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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사회

“나를 믿을 수 있어?”
“아니, 널 믿을 수 없어. 너는 너무 무능해. 너의 ST가 너무 나빠.”

오래 전에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그 오래 전이 얼마 만큼의 시간인지 그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분명 몇달 또는 1, 2년 보다는 더 흘렀음을 알지만 그 이상은 도무지 생각이 미치질 못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대형 크레딧 매장에 들러 맥주를 사고 싶었다. 모처럼 담배 피우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고…
체커. 언제나 매장의 정문을 들어서거나 나올 때는 신기했다. 어떻게 알수 있을까… 눈을 인식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머니 속에 있는 손의 지문을 비접촉의 교묘한 방식으로 판독하는 것일까. 아니면 더욱 빈털털이인 그의 마음을 검색하는 것일까. 단층촬영의 방식으로 그의 갈비뼈에 뫼비우스 코드를 기록하고 스캔하는 것일까…
어딘가에 블랙박스가 있었고 그것은 물론 조난 이후라야 개봉 가능한 것임에 틀림없는 것이었다.

이 안정된 사회 속에서 물가는 결코 변동이라는 것이 없었다. 모든 물건의 가격은 일정 수준에서 거의 영구적인 것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다른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좀처럼 수정되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불변의 경전이었다.
그럼에도 물가는 결국 상대적인 것으로 절대 가격과 자신의 크레딧의 조합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신용신뢰도는 급전직하의 추락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 숫자를 볼 때마다 마음은 더 참담했다. 어디 공동 작업 센터나 리싸이클 센터로 가면 어느 정도는 레벨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힘겹게 다니는 노인을 잠깐 도와주거나,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거나, 지금은 거의 보기 힘들지만… 정신지체아동을 위해 약간의 도움을 줘서 그가 도움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ST 레벨을 잘 유지하려면 좀 귀찮고 비참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일부러 고난에 빠진 누군가를 찾고 싶지는 않았다. 억지로 휴지조각을 찾아서 줏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참담함에 너무 익숙해진 것일까… 그는 점진적 개선이라는 상태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낮엔 우연히 시동이 잘 안걸리는 자동차로 애를 먹고 있는 할아버지를 도와주었다. 그냥 그 앞에서 그런 일이 있었기에 그랬을 뿐… 뭐가 잘못된 것인지는 정말 모를 일이었다.
이미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없는 세상이었다. 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짓을 하거나 수치로서 보상받고 처벌받으니 모두가 자업자득인 것, 자신의 행운이고 문제일 뿐이었다.
만약 고맙다고 말해야 한다면 넘어져서 울고 있는 어린 아이를 일으켜 세운 자신이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내 ST를 향상시켜줘 고마워요.” 하지만 그런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물론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하거나 상냥한 미소를 보내거나, 아무런 까닭도 없이 고맙다 생각하고 말해도 ST는 조금씩 개선되는 법이고 실제로 그렇게 즐겨 말하는 구두쇠 같은 인간들도 몇몇 본 적은 있다. 하지만 그는 너무 지쳐 있었고 피곤했고, 너무 많은 것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느끼고 있었다.
CM의 출구 ㅡ 자신이 서 있는 줄에서 그의 ST 레벨이 최악의 수치로 출력되었을 때 그는 얼굴이 화끈거렸고 주저앉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급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몹시도 부끄러웠던 한 순간이 지나고 허탈한 느낌이 몰려왔다. 그리고 의혹의 그림자도 거기 함께 자리잡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왜 자신보다 더 낮은 신용도를 가진 사람은 없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뒤처진 낙오자임을 부인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은 진정 의혹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미지근한 캔 맥주를 따서 마셨고, 간소한 침대에 누워 Self-Vision을 켰다. SV조차도 그의 크레딧 폭락을 가장 큰 화젯거리로 다루고 있었고, 끊임없이 경고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SV도 그러할까. 이런 도덕-경제 이야기만 가득하고, 노래는 캠페인 송만 나오고, 영화는 의식고양을 위한 교훈적인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일까. 예전에는 분명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딘가 향기가 분명 있었다.
그는 너무 피곤해서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았지만 힘겹게 채널을 돌릴 수 있었다. 어느 채널에선가 신용과 사회에의 기여에 관한 지루해 보이는 영화가 시작될 참이었다.
잠결이어서일까… 그 영화의 주인공은 꼭 자신처럼 보였다. 그의 상대역은 오래전에 가버린 그녀처럼 보였다. 하지만 나른한 마음은 이미 눈을 감았고 잠결에 큰 소리가 울려퍼지는 것을 들었다.
깨어보니 그녀 혼자 남몰래 눈물 흘리며 크레딧 마켓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영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잠깐 잠든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밤새 행군을 하고 온 사람처럼 온몸이 쑤셨다. 그리고 창문을 보니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오래도록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았다.

한때 이 방에는 많은 것이 있었다. 전 세계의 많은 음악들을 집대성한 보기드문 최고의 데이타 베이스가 있었고, 아무 쓸모 없지만 정교하고 아름답게 생긴 항해용 나침반도 있었다. 곰팡내가 날만큼 오래되었고, 무슨 의미를 담고있는지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지만 몇 권의 아름다운 책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텔레비전, 냉장고, 간단한 주방도구와 세면대, 그리고 누구나 갖고 있는 SV, SR(Self-Radio)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는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를 했다. 아침을 먹는 고역을 대신하여 반컵 정도의 우유를 마시고는 잠깐 바깥 공기를 쐬고자 했다.
어디에나 있는 체커. 이 슬럼가에서조차도 그는 거의 최저 레벨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오늘은 카운터가 0을 켜고 있었다. “쳇, 0이라니. 고장인데도 아무도 관심도 없군…”
하지만 주거지역을 벗어나 교육지역을 통과할 때 살펴본 체커에도 어김없이 그는 0을 기록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숨이 막히고 뛰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0. 그로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꿈의 숫자였다. 인도 최고의 마법, 마야의 신관과 천문가들이 헤아리고 싶어했던 꿈, 충만과 공허의 극점에 있는 무엇… 그것을 상상하는 것조차도 가슴 벅찬 일, 세상의 모든 것을 마음대로 나눌 수 있는 황금의 열쇠였다. 그러니 당연히 그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체커는 어김없이 자신이 레벨 제로임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불신할 힘도 없는 것 같았다.

그는 Meta Market으로 달려가 한구석의 Sound Part를 뒤졌다. 그리고 뛰는 가슴으로 물건을 골랐다. ㅡ Virtual Sphere Sound System.
자신의 신체를  정확히 계산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반경에서 마음껏 실컷 큰 소리로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허리띠 버클형의 VS3를 구입하였다. 정말 얼마만에 들어보는 음악인가.
그가 자신의 VS3와 음악 데이타를 고민끝에 처분해버린 것은 ST 유지를 위한 비참한 시도이기도 했지만 거의 아무도 거기 관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길고 혹독했던 외로운 시간, 한번씩은 그녀에 관한 느낌 만큼이나 그리운 소리들이었다.
VS3의 소리 반경을 개방시키면 공공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에 ST 레벨이 나빠지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지금 꿈도 꾸지 못할 너무 높은 레벨이었기에 기꺼이 소리로 이루어진 구의 장막을 열었다.
엄청난 볼륨이 사방으로 뻗어나갔을 때 사람들은 시끄러운 소리에 잠깐 놀랐을 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모두 영상-감각합치형의 Meta Sphere를 좋아할 뿐이었다. MS는 지금도 그러하지만 결국 세상의 중심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그는 Self-Radio에서 나오는 지리멸렬한 노래들을 잠깐 떠올리다 뛸 듯이 기뻐했고 정신없이 거리를 쏘다니고 있었다.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한참을 걷고 달리다 보니 지구라트형으로 건축된 휘황찬란한 큰 건물이 보였다. “참, 내가 얼마나 오래도록 방구석에 처박혀 지낸 것일까. 이 근처에 이런 건물이 있는지도 몰랐다니…”
건물의 영롱한 네온싸인에는 Karma Hotel이라는 이름이 날렵한 글씨로 적혀 있었고, K.A.R.M.A.가 순차적으로 소멸하고 다시 켜지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Karma 네온이 어둠에 잦아들 때면 형광빛 램프로 “Well, We All Shine On!”*이라는 글자들이 대신 흘러가고 있었다. 그는 레벨 제로의 당당함으로 KH의 화려한 입구를 거리낌없이 통과하였다.
그를 맞이한 호텔 웨이터는 ST 레벨이 준수한 아주 활달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따뜻하게 그를 접대하였고, 그의 마음에 꼭 들만한 최상층의 가장 매력적인 룸으로 그를 안내하였다. 그 방은 Flashback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호텔 최고의 시설이었고 평생토록 꿈꾸어온 순간이 거기 있었다. 놀라운 방에 관한 경외감과 찬사로 그는 웨이터에게 소정의 ST를 주고 싶었지만 그는 미소로 정중히 거절하였다.
웨이터가 문을 닫고 나가자 거기 자신의 모든 것이 동시에 존재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극단의 꿈의 향연이었고 악몽의 조합이었고 아파도 돌아가고 싶은 아련한 추억이었다.
무한에 고양되고 도취된 그는 온갖 즐거웠던 순간들의 꿈을 꾸며 달콤하고 행복하게 잠이 들었다. 룸 써비스가 전혀 필요없는 그 방 자체가 완벽한 세계였다. 그는 그 긴 밤의 한 가운데서 그녀를 만났고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레벨 제로의 길을 보았다.

카르마 호텔의 웨이터가 방을 정리하기 위해 손님의 부재를 확인하고 들어왔을 때 방은 이미 정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침대 옆 탁자 위에 있는 신용유지국의 확인증을 보는 아주 짧은 순간 알 수 없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끔 그런 걸 느낄 때가 있었지만 그는 그게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었다. 우리가 아주 길고 험난한 시련을 넘어 발견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리고 망각해버린 무엇이었다. 그는 즐거운 휘파람을 불며 FB의 문을 잠갔다.
그가 문을 닫고 나왔을 때 방의 이름은 바뀌어 있었다. 그것은 영원토록 지속될 Feedback이었다. 다른 누군가의 부재에 다시 직면할 때까지.

ㅡ 나를 믿을 수 있어?

 

1999. 8. 17. jjlee(c). * Instant Karma

 

싸이카

ㅡ 금지곡을 위하여

 

달려, 불꽃이 날리기 시작했지
굉음이 터져야 할텐데 모기 소리 만큼도 들을 수 없었어
턴넬로 들어섰는데 바깥이 더 이상해 보였어
사실은 그 바깥이 정말 턴넬 같았지
난 시계가 고장난줄 알았어
계기판이 빙빙돌아 미친줄 알았지
그걸 좋아하니 너도 알 수 있을 걸
느끼고 싶어하니 너도 가고 싶을 걸
가로등이 휘어지면서
앞길이 옆으로 펼쳐지기 시작했어
물고기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느낌 알고나 있을지 몰라
어안렌즈가 장착된 카메라가 아닌 다음에야
볼 수나 있을지 몰라
아득히 멀리 바늘 귀같은 점이 보이는 순간
나는 거대한 흑점 안에 있었어
그 차가운 점 안에 있다고 느낀 순간 점은 사라져버렸어
달려, 있는 힘껏 달려
가슴이 벅차올라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돌아올 때 역회전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만약 따라간다면 요람까지
만약 좇아간다면 무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순찰차 경광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천년이나 되는 줄 알았어
경관이 잽싸게 총을 뽑았지만 그건 정지화면이었지
경관이 부리나케 총을 쏘았지만 거북이 놀음이었어
그랬어, 난 너를 위해 그 총탄을 가져왔지
기어오는 총알을 잠시 기다리다 슬쩍 나꿔챈 것이야
꿈길 마저 온갖 이름의 수갑을 채우려 한다면
그나마 자유가 아니라면
달려, 목청이 터질만큼 고함지르며 달리고 싶어
힘줄이 끊어질만큼 지금 당장 달리고 싶어
아, 다시 한번 또 그렇게 해보고 싶어
너랑 같이 누워서
그 짓을 해보고 싶어

 

 

/1999. 8. 6.

싸이카

ㅡ 금지곡을 위하여

 

달려, 불꽃이 날리기 시작했지 굉음이 터져야 할텐데 모기 소리만큼도 들을 수 없었어 터널로 들어섰는데 바깥이 더 이상해 보였어 사실은 그 바깥이 정말 터널 같았지 난 시계가 고장난줄 알았어 계기판이 빙빙 돌아 미친줄 알았지
그걸 좋아하니 너도 알 수 있을 걸 느끼고 싶어하니 너도 가고 싶을 걸
가로등이 휘어지면서 앞길이 옆으로 펼쳐지기 시작했어 물고기가 아닌 다음에야 그런 느낌 알고나 있을지 몰라 어안렌즈가 장착된 카메라가 아닌 다음에야 볼 수나 있을지 몰라
아득히 멀리 바늘 귀같은 점이 보이는 순간 나는 거대한 흑점 안에 있었어 그 차가운 점 안에 있다고 느낀 순간 점은 사라져버렸어
달려, 있는 힘껏 달려 가슴이 벅차올라 고함을 질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나는 돌아올 때 역회전된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
만약 따라간다면 요람까지 만약 좇아간다면 무덤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어 순찰차 경광등이 깜빡이는 순간이 천년이나 되는 줄 알았어 경관이 잽싸게 총을 뽑았지만 그건 정지화면이었지 경관이 부리나케 총을 쏘았지만 거북이 놀음이었어 그랬어, 난 너를 위해 그 총탄을 가져왔지 기어오는 총알을 잠시 기다리다 슬쩍 낚아챈 것이야
꿈길마저 온갖 이름의 수갑을 채우려 한다면 그나마 자유가 아니라면 달려, 목청이 터질 만큼 고함지르며 달리고 싶어 힘줄이 끊어질 만큼 지금 당장 달리고 싶어
아, 다시 한 번 또 그렇게 해보고 싶어
너랑 같이 누워서
그 짓을 해보고 싶어

 

 

/1999. 8. 6.

Roy “the Breast-bone” Harper 

<Stormcock>, Roy Harper
● 1971

 

Producer : Peter Jenner
Sound Engineers : John Barrett, Peter Bown, John Leckie, Phil McDonald, Alan Parsons, Nick Webb
Additional musicians : David Bedford, Jimmy Page

Stormcock is arguably Roy’s finest achievement. It contains four long songs, and to me it shows the very best of both Roy’s writing and playing ability. The songs are so strong that they are still played in live sets today. The album includes some very appropriate arrangements by David Bedford, and guitar by S. Flavius Mercurius, also known as Jimmy Page.

 

경솔한 마음의 잘못으로
어느새 죄를 이몸에 지녔도다
청정하신 신이여,
어여삐 여기시어 연민을 베푸소서.
<물종기에 걸린 사람이 바루나에게 용서를 비는 노래, 리그베다>

 

Roy Harper. 그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 쉽지가 않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저려옵니다. 때로 부드럽고, 때로 격렬하고, 아름답게 울려퍼지다 추악한 목소리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Donovan의 목소리처럼 처량하게 울려퍼지는가 하면 Albert Hammond처럼 껄쭉한 목소리로 노래합니다.

하지만 더 깊은 목소리라고나 해야 할까요. 자신의 친구이기도 한 David Gilmour처럼 노래하는가 하면 Roger Waters처럼 뒤틀린 삶을 공박합니다. 장정일은 또다른 로이 – 로이 뷰캐넌을 가리켜 “그 자신이 기타였던 로이”이라고 했지만 난 그걸 그다지 믿지 않습니다. 로이 하퍼는 자신의 기타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현을 울립니다.

 

 

Hors d’Oeuvres (8:37)
잔잔한 슬픔과 아름다움이 있는 노래입니다. 무심한듯 한음씩 낮아져 가는 기타 소리가 반복되며 무게를 더해가는 것 같습니다. 저음에서 가성까지 Harper의 목소리가 참 슬프게 이어집니다. 하지만 그의 노래에는 약함과 강함, 슬픔과 정열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스캣 창법으로 부르는 대목이 참 듣기좋은 곡입니다.

The Same Old Rock (12:25)
비장한 느낌을 갖게 하는 아름다운 소리ㅡ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특히나 빛을 발합니다. 보컬 파트는 한동한 장조의 잔잔한 멜로디로 이어지다 점차 단조로 바뀌어 갑니다. 보컬 시작 부분은 영국 민요 같은 느낌이 있는데, ‘슬픔과 평안’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이 함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노래가 급격히 단조로 바뀌어가면… 미칠 것 같은 슬픔.
이 노래의 후반부는 꽤 격렬한 포크 기타와 보컬을 들려주는데 그것은 결코 ‘기승전결’의 절정이 아닙니다. 자연스레 터져나오는 감정의 폭발같은 격렬함이며, 내 마음도 그 폭발을 따라가는 기분을 갖곤 합니다.
이 앨범의 모든 노래에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만 적절한 베이스와 드럼이 사용되었다면 그야말로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기타와 그의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한 아름다움입니다. My breast bone harper…

One Man Rock and Roll Band (7:23)
반드시 성공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특이한 사운드를 가진 곡입니다. 블루스 록 풍의 곡임에도 보코더를 사용하여 목소리는 변조된 채 약간은 기계적으로 들립니다. 지미 페이지의 기타는 Led Zepplin을 연상케 합니다. 역시 드럼과 베이스를 사용하고 정상적인 세팅으로 녹음되었다면 상당히 멋진 블루스 넘버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아쉬움이 있더라도 무엇이든 용서가 가능한(!) Stormcock입니다. Harper 자신은 이 곡에서의 지미 페이지의 기타 연주에 대단히 만족해 했습니다.

Me And My Woman (13:01)
슬픔 속의 Stormcock. 하지만 그 슬픔은 결코 나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Neil Young이 사춘기적 감성으로 날카롭고도 깊은 외로움을 노래한다면 Harper의 노래 속에는 주체하지 못할 슬픔과 무르익은 열정이 배어 있습니다. 낮은 읊조림에서나 거친 고음에서나 텅빈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는 그의 아픈 목소리…… 가성으로 높게 올라가며 “Me and my little woman”이라고 노래하는 그 목소리를 듣노라면 그가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노래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우는 게 아니라 내가 우는 듯한 느낌입니다. “Whatever Happened to Jugula” ㅡ 내가 그를 노래합니다.

 

그대 노래하는 이는
물속 한가운데 서있어도
갈증은 그로부터 사라질 줄 모르니,
어여삐 여기시어 연민을 베푸소서.
<물종기에 걸린 사람이 바루나에게 용서를 비는 노래, 리그베다>

 

1999. 6. 7.

PS.
(Peter) Jenner로부터 예방접종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Her Breast-bone Harp

<Cruel Siste>,  Pentangle

 

포크 음악이란 무엇일까요. 어릴 땐 막연히 70년대 청바지를 떠올리며 통기타나 어쿠스틱 악기들을 사용하는 음악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아마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여길 것이며, 그것이 전혀 틀린 생각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제가 이해하는 포크 음악이라는 것은 민요와 구전가요의 전통을 이어받은 음악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옛음악의 계승이나 재현, 또는 발전이라는 형태를 가지며, 자연스럽게 어쿠스틱 악기들을 사용하는 것일 것입니다. 또한 전자악기나 드럼을 사용한다고 해서 포크음악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 역시 편견이라고밖에 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포크음악은 ‘포크가수’로 불리우는 사람들에 의해 많은 오해와 왜곡을 불러일으켰음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것이 반드시 나쁜 의미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 해도 민요의 전통은 너무 많은 곳에서 ‘그대로 따라하기’이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외면당해 왔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경우라 다른 면들도 많겠지만 Pentangle은 바로 그런 점에서 민요의 본질을 잘 파악한 포크 그룹이라 하겠습니다. 저는 그들의 네 장의 앨범을 들었습니다만 어느 앨범에서나 그들이 추구하는 것은 한결같았습니다. Pentangle에 관한 그러한 느낌들은 Omie Wise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내 머리 속에 박혀버렸습니다.
Spirogyra나 Magna Carta, Mellow Candle, Clannad 같은 포크 그룹들의 특출함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겠지만 Pentangle처럼 철저하게 포크의 전통을 이어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Spirogyra는 흔히들 말하듯 art rock적인 성격이나 록큰롤의 분위기를 함께 갖고 있으며, Magna Carta는 팝적인 성향이 많습니다. Mellow Candle이나 Clannad는 켈틱 사운드를 기반으로 하면서 뉴에이지적인 성향과 팝적인 성향을 가지다 보니 때로는 얄팍한 면들도 발견하게 됩니다. Fairport Convention은 비교적 Pentangle과 비슷하지만 보다 현대적인 느낌이지요. 그런 면에서 Pentangle은 가장 영국적인 포크 그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Cruel sister 앨범 또한 민요와 구전가요의 전통을 잘 반영한 작품이 아닐까 합니다. 타이틀곡 Cruel sister는 유럽의 동화에서 가끔 발견할 수 있는 ‘엽기적’인 대목을 포함하고 있지만 슬픔과 비장함의 확대를 위한 장치로 이해하면 무리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벌어지는 자매간의 이야기를 그린 이 곡에서 언니(Cruel sister)는 욕심과 질투로 동생을 바다 구경 시켜준다며 데려가 물에 빠져 죽게 합니다. 두사람의 음유시인이 해변에서 그녀의 시신을 발견하고 (좀 끔찍합니다만) 그녀의 breast bone과 three locks of yellow hair로 하프를 만듭니다. 그 슬픈 악기를 가지고 그녀의 집으로 가니 하프가 혼자서 구성지게 울려댄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곡입니다. Pentangle판 공무도하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누군가 Cruel Sister 앨범에 관한 리뷰에서 타이틀곡 Cruel Sister를 듣는데는 상당한 내공(?)이 필요하다는데 나는 내공이라는 건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이지만 반복되는 리듬임에도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단 네 줄의 노랫말(그것도 두줄은 늘 똑같은 것)을 조금씩 바꾸어 가며 같은 곡조가 무려 열아홉번이나 반복되지만 악기가 추가되면서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와 함께 가끔씩 등장하는 시타의 환상적이고도 미묘한 애드립이 그 지루함을 잊게 해주었습니다.

John Renbourn이 연주하는 시타는 이 곡에서 동양풍이 아닌 어쿠스틱 기타 스타일의 음계를 들려주는 것도 특이합니다. 더불어 Danny Thompson의 더블베이스는 단순하게 연주되면서 서러움을 더해주고 있으며, Terry Cox의 dulcitone(dulcimer의 변형?) 연주도 대단히 아름답게 들리는 노래입니다. 물론 Jacqui McShee의 보컬은 변함 없이 구성진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곡의 단순함과 지루함에 식상해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들의 빼어난 악기 연주만으로도 충분히 즐겨 들을만한 Cruel Sister일 것입니다. 제가 들어보았던 Pentangle의 다른 앨범들에 비해 곡마다의 색채가 부족한 앨범이었지만, Cruel sister만으로도 나는 이 앨범을 가끔 듣게 될 것입니다.

그녀는 나의 자매 같은 느낌 – 하염없이 파도 속으로 잠기어 가던 breast-bone harp의 울림을 함께 나누며.

 

 

 

There lived a lady by the North Sea shore
(Lay the bent to the bonnie broom)
Two daughters were the babes she bore
(Fa la la la la la la la la la)

As one grew bright as in the sun
So coal black grew the elder one

A knight came riding to the lady’s door
He’d travelled far to be their wooer

He courted one with gloves and rings
But loved the other above all things

Oh sister will you go with me
To watch the ships sail on the sea?

She took her sister by the hand
And led her down to the North Sea strand

And as they stood on the windy shore
The dark girl threw her sister o’er

Sometimes she sank, sometimes she swam
Crying sister reach to me your hand

Oh sister, sister let me live
And all that’s mine I’ll surely give

It’s your own truelove that I’ll have and more
But thou shalt never come ashore

And there she floated like a swan
The salt sea bore her body on

Two minstrels walked along the strand
And saw the maiden float to land

They made a harp of her breast bone
Whose sound would melt a heart of stone

They took three locks of her yellow hair
And with them strung the harp so rare

They went into her father’s hall
To play the harp before them all

But as they laid it on a stone
The harp began to play alone

The first string sang a doleful sound
The bride her younger sister drowned

The second string as that they tried
In terror sits the black-haired bride

The third string sang beneath their bow
And surely now her tears will flow

 

/1999. 5. 10. 월.

폼페이에 관한 단상

당신의 기침 소리“와 “pink floyd의 pompei live“에 관한 부언

 

나는 한권의 책을 통하여 <당신의 기침 소리>를 썼다.(폼페이에 관한 자료들은 여러 권 갖고 있지만 시를 쓸 때는 폼페이 발굴에 관한 단 한권의 책만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시 속의 집이나 직업, 풍속 등 그 모든 내용과 이름들은 거의 실재하는 것들이다. 실제로 폼페이에서의 7월은 선거의 달이었으며, 아셀리나의 술집 역시 실재하는 곳이었다. 그 술집의 벽에는 팔미라, 아글라이, 마리아, 즈미리나 등의 이름이 낙서로 남아 있었다. 또한 이들이 행정관에 출마한 폴리비우스를 공개적으로 지지하자 그는 난감한 상태가 되어 화를 내었다는 기록도 있다. 아마도 그는 평소 ‘아셀리나의 특별한 술집’을 자주 찾았던 것 같다.
<기침 소리>의 비장한 분위기에 약간의 유머를 주기 위하여 나는 폴리비우스를 언급하였다. 기타 내가 언급한 모든 이름과 장소는 실재하는 것들이었다. 물론 약간의 ‘시적 진실’이 포함되긴 했지만 거의 넌픽션인 셈이다.

 


빵가게 부부의 초상

 

이들이 <당신의 기침 소리>에 등장하는 스타티아와 페트로니아 부부인지는 알 수 없지만 빵가게를 운영하는 부부인 것은 확실하다. 불행히도 시에서  언급한 스타티아의 빵가게는 너무 작은 곳이어서 폼페이 복원지도에도 나와 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임의로 조금은 후미진 스타비아 목욕탕 부근에 빵가게가 있는 것으로 상정하였다.
내가 읽은 한 책에서는 이 벽화를 ‘장부와 첨필을 든 꼼꼼한 부부’로 묘사하였고, 또다른 책에서는 신혼의 의식을 기념한 그림이라고 하였다. 물론 나는 학술적인 고찰에 상관없이 빵가게를 운영하던 신혼부부의 언약이 담긴 초상이라 믿는다.

 


폼페이에서 발견된 여덟조각으로 나눠진 빵

 

이것은 실제로 빵가마에서 발견된 2000년된 빵이다. 빵공장에는 응회암으로 만들어진 맷돌이 있었는데, 노예가 돌리는 것과 노새나 말을 부려 돌리는 두 가지가 있었다.
시 속의 저녁식사에서 언급한 ‘가룸’은 소스와 소금을 뿌린 물고기 요리로 모두가 즐기는 식품이었으며, 가룸의 생산은 몇몇 부유한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다고 한다. 포도주 역시 폼페이의 유명 생산품이었다.

 

   
신비의 별장에서 발견된 세멜레의 입문의식(좌)  / 비너스와 마스의 벽화(우)

 

폼페이에서 그리 멀지 않은 교외에 있는 ‘신비의 별장’은 디오니소스에게 봉헌된 프레스코 벽화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별장의 예배실에는 모두 29명의 인물상이 실물 크기로 그려져 있는데 한 신부가 디오니소스의 비교에 입회하는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 의식의 클라이막스는 물론 성적인 상징을 담고 있다.
세멜레의 입문의식은 핑크 플로이드의 폼페이 라이브 필름에서 로저 워터스가 set the controls for the heart of the sun을 부를 때 상세히 보여주는데, 세멜레는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이다.

 


고대의 포르노그라피

 

폼페이에서는 이런 류의 퇴폐적인 벽화가 많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외설적이고 관능적인 그림들을 대단히 즐겼다. 약사 베티우스의 집에서 발견된 위의 그림 역시 마찬가지이며, 과장된 신체를 지닌 남자의 모습을 그린 또다른 그림이 베티우스의 현관에 그려져 있었다.
여인숙을 운영하는 주인 가운데는 발레리아 헤도네라는 여인도 있었는데, 그녀의 성-헤도네는 그리스어로 쾌락을 뜻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베티우스나 헤도네와는 전혀 다른 취향의 인물도 있었다. 바로 아리우스 크레센티우스인데, 그의 집은 통상 ‘도덕주의자의 집’으로 통한다. 그의 식당에는 “말다툼과 논쟁을 자제할 수 없다면 집에 가는 것이 더 낫다.”라든가 “다른 사람의 아내를 욕망의 눈으로 보지 말라.”는 경구들이 적혀 있었다. 그의 식탁에서는 유리병과 청동항아리, 국자, 사슬 달린 램프, 커다란 사발 등이 온전히 발견되었지만 아쉽게도 도덕주의자의 집은 제2차 세계대전 때의 폭격으로 그 형체를 잃어버렸다. 아이러니 속의 아이러니 ㅡ 포르노그라피는 영원하고 도덕주의자는 사라진 셈이다.

 

 

폼페이의 건물들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시가지의 복원도를 보면 오늘날의 건물들이 얼마나 비미학적인 것인가 새삼 느끼게 되고 도대체 무엇이 발전했는가에 대한 의구심마저 든다. 청동으로 만들어진 난방장치(보일러) 마저도 그 자체로서 우아한 작품이었다.

공공목욕탕 역시 대단히 예술적인 것이었는데 냉탕, 온탕, 그리고 증기탕에 탈의실까지 갖추어진 매우 화려한 건물들로서 남탕과 여탕은 따로 만들어져 있었다. 절대다수의 현대인들조차도 이 정도의 고급스런 목욕탕을 이용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화가 테오도르 샤세리오는 이 대중탕의 나른하고도 관능적인 이미지를 <Tepidarium (증기목욕실, 목욕을 마친 뒤 휴식을 취하며 몸을 말리는 폼페이 여인들)>이라는 그림으로 표현하였다.

하지만 폼페이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인 것은 아마도 시신들일 것이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신은 화산재에 뒤덮인채 그대로 석화되어 오늘날 석고상으로 온전히 복원되기도 했다. 상태가 좋은 시신의 경우 본뜬 석고상에서조차도 얼굴 표정이나 옷의 주름 부분까지 세밀하게 살아 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번민과 고통에 대한 자연이 만들어낸 비극적 예술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자연학 문제집>을 통하여 폼페이의 재앙을 묘사하고 이렇게 끝을 맺는다.  “그러나 온세상이 무너져 내린다면, 어디에서 구원의 손길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람의 말대로, 우리를 보호해 주고, 우리를 떠받치고 있는 이 땅이 쪼개지고 흔들린다면, 무엇이 그 토대가 될 것이며, 어디에 집을 지어야 한다는 말인가?”

‘파괴가 만들어낸 영원’이라는 아이러니 속에서 그 번민은 결코 끝나는 법이 없을 것이다.

 

 

/1998. 12. 18.

안개 속의 거울

내 믿지 못할 경험을 세상에 밝히도록 격려해준 P에게 이 글을 바친다. 그가 아니었다면 이 글은 내 기억 속에만 남아 있다 영영 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완성도 되지 못한 이 글을 내어놓는다. 나 또한 진실을 확신하지 못한채…

 

실재 reality : 
약간 머리가 돈 철학자가 꾸는 꿈 
만일 사람이 환영이라는 것을 분석 시험한다 하면, 
도간 속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 
공허의 핵심 
ㅡ A. 비어스, <악마의 사전>에서. 

 

 

글머리에.

 

나는 평범한 사람이다. 별다르게 쓰라린 삶을 경험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운명의 계시나 지배를 받아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실린 이야기들은 내가 직접 체험했거나 아니면 바로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서 일어났던 조용하면서도 특이한 사건들의 기록이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이렇게 많은 기괴한 현상들을 직 간접적으로 체험했었는가에 대하여 의문을 가질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하고도 확실하다. 나처럼 한번의 그런 이상한 경험을 가진 사람에게는 마치 그물이 던져진 것처럼 연속적인 체험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것은 융의 공시성처럼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것인 모양이다. 나는 본의 아니게 그러한 우연의 그물에 몸을 던진 것이었다. 
아무튼 처음으로 신비한 경험을 하고 나서부터 그런 우연 또는 초자연적인 현상(나는 결코 이렇게 표현하고 싶지 않다. 초자연 또한 자연의 일부라고 자연스레 생각하고 있기에)에 무관심하던 나는 조금은 다른 사고방식들을 가지게 되었고, 내 경험들을 글로서 남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짧은 글솜씨에 그 이야기들을 조금도 가감없이 적고자 무척이나 고심하고 노력하였다. 아니, 짧은 솜씨이기에 가감이 없음이 가능하였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겪었던 일들이기도 하고, 내게 그 체험들을 이야기해준 사람들이 아직 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나의 글재주 없음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두가 사실을 기록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는 좋은 글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아는 게 없는 사람이고, 글을 지어내는 것은 더욱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다만 나는 내가 겪었던, 또는 겪었다고 믿는 어떤 사건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록해두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소설이 아니라 실재로 내가 겪었던 일이며, 조금의 가감도 없음을 분명히 고백한다. 
적어도 그것은 내 삶의 어느 한순간에 실재한 사실이거나 또는 착란에 의한 도착과 환영 가운데 하나일 것이고, 그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 가에 대해선 이 글을 읽는 사람의 판단에 맡길 수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실재로 경험한 일이라는 것을 진실로 믿고 있다는 것을 이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분명히 밝혀두고자 한다.

1993. 10. 2. 토. 초고.

 

나는 언제나 적당히 쪼들린 채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뛰어난 재능이나 능력이 없는 나의 밋밋한 삶처럼 별로 특별한 게 없는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 단 한 시절, 결코 평범하지 않은 한 시절이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한 순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그 순간 또는 시절이 여태 나를 묶어두고 있다. 알 수 없는 자책감 속에 나는 그 포박을 운명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대치하는 방법도 배워왔다. 이제 그 믿어지지 않는 일에 관해 기록을 남기고자 한다. 

내가 그 낡고 허름한 목욕탕에서 무엇인가 보게 된 것은 지금부터 4년 전, 정확히 말해서 오늘이다. 오늘같이 심하게 흐린데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어두운 낮시간이었다. 
(지금도 그러하지만) 당시 나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있었고, 1달씩 교대로 밤근무를 했다. 그 사건이 있었던 것은 밤근무 후 돌아와 늦잠을 자고 낮에 목욕탕엘 가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날은 금요일이었다. 
내 하숙집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목욕탕은 변두리 동네의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조그만 목욕탕이었다. 늙은 아저씨가 박스 카운터에 앉아 돈을 받고, 시장 아주머니가 말 안 듣는 어린 아이들을 질책하며 황급히 몰아세우고, 술취한 아저씨가 목욕탕 주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몇몇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동네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탈의실에서 담배를 태우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작고 평범한 목욕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날 목욕탕엔 많지도, 그렇다고 적지도 않은 수의 사람들이 목욕을 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부대끼는 것을 싫어했다. 게다가 약간의 되먹지 못한 결벽증이 있어, 그들이 머리를 감을 때 튀는 비눗방울이나 물을 본의 아니게 뒤집어 쓰기가 싫어 구석진 자리에 앉아 목욕을 했다. (나는 목욕탕 위쪽에 뚫린 작은 창으로 보이는 그날 낮 하늘의 이상스런 어둠과 조용한 목욕탕에 간혹 들리던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의 독특하고도 음울한 느낌들을 아직도 기억할 수 있다!) 
그리 긴 시간을 목욕탕에 앉아 있지도 않았다. 혼자 조용히 목욕을 마치고 이제 탈의실로 나가려는 참이었다. 나는 문 앞에 섰다. 탈의실과 탕 사이에는 큰 미닫이 유리문이 있었는데 그 문 유리창에 목욕하는 사람들이 비쳤다. 

고독한 환경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멋부리기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유달리 거울 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탈의장 정경 너머로 희미하게 비치는 내 모습을 습관적으로 잠깐 바라보았다. 그리고 지나친 자아의식에서 오는 이상한 자책감으로 해서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게 아닌지 목욕탕 여기 저기의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어떤 사람은 머리를 감고, 어떤 사람은 샤워를 하고, 어떤 사람은 탕 안에 있고, 모두가 자신들의 몸 씻기에 나름대로 몰두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본 것은 그 순간이었다. 지금 와서 모든 것을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 느끼지 못했던 두려움에 소름이 돋곤 한다. 
목욕탕 제일 안쪽 편으로는 한증실과 냉탕이 있었는데 냉탕 바로 앞에는 유리 칸막이가 있었다. 아이들이 장난치거나 으스대기 좋아하는 어른들이 찬물을 여기 저기 튀겨 목욕하는 사람들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그만 배려였다. 그런데 탈의실로 통하는 유리창의 넓은 반영 가운데 유독 그곳이 눈에 들어왔다. 탈의실의 형광등 탓으로 워낙 희미해서 정확히는 볼 수 없었지만 누군가가 냉탕 쪽으로 몸을 돌리고 고개를 숙인 채 몸을 씻고 있었다. 
하지만 왠지 몸을 씻는 그 몸짓은 어디선가 본 듯한 분위기를 풍겼고, 나 역시 꼭 이전에 이러한 상황을 겪은 듯한 몸 떨리는 기시감(旣視感)을 느꼈으며, 그 사람의 모습과 자세가 어딘가 어색하고 연약하게 느껴졌다. 등을 돌린 자세라서 그런 것일 테지… 하고 나는 문을 열고 목욕탕을 나왔다. 그리고 몸을 말리고 옷을 입느라 그 일은 잊어버렸다. 
하지만 옷을 입고, 다시 거울을 보는 순간 그 어색한 포우즈가 떠올라서 목욕탕 쪽을 바라보았다. 즉흥적인 묘한 기대감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곳에 조금 전에 보았던 그 모습이 없길 바랬으며, 역시 그 바램대로 냉탕 부근엔 아무도 없었다. 그가 누구일까 생각하면서 목욕탕을 슬쩍 훑어보았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 모습의 주인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이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그날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일주일 뒤 다시 목욕탕엘 갔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 되어 날씨가 꽤 쌀쌀했다. 따뜻한 물이 예전보다 더 평화로운 느낌을 주는 계절이었다. 그날은 지난 번 왔을 때보다 사람이 적었다. 겨우 대여섯명 될까, 그 정도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었다. 
역시 조용히 구석 자리에 앉아서 목욕을 마치고 탈의실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 섰다. 잠깐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다 별생각없이 문을 열려다 문득, 또는 혹시 하는 이상한 마음이 들어 목욕탕을 살폈다. 
갑작스레 지난주에 잠깐 보고 느꼈던 묘한 감정이 떠올라서 나는 탈의실 유리창에 비친 모습들을 찬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리고 유독 한 사람만이 내 눈에 들어 왔다. 냉탕 앞에 또 다시 어떤 사람이 등을 돌린 채 목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엔 기시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람의 자세는 여전히 뭔가 어색하게 보였다. 목욕탕의 습기와 열기로 인한 김 때문에 희미하게 보였지만 이번에는 좀 더 침착하게 자세히 살폈다. 몸에 비누칠을 하는 동작도, 머리에 물을 붓는 동작도 모두가 무엇인가 어색하고 연약하게 보여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석이 있었다. 
무엇일까, 무엇일까… 그러고 보니 몸이 무척이나 왜소한 것처럼 느껴졌다. 
이번엔 이전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등 아래, 거의 허리 윗부분에 있는 엄지손톱 만한 크기의 점까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이길래 내게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일까. 그 궁금증을 눌러가면서 잠깐을 더 멍청히 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결국 고개를 돌렸다. 
누구일까? 불현듯 그 냉탕이 있는 자리에 아무도 없을 것 같은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았다. 
그것은 기우였다. 밤근무로 점철되는 오랜 비정상적인 일과가 헛된 망상만을 키워온 탓이리라. 한 사람이 비스듬히 등을 돌린 자세로 냉탕 앞에서 몸을 씻고 있었다. 한순간, 세상에 특별한 기적 같은 것은 없는 법이고, 내 삶에 어떠한 파란도 일어나지는 않으리라는 안도감과 묘한 실망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허리가 굽은 초로의 사람이었고, 야위기는 했지만 분명 창에 비친 사람은 아니라는 이상한 확신이 들었다. 게다가 몸을 돌린 각도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은 내가 두 번이나 보았던 유리창에 비친 그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유리문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그곳엔 초로의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비누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인쇄일을 하면서 인쇄된 ‘종이들’을 읽은 적은 사실 별로 없었다. 인쇄상태에 이상이 없는지, 연판에 이상이 없는지, 또는 색상이 알맞게 되었는지를 살피고 종이를 정리하고 시끄러운 옵셋 인쇄기 돌아가는 엄청난 소리 속에서 책의 내용을 살필 여유는 전혀 없었다. 게다가 2절지 한장에 페이지는 얽혀 있기에 찾아가며 읽기도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부분 만큼은 얼른 눈에 들어와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목욕 :
종교상의 예배에 대신하는 일종의 신비적인 의식 
다만 영혼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지금까지 결정된 바 없다. 

 

나는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이다. 
가난하게 살았고, 인쇄소에서 겨우 혼자 별다른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갈 만큼의 월급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일주일에 한번, 목욕을 하고, 한달에 두어번 몇몇 고향 친구들을 만나는 것 말고는별다른 취미도 없다. 환영이나 귀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고, 공포영화는 경멸하는 편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있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얼이 빠진 채 탈의실로 나오니 목욕탕에 일하는 사내가 나를 미친 사람 보듯이 빤히 바라보고 있어 얼굴이 붉어짐을 느꼈으나 별로 개의치 않았다. 아니, 부끄러움을 생각할 여유가 내겐 이미 없어져버린 것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다음 주부터는 한달간 낮시간 근무로 전환되었다. 
목욕탕을 나올 때마다 떨리는 가슴으로 유리창을 바라보았지만 냉탕 앞의 사람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한달 동안 네번 목욕탕을 찾았지만 한번도 그 사람을 볼 수 없었다. 
결국 헛것을 보았군. 나는 그저 피곤함으로 잘못 보았겠지 생각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 거의 잊어버리게 되었다. 
그 다음달, 그러니까 처음 그 사람을 본 이후 세째달로 접어든 때였다. 이제 그 낮시간에 목욕탕엘 왔으니 어쩌면 그 사람을 다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날은 고등학교 운동부 학생들이 무더기로 목욕탕에 오는 바람에 너무 소란스러웠고, 그들의 우람한 모습에 가려 설사 냉탕 근처에 그 사람이 있다고 해도 볼 수 없을 판이었다. 괜스레 짜증이 나고 기대감이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면서 서둘러 목욕탕에서 나와야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에 목욕탕이 새로 하나 생겨 많은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자주 가던 목욕탕은 거의 사람이 없었다.
평일낮의 목욕탕은 대개가 두 세사람 뿐이었고, 어쩌다가는 혼자 목욕하는 경우도 있었다. 나는 오히려 안도의 기분마저 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보름이나 지났을까. 내가 평새토록 잊지 못할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날의 낮은 매우 어두웠다. 찌푸린 날씨가 몹시도 을씨년스러웠지만 비는 오지 않았고, 바람은 매우 심했다. 
다시 그 희미한 유리창의 이미지, 아니 그를 보았다. 그리고 지금껏 내가 의문을 품고 있던 거의 모든 것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왜 그가 목욕하는 동작이 어딘가 어색해 보였던가에 대하여. 왜 내가 그토록 그 환영에 관심을 기울였는지에 대하여.
탈의실로 나오던 나는 습관적으로 닫은 유리문을 살펴보았다.
그 순간 유리창에 다시 그가 보였고 나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약간 고개를 돌렸고 그 순간 나는 거의 비명을 지를 뻔 했다. 약간 긴 머리와 섬세한 선…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녀였던 것이다. 왜소한 체구의 그녀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노인의 쇄잔하고 힘없는 모습도 아니었고, 목욕탕의 열기 때문에 생긴 환영도 아니었다. 분명히 한 여자가 거기에 있었다. 
여긴 틀림없는 남탕이다. 바깥 풍경, 그러니까 창문으로 보이는 전봇대의 윗부분이 여기가 2층에 있는 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대개의 목욕탕이 그러하듯이 여탕은 1층인 것이다. 하지만 여기 그녀가 있었다.  여전히 등을 돌린 자세로. 냉탕 가까이에. 
나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고, 겁이 덜컹 났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유령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내가 여자 목욕탕엘 들어왔단 말인가…… 혼란스럽고, 무섭기도 하고, 부끄러운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의문을 깨고 싶었다. 유리창에 비쳤던 그 이미지가 지금 실체로 앞에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확인을 하고 싶었다. 그야말로 평소의 나 답지 않게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문을 열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한걸음 나는 조용히 다가갔다. 
간절했다. 
한걸음. 
그녀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한걸음. 
그녀가 내게 왜 나타났는지. 
한걸음. 
왜 그녀가 몸을 씻는 동작들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는지,  왜 남탕에 여자가 와 있는지, 그리고 왜 어딘가 낯익은 모습이었는지……

이제 그녀와의 거리는 1m정도로 가까워졌다.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1초도 안되는 한 순간에 나는 모든 의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었다. 
촉촉한 눈매. 등 아래의 점. 슬픔. 
그 짧은 순간에 경악이나 당황, 충격 보다는 왠지 슬픔을 느꼈다. 그리고 그 뒤에 충격이 왔다.  그녀의 눈동자에 공포가 어렸다. 
한걸음 뒤로. 하지만 그녀가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한걸음 뒤로……
탈의실엔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탈의실을 지키는 젊은 청년도 잠시 자리를 비운 순간이었다. 
나는 허둥지둥 옷을 입었다. 뿌연 유리창 너머로 여전히 누군가 목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나는 더 이상 그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내 하숙집이 있는 골목의 가운데 쯤에 있는 집에 사는 사람이었다. 한걸음 뒤로. 
그녀는 왼쪽 다리가 약간 불편해서 제대로 앉아서 몸을 씻는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한걸음 뒤로. 그녀의 몸이 움츠려들었다. 한걸음 뒤로, 뒤로, 뒤로……

나는 탈의실로 통하는 유리문 앞에 섰다. 
그녀는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틀림없이 그곳에 있었고 나는 유리문을 통해서 다시 그 모습을 보았다. 하지만 두려워하던 비명소리는 결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허겁지겁 옷을 입었고, 마지막으로 욕실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한달 뒤 그녀는 이사를 갔다. 나를 바라보는 눈이 특별했다. 금방 눈을 돌려 버렸지만 알 수 있었다. 내가 미친 것이었을까.
나는 그때까지 그녀의 이름을 몰랐지만 하숙집 주인 아주머니를 통해 이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버렸다. 회사도 그만두었다는데 도무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여전히 그녀를 찾고 있다. 4년이 흘렀지만 아직 그녀를 찾지 못했다. 내가 미쳤던 것일까. 
하지만 나는 지금껏 정상적으로 살아왔고, 인쇄소의 기사로서의 생활 역시 열심히 해왔다. 말이 별로 없고, 사교성도 좋은 편이 못되지만 성실한 사람으로 통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그 몇달 간의 사건을 돌이켜 볼 때내가 전적으로 미친 것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한다. 역시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그 목욕탕은 결국 문을 닫아 몇년전부터 인쇄소로 바뀌어 버렸고, 나는 더이상 그녀의 자취를 찾지 못하고 있다. 
대단한 언론인이자 특유의 풍자로 일세를 풍미했던 앰브로우즈 비어스는 남미로 여행을 떠난 이후 실종되었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분명 비어스는 남미로 떠났고, 그곳에서 어떤 식으로든 죽었다. 그가 떠나기전에 말했듯이 그 자신은 그것을 멋진 죽음이라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비어스의 시신 조차도 찾아내지는 못했다. 그의 글만이 이 세상에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녀도 이제는 내가 찾을 수 없는 존재인 것일까. 

그녀가 이사를 떠난 후 나는 그 사건들을 보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느 정도는 비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여탕에 침입했을 가능성을 솔직히 인정할 수도 있었다. 그 목욕탕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주인이 돈을 받는 카운터 박스는 여탕보다 훨씬 정문에 가깝게 있었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벌거벗은 상태에서라도 2층 남탕에서 내려와 여탕으로의 침입이 가능했으리라. 
하지만 처음, 그리고 두번째로 그녀를 유리문에서 보았을 때는 분명 다른 사람들 – 다른 남자들이 목욕탕에 많이 있었다. 그리고 두번째 보았던 날, 벌거벗은 그녀(그때까지는 여자인지도 몰랐지만)에 정신이 팔려 멍청히 서있는 나를 곱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던 목욕탕 종업원 사내도 나는 기억한다. 물론, 이것 마저도 내 정신의 환각으로 돌려버린다면 그만이겠지만.
하지만 단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모든 것을 내 정신의 착란으로 돌린다 해도 그녀의 등 아래쪽에 나 있던 점 만큼은 결코 그것이 아니다. 내가 여탕으로 몰래 침입했다는 사실 마저도 나로서는 믿기 어렵지만 그 이전에 나는 그녀의 점을 보았다. 
사실, 내가 여탕에 침입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긴 했다. 
그때는 그 목욕탕이 헐리기 얼마전이었고, 새 목욕탕 때문에 사람이 거의 오지 않았기에 목욕탕 입구의 계산대 박스에 있는 사람도 졸기가 일쑤였고, 박스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여탕 입구와 계단이 나란히 있었기 때문에 벌거벗은 채로도 2층에서 1층으로 내려와 여탕으로 가는 것도 가능하긴 했을 것이다. 단, 그 순간 1,2층 모두에 그녀와 나만 있었다는 전제하에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남탕인지 여탕인지 또는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 어떤 미지의 공간이었든지 그녀를 만났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할 수가 없다.
단 한마디의 대화 조차도 없었었지만, 그녀와의 만남을 하나의 계시라고 나는 믿는다. 그녀와 나를 이어주는 특별한 무엇이 있다는 것을. 
그래서 4년이 지나버린 지금도 나는 그녀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녀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마력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녀가 내게 무엇인가 강력히 구하고 있었는지, 나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그런 것이 있었다면 나는 얼마나 바보였던가. 나는 왜 그전에 그녀와 말 한마디 못하고, 인사 한번 나누지도 못한 것인지 돌이켜 생각해보면 너무 마음 아프고 후회스럽다.
그녀에게 다가선 순간에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슬픔 때문에 나는 많은 시간을 괴로움과 자책 속에 살아왔다. 그 이유를 알아야 했고, 그 슬픔을 달래줬어야 했는데…… 아니, 그때 그녀에게 무엇인가 할 말이 있었는데, 분명히……
그것을 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지금껏 나를 괴롭혀 왔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찾고 있고, 아직도 믿고 있다.

표리부동 이이제이. 가끔식 그녀를 생각하면 인쇄용 필름같은 네가티브의 얼굴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 이미지들은 대개 의미 그대로 부정적이고 염세적이고, 때로 괴기스런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그 네가티브의 영상이 인쇄기를 통과하면 그와는 반대의 느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것은 어둠이 만드는 빛일 수도 있고, 빛을 깨닫게 하는 어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포지티브’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이미지들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거꾸로된 상 그대로 애정을 갖고 바라본다. 그녀 또한 내 삶에 있어 빛을 인식케 하는 어둠이거나, 아니면 그녀 자체로서 빛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내가 어둠이라면 그 광점은 너무 작고 너무 밝아 종이를 뚫고 책을 뚫고 내게로 온다. 잡은 가득한 레코드 판을 뚫고 음악을 뚫고 안개 가득한 거울 너머로도 분명하게 보인다. 어디선가 읽은 뉴트리노 입자처럼 내 눈을 뚫고 내 가슴을 뚫고도 내게 머문다. 내가 타버리거나 내 안에서 어둠이 사라져버릴 때까지.

우울한 음악처럼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안개낀 날, 오직 느낌으로만 알 수 있는 습한 공기가 어둔 거리를 휩싸고 도는 날, 어디선가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예감하고 있다. 그녀의 등 아래에 있는 점은 내 믿음의 상징이 되었고, 그녀의 촉촉한 눈매는 나의 약속이 되었고, 그녀의 절뚝거리는 다리는 나의 종교가 되었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이란 말인가?
막 자정을 통과하는 마지막 시내버스의 컴컴한 뒷자리에 앉아 멍하니 차창을 바라보며 지친 몸을 기대고 있을 때 여자의 기침 소리가 들린다면, 아기를 업고, 무거운 짐을 든 젊은 신부가 혼자 가파른 산복도로를 올라가며 한숨을 내지른다면, 그곳에서 나는 그녀를 느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 그녀를 다시 볼 수 있는 환상의 유리문을 찾아 헤맬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이다. 그리고 그것은 비어스의 말대로 공허의 핵심을 찾는 일이 될 것이다. 결국 그것은 현실일 뿐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1993-. jjle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