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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난 후에 읽는 글들

어제
손에 불타는 석탄을 쥐고
마구 던지려 했다.
밤새 손바닥이 아려왔다.
알다시피 그게 아니라……

그리고 때늦은 소식처럼 허수경의 책이 왔다.
그녀에 대한 생각은 꽤 양면적이지만
시에 관해서라면 독보적인 세계를 지닌 그녀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From her to eternity란 제목으로 글을 끄적였다.

그리고 며칠 전 피란델로 책을 구하다 그녀의 흔적을 찾게 되었다.
가기 전에 쓰는 글들……
‘일러두기’와 달리 내가 편안함을 느끼곤 하는 시 같은 글과
글 같은 시들이 거기 있었다.

고운 자주빛 표지에
무선제본식 가짜 양장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리고 책갈피처럼 들어있는 엽서의 짙은 오렌지빛이
귤 향기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지만
병문안 온 사람처럼 조심조심 나는 책을 펼쳤다.

From here to eternity.​

 

 

/2022. 4. 6.

약간의 허함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퍼백에 넣어 온 <혼자 가는 먼 집>을
좌석 옆에 끼워뒀다 쉬엄쉬엄 다 읽었다
내게도 더이상 어울릴 수가 없을 법한 제목이었다
누군가 꿈꾸고 간 베개에 기댄 채+
불편한 자세에도 불편한 마음의 자세에도 더 어울릴 수는 없었다
보르헤스의 강의와 이창기는 미로처럼 찬밥처럼+ 화물칸 어딘가에 갇혀 있었다
나는 기내 허용 반입량을 초과하여 지퍼백에 1리터의 액체를 넣어온 것이었다
처음인양 읽었고 처음처럼 마셨다
어떤 페이지는 집중해서
다른 사연은 설렁설렁 넘어갔다
엑스레이 투시기와 소지품 검사, 모든 감시망을 피해
투명한 지퍼백에 온갖 맛을 지닌 1리터의 액체를 몰래 넣어왔다
소울풀 모운풀 엉키고 풀리고 질척이는 것이
소줏잔이라도 깨물고 씹는 듯이
치떨며 부러워하며 찔끔찔끔 마셨다
약간의 허함 또한 그곳에 있었다
그렇다 허한 당신 허할 수
없었던 당신 먼 집의 전부일 것 같은
당신
그리하여 지난 밤에도 나는  먼 집에 있었다
돌아가는 비행기 속에 쭈그러진 지퍼백 속에
나눌 길 없는 허한 공기 속에
홀로 갇혀 있었다
썩어 없어질 몸은 남았고
썩지 않는다는
마음이라는
썩어버린 악기+는

 

/2019. 4. 18.

 

+씁쓸한 여관방, 허수경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이창기
+<혼자 가는 먼 집> 후기, 허수경