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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하지 못한 꿈

냉동여행 Frozen Journey, 필립 K. 딕

 

▲ 그의 지난날
그의 이름은 빅터 케밍스다. 어릴 적에 도르키라는 이름을 지닌 고양이가 비둘기를 잡아먹도록 부추겼다. 네 살 때는 거미줄에 걸린 벌을 도와주려다 벌에게 쏘였으며, 마틴이라는 프랑스 여인과 결혼했으나 이혼했다. 화가의 친필서명이 적힌 꽤 값어치 있는 포스터 한 점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 보관했는지 아니면 찢어져버렸는지 불분명하다.

 

▲ 그의 오늘
새로운 행성에서의 새로운 출발을 기대하며 장거리 우주여행에 나섰으나 냉동 시스템에 문제가 발생하여 희미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우주선에는 깨어서 생활할 만큼의 충분한 산소와 식량이 없는 까닭에 우주선의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현실 세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는 과거를 반추하며 괴로워 하고 새행성에 도착할 가까운 미래의 환상을 접하며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고 또 절망한다.

 

▲ 그의 내일
10년간의 끔찍스런 과거와 미래로의 여행
또는 새로운 행성에서의 극적이고도 꿈같은 재회?

 
ARRIVE  ARRIVE3

 
필립 K. 딕 하면 영화의 장면들이 먼저 떠오른다. <블레이드 러너>(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 <토털 리콜>(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에서 <임포스터>, <마이너리티 리포트>, <페이 첵>에 이르기까지 꽤 많은 그의 작품들이 영화로 만들어진 까닭이다.(아쉽게도 블레이드 러너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개 정체성 문제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것은 <냉동여행>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어슐러 르 귄과 더불어 주류(?) 문학계에서도 거론되곤 하는 몇 안되는 SF작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나 르 귄의 경우와 달리 그는 보다 ‘통상적인’ 형태를 취하곤 한다.

 

내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군.
뭔지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있어. 내 안에 말이야.
통증의 쓰라림. 무가치하다는 느낌.

 

애초에 그는 목표 행성까지 냉동수면 상태로 지냈어야 하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주 여행 도중에 일부 의식이 깨어나버렸다. 불행히도 우주선에는 인간이 깨어서 생활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우주선의 컴퓨터는 그를 수면 내지 가수면 상태로 유지하고자 애를 쓴다…..

그에게 닥친 부조리한 기억들이 남의 일 같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과거로 돌아가곤 하지만 단 한번도 행복한 기억을 유추해내지 못한다. 우주선은 그에게 새 행성에 도착하는 시점을 가상적으로 만들어내어 그에게 안도감을 주려 하지만 그마저도 번번이 그가 눈치채어버려 실패하곤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자그마한 잘못들에서 비롯되었다고 믿으며 부정적이고 우울한 상태를 지속한다. 우주선 컴퓨터의 판단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의 두려움과 죄의식을 격자처럼 엮어서 하나로 통합해놓은” 상태다.

우주선은 수많은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통해 로봇의사를 보내고, 새 행성에서의 새로운 만남을 주선하곤 하지만 그의 예민하고 집요한 의식에 부딪혀 번번이 실패하곤 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제목을 살짝 고쳐서 이야기 하자면 안드로이드(우주선)는 끊임없이 전기양의 꿈을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그는 양의 꿈을 원했다.

 

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겠군.
나를 다시 영원히 냉동시켜 달라고 하자.
난 죄의식에 가득 찬 인간,
파괴할 줄밖에 모르는 인간이니까.

 

우주선은 결국 그의 아내를 호출하여 그가 새 행성에서 옛 아내를 다시 만나서 자신의 심적 상처를 치료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한다. 그는 수없이 반복되었던 가상현실과 비슷한 형태로 새 행성에 도착해서 아내를 만나고 아내는 그를 도와주기 위해 진심을 다 한다.

하지만 가상현실을 통해 그것이 꿈속의 일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각성했던 그로서는 마틴이 새 행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음에 안도하면서도 그녀가 현실의 존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의 ‘냉동여행’도 그렇게 애매하게 끝을 맺는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는 그다지 길지도 않은 이 단편에 관해서 생각하곤 했다. 하지만 나 역시 빅터 케밍스처럼 정확한 해답을 알 수는 없다. 그는 진정 깨어나서 아내 마틴을 만난 것일까… 아니면 그 마지막 희망마저도 가짜이며, 그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한 것일까…

마치 장주의 호접몽처럼 혼돈이 일어나는 순간이 온 것이고, 딕 자신의 다른 단편들에서처럼 자신이 과연 자기 자신인지, 현재가 그대로 현실인지에 대해 극심한 혼란에 부딪히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한 인간의 모조품임을 결코 알아채지 못한 임포스터의 정교한 로봇처럼 꿈임을 알지 못하는 꿈이 무한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삶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블랙홀의 내부가 궁금하다면 우리 주변을 살펴보면 된다던 어떤 이의 한줄처럼.

 

단편의 마지막은 어쩐지 그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그림을 그린 작가의 친필사인이 들어 있는 포스터가 현실 속에서 온전히 보존되어 있었는지 아니면 찢어졌는지가 열쇠인데 그는 끝까지 모호한 태도를 유지해서 혼란스럽게 한다. ‘플레이보이’를 통해 <냉동여행>이란 제목으로 발표된 이 작품이 자신의 단편집에 실렸을 때의 제목은 <조만간 나는 도착하기를 희망한다>이라고 한다. 나도 진심으로 그랬으면 싶었다.

그리고 여기 이 단편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대화가 있다. 참으로 다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부분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짧고도 길고 단순하면서도 복잡미묘한 이야기의 모든 것이다.
케밍스의 고통은 끔찍스럽지만 도착지에 먼저 와서 그를 기다리는 마틴의 말은 나를 부럽게 한다.

 

“…이것이 현실이면 좋을 텐데 말이오.”
마틴이 말했다.
“전 이 일이 당신에게 현실이 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앉아 있겠어요.”

i hope i shall arrive soon……

 

 

/2006. 3. 18.

 

비밀의 기적

금강경에 관한 어느 책에서 승조 스님의 일화를 보았다. 환속하여 재상이 되기를 바라는 황제의 요청을 거부한 까닭에 죽음을 당하게 된 그는 마지막 칠일 동안 팔만대장경의 핵심을 궤뚫은 <보장론>을 저술했다고 한다.

스님의 이야기는 자연스레 보르헤스를 생각나게 했다. <허구들>에 실린 단편  ‘비밀의 기적’이 그랬다. 사형을 기다리는 8시 44분에서 9시 사이, 그리고 격발의 순간에서부터 총알이 자신을 뚫고 지나가기까지의 찰나를 1년의 시간으로 연장시키며 자로미르 홀라딕은 필생의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9시 2분, 창작의 희열 속에 그는 죽었다.

그리고 또다른 이야기들도 있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과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에 관한 회상이라고나 할까… 스파이크 리의 <25시>에는 수감을 앞둔 주인공 몬티의 행복한 미래의 삶이 꿈처럼 이어진다. 가석방을 마치고 7년의 형기를 채우기 위해 교도소로 가는 길,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 속에서 그는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한다.

아버지의 계획과 선택을 따라 교도소로 가지 않고 달아나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골 마을에 자리를 잡고 옛 사랑을 다시 만나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이 교도소로 가는 길에 꾸었던 짧은 꿈이었다. 그는 반성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고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환영 속에서 잠깐 현실을 잊었을 뿐이다.

 

25

 

또 필립 K.딕의 단편 ‘냉동여행’은 반대로 크고 작은 과거의 아픈 기억들에 사로잡혀 무한한 고초를 겪는 주인공을 다루고 있다. 광속 여행의 와중에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광년의 거리와 시간을 과거의 잘못과 고통들을 반추하며 보내는 것이다.

 

playboy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인생 또한 마찬가지로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비밀의 기적과 고통의 무한반복이라는 극단 사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지점들이 있다. 내가 알거나 들었거나 전혀 모르는 비슷한 수많은 사연들이 거기 있을 것이다. 焉敢生心 , 홀라딕이나 승조 스님의 이야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 게으름과 무기력을 물리친다면 소소한 몇 페이지 일기는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비밀의 기적’의 서두에 적절하게 인용된 코란의 구절 역시 이들 모든 이야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리고 신은 그를 100년 동안 죽게 한 다음
그를 살려냈고,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ㅡ 너는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는가?
ㅡ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하루 또는 하루의 일부. 또는 지상에서의 매미의 일주일 같은 삶의 길이는 찰나에서 거의 무한에 이르기까지 다른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승조 스님이 남긴 열반송을 사족처럼 여기 덧붙여 본다.

 

四大元無主  사대는 원래 주인이 없고
五陰本來空  다섯 가지는 본래부터 비어 있었네
將頭臨白刀  장차 흰 칼날이 내 목을 자를 것이나
猶似斬春風  마치 봄바람을 베는 일과 같을 뿐이네

(‘사대’는 세상 만물을 이루고 있는 흙, 물, 불, 바람의 4원소를 의미하며 ‘다섯 가지’는 생멸과 변화의 모든 것을 구성하는 ‘색수상행식 色受想行識’을 상징하며 그 각각은 물질, 감각, 지각, 마음의 작용, 마음을 의미한다.)

 

 

mister.yⓒmisterycase.com, 2009.

멜랑콜리의 묘약

: 약을 잃고 약을 찾다

 

그들은 춤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을 축하해야 할지도 모르는 채 그들은 춤을 추었다.
ㅡ 멜랑콜리의 묘약, 레이 브래드베리

 

그 책은 어느 약장에 꽂혀 있었을까요. 밤 늦도록 멜랑콜리의 묘약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이 책엔 발이 달렸는지 며칠 잊고 지내면 벌써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찾을 길이 없곤 합니다. 아니면 “마개뽑힌 가슴”에서 약이 다 달아나버린 것이었을까요.
약이 없어 약이 올랐습니다. 약이 보이질 않아 어리석게 약발을 받았습니다. 기억의 모랫벌에 새겨진 그림들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밤마다 꿈마다 굉음을 울리며 나를 쓰러트리던 화룡+의 정체를 몰랐습니다.
계절을 잃어버린 장롱속의 옷에서 희미한 약냄새가 풍겨 나왔습니다. 거의 부스러질 것 같은 옛 가요책에서 약냄새가 풍겼습니다. 김수영 시집에 그어진 밑줄과 비닐 커버 사이에 끼워져 있는 이름도 모를 배우의 젊은 날 사진에서 약냄새가 풍겼습니다. 어느 밥집에서 가져온 성냥갑이나 지금은 도수가 맞지 않은 촌스런 안경, “리듬 파래이드 제8집” <헤졌을때와 만났을때>라고 적힌 낡은 ‘레코-드’의 노래보다 더한 잡음 마다에도 흐릿하니 냄새가 남아 있습니다.
읽거나 읽지 않거나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있으나 낡은 문고판 책 하나 없으면 마음이 불안해졌습니다. 매번 책을 잃어버릴 때마다 어쩌면 그 책 다시는 찾지 못하리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잃어버린 것이라면 그 약 구해다 주겠노라는 말이 고맙고도 미안하였습니다. 멜랑콜리의 묘약. 백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알 것만 같은 가슴뼈 사이에 꽂혀 있는 것일까요.
어느 노곤한 잠결에 꿈결에 놓쳐버린 멜랑콜리의 묘약. 침대와 탁자 사이 보이지 않는 구석에 소리없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것이 쏟아지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습니다. 캐밀리어+가 얻은 것을 나는 잃었을까요. 멜랑콜리의 묘약이 내 눈 앞에 펼쳐져 있는데 딸기빛 유리창+ 너머로 아득히 먼 별을 바라봅니다. 그 아련한 약냄새는 어디로부터 이 밤을 향해 쏟아지고 있을까요. 나는 약을 잃고 또 약을 찾아 기뻐합니다. 그 어리석음이 기뻐합니다.

 

2001. 11. 8.

 

+<멜랑콜리의 묘약>에 수록된 단편 이름.
+ <멜랑콜리의 묘약>의 주인공 이름.
+<멜랑콜리의 묘약>에 수록된 단편 이름.

경운기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 Pun에 관한 짧은 Pun

 

어떤 제한적인 의미에서 韻이라는 것은 일종의 고품격화된 pun이다. 많은 시인들이 제 나름대로 마음 속에 운을 띄워 보지만 그것을 제대로 부드럽게 풀어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약간의 어폐가 있다고 하더라도 韻이 좋다면 그것은 아주 멋진 표현이 되거나 적어도 무난한 흐름은 된다.
나의 경우, 시를 쓰는데 있어 (별스레 그런 걸 찾지도 않았다만) 그다지 품격이 없는데다 韻이 좋지 못하여 운보다는 내 말이 가는대로 달리고 휘파람 불며 떠돌다 되는대로 당근인양 pun을 사용했을 뿐이다. 그게 갈 곳 없는 내 글의 운명이거니 하면서…

우리말의 경우 한자어로 표현되는 단어들이 부지기수인 관계로 이래저래 동음이의어 homonym가 무진장이고 따라서 그것은 나의 나쁜 운을 위한 보고다. 때로 그것은 운을 시험하는 즉석복권 같은 것이기도 하지만 대개는 상당한 집중을 필요로 한다. 꿈 잘꾸었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산신령이 나타나 한 수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다.
韻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적절한 위치에 기발한 pun이 사용된다면 약간의 논리없음은 pun에 의해 어느 정도 무마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때로 주제를 희석시키고 경박한 것으로 만드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나는 가능한 한 그것이 Hors d’oeuvre나 일종의 양념 이상의 것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다시 말해서 pun을 제거한 상태에서도 그 의미가 왜곡되지 않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가능한 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천박함이 극복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스스로에 관한 부끄러움을 조금은 덜어주는 대목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그러한 문장을 만들어내는 즐거움이 나만의 것이 아니길 바랄 때가 많다.

하지만 나 또한 오래도록 시를 쓰면서 行韻의 날을 항상 기다려 왔다. 내 韻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물처럼 바람처럼 또는 소월처럼 운이 흐르기를. 그래서 가끔은 운우지정의 마음을 간직한 채 뜬 구름 잡는 소릴 헤적여 본다. 구운몽의 꿈을 열어 젖힌다. “I see the sky, oh, I see the cloud, everything is clear in my heart ..”
하늘에 구름이 몇 조각인지 흐름과 멈춤, 그들의 만남과 헤어짐에도 운이 있는 것인지… 산문 밖을 좀 나다녀야 운문을 열 수 있는 것인지…
그러나 조지 오웰의 1984년에 나오는 韻作機처럼 잘 돌아가지 않는 나의 고물 耕韻機는 늘 삑사리만 내고 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시인 사임도 韻이 나빠 사임하게 되고 “애정성”에 붙들려 가지 않았던가.
행운유수라고 어쩌다 가끔은 내게도 韻秀 좋은 날이 있어 기쁘다. 韻이 따라 준다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하루, 그런 순간을 늘 기다린다. 따라서 그런 때가 있다면 그것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 될 것이다. Good luck!!!

나의 고물 耕韻機, 아무리 힘주어 돌려도
요란한 빈 소리에 매캐한 연기 뿐
척박한 이내 마음 언제나 발동 걸려
절로 운을 읊어 보려나.
마음 밭 갈고 닦아 구름 가듯 물 흐르듯
경운기 타고 떠나 보려나.

 

/2001. 3. 28.

 

PS.

<1984년>에서 사임의 잘못은 운을 맞추기가 너무 어려워 ‘god’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존 레논은 “God is a concept by which we measure our pain.”이라 했던가.^^;;
Pun이란… Donovan의 노랠 좀 바꾸어서 말한다면 Pun is a very magic fellow쯤 될 것이고, Beach Boys의 노래 제목을 고친다면 Pun, Pun, Pun이 surfing처럼 유쾌한 것이 될 테다.
그것은 또한 hippology여서 pun이 몰려 다니는 hippocampus는 나의 꿈을 일깨워 준다. 그리하여 포르노 왕국이 아닌 新애마 천국으로 가는 나는 hippophille이다. 그런 면에서 이작자는 여전히 餘福이 많아 여성운은 좋은 것 같은데 남성운이 별로 없는 것 아닌지 몰라. 韻도 없는 것이 말만 많은 이작자, 정말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좀 씩씩거리며 씩씩하게 살자!!!

책이 작자에게

: 작자의 지은이에 관한 단상

 

그때 나는 한 살이었다
그때도 나는 奇蹟이었다
계속 판올림 하며 ○○년의 새해에도 나는.
//이작자

 

휴일의 한낮을 포터블 씨디 플레이어와 함께 보내었다. 마음먹은 김에 비좁은 하드디스크에 겨우 씨디 한장 복사할 공간을 만들어 ‘Samba da Bencao’을 녹음한 것이다. 그리고 작자의 지은이(^^)와 더불어 한참을 감상했다.

지은이는 그 가운데서도 ‘Lungomare’나 ‘Summertime’의 기타 연주, 체 게바라를 기리는 노래와 잉쎈싸떼쥐의 젠틀한 목소리, ‘봉 지아 뜨리쉬떼자'(마치 ‘백치 아다다’처럼 비장미 넘치는 이 노래는 가요무대에 나와도 될 것 같다) 등을 특히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 멋진 곡들 중에서도 ‘쌈바 다 벤쏭’의 가치를 알아봤으니 이작자가 도리어 감격하였다. 아무래도 그 노래에 남다른 멋과 품위가 있다고 한다.

작자의 지은이 ㅡ 작자 스스로야 늘 부끄럽고 한심하기 짝이 없는 하찮은 인간일 뿐이지만 그 저작권의 반을 갖고 있는 지은이께서는 늘 그 점에 관해서 당당하시다. 나머지 절반의 저작권자보다는 틀림없이 한참 좋은 점수일 것이다. 하찮은 작자이지만 그 당당함을 증명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간절히 바란다. 오늘은 더욱 그런 심정이 된다.

이작자라는 이름의 옆편소설(?)이 세상에 나온지 어언 XX년, 여전히 하찮은 소설이지만 그것은 작자 자신이 개작에 게을렀던 탓, 원작은 늘 훌륭한 것이었다. 절반의 지은이는 책을 찍고서 또 얼마나 기뻐했는지 그 사연은 때로 이작자를 부끄럽게 한다.

제 1권 발행일(누님의 생일^^)을 깜빡 넘겨버려 뒤늦게 케일 라이브 씨디를 카피하며, 그리고 이작자라는 작자의 초판 발행일(?)을 앞두고 작자의 공동집필자 가운데 한 사람에 관해 잠시 생각하였다.

부디 책이 값어치 있는 것이 되고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뿐이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작자의 지은이에게는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정상적인 작자(이작자 아님^^)라면 세상 모든 이가 그러할 것이다. 침해될 수 없는 작자에 관한 저작권, 저작권이여 영원히!

 

제 3권의 스토리를 말하지 않되 언제나 함께 기억하며
책이 작자에게, 이작자가 저작자에게

오늘의 머리까지도 지은이의 손을 빌려 깎은 작자 쓰다.

 

/2003. 7. 27.

 

+
사진 : Old Mister.y Book vol. 2 & 3
+
사진 뒷편의 병풍도 ‘지은이’의 작품이다. 어쩌면 아직도 시골집에 남아 있을 듯.
국민학교 중학교 시절까지 그 병풍의 뒷면을 제사때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 다하여라… 그런 시조들이 세로로 인쇄되어 있었던.

 

Don’t you hear my call, though you’re many years away
Don’t you hear me calling you? (39 / Queen)

플래쉬 백 : 回光

해가 몰라보게 짧아졌습니다. 좀 늦은 시간에 산엘 갔더니 약수터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렸습니다. 큼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별이 새삼스러웠지요. 자그마한 손전등 하나를 갖고 갔는데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측백나무 빼곡한 길목 너머 어둠 속 옛길을 따라 返照의 시간이 왔습니다.

자전거엔 바퀴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전조등이 달려 있었고 캄캄한 논길 다닐 적에는 ㄱ자로 꺾인 국방색 손전등이 요긴했었지요. 큼지막한 6V 전지가 들어가는 묵직한 플래쉬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도둑은 들키지 않기 위해 침침한 손전등을 갖고 다녀야 했고, 늦은 저녁 도랑길에 플래쉬라도 비추면면 목욕하던 아낙네들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별이었던지 미지의 비행물체였던지 강둑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둥글고 또렷한 빛의 궤적도 기억합니다.

시골의 여름밤에 플래쉬 갖고 놀면 그보다 신나는 일도 별로 없었지요. 새 전지를 넣은 손전등을 하늘로 비추면 밤하늘에 뽀얗고도 환한 선이 그어졌습니다. 어둠을 뚫고 구름을 넘어 어느 먼 먼 별에서 그 빛을 끝내 발견하리라는 확신에 가까웠던 믿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플래쉬 자체가 영사기였고 위태로운 담벼락에서 밤하늘까지가 꿈의 스크린이 되었지요. 우리는 저마다 손전등을 들고 불나방처럼 흥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온통 흩뿌려진 별들에까지 닿을 듯한 그 아찔한 환희의 느낌이라니요. 생각하면 가끔은 발을 헛디딘 듯 떨어지는 느낌이고, 잠깐씩은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각성의 충격이 오기도 합니다.

한참 닳아버린 전지 같은 세월 너머 측백나무 우거진 길을 걷다 그 우유빛 빛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얼굴들도 보이고 발자국 소리며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어떤 목소리는 귓전에서 나를 부르고 어떤 목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재촉을 합니다. 누군가 어둠 저 너머에서 플래쉬를 켰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떤 별에서도 응답받지 못한 그 빛이 세월을 돌고 돌아 내 캄캄한 하늘을 밝히는 몇몇 별이 되었습니다.

 

2008. 8. 30. 토.

어 토이 인 디 애틱

노래 속의 이름은 ‘리자’였고 이야기 속의 이름은 ‘리사’였다. 그게 같은 철자의 다른 발음인지 다른 이름인지는 잘 모르지만 ‘Lisa’라는 이름을 들으면 늘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사실 그 얼굴이란 내가 그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는 이야기 속, 또는 상상 속의 얼굴이다. 그녀는 대단한 시계 장인이 만든 ‘시계’였고 리사는 이름이었다. 할아버지가 몇시냐고 물으면 그때마다 또박또박 대답을 해주던.

어떤 청년이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녀의 ‘제작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그녀 가슴에서 박동 대신 들려오는 시계바늘 소리를 듣고 달아났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 늘 미안하였고 마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나였던 것처럼 약간의 죄스러움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 이후에 일어날 어떤 일에 대한,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읽던 시점에서 말한다면 일종의 ‘미래의 기억’, 또는 ‘미래에 일어난(나는 이것을 과거형으로 썼다) 잘못에 관한 선험적인 죄의식’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저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이라면 더 합리적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리사의 심장이 짹각대듯이 내 가슴엔 감당하지 못할 버거움이 쿵쾅대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체스터튼의 이야기에서처럼 나뭇잎이 되어 숲에 묻혔고 먼지 가득한 다락방에서 삭아가는 장난감이 되었고 수많은 책이 있는 도서관에서 전혀 눈에 뜨일 없는 볼품없는 이야기책이 되었다. Sad Lisa, 하지만 슬픈 것은 리자가 아니라 와전된 한 줄처럼……

“Tell me what’s making you sad, Li?”

 

 

Sad Lisa / Marianne Faithfull

믿어 의심치 않는 어떤 미래에 대한 사소한 기록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은 벚꽃나무로 무성하다. 이제는 2차선 도로를 마주하고 선 나무들이 봄날이면 터널을 이룰 정도로 자랐으니 어느 계절이나 여기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그런 거리다. 가을은 가을대로 단출한 운치가 있고, 봄날에는 어떤 벚꽃길보다도 소박하고 요란스럽지 않아서 좋다. 요즘 같은 계절에는 늘 “여름날의 푸른 잎새들”이란 옛 노래를 절로 떠올리게 하는 그런 길이다.

아파트의 제일 중심에는 그리 크지 않은 2층짜리 상가 건물이 있고, 그곳엔 이발소와 과일가게와 슈퍼와 치킨집, 그리고 식당이 촘촘히 들어서 있다. 낡고 조용한 이 곳에서 유일하게 조금은 붐비는 곳이 바로 여기다. 상가라고 해도 큰 건물도 아니고 아직은 주차 문제가 그리 심각하지는 않아서 이발하러 오는 사람들도 가끔은 상가 앞에 주차를 하기도 한다.

그 중에서도 중심은 아무래도 슈퍼다. 하루의 절반 가량을 보내며 먹고 쉬고 자는 이 곳에 슈퍼가 없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일년에 불과 몇 번을 이용한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곳이 바로 거기일 것이다. 하지만 말이 슈퍼지 이발용 의자가 둘 놓여 있는 이발소나 바로 곁의 과일가게의 두 배 정도 되는 점포일 뿐이다.
그 슈퍼에는 아파트 단지 아래쪽의 술집거리로 술을 배달하는데 사용하는 자전거 하나가 슈퍼가 열려 있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세워져 있다.

말했다시피 차량 통행이 적어서인지 차의 통행에 큰 지장이 없는 탓인지 자전거는 길 방향으로 세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핸들과 바퀴의 방향이 슈퍼의 정문과 일직선으로 해서 세워져 있다. 마치 비상상황을 위해 대기중인 순찰차처럼 주인아저씨의 변함없는 머리 스타일과 그 길이처럼 365일 어느 날이나 결코 변함없이 그렇게이다.
하지만 어쩌다 운전을 하면 습관처럼 나는 움직이게 된다.

과속방지턱도 없는 그곳 ― 슈퍼 앞을 지날 적이면 어쩔 수 없이 속도를 줄이게끔 되어 있는데, 왕복 2차선의 도로에서 자전거를 피해서 가려면 당연히 맞은편 차선을 절반 가량은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지 큰 불편도 아니고, 통행이 크게 지장을 받을 정도도 아니니까 아주 잠깐 핸들을 왼편으로 돌려주면 그만일 뿐이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그런 사소한 동작을 그곳을 지나가는 누군가가 하루에도 수백 수천 번씩 반복하는 것일 뿐이다. 일년에 수만 번 또는 수십만 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전거와 관련하여, 아직은 겪어보지 못한 어떤 세계에 관해 감히 말할 수 있다. 만약 부지런하고 마음좋은 주인 아저씨가 스스로 자전거를 90도 돌려서(정확한 90도는 아니어도 근사값은 되어야 한다!) 세워두는 어떤 날이 오고, 그 이후 그렇게 지속된다면 아마도 우리는 다른 이방의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하는, 또는 누구보다도 우리 스스로가 가장 그리는 같고도 전혀 다른 세상에 속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그곳으로 가기 위한 유사하거나 전혀 다른 수많은 방법들에 관해 비슷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 어떠한 것도 정확히 실행된 적은 없다.

 

/2007. 7. 20

 

 

+
이 글을 쓴 몇해 뒤 슈퍼는 다른 사람에게 인수되었다. 새로운 주인은 더 이상 자전거 배달을 하지 않게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많은 기회 가운데 하나는 사라져버렸다. 그런 ‘기회’는 수없이 많이 있으나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사람은 드물다. 지금은 내가 다니는 육교 앞에 오토바이 한 대가 서 있는데 자전거보다 훨씬 폭력적인(?) 방식으로 오가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있다.

 

+
추신처럼 달아뒀던 오토바이는 이제 더 이상 볼 수 없다. 왜냐면 그 오토바이가 있는 쪽으로 나 있던 큰 육교 한 가지는 최근에 있었던 야구장 철거와 함께 잘려나가버렸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꿈이 사라졌지만 꿈은 너무도 많다. 그것을 깨트리는 현실이 더 많은 것이 조금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2018. 10. 2.

 

불멸

나무 끝의 부용화
산 속에서 붉은 봉오릴 터뜨렸네
개울가 집이라 적막하여 인적 없는데
어지러이 피었다간 또 지는구나
/신이오, 왕유
木末芙蓉花  목발부용화
山中發紅萼  산중발홍악
澗戶寂無人  간호적무인
紛紛開且落  분분개차락
/辛夷塢, 王維

 

그 이름을 기억하거나 외우고 간직하는 것만이 영속성을 보증하는 틀림없는 방법일까. 만약 그러하다면 그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구구절절 옳은 말 ㅡ 사람들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시 한 구절에 온갖 의미를 부여하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럴 자격이 없을 때도 있고, 타고난 부끄러움 탓일 수도 있고, 어떤 가능한 방법도 없는 경우도 있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꽃이 피어난들 하나 같은 꽃이 없으며 어제의 그 꽃도 물론 아니다. 심지어 말로 꽃을 피움에야…

문득 3년여 전의 편지들을 찾아 hotmail에 들렀다가 나는 그 계정이 비워져버린 것을 발견하였다.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탓이다. 나는 기억만을 복구하는 것이 싫어 애써 그것을 읽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j.j. cale의 어느 노래 가사에 관한 번역과 닭죽 요리에 관한 짧은 언급을 기억한다. 연꼿 속에서 나비가 날아오르는 보색대비의 그림과 옷걸이 속에 펼쳐진 영상들, 그리고 모질게도 힘들었던 어느 하루에 관한 푸념도 기억한다.
나는 상심하고 심란한 마음이 되어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고 머리맡에 있던 보르헤스의 책을 뒤적이며 그의 강연에 귀를 기울였다. <델리아 엘레나 산 마르꼬>에서 그리고 <알렙>에서 내 마음 같은 글을 이미 보았기에 불멸에 관한 그의 간결한 생각과 겸손함이 약간의 위로라도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였다.

위대한 영혼의 불멸을 믿는 것과 똑같이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들도 그러하다고 말하는 그의 강의는 철학적이기도 하거니와 사적이기도 하고 또 심지어는 정치적 평등에까지 이르는 함축적인 이야기였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다. 인도철학에서 말하는 아카사 기록처럼 우주적인 규모의 ‘백업 장치’이건 혹은 내 마음 속의 ‘운항기록계’이건 혹은 보르헤스의 <과학에 대한 열정>에서처럼 ‘그 자체’이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그 자체가 어떻게 황폐해졌는지 다들 알고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대체 왜 존재의 증명을 요구해야 한단 말인가. 내 안에는 당신에 관한 보다 명백한 증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보르헤스를 뒤적였다고 해서 전적으로 마음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거창한 깨달음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약간의 ‘척’이라도 할 수는 있다. 지금은 그것만이라도 필요하고 그것으로라도 족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내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내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2003. 10. 17.
+<불멸>, 보르헤스 강연집

 

變心 : Sad Lisa

로버트 블록

 

 

“여섯시에요, 할아버지.”

세상에 이런 아름다운 시계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말썽장이 피노키오가 시계 소녀로 바뀐 것 같습니다. 피노키오의 할아버지같은 솜씨 좋은 시계공이 만든 필생의 ‘예술품’이 그녀였습니다.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 짧고도 동화같은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의 반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래된 시계를 고치러 울리치 클레임 시계점에 들렀다 우연히 알게 된 리사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두 사람의 결혼을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리사 역시 할아버지의 편이었기에 주인공은 결국 그들을 떠납니다.

그렇지만 마음을 속일 수는 없는 법, 리사는 병(물론 가슴에 병이 났겠지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밤낮 리사를 간호하던 할아버지는 그녀의 병을 고치고는 탈진해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오래도록 어둠 속에 혼자 버려져 있던 리사를 찾아 끌어안은 나는 깊은 연민과 후회 속에 그녀의 가슴에서 째깍대는 시계소리를 들었습니다.

리사. 착하고 순결한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시계였습니다. 리사의 가슴에서 들리는 시계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그였습니다.

<싸이코>를 쓴 로버트 블록이기 때문일까요. 공포소설이 가지는 반전의 매력에 집착한 작가의 조금은 냉정한 선택이라 해야 할까요… 그를 탓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지만 도망치는 나는 너무 무정하였습니다.

만약 내게 그런 일이 있었다면, 또는 내가 글을 썼다면 ― 그것이 좀 시시하고 유치한 끝맺음이라고 해도 ― 나는 그녀를 데리고 나왔겠습니다.

현실 속에서…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처럼 도망쳤을 것이고, 어쩌면 많은 리사가 지금 이 순간 어두운 방안에 쓰러져 있겠지요. 그걸 생각하면 더욱 그녀의 손을 잡아야 했습니다.

이 단편을 읽노라면 자연스레 Cat Stevens의 Sad Lisa가 떠오릅니다. 물방울 소리같은 피아노 아르페지오에 이어지는 애처로운 멜로디입니다.

 

Sad Lisa (by Cat Stevens)

 

She hangs her head and cries in my shirt
She must be hurt very badly
Tell me what’s making you sadly
Open your door don’t hide in the dark
You’re lost in the dark, You can trust me
Cause you know that’s how it must be
Lisa, Lisa, sad Lisa, Lisa

Her eyes like windows, tricklin’ rain
Upon her pain, getting deeper
Though my love wants to relive her
She walks alone from wall to wall
Lost in her hall she can’t hear me
Though I know she likes to be near me
Lisa, Lisa, sad Lisa, Lisa

She sits in a corner by the door
There must be more I can tell her
If she really wants me to help her
I’ll do what I can to show her the way
And maybe one day I will free her
Though I know no one can see her
Lisa, Lisa, sad Lisa, Lisa

 

하지만 결코 용서할 수 없는 ‘나’입니다. 마네킹 인형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을 그린 존 콜리어의 단편 <특별배달>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마네킹 ― 전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이었습니다 ― 때문에 직장에서 쫓겨날 신세가 된 앨버트 베이커는 ‘그녀를 훔쳐서’ 여기 저기 도망다닙니다. 그 사이 말못할 고초를 겪지만 오직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그녀가 망가지지 않게 지켜준다는 데서 삶의 기쁨과 행복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녀와의 사랑 때문에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지만 그는 그녀와 영영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쇼윈도 너머의 마네킹을 사랑하는 남자에 관한 페리 코모의 옛 스윙 넘버 ‘글렌도라’가 비슷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차라리 <같은 시간 같은 장소>의 주인공처럼 ‘괴물과의 결혼’이었다면 그의 도망을 이해할 수는 있습니다. 그 끔찍한 결혼식장의 풍경을 목격하고 초라하고 혐오스런 집으로 돌아와 안도하는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 ‘나’는 정말 비겁한 인간이었습니다. 리사의 가슴은 기계처럼 세월을 지켰지만 ‘변심’은 그녀가 아니라 그의 것이었지요.

리사와 마네킹. <특별배달>의 소심한 주인공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둘을 바꿀 수 있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나는 용기없는 인간이지만 만약 내가 리사를 만나 사랑했다면 평생토록 그녀와 행복하였겠습니다. 기꺼이 시계공이 되어 평생을 함께 하며 리사를 돌보았을 것입니다. for Happy Lisa…

“리사, 지금 몇시지?”
그녀의 행복한 가슴이 째깍째깍 뛰고 있습니다.

 

 

/1999. 7. 7.

 

 

 

일러바치기 심장+

 

귀를 대어보세요.
그녀의 가슴이 째깍거립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들리는 법
한 시간이 한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다들 그러하듯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그곳
그냥 그대로 얼어붙은 초점입니다.
그러던 내 가슴에 손 얹어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귀를 대어보세요.
다들 그러하듯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무지 이길 길 없어 멈출 법도 했건만
한 번쯤 참지 못해 달아날 법도 했건만
찰나를 세월처럼 지켰습니다.

 

1999. 7. 6.

 

 

+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The Tell-tale Heart>에서 따온 제목.
이 시는 <변심>에 관한 글보다 하루 전에 썼는데 비슷한 내용을 다른 방식으로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