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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어떤 것

따사로운 봄볕 아래
가늠키 힘든 그늘 자라고 있어
내 차라리 밤을 그렸네
점멸하는 별처럼
수많은 이름을 지닌 바램 가운데
단 하나, 출구를 향하여
빛의 기운이 몰리어 갈 때
마냥 깊어지고
시간과 우주의 고독한 종말을 향해
속절없이 팽창하던
밤, 그리고 밤의 어떤 것

2016. 3. 29.

플래쉬 백 : 回光

해가 몰라보게 짧아졌습니다. 좀 늦은 시간에 산엘 갔더니 약수터에 이르렀을 때는 벌써 어둠이 내렸습니다. 큼지막한 나무들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별이 새삼스러웠지요. 자그마한 손전등 하나를 갖고 갔는데 그럭저럭 괜찮았습니다. 측백나무 빼곡한 길목 너머 어둠 속 옛길을 따라 返照의 시간이 왔습니다.

자전거엔 바퀴의 동력으로 작동하는 전조등이 달려 있었고 캄캄한 논길 다닐 적에는 ㄱ자로 꺾인 국방색 손전등이 요긴했었지요. 큼지막한 6V 전지가 들어가는 묵직한 플래쉬는 정말 굉장했습니다.

도둑은 들키지 않기 위해 침침한 손전등을 갖고 다녀야 했고, 늦은 저녁 도랑길에 플래쉬라도 비추면면 목욕하던 아낙네들이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별이었던지 미지의 비행물체였던지 강둑에 누워 바라보던 하늘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둥글고 또렷한 빛의 궤적도 기억합니다.

시골의 여름밤에 플래쉬 갖고 놀면 그보다 신나는 일도 별로 없었지요. 새 전지를 넣은 손전등을 하늘로 비추면 밤하늘에 뽀얗고도 환한 선이 그어졌습니다. 어둠을 뚫고 구름을 넘어 어느 먼 먼 별에서 그 빛을 끝내 발견하리라는 확신에 가까웠던 믿음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플래쉬 자체가 영사기였고 위태로운 담벼락에서 밤하늘까지가 꿈의 스크린이 되었지요. 우리는 저마다 손전등을 들고 불나방처럼 흥분해서 여기저기 뛰어다니곤 했습니다. 온통 흩뿌려진 별들에까지 닿을 듯한 그 아찔한 환희의 느낌이라니요. 생각하면 가끔은 발을 헛디딘 듯 떨어지는 느낌이고, 잠깐씩은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이해하기 힘든 각성의 충격이 오기도 합니다.

한참 닳아버린 전지 같은 세월 너머 측백나무 우거진 길을 걷다 그 우유빛 빛줄기가 새삼 떠올랐습니다. 얼굴들도 보이고 발자국 소리며 웃음소리도 들립니다. 어떤 목소리는 귓전에서 나를 부르고 어떤 목소리는 아득한 곳에서 재촉을 합니다. 누군가 어둠 저 너머에서 플래쉬를 켰나 봅니다.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하고 어떤 별에서도 응답받지 못한 그 빛이 세월을 돌고 돌아 내 캄캄한 하늘을 밝히는 몇몇 별이 되었습니다.

 

2008. 8. 30. 토.

거품의 바다 ​Mare Spumans

잠시 기다려주오
위난의 바다 속 섬 같은 그곳
나 이 모래성 허물고
그대 마음대로 나고 들 세상 다시 지으리
그리고 등 돌린 채 그 자리서 잊혀져버린 세계
끝내 담을 수 없었던 未知
바다는 천길만길 물러나 자취를 감추었고
누군가 그녀에게
돌아오지 못할 이름 주었네

 

2015. 10. 13.

님은 먼 곳에

가을의 도로 위를 무작위로 흐르는 노래들, 오랜만에 장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원래부터 그의 노래는 아니었지만 이 사람 찾아 헤매이는 그 먼 곳 생각나서 꽉 닫힌 창문 안에서 뒤늦게 목청껏 따라 불렀다 내 마음이 가는 그 곳+, 아득한 그 곳 향해 마음 몇 가닥 옮겨보려고 오랜 세월 씨줄 날줄 엮어도 보았으나 처음에 떠올렸던 어느 한 줄이 모든 것이었기에 그 어떤 살도 붙일 수가 없었다 2002년에 썼던 한 줄 매번 고친답시고 끄적일 때마다 억지로 이어붙인 가짜 갈비 같은 느낌 지울 수 없었는데 또 어설프게 포장을 했다 하지만 이제, 갈비살은 더 이상 붙이지도 떼어주지도 않을까 보다 그리고 여기, 갈 곳 없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 않은 것 없는데
한 것은 더욱 없네
님은 먼 곳에
그러나 님은 곳곳에

 

 

+
미련, 장현 노래 / 신중현 곡.
/2015. 10. 19.

三行詩 삼행시

그 목줄 누가 내어놓았는지

강아지 한 마리 위태로이 찻길 따라 걷는다

바쁠 것 없는 걸음 괜스레 재촉하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친다

 

(알지 못하는 셋이 길에서 마주쳤는데
그 가운데 二人이 느낀 것을
어느 一人이 쓰다.)

 

 

/2015. 3. 22.

말할 수 없는 그것

감히 말할 수 없는 그것 - 카르투슈에 둘러싸인 파라오의 신성한 이름처럼 섣불리 발음조차 할 수 없는 그것 텅 비어 있는 왕의 자리처럼 감히 그릴 수 없는 그것
새벽 꿈길에 흔적 없이 왔다 가고, 폭풍처럼 한 순간에 나를 채우곤 했네 어떤 전통은 그것을 14행으로 노래하려 했고, 어느 나라에선 세 줄이거나 한 줄만으로도 충분하였다네
어떤 이의 이야기 속에서는 뭔지 모를 하나의 단어만으로도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꿈꾸었고, 다른 이는 300행에 달하는 재나두의 꿈을 끝내 옮겨 담지 못했네
그 속에 형상 없는 재료로 이루어진 유구한 사원이 있으나 진실한 믿음은 결단코 흔치 않은 법, 적어도 내 안에서는 흘러간 적 없는 옛 시인의 노래는 연인의 눈동자에서 그것을 본다고 했네
미다스의 이발사처럼 복두장이의 비밀처럼 주체할 수 없는 답답함을 내게 주는 그것 그 어떤 한적한 갈대밭도 찾지 못해 세상 많은 이들을 방황케 하는 그것
그대 있으니 나 또한 있고 그대 없으면 나도 또한 없음이라 말로 이루어진 사원을 꿈꾸었으나 有와 無를 모두 세우지 아니한다 했으니+ 쉽사리 발설했다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면서도 말하지 못해 형용할 수 없어 미칠 것 같은 바로 그것

 

 

/2010. 5. 27.

 

 

+​爾有我亦有(이유아역유) 君無我亦無(군무아역무)
有無俱不立(유무구불립) 相對觜盧都(상대취로도) ​​/冶父 頌
<金剛經五家解>에서 변용하였고, 相對觜盧都 또한 “말할 수 없는 그것”이어서 넣지 않았다.

+”텅 빈 왕의 자리처럼 감히 그릴 수 없는 그것” 2025년 9월에 수정하였다.

빗방울을 읽다

불가해한 순열의 초록빛 문자는 아니었습니다. 어디서 날아온 소식이던지 방충망의 모눈을 따라 드문드문 물방울 맺혀 나 모르는 세상의 철자가 되었습니다. 낯설고도 반가운 사연, 그렇게라도 듣게 되는 장문의 소식입니다. 빗줄기를 따라 사연도 그만큼 길었던가요. 의미 없는 의미의 심장 ― 거기에 뜻 있겠거니 모눈의 마음이 부지런히 받아서 적었습니다. 어느 아침 햇살에 잊혀지는 꿈처럼 해독解讀은 오히려 해독害毒, 조금 틀렸거나 잃어버려도 상관은 없겠지요. 밤이 오면서 창 너머로는 환한 방이 보이고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수심愁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 속에 잠기어 있고 지금쯤엔 저마다의 답신이 송골송골 맺혀 있을 것입니다.
 

 

/2002. 9. 1.

봄밤

너 대신 짧은 봄밤
새로 핀 꽃구경도 즐거웠다만
건너편 집 처녀
다소곳이 설거지하는 모습도 참 예쁘다
전해지려나
이 방을 흐르는 노래 그곳까지 들릴까
나 대신 짧은 봄비
마음아 너는 어디까지 가려나
얼마만큼 쌓이어서 한 줄 닿으려나
너 대신 짧은 봄꿈
양지 바른 곳에 누워 노랠 따라 불렀더라
구름에 햇살 오가다 어느 하루 잠들었는데
자장가 부르던 이만 잠 못 이루네

 

/2002. 3. 18.

 

 

+
“얼마만큼 쌓이어서 한 줄 닿으려나”에서 “인들”을 뺐다.
“한 줄인들”이 더 운이 맞지만 한 줄이나 천 줄이나 닿는 것은 다름이 없고
한 줄이면 족하기에 “인들”은 그 절박함을 부박하게 만든다 싶었다.

/2017. 2. 15.

라 마하 데스누다

열세 살 백과사전의 한 페이지 귀퉁이에 마야가 누워 있습니다. 어느 어린 봄날의 시험시간, 책상 사이로 길게 늘어선 그림자를 바라보다 아득해진 삶처럼 너무 작고 흐린 그림이 몹시도 안타까웠습니다. 태초의 숲에서 율리시즈의 고행까지 누구의 연인인들 어땠을까요. 옛 그리스의 꿈인양 비만이 풍만으로 보이던 환상, 얇은 그 옷을 뚫어져라 쳐다보았습니다. 라 마하 베스띠다, 지도와 영토 사이 흐릿한 한 지점을 하염없이 꿈꾸었습니다. 마야의 침대 위에 홀로 누웠습니다. 더 잃을 것도 없는 허망을 찾아 내가 간지럽힌 것은, 나를 그리 한 것은 어느 여인의 옆구리였을까요. 고야의 방을 채우던 검은 그림 너머 헐벗은 마음으론 분별치 못할 황홀한 나의 마야입니다.

 

 

2001. 9. 26.

 

+라 마하 데스누다 / 라 마하 베스띠다, 고야.
제목을 한글 발음으로 바꾸었고, 조금 고쳤다.  외래어 표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시절에 봤던 ‘그책’의 이름대로, 그리고 ‘幻’이라는 의미로 그녀의 이름을 마야라고 썼다. 인용이라고 하기엔 조금 애매하지만, 영토와 지도에 관한 생각은 카프라의 책에서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마야란 지도를 영토로 착각하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