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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넌, 하이쿠, 궁금한 너의 창가

다만 그 그늘에 놀며 풍우에 쉬 찢겨짐을 사랑할 뿐이로다.
/마츠오 바쇼

 

존 레넌에 대해 생각할 때 나는 밥 딜런 보다는 그 사람을 훨씬 좋아한다고 느낀다. 음악에 국한해서라면 (그의 노래들이 내 마음속에 언제나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나는 존 레넌보다 딜런을 더 즐겨 듣는 편이라 할 수 있지만 사람에 대한 생각은 한참 다르다.

오늘은 오노 요코를 통해 하이쿠에 대해 처음 소개 받았을 때에 관한 존 레넌의 언급을 보았는데 하이쿠와 롱펠로우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의 소감이었다. 하지만 그의 코멘트를 읽은 내 느낌은 그가 하이쿠에 대해 제대로 파악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나무 탁자 위 하얀 그릇에 담긴 노란 꽃”처럼 하이쿠는 전체를 보여준다고 했는데 내 생각은 그와 궤를 달리한다.

 

Original pages from Lennon’s sketchbook: “Wabishii” and “Sabi.” Photos by Yamanaka Shintarō (Qsyum!). (Courtesy the Double Fantasy: John & Yoko exhibition in Tokyo)

 

비틀즈 연구가 히로타 칸지에 의하면 존 레넌이 일본에 왔을 때 기무라 토스케를 통해 바쇼와 잇사의 하이쿠를 알게 되었고, R. H. 블리쓰의 하이쿠 책을 읽었으며 료칸에 숙박하기도 했다. 그는 비쇼의 오래된 연못/개구리 뛰어드는/물보라 소리(古池や蛙飛び込む水の音)가 새겨진 기무라 토스케의 탄자쿠(와카, 하이쿠 등을 붓으로 쓰기 위해 사용하는 길게 자른 종이, 일반적으로 36×6cm)를 좋아했으며 그와 함께 가부키 공연도 보았다고 한다.

레넌은 자신의 노래 My Mummy’s Dead가 하이쿠의 느낌과 비슷하다는 소감도 피력했지만(외형상으론 그러하다) 어린 시절 그 노래에 꽤 마음이 쏠렸던 내게 있어서도 그닥 공감이 가지는 않는 이야기였다. 젖소, 절벽에서 거꾸로 떨어지는 사람, 그리고 헐벗은 채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에 대한 그의 농담조 낙서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 노래의 感傷은 스스로의 상처에 대해 “노출이 너무 심한”의 분위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행여 그가 말한 ‘노란 꽃’에 대한 언급이 하이쿠일까 해서 생각도 해보고 검색도 해봤지만 찾지는 못했다.(적어도 하이쿠의 정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에겐 늘 시적인 분위기와 시 같은 노랫말이 존재한다. 존 레넌이 쓴 가사에서 하이쿠 같은 느낌이 드는 문장을 고르자면 얼른 생각나는 것은 내가 늘 좋아하고 인용하곤 했던 아래의 두 줄이다.

 

Half of what I say is meaningless
But I say it just to reach you
/Julia

 

 

오래도록 나는 Julia를 그리움을 간직한 시처럼 생각했고, Strawberry Fields Forver나 Across the Universe 등에도 ― 그것이 하이쿠의 이미지를 가졌든 아니든 상관없이 ― 인상적이고 시적인 대목들이 있음에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덧붙여 좋은 하이쿠에 대한 내 짧고 모자란 생각을 하이쿠 운율로 표현하자면 이러하다 ;

 

풍경이라면
절반 너머 감춰진
애타는 창가

 

 

/2023. 6. 29.

말해버린 그것에 관한 약간의 자책 +

말할 수 없는 그것이란 제목으로 처음 쓴 것을 찾아보니 2010년의 일이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내게 묻는다면 애초의 그것은 ‘시’였다. 참으로 말할 수 없는 그것이었고, 말하기 힘든 그것이었고, 형언하지 못해 형언하지 못할 괴로움을 내게 주는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물론 그게 처음은 아니었고 나는 여태 시에 관한 시를 꽤 여러 편 썼다.  한참 예전에 장난처럼 쓴 누구…시온지…가 그랬고,  절망과 헛된 희망이 교차하는 내가 쓴 가장 좋은 시, 쓰라린 포기각서 같았던 이하의 마지막 말이나 라면은 보글보글도 어쩌면 그렇다. 제대로 쓰진 못했지만 미련스런 할 수 없는 노릇도 그랬다. 이하의 마지막 말을 썼을 때 나는 더이상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아 심히 서글픈 심정이었지만 그 굴욕의 시간을 오늘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내가 시를 쓴다는 꿈 또한 이하의 마지막 말의 깨어나지 못한 꿈 같은 서글픈 변종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들어 말할 수 없는 그것이란 제목으로 또 다른 시를 썼다. 처음엔 ‘더 말할 수 없는 그것’, ‘영영 말할 수 없는 그것’ 등으로 붙였지만 결국엔 ‘말할 수 없는 그것’으로 환원되었다.

이 시는 앞선 것들과는 달리 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꼭 그만큼이나 ‘말할 수 없는 무엇’이어서 제목을 그렇게 붙였을 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고 초라하고 서글픈 마음이었음에도 나는 시를 쓰고서 좀 기뻤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조금 자랑스러웠다.(그 느낌으로 “보내지 않은 메시지”를 썼고, 거기서 간지러운 몇줄을 빼서 실행한 것이 보낸 메시지다) 사실을 들여다보면 심히 아픈 이야기지만 내 마음에 관하여 가능한 만큼 제대로 썼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것은 의미를 알려줄 수 없는 “메르우트”라는 단어에서 시작되었다. 히에로글리프로 쓴 한줄은 ‘메르우트, 엔 메르우트’라고 읽을 수 있다. 다만 발음은 조금 미묘한 차이를 두고 슬쩍 다르게 표기했는데, 의미를 찾기 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에도 뜻을 알고자 애를 쓴다면 전혀 어렵지 않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몇 글자가 심오한 의미를 지닌 문자이거나 비밀은 아니다. 평범하고도 위대한 무엇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그 시는 히에로글리프 한줄이거나 끝의 네줄이 전부다.

4행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붙이자면 첫번째 줄은 잇사의 인용으로 시제만 과거형으로 바꾼 것이고 둘째줄은 나의 시점, 셋째줄은 잇사의 시점이기도 하지만 형식상 그것을 빌렸을 뿐, 내 시각이라 할 수 있으며 (“눈에” 다음에서 좀 뻔하고 감상적인 글자 세자는 생략했다) 마지막 줄은 100퍼센트 내가 보는 것이다.

 

찢어진 문틈으로 보던 은하수+
암흑과 광년의 세상을 가로질러
남루한 그 옛날의 눈에 맺힌
당신이라는 이름의 눈부신 오늘이어요

 

하지만 나는 결과적으로 이 시를 배신했다. ‘말할 수 없는 그것’에 관해 하루아침에 깡그리 다 설명해버리고 말았다. “○○는 하되 XX는 하지 않는다”던 방중술의 오래되고 미심쩍은 어떤 금언을 지키지 못한 느낌 같은 것, 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허탈하고 참담하지만 후회는 하지 않는다. 평소의 조심스러움, 소심함이나 신중함과 달리 나는 대책없이 직선적인 사람이고 그런 쪽으로 마음을 감추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느꼈기에 가만 있기가 더 힘들었다. 사실은 ‘그것’을 드러내는 것이 비할 수 없이 온당치 못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약간의 소소한 이야기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고, ‘말할 수 없는 그것’은 하루만에 ‘말해버린 그것’이 되었다. “무를 수도 없는 참혹”이라 했지만 내 마음보다 슬프지는 않다.

 

 

+잇사.

 

 

+뭔가 빠진 시가 하나 있었는데 왜 그걸 빼먹었던지 모르겠다. 내가 시를 쓴다던 꿈, 이제사 생각이 나서 한줄 집어넣었다. 매일같이 그 캄캄한 화면에서 뭔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다./2019. 11. 29.

 

一茶頃

오고 또 와도
서툰 꾀꼬리
우리 집 담장+

 

겨우 스물 두셋 시절 일다경에 대해 뭔가 끄적인 적 있었다
얼핏 그럴 듯해 보였지만 득함이 없는 시늉이었을 뿐,
그래서 굳이 ‘頃’자를 붙여 부끄러움을 되새기며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의 삶을 돌아본다

아들 셋과 딸 둘, 세 사람의 여인을 만나 함께 하였으나
닿는 것 스치는 것 모두 찔레꽃인양+ 그다지 사랑받지 못한 삶
가진 것 없이 온통 잃어버린 삶이 열 일곱 글자로 오늘까지 남았네
초여름에 와서 한겨울로 떠난 사람
벼룩과 모기, 파리와 개구리에서도 삶을 읽어낸 사람
무엇이 그로 하여금 예순 다섯의 모진 꿈 너머로
새록새록 꿈꿀 자리 만들었는지
서툴고 서툰 길에서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사랑한 사람
패터슨++의 운전사처럼
一茶 할 적이면 또 一茶를 생각하네

 

열 일곱 글자
어렸던 눈물인가
잇사가 처음

 

 

+고바야시 잇사
++패터슨, 짐 자머쉬

ascenseur pour

가끔씩 생각나는 한줄들, 어떤 때는 잇사가 위로가 된다. 바쇼에 비해 질곡의 삶을 살았건만, 그래서 가끔 꺾이기도 했지만 그는 오직 그것을 견뎌내며 한줄을 쓰는 것으로 일관했었나 보다. 잇사를 생각하면 하찮은 내 인생의 괴로움이라는 것은 참 아무 것도 아닌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년 1월 어느 날의 소감을 뒤돌아보며./2017. 6. 15.

 

월요일부터 얼어붙었던 수돗물은 금요일 사무실 나오니 풀려 있었다.
목요일 퇴근 전에 물 두어통이랑 생수병 몇 개
이웃집에서 갖고 올 때는 그것이 하루를 버텨줄 요긴한 필수품이었는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는 것을 알게 된 바로 순간
“맹물보다도 못한” 하찮은 무엇이 되어버렸다.
나도 누군가에 또 내가 누군가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세상을 사는 것은
거듭 겨울비를
긋는 것//소기

 

늦은 출근 ㅡ 사무실 오는 길에 한참 멀리 위쪽에서 폐지 줍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수레 뒤로 차가 따라오는데 귀 어두우셔서 잘 모르는가 싶었다.
마침내 경적을 울리고 우여곡절 끝에 차는 피해갔고
나는 눈짓 손짓으로 2층으로 모시고 커피 한잔 같이 마셨다.
한달여 모아둔 폐지와 사무실에서 쓰려고 뒀으나 잘 입지 않는겨울옷 두 벌 드렸고
수레를 다시 움직일 수 있도록 조금 끌어드리고 올라왔다.
그 잠깐 동안은 최근의 우울을 잊고 있었나 보다.

 

둥근 집이야말로
사각 집보다 좋아라
한겨울 칩거//사와 로센

 

힘들어서였을지 아니면 초탈해서였을지 아니면 어떤 달관이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지은이의 의도와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요즘의 내 느낌도 비슷하다.
이렇게 완곡하게 썼으니까 내 뜻대로 마음대로 고쳐서 생각하기도 좋다.
하지만 고바야시 잇사를 생각하면 괴로움에 대해서는 말하기 쉽지 않다.

그는 전혀 초월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세파에 부대끼고 그 속에서 숱한 고초와 아픔을 겪었으나
남달리 험난했던 삶에 완벽하게 굴복한 적은 없었는가 싶다.

 

여윈 개구리
지지마라 잇사가
여기에 있다//잇사

 

모르긴 해도, 또 그가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고 해도
지금까지의 느낌으로는 잇사에 제일 마음이 갔다.
(그것이 그를 좋아하는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사연이 담긴 그의 몇몇 글에서는 감정을 추스르기 쉽지 않았다.
개구리 하이쿠처럼 아이들에 관한 것은 특히나 그랬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책 두 권을 읽으면서 70여 페이지로 요약을 했다.
피난처였다.

 

다만 있으면
이대로 있을 뿐
눈은 내리고//잇사

 

 

+
잔느 모로, 또는 어떤 이가
비슷하니 길을 걸을 때
트럼펫 소리가……

 

/2016. 1. 30. 21:49.

 

 


ascenseur pour l’echafaud / miles dav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