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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그리스

황홀이라더니,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것이 황홀이라더니
어떤 불편함, 돌이킬 수 없는 잘못
변명할 길 없는 상처
내 마음이 토해낸 부유물이
소금도 맞고 햇살도 받고 이리저리 돌고 또 돌아
화석처럼 굳었는데
빛도 아니고
보향도 아니고
어떤 불편함, 돌이킬 수 없는 잘못
변명할 길 없는 상처
어찌 못할 번민의 덩어리가 되어
이루어진 심신
역한 냄새 애써 감춰가며
지켜야 할 향도 없이
떼밀려 갈 해변도 기꺼이 앗아갈 손길도
녹여줄 숨결도 없이
어슴푸레하고 흐릿한 것이
정처도 없이

 

 

/2016. 8. 8.
/2018. 10. 17.

 

 

 

제목을 생각했으나 붙이지 아니함.

다만 홀로 허덕였을 뿐,
수없이 많은 말을 건넸으나 답은 없었다
땀과 숨이 뒤섞일 때
숨과 숨이 거칠게 맞닥뜨릴 때
오늘도 봉긋한 그 가슴에 오르다

 

/2006. 1. 28.

 

 

++
제목을 사용했다면 좀 썰렁했을 것이다.
영상이 상상을 제약하듯, 제목이 많은 것을 가두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붙이지 않은 제목 때문에 붙이지 않은 다른 제목이 붙었다.
마음대로 생각하기 바란다./2016. 7. 25.

 

 

+
꽤 오래 전이다……
굳이 제목을 붙이지 않은데는 당연히 저의가 있다.
거의 오해하고(5할) 아주 조금 이해하길(2할) 바라며.
자연스레 상상하는 그 무엇일 수도 있지만
이 글은 역시나 두 개의 트랙을 지니고 있다.
나머지 3할이란, 이해가 오해이거나 오해가 이해일 수도 있다는 것,
사실은 나도 뭐라고 단정짓지 못하겠다는 것./2016. 5. 22.

 

 

아무도 모르는 소식

별이 사라진 것도 꿋꿋이 견뎌온 건물이 허물어진 것도 아니다. 1년이나 버텼을까 모르겠다. 육교 건너편 인적 드문 길, 점포 하나 문 닫은 지 몇 달이 지났는데 간판은 여전히 불을 밝히고 있다. 한때는 희망이었고 한때는 버겁기에 더 기대했던 빛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벌써 퇴각해버린 꿈일 뿐인데 자동 타이머가 붙어 있는 간판이 그 길을 훤하니 비추고 있다. 텅 빈 실내에 휑한 빛을 던지고 있다. 또 다른 가녀린 꿈이 자리를 채울 때까지 내 안에도 비슷한 빛이 스러졌다 또 켜지곤 한다는 것, 어쩌면 모두가 알고 있는 소식일 테고 별이 사라진다 한들 그 길 오고 가는 이들도 그럴 것이다.

 
/2016. 2. 20.

三行詩

그 목줄 누가 내어놓았는지

강아지 한 마리 위태로이 찻길 따라 걷는다

바쁠 것 없는 걸음 괜스레 재촉하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친다

 

(알지 못하는 셋이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 가운데 二人이 느낀 것을
어느 一人이 쓰다.)

일러바치기 심장

귀를 대어보세요.

그녀의 가슴이 째깍거립니다.

눈을 감으면 더 잘 들리는 법

한 시간이 한순간처럼 지나갑니다.

다들 그러하듯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그곳

그냥 그대로 얼어붙은 초점입니다.

그러던 내 가슴에 손 얹어보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귀를 대어보세요.

다들 그러하듯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도무지 이길 길 없어 멈출 법도 했건만

한 번쯤 참지 못해 달아날 법도 했건만

찰나를 세월처럼 지켰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 <The Tell-tale Heart>

다림질하는 여인

그녀의 허리 아래에는 무엇인가 있는 것 같아 구겨진 삶을 힘없는 어깨로 펴보려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아 늘어트린 그녀의 머리칼처럼 기운 없는 하루가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만 같아
청색시대는 이미 저물어버렸을 그녀, 그녀에게 준비된 새로운 캔버스가 있다면 믿기 힘든 추상같은 현실일 것이야 사연 없어 사연 많은 고된 하루, 남달라서 할말 없을 지루한 삶이 끝이 없을 것만 같아
그녀의 다림판엔 아무래도 펴기 힘든 주름만 널려 있을지 몰라 그녀의 어두운 얼굴 자세히 들여다보면 눈가에 잔주름 가득할지도 몰라 그녀의 다림판엔 이미 다 태워버린, 너무 보드라운 그리움만 널브러져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녀의 허리 아래에는 무엇인가 환한 빛이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배경이 그렇게 어두운 것, 그녀의 얼굴이 그렇게 어두운 것, 그토록 고개 숙인 것은 오직 그 때문임을, 그 때문임을
믿고
또 믿고
또 믿어야 할 것 같아

그릴 연 꽃을 찾아

당시에 부쳐

 

장강이 심산으로 흐른다던가
달빛이 불야성을 흐린다던가
한시 두시 옛 시절로 밤 깊어가니
그때 당시 분간할 마음 마냥 저어하네
봄날 다 가고서야 매화 반겨 핀다던가
아쉬움이 임을 이 밤 모신다던가
한시 두시 읊조리다 눈 부빌 때면
미련한 심사인양 꿈결로 저어가네
얼어붙은 강을 따라 새겨둔 마음
이 밤에사 다 풀리어 소식 당도했던가
저 하늘에 걸리운 그릴 연 줄을 타고
내 마음도 따라 훨훨 떠돌아 간다한데
길 없음도 길이라 끊어져 간다던가
맺을 연 마음길로 이어져 간다던가

눈 빛

눈 씻고 다녀도 눈 만나기 어려운 곳
앞에 두고 눈 그리라 하십니다
마저 치우지도 못한 잠자리
눈부신 어지러움 아직 남아 있는데
제 눈의 잘못일랑 젖혀 두시고
눈 온 아침 애꿎은 풍경더러
구차하다 하십니다
북방에 있는 어여쁜 사람+
한 사람의 빛깔이 세상 기울인다더니+
깜빡이던 간밤에는
눈빛도 그윽하였습니다

 

 

+이연년 李延年의 시 한 구절.
北方有佳人 絶世而獨立 一顧傾人城 再顧傾人國 寧不知傾城與傾國 佳人難再得.
+이연년의 시에서 유래한 경국지색(傾國之色)을
작자 멋대로 ‘詩義適切’하게 해석한 것임.

착한 애인 찾기

*어떤 시/집에 부쳐

 

선생님, 그런데요 착한 애인이 없네요. 번거로우시겠지만 잘생기고 좀 모자란 도움이 필요한 남자니까 한번 봐주시구려. 아무리 뒤져봐도 착한 애인은 없다네가 없어요. 어중간한 늦여름 날씨에 도서관 안쪽 귀퉁이에 십분 너머를 쪼그리고 앉아 땀 범벅이 되도록 찾아 헤맸으나 그것만은 찾지 못했다오. 수십년 동안 보고 겪은 것 또한 비슷했다오. 책 집어들면 원하는 페이지 척척 펼쳐주는 도서관의 천사는 내게 없다오. 하지만 선생님, 한번 움직이시니 그 애인 마술처럼 금세 제 앞에 모습 보이네요. 作者가 없다고 하니 더 찾고 싶었던 그녀, 이젠 그 속살을 들여다봐요. 지금은 책 속에서 다른 한 줄을 찾아 헤매고 있지요. 아 내 얕은 눈을 또 다른 페이지가 가득 채우네요. 그 페이지만은 물기 가득한 거울이었지요. 그곳으로부터 고래 한 마리가 소리없이 튀어나왔습니다. 어느 날 문득 뭍으로 올라온 고래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나는 잠시 그 고래였으면 했더랬습니다. 미안해요. 죄송하지만 정말 그랬어요. 다시 바다로 돌아갈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를 고래의 눈이 한순간 촉촉해졌었지요. 그런데 인터넷 충동구매 하듯 가져온 몇몇 책은 ‘반품’하고 싶네요. 사람의 개입이 필요 없는 도서대출/반납 시스템 사용법을 배운 것은 조금 서글픈 소득이었어요. 내가 뭍으로 올라온 고래라는 걸 알았다는 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