 구매력 있는 제목을 원했겠지만 나는 바뀐 그 제목이 그리 탐탁치는 않았다.
하지만 제목이 무엇이라 붙었던들 그 책, <또다른 심문 otras inquisiciones>은 내게 의미있는 방향타가 되어 주었다. 비니시우스 지 모라이스의 노래 한 곡에 대한 집요한 관심이 브라질 음악에 대한 내 이해의 폭을 다방면으로 확장시켜준 것과 비슷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사실을 말하자면 보르헤스의 상당수 에세이가 내게 그랬다. 바벨의 도서관 해제도 물론.)
아무튼 그 책의 ‘카프카와 그의 선구자들’이란 에세이에서 나는 레옹 블루아(이전의 책에는 영어식 표기로 ‘레온 블로이’라 되어 있었다)를 다시 보았고 로드 던세이니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다행이도 <바벨의 도서관> 시리즈에는 두 작가와 그들의 이야기가 각기 수록되어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들이 정착한 마을 ‘몽쥐모’를 떠날 수 없는 부부의 기구한 삶이 있었고, 그와 반대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전설의 도시 ‘카르카손’을 향한 원정대의 허망한 꿈을 다룬 던세이니의 이야기도 있었다.
블루아의 단편에는 일정 부분 블랙 코메디 같은 분위기가 있었고 던세이니의 경우는 중세 무용담의 형식에 삶 자체에 대한 은유를 담담한 어조로 담아내었다. 던세이니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이가 보내온 편지에 인용된 출처불명의 한 줄 “그러나 그는, 그 사람은 결코 카르카손에 도달하지 못했다”를 통해 이 단편을 썼다고 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떠날 수 없는 곳과 수많은 세월을 진군했음에도 닿지 못하는 곳, 내 생각에 삶은 그 두 장소 모두인 것 같았고 나 역시 그 두 곳을 오가며 절망하고 희망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어쩌면 몽쥐모와 카르카손은 결국 같은 공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를 일이다.
“but he, he never came to carcassonne.”
/2017. 11. 23.
메추리 요리 / 시스템 복원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에서 가장 절묘한 것은 ‘메추리를 재료로 하는 저녁 요리’라는 복선이다. 마술을 시작하는 시점에 등장하는 “메추리로 저녁 식사를 준비하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만들지 말라”는 언급은 나중에 마법을 취소시키는 장치로 사용된다.
그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는 복선 내지 스위치가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에도 포함되어 있다. 윈도 xp, 비스타 등의 <시스템 도구> 항목에 있는 <시스템 복원>이 바로 그것이다. ‘시스템 복원’은 운영체계가 스스로 일정 시간마다 복원 시점을 만들어 (혹은 사용자가 수동으로 복원 시점을 만들어) 컴퓨터에 이상이 생기거나 예기치 못한 문제를 발생시킬 때 그 이전의 특정한 시점으로 컴퓨터 환경을 되돌리는 역할을 한다.
‘메추리 저녁식사’는 마법사와 신부의 삶에 있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마법사가 만들어둔 일종의 복원시점 같은 것이었고, 유저(마법사)의 입장에서 원치 않은 상황을 초래한 신부의 초고속 승진은 “메추리로 저녁 식사를 만들라”는 ‘시스템 복원 명령’에 의해 그 시점으로 돌아가버렸고 교황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했던 마법은 덩달아 ‘언인스톨’ 되어버린 것이다.
예전에도 ‘시스템 복원’에 대해 무엇인가 글 썼던 것을 기억한다. 내 삶에 그런 시점을 설정할 수 있다면 어디쯤일까에 관해서도. 옛노래 그린 필즈에서 늘 마음을 저리게 했던 구절 역시 가능하지 않은 ‘복원’에 관한 대목이었다.
월명리의 전설 또한 이야기 또한 복원할 수 없는 무엇에 관한, 어떤 길에 관한 생각이었다.
메추리로 저녁 식사를 할 수 없는 삶, 복원 기능이 없는 삶에 있어 우리가 가진 유일한 스위치는 어쩌면 ‘현재 그 자체’일 것이다.
참고로 <초고속 승진을 시킨 마술>을 비롯한 <불한당들의 세계사> 수록 작품 대부분은 보르헤스 자신의 순수 창작이 아니라 세계 각처의 기록과 전승, 작품에 관한 ‘다시쓰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2008. 8.1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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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템 복원(system restore)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 me, xp, 비스타, win7~10의 운영체제에서
시스템 파일, 레지스트리 키, 설치된 프로그램 등을 특정 시점의 상태로 되돌리는 시스템 도구.
보조프로그램-시스템도구-시스템복원.(win7 기준).
델리아에게 전하는 인사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 보르헤스
바람도 선선한 가을날입니다. 늘 다니던 길에서 새로운 가게 하나를 발견한 것처럼 늘 보던 화단에서 언제부터 있었는지도 모를 나무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델리아를 보았습니다.
새로운 것이 아니어서 새로운 느낌, 오래도록 여기저기 뒤적여 왔으나 너무 짧은 글이어서 그냥 무심하게 넘어갔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거리를 헤매이면서도 그녀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었을지요.
내 기억 속에도 그런 장면이 있습니다. 어디쯤에서 헤어졌는지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마치 나 자신이 모든 시간을 관통하는 듯 Flashback의 느낌을 갖곤 합니다. 그의 짧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11번가의 모퉁이는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그런 아스라한 순간이 남아 있겠지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 나면 잘 안다는 것은 무엇인지,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지 내 마음의 잔상은 흔들리며 흐릿해지곤 합니다. 죽음이 지닌 감당키 힘든 위력 가운데 하나 ㅡ 그가 말한 ‘거짓 기억’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상이 흔들리는 것일 뿐, 그것은 그 글자의 본래적 의미처럼 이미지가 아닌 것이어서 변치 않고 남아 있는 무엇이 있습니다. 아마 그가 붙들고자 하였던 델리아의 본질도 분명 그러하였을 것입니다.
그가 <울리카>에서 화자의 입을 빌어 말한 것처럼 인간에게 영원이란 허용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짧은 글을 통해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를 내 빈약한 가슴속에 깊이 깊이 각인시켰습니다.
지구 저 반대편에서 수십년 전에 존재했던 어떤 사람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사연에 전도되어 11번가의 모퉁이를 바라보는 이 느낌을 어찌 다 말할 수 있을지요. 하나같이 너무 구차한 사족인 것만 같아 두 페이지에 불과한 델리아의 이야기를 내 마음의 카메라에 수없이 담고 또 담아봅니다.
Some sunny day… 어딘지 언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다시 만나리라던 비러 린의 노래가 꼭 그러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꿈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억의 한 부분+ ㅡ 나도 더불어 비러 린에게, 스탠리 큐브릭에게, 보르헤스에게, 그리고 델리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그는 “작별인사를 나누는 것은 이별을 부정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인사가 없어도 분명 그랬을테지요.
델리아, 언젠가 우리는 다시 서로 이어지게 되리라.
어느 강가에서?
이 불확정적인 말,
우리는 한때 우리가 평원 속에 묻혀 있는 한 도시 속에서
정말로 보르헤스와 델리아였는지 자문해 보게 되리라.
ㅡ JLB.
+마르띤 삐에로.
/2003.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