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트레저 아일랜드 ㅡ 최근에 구입한 스티븐슨의 단편집 첫 페이지를 펼치니 그가 쓴 헌정사가 있었다.(정확히 하자면,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이상한 사건>에 수록된 헌정사다.) 사촌이었던 캐서린 드 마토스에게 쓴 긴 편지시의 일부라고 하는데 인상적인 헌정사라는 점에서 칼 세이건을 생각나게 했다.
하느님께서 맺으신 인연을 풀어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군요.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바람 이는 히스 황야의 아이들이지요.
비록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금작화가 북쪽 땅에서
아름답게 흩날리는 건 여전히 당신과 나를 위해서지요.
/캐서린 드 마토스(Katharine de Mattos)에게,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억겁의 시공간에서의 드라마틱한 조우는 아니었지만 스티븐슨의 두 줄은 당시에서나 볼 수 있었던 섬세함과 절절함으로 내 마음을 움직였다. 끊어진 만남이 미래같은 과거로 하여 다시 이어짐을 바라보며 함께 함의 의미에 대해 새삼 생각할 수 있었다.
칼 세이건의 헌정사는 광대한 우주와 무한의 시간 사이에서 같은 행성, 같은 시대를 함께 사는 이의 기적 같은 기쁨을 헤아릴 수 있게 했다. 하지만 단절되어버린 현실의 인연이그 옛날처럼 함께 이어져 있음을 흩날리는 금작화에서 일러주는 스티븐슨의 문장은 그 소소함과 위태로움으로 하여 더 절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